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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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광 李永光

1965년 경북 의성 출생. 1998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아픈 천국』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가 있음. leeglor@hanmail.net

 

 

 

둥지 위의 것들

 

 

언 강에 나간 아이들이 돌을 던지면 두루미들은

달리는 듯 나는 듯 푸드득거리다가

저만치, 얼음 위에 또 내려앉는다

도약 직전의 종종걸음, 모든 날것들의 비상에는

어딘가 펭귄 같은 순간이 들어 있다

 

조류는 정말로 저 공룡시대에 네발짐승에서

두발짐승으로, 새들로 진화했을까

포식자의 이빨에 쫓기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무 위로

공중으로 날아올랐을까

 

공중엔 길이 없다 모든 절체절명이 앞발을

날개로 바꿔놓지는 않는다 수만년, 수십만년의 발버둥 가운데

수백만년의 살육 가운데

어떤 한줌의 비명이 공중으로 구사일생했을 뿐

새들은 발을 잃은 불구가 아닌가

 

디딜 땅이 없었던 것, 땅에선 안된다는 것,

하지만 새가 아닌 것들에게 공중이란 무엇인가

새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없는 것들에게

공중이란 대체 무엇인가

포식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저 쇠로 얽은 둥지 위의 것들은 왜 날지 않는 거지?

 

돌이 날아오면 뛰는 듯 나는 듯 퍼덕거리다가

다시 언 땅에 언 날개를 끄는

저것들은 실패한 진화이다

참혹한 퇴화이다

먹을 것은 죄다 땅에 있지 않은가

 

디딜 땅이 없었다는 것, 하지만 하늘은 땅의 마지막

살이라는 것

차곡차곡 두 발로 공중을 걸어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는 인간 새들을 보며

피 묻은 깃털을 입에 물고 포식자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저 둥지 위의 것들은 왜 날개를 만들어 붙이지 않는 거지?

 

 

 

살생부

 

 

영 아닌 인간들은 수첩에서,

요즘 같으면 휴대폰 전화번호부에서 아예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글을 읽으면, 냉장고에서

술을 꺼낸다

 

모두들, 살생부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걸까

상상도 상징도 뭣도 아니고 그냥

존재 자체를 그어버린다는,

그 칼질 가운데 내 이름은 몇?

 

나는 원한을 산 일이 있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누군가에게 갔다

안되면 되게 한 적이,

살려고 죽은 적이 있다

연락하지 않았다

슬픔을 비웃었다

 

나는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다

속으론, 넌 안돼, 하면서 껄껄 잔을 부딪쳤다

자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가끔

내가 아닌 것이었다 아니,

나인 것이었다, 대체 나는 나를 상처 내지 않으려고 벌벌 떨며

얼마나 여러번 잘못 찔렀던 것인가

 

나도 아닌 인간이지만, 더러운 깨끗함 없이 사는

깨끗한 더러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생각했으니

무수한 생각들을 눌러 죽인 그 생각보다 더

무수한 죄는 없을 터이고, 쥐새끼처럼

죽은 채로 살 길을 찾아 헤맸던 것이니

 

죄는 알지만 용서는 모른다

용서는 알아도 벌은 모른다

알 수 없다

알아버리고 싶지 않다

나는 아픔을 오래 참을 수 있다

기억나지 않는 기억의 반군들이 또 사방에서

몰려온다

 

나에게도 오래된 살생부가 있다

거기엔 언제나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