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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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사랑한 시절, 사랑할 시절

 

 

은유

글 쓰는 사람.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등을 썼다.

varyeyes21@hanmail.net

 

 

‘몸집은 작은데 고독이 너무 커서 술을 많이 마시고 사람을 매일 찾는다.’

대학 시절 만난 선배가 현을 보고 말했다. 그랬다. ‘작은 어른’ 현은 고독을 메우려 술, 사람, 영화, 음악, 책을 폭식했다. 외롭고 허전할 겨를이 없었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가처럼, 현의 청춘을 한 문장으로 쨍하게 잡아낸 선배는 투병을 하다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친구도 죽음을 맞았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생은 유한하다 같은, 현의 머리에 있던 정보가 비로소 가슴으로 내려와 ‘쓸쓸하다’는 감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현은 저렇게 한생이 마감되기도 하는구나, 허무해, 나도 뭐 죽을 거 덧없네, 하며 비관하지는 않는다. 아, 쓸쓸한 일이다, 근데 어쨌든 ‘나’의 생은 아직 계속되는 거니까 이걸 되게 잘하고 싶다, 하는 에너지가 동시에 생기는 사람이다. 허무함이 자기소멸의 느낌이라면 쓸쓸함은 아직 내가 있는 상태. “슬퍼도 기쁨이 조금이라도 있는 상태.” 그 감정의 발견이 무척 소중했던 현은, 이쯤에서 모두가 자기 삶과 주변 사람을 돌아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고른 말이 ‘잘들’이다. 김현은 세번째 시집 『호시절』(창비 2020)을 펴내며 ‘시인의 말’을 이렇게 맺었다.

“잘들 쓸쓸하세요.”

『호시절』은 잘 쓸쓸하기 위한 참고서다. 시인의 눈에는 태어나는 일, 상처받는 일, 위로하다가 사랑하게 되는 일, 밥 먹는 일, 먹고 난 것을 분리수거하는 일, 싸우고 화해하는 일, 명이 다하는 일, 죽은 사람을 품고 사는 일까지 온통 쓸쓸하지 않은 것이 없다. 허나, 슬퍼도 기쁨이 조금은 남아 있기에, 마음 다해 살아볼 만한 것이다. 이 따습고 쓸쓸한 서정의 시원은 부모다.

 

 

나에 대한 탐구, 부모에 대한 관심으로

 

나의 어머니는 한 시절

동생 둘을 먼저 보낸 사람

일찍이 술을 가까이하였다

 

어머니가 술에 취해 거실에 있고

나는 그곳에 누구와도 같이 있지 않아서

기침을 하고

어머니의 호주머니에서 만원짜리 몇장을 꺼내

남자와 썼다 잤다

어머니의 얼굴을 자주 보는 일로

수치를 알고

—「미래 서비스」 부분

 

현은 사촌형 때문에 아웃팅을 당하고, 부모에게 커밍아웃을 하며 부모와 불화했다. 이삼십대 내내. 부모에 대한 관심이 다시 싹튼 것은 ‘나’에 대한 탐구의 여정에서다. 『호시절』에 들어가는 시를 쓸 즈음, 누구에게 주고 또 누구에게서 받는 사랑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의 애정력은 어떻게 키워져왔을까. 사랑의 기원을 향해 거슬러 가다보니 부모와 맞닿았다. 생식이 가능한 부모가 자식을 만들고 그 자식에게 사랑을 주고 또 그 자식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생각하는 일은 부모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했다. 다른 시선에서 다른 정서가 생겨났고, 다른 정서는 부모와의 대화에 물꼬를 터주었다.

 

2년 전 무렵인가. 엄마아빠 앉혀두고 다시 커밍아웃을 했어요. 아웃팅 당했던 날 얘기를 꺼냈죠. 그날 큰 상처를 입었다고.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말했어요. 아버지가 사과하더라고요. 부모님도 이제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은 나이가 되신 거죠. 그냥 네가 행복하면 된다고. 그런 반응을 보니까 또 새로워요. 저렇게 되어가는 거구나. 부모의 삶, 자식의 삶이란. 그걸 시로 쓰고 싶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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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화해해서 시가 나온 게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부모에 대한 다른 시선이 깃들게 되었다고,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현의 눈빛은 시인의 긍지로 반짝였다.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것, 이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최승자 「20년 후에, 芝에게」)이 시의 자장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둘 있으나

한 녀석은 도시에 나가 남자와 살고

한 녀석은 시골에 나가 남자와 아이 둘과 삽니다

—「이렇게 생긴 아름다운 이야기」 부분

 

 

형들의 사랑,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

 

『호시절』은 1부 제목이 ‘안개’, 2부가 ‘푸른 화병’, 3부가 ‘앵두주’다. 흐릿하고 선명하게, 영혼에서 육체로, 희고 푸르고 붉은 것, 평등 자유 박애로 나아간다. 첫 시 「손톱달」 시작은 이렇다.

“여보/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마치 마을 입구에 내걸린 ‘금의환향’ 현수막처럼 독자를 반기는 문구를, 현은 유명한 광고 문구에서 빌려왔다. 이제부터 일일드라마 같은 소소한 일상, 사랑과 그리움을 타전하는 시편들이 나올 것이라는 친절한 알림이다. 시에 들어간 소재를 봐도 그렇다. 남자로 태어난 두 사람이 있다. 달도 있고 개도 있고 꿈 얘기도 있다.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현실 얘기하다가 갑자기 다른 데 갔다 오기도 하고, “탄핵소추안 가결” 같은 뉴스가 흐르고 “달걀 세알을 풀어 만든 계란찜”도 끓는다. 「손톱달」은 시집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이에 독자를 위치시키려는 현의 세심한 작전이다.

이후 ‘단짠단짠’의 생활맛 시편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가족 구성원이 나오는 순간 시적 긴장이 어김없이 발생한다. 가령 “그녀는 아빠가 되는 삶을/꿈꾸었다” “그녀와 아내도 한때/작은 손과 발을, 부모를 가지고 있었으므로”(「겨울은 따뜻한 과일이다」) 같은 시구가 그렇다. 얼핏 보면 모르고 자세히 보면 낯설다. 그녀가 아빠가 되고 그녀와 아내가 나란한 것은.

 

이성애자 중심의 가족 구성원과는 다른, (대안)가족의 이야기를 시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부나 남편, 아내라는 말은 이성애자들만의 것으로 여겨지잖아요. 기득권의 말이죠. 그걸 좀 빼앗아 오고 싶더라고요. 남편이나 아내,라는 말이 성차별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성소수자를 향한 무분별한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고 생활동반자법이나 동성결혼 합법화를 별다른 이유 없이 반대하는 이즈음에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다’ ‘우리도 혼인할 수 있다’ ‘우리도 그 말을 쓸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언어의 쓰임을 교란하는 것만으로도 성소수자의 삶을 다시금 환기하는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었죠.

 

이들 부부는 부모의 자식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부모를 닮아가면서도/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당신”(「손톱달」)은 “부모 살아 계실 적에 부모를 감사히 생각”(「지혜의 혀」)해야 한다. “엄마는 잡아주는 사람이니까”(「성탄 전야」). 그런데 이런 시구는 얼핏 효 사상과 모성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듯도 보인다. 현에게 물었다. 효자가 시인이 될 수는 있겠으나 시인이 효자가 되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고.

 

부모가 등장하더라도 제 시의 방점은 늘 그들을 바라보거나 그들을 떠올리는 자식에게 찍혀 있어요. 그 자식들은 대체로 성소수자들이죠. 이성애자이면서 생식이 가능한 부모와 동성애자이면서 생식이 불가능한 자식의 이야기를 겹쳐두는 방식으로 오히려 효 사상이나 모성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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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다. ‘형들’도 한 시절 효행을 하고, 한 시절 부모와 반목도 한다. 평범한 자식이다. 이 당연한 사실은 그의 시 「생선과 살구」 「형들의 사랑」 「두려움 없는 사랑」에 조금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이 세편을 김현은 ‘호시절 삼형제’라고 부른다. 그에 따르면, 어떤 시집을 묶어놓은 다음에 바로 튀어나오는 시가 있다. 쓰고 보니 이전 세계와는 다른 시다. 그 시가 시발점이 되어서 그 스타일로 시가 쭉 써진다. 김현이 두번째 시집(『입술을 열면』, 창비 2018)을 낸 후, 거의 동시에 쓴 「형들의 사랑」과 「두려움 없는 사랑」은 『호시절』이라는 별자리의 시작점이 되었다. 한편 한편 생활인이자 노동자로서의 사는 모습이 스며드는 시들이 탄생한다.

 

저는 여성이자 성소수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가를 수 있습니까?

 

반으로 갈라진 것을 보면

소금을 뿌렸다

 

상하지 말고 살아

언니가 말했다

—「생선과 살구」 부분

 

2017년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나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활동가는 ‘나는 여성이고 성소수자인데, 내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다. 그 생생한 외침은 현에게로 와서 「생선과 살구」라는 시가 되었다. 현은 말하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은 우리가 먹는 생선구이처럼 일상적인 풍경이어야 하는 거라고. “당신과 마트에 가서 밥 사 먹고/매대에 놓인 팬티를 사서 커플 팬티로 삼”고 “순두부와 가자미와 영양부추를 사” 오는 일상, “남자들에게도/평범한 행복이란 이런 것”(「가장 큰 행복」)이므로 “형들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형들의 사랑」)라고 당부한다.

 

성소수자에 대해 선입견에 휩싸여 있거나 무지한 사람들은, 성소수자에게도 일상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 같아요. 언젠가 퀴어문화축제의 슬로건이 ‘당신 옆에 성소수자가 있다’였던 적이 있거든요. 호모포비아들은 성소수자들을 끊임없이 탈일상화시켜버려요. 광장에 팬티만 입고 있거나 화려한 분장으로만 존재하는 ‘팝업적 집단’으로 만들어버리죠. 일상의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지워버리는 거예요. 성소수자들도 당신네들과 똑같이 밥 먹고 음악 듣고 화내고 사랑하는 ‘보통의 존재’임을 항변하듯이 쓰고 싶었어요.

 

김현은 묻는다. ‘우리의 행복은 왜 늘 다른 취급을 받는가.’

이 담담한 물음에 시로써 묵묵히 답할 것임을, 그는 「견본 세대 2」라는 산문에서 일찍이 예고했다.

 

‘내가 계속 써야 할 것은 다수가 싫어하는 것들이겠구나’라는 막연하지 않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수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땅, 불, 바람, 물, 마음의 서정 말고 항문 섹스의 서정과 동성애의 서정과 소수의 서정은 없는 걸까요? 그런 것들은 ‘히트다 히트’ 문학적 이벤트가 될 수밖에 없을까요?//그렇다고 문학이 무슨 인권 보고서입니까? 문인이 무슨 인권활동가입니까?/ 물을 수도 있겠지요. 그럼 문학이, 문인이 대체 그런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질문 있습니다』, 서랍의날씨 2018, 196면)

 

최근엔 양상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영화나 드라마, 문학작품에서도 성소수자 캐릭터가 희화화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 시 안에선 그렇게 존재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자주 생각했죠. 예전엔 제가 쓰는 시나 글이 다른 성소수자에게 견본이 되면 좋겠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역할을 하는 작가들도 좀더 생겼고 의무감이나 사명감은 조금 희미해졌어요. 그들과 또다른 방향으로 써야겠다는 차별성은 고민하죠. 행복한 고민이에요.

 

 

디졸브 기법, 시의 겹을 입체적으로

 

김현 시인은 눈이 크다. 눈을 다 감고 웃을 땐 익살스러운 청년이다. 가만히 눈을 뜨면 고민 잘 들어주는 친구 같고, 눈매에 약간만 힘을 주어도 선 굵은 배우로 변한다. 그의 표정들처럼 그가 펴낸 세권의 시집도 분위기가 다르다. 아직 그의 두번째 시집이 나오기 전인 2017년에, 그러니까 가장 매운맛 시집인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만 본 상태에서, 나는 김현을 한 시사주간지의 연재 메이트로 만났다. 우리는 ‘김현 살다’ ‘은유 쓰다’라는 코너를 각각 격주로 맡았다. 담당기자의 주선으로 그와 인사를 처음 나누었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저 조용한 얼굴을 한 사람이 혼돈의 카오스 같은 『글로리홀』을 쓴 시인이란 말이지.’

『글로리홀』은 255면이다. 시집치곤 두께가 있다. 글자 수도 넘친다. 산문시 형식이라 내용이 밀도 있고 각주도 길다. 말들의 소낙비가 내리는 시의 커다란 집. 이런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이고 어떤 정서의 결에서 나오는지 너무 궁금했던 것을, 나는 수년이 흐른 후에야 물어볼 수 있었다.

 

다양한 예술 장르를 섭렵하던 시기였어요. 그 무렵엔 닥치는 대로 읽고 보고 듣고 한 것 같아요. 지적 허영도 있었고, 뭐든 다 흡수하고 싶고 소화도 빠르고. 제 안에 다채로운 예술적 에너지가 농축됐죠. 첫 시집에는 그런 에너지가 응축적으로 고스란히 다 들어갔어요. 두번째 시집에는 그런 에너지가 광장으로 현장으로 분출해나가면서 쓰인 시들이 묶였죠. 어쨌든 첫 시집도 그렇고 두번째, 세번째 시집 모두 영화라는 장르에 힘입은 바가 커요. 제가 원래 영화를 하는 게 꿈이기도 했거든요. 글로 쓰면서도 머릿속으론 영상, 이미지를 떠올리며 쓰죠. 미장센을 짜듯이. 가령 글로 어떻게 롱테이크 효과를 낼까, 배경음악을 사용할까, 특수효과를 넣을 수 있을까를 고려해요. 그러면서도 영상이나 영화로 표현될 수 없는 것, 언어적인 것, 언어의 고유성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요. 영화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의 줄다리기로 탄생하는 시를 생각한다고 할까요. 김현의 시, 하면 각주라는 형식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죠. 각주는 시의 출입구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 썼어요. 들고 나는 구멍이 많아지면 아리송해지고 헷갈리고, 다시 보게 되잖아요. 요즘은 각주라는 형식, 방법론보다는 언어로 구현하는 입체에 관해 궁리해요.

 

김현 시의 특허가 된 ‘각주’는 『호시절』에도 나온다. 시 하단에 부록처럼 한줄 문장이나 짧은 산문이 붙어 있는 경우, 영화에서 한 화면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화면이 점차로 나타나는 장면전환 장치인 ‘디졸브 기법’처럼 읽으면 된다. 현이 말했듯이, 디졸브 기법은 삶의 일면에만 집착하지 않는 입체적인 시선을 유도한다. 이 장치는 사랑 시에서 특히 유용하다.

현은 애인을 ‘짝꿍’이라고 부른다. 짝꿍과는 14년차 커플이다. 사랑의 ‘이꼴 저꼴’을 다 보고도 남았을 세월, 일상이 자아내는 온갖 구질구질하고 지질한 순간, 추하고 잡다한 감정들을, 현은 사랑의 그늘이라는 큰 말로 ‘퉁치지’ 않는다. ‘변비’ ‘코골이’ ‘갱년기’ ‘성욕 저하’ 같은 시어들을 거침없이 내세운다. 시에서처럼 혹시 현도 사랑의 농도 변화를 겪고 있는지 물었더니 “아니요, 사랑은 그대로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방식과 형식에 변화가 있을지언정 내용적 변화는 아니라고 말했다.

 

사랑의 형식이 달라지면 내용도 의심하게 되고 그러잖아요? 같이 밥 먹는 횟수가 줄어들면 사랑이 식었는지 고민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사랑이 길어지고 깊어지면 시작할 때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이 자기 안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요. 그 감정에는 불안이나 불신, 미움 같은 것들도 물론 있죠. 사랑에 관한, 사랑하거나 사랑했던, 사랑할 것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시를 쓸 때면 그 수많은, 사랑을 이루는 여러가지 감정과 빛깔들을 이리저리 살피고, 시에 맞춤한 것들을 가져와서 점점이 찍어두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사랑의 정신」이라는 시에서는 사랑의 육체와 사랑의 정신(영혼)을 이야기하면서 사랑의 속됨, 사랑의 성스러움, 사랑의 생활됨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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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점묘화의 예를 들었다. 가령 쇠라(G. Seurat)의 「그랑드자뜨섬의 일요일 오후」는 멀리서 보면 평범한 그림 같지만 가까이 보면 무수한 점이다. 연인이 등장하는 시라 해도 당연히 기쁘고 항상 행복한 게 아니라, 얘네 둘은 분명 행복한 것 같은데 묘하게 슬픈 것도 같고, 사랑에 대한 예찬인 것 같은데 사랑스럽지 않은 감정이 들어가 있기도 한다. 사랑의 흰 면만이 아니고 검은 면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를테면 “박근혜 대통령이/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든다고 했어/말해주자 당신이 여느 때보다 더 크게 웃다가 그만/오줌을 쌌”는데, 시적 화자는 “그렇게 다시 당신이 뜨거운 사람이라는 걸 알”(「두려움 없는 사랑」)게 된다. 이렇듯 오줌은 ‘더러워’가 아니라 ‘뜨거워’가 되는 것이 현에게는 사랑이다. 현은 늘 그렇게 생각한다.

 

 

가장 애틋한 시 「우리의 불」

 

김현 시인은 낭독주의자다. 시 읽는 밤을 사랑하고 실행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서울의 ‘고요서사’와 제주의 ‘무명서점’ 등 작은 책방을 활발히 오가며 독자와의 만남을 꾸준히 가졌다. “시인의 육성으로 들었을 때 한 퍼즐이 맞춰지는 시들이 있다”는데, 가령 「우리의 불」 같은 시가 그렇다. 낭독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마다 읽었던 시다. 곁에 사람을 두고 같이 읽고 싶은 시, 『호시절』에서 한편을 고른다면 현은 이것을 꼽는다.

 

두 노인은 누워서

동굴 위로 어른거리는 그림자

부모를 떠올려봅니다

 

메밀꽃 필 무렵

야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소고기 한근을 가슴에 안고

아버지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저만치 가는 어머니를 할멈, 할멈 하고 부르더군

아버지, 어머니가 보여요

내가 물으니

아버지가 묻더군

너는, 어머니가 보이니

 

네, 저는 어머니가 보여요

그럼, 나도 보이는 거겠지

 

처음이었고

메밀밭을 지나며 속으로 어머니, 어머니 불러보았지

 

한번은 한밤중에

어머니가

잠든 나와 형을 깨워서는

달이 떴으니 메밀밭으로 가자 말씀하시는 거야

 

말씀이 있으니 말씀을 따르되

 

어머니

우리는 무얼 해야 하나요 묻자

어머니가

거기에 불을 붙이면 된다

나와 형은 거기에 불을 붙이고

메밀꽃이 지천인 곳에 가만히 서 있었지

어머니가 우리의 불을

그곳에 넣고 하늘로 날려 보내는데

거기에 넣은 우리의 불이

저렇게 가볍고 높을 수 있다니

나와 형이 감탄하는 가운데

어머니가 아버지의 지복을 빌자,

형이 먼저

조용히 집으로 향하고

그다음은 내가

영영 어머니를 그곳에 남겨두고

다리를 건너며

형이 말했지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마

형, 저길 봐 우리의 것이 아직도 올라가고 있어

—「우리의 불」 부분

 

시는 어떻게 시가 되는가. 독자로서 시인을 만나면 긴 답을 듣고 싶었다. 현은 「우리의 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인 조해진 소설가와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해진 누나가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는데 시상식을 봉평에서 했어요. 축사를 부탁받아서 제가 같이 내려갔거든요. 해진 누나네 부모님 차 타고 넷이서. 누나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세요. 아버님이 어머님을 ‘할멈 할멈’이라고 부르는데, 그 음성을 언젠가 시에 꼭 넣어야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그날 밤, 하얀 메밀꽃밭을 한바퀴 돌고, 풍등을 처음으로 날렸는데, 낮에 들었던 음성과 오늘 하루 보았던 ‘노부부의 풍경’이 갑자기 밤과 풍등과 메밀꽃밭과 디졸브되더라고요. 그 디졸브가 과거 같기도 하고, 미래 같기도 하고, 현실 같기도 하고, 꿈속 같기도 했어요.

 

「우리의 불」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묘하게 겹쳐 있다. “눈이 하염없이 오는/전형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두 노인” 부부와 그들을 따라가는 “딸과 그 딸의 아내”가 있다. 그리고 위에 인용된 부분인 두 노인이 떠올려보는 “부모”의 삶이 있다. 고려장처럼 산속 동굴로 떠나온 두 노인이 누대의 삶을 회상하는 것이다. ‘우리의 불’이란 어린 시절에 갖고 있던 무언가다. “ 꿈, 행복, 기쁨, 그리움. 혹은 본질적인 것. 본성. 나를 나로 만들어놓는 것.”

 

 

슬픔의 시간도 호시절이 된다

 

“우리가 이룩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무너뜨린 것이 있지.”

「우리의 불」에서 도드라지게 빛나는 이 시구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처럼도 느껴진다. 사랑하는 일의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인간관계의 반목과 화해,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 먹는 일의 즐거움과 비루함 같은 상승과 하강의 에너지가 교차하고 흘러가서 삶의 대양을 이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김현이 생각하는 ‘호시절’은 마냥 좋기만 한 시절이 아니다. “가끔 진흙탕에 발이 빠지기도 하”겠지만 “삶이 진창이라는 것을/사랑하는 이의 어깨 위에서 알려줄 수 있”(「내가 새라면」)으면 된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라는 두 다리를 가지고서”(「조국 미래 자유 학번」) 건너갈 수 있다고 믿기에 그렇다.

소위 성공이나 성과에만 도취되는 것이 어리석음이라면, 무너뜨린 것도 돌아보는 것은 지혜로움이다. 대개 한 측면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불」의 시적 화자처럼 자발적 고려장을 하는 사람이라면 두가지를 다 성찰하는 사람들이고, 후손에게 그 뜻을 전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염원이 현에게는 있다. 또 우리는 살면서 상처나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존재들의 노력으로 그 아픔들을 다르게 볼 수는 있다. ‘흑역사’가 ‘호시절’로 의미가 변환되기도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현은 경험적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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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여자 같다’라는 이유로 수시로 학교폭력에 시달렸어요. 근데 대학에 들어가고, 여성학 수업을 듣고, 페미니스트 선배들을 만나면서부터 그 시절의 저를 다시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오랜 시간 폭력 피해를 수치스러워했는데, 그럴 게 아니었어요.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가해자들이었죠. 그렇게 저는 생존자로 거듭났고, 그후부터는 줄곧 제 안에 어떤 빛나는 심지(긍지) 같은 게 생긴 것 같았어요. 그 경험이 숨겨야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할 일이 아니라 드러내고 말해야 할 일로 바뀌게 됐죠. 벌어진 적 없는 일이 아니라 벌어졌던 일이 된 거예요. 이번에도 ‘점’으로 얘기해보면, 여러 점들이 모여 한 시절이 되는데, 어느 시기에는 유독 하나의 점만을 크게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나고 나서, 떨어져서 보면 그건 그냥 검은 점이고, 그 옆으로도 무척 빛나는 점들이 찍혀 있음을 깨닫게도 되죠. 저는 어떤 호시절은 내가 어떤 삶을 살기로 마음먹느냐에 따라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해요.

 

 

‘같이 있어요’

 

생활은 관념이 아니다. 그래서 참 좋았던 순간들의 집적물인 이 시집 안에는 여러개의 노래가 흐르고 있고, 이런저런 음식이 끓고 있고, 어디서나 개가 지켜보고 있다. 김현의 호시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에서 가장 우선은 음식이다. 미역국, 계란찜(「손톱달」), 백순두부탕, 가자미구이(「가장 큰 행복」), 만두(「성탄 전야」), 전주콩나물국밥(「견과를 위한 레퀴엠」), 도다리쑥국(「좋은 시절」), 토마토스파게티(「Bon appétit」), 명태조림, 양평해장국, 우럭회(「부모의 여자 형제를 부르는 말」)는 그가 살면서 촘촘히 찍어낸 기쁨의 점들이다. 이것을 먹어서 시를 쓴 게 아니라 먹었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개. 어릴 적 엄마가 술에 취해 있을 때 곁에 다가와 손등을 핥아주던 존재,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사랑을 주는 반려동물이다.

 

쓰고 나서 알았어요. 애정, 희망, 긍정의 순간엔 늘 작은 개가 등장하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개를 키웠어요. 개가 갖고 있는 항상성, 항애정성을 어린 나이에 체감하고 있어서 그걸 신비화해서 보는 거 같아요. 일방적이고 조건 없이 주는. 작은 개에게 투영되긴 했지만, 인간은 아마도 해내지 못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염원도 있는 것 같아요. 두려움 없는 사랑을 인간은 할 수 있을까요?

 

『호시절』에서는 ‘일러두기’도 시적 장치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곡이 흐르고 있다”라는 예고와 함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시시콜콜한 이야기」 「TheWaterIsWide」 등등 곡명이 소개된다. 나는 현의 시집에 들어가기 전에 ‘일러두기’를 보고 모처럼 이소라 6집 ‘눈썹달’을 찾아들었다. 그랬더니 식전 음식을 먹은 것처럼 입맛이 돌아서 시가 더 맛있게 읽히는 기분이 들었다. 현은 평소 이소라를 ‘이소라느님’이라고 부른다. 작사가이기도 한 이소라의 노랫말에서 시적 영감을 받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현은 가사보다 외려 가사를 뭉개는 듯한 짙은 음색, 그리고 정서적인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시집에서 ‘통속성’이 엿보이는 시들, ‘이건 생활에서 온 거 같은데?’ 하는 시에는 대부분 대중가요 가사가 있다고 귀띔했다. 그에겐 시를 만나는 일이 “살면서 놓쳐버린 노랫소리, 찾지 못한 노랫말이 내 곁에 있음을. 도처에 숨겨진 그 소리를 발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일러두기’ 곡 목록 중에 「울고 싶은 마음이 들면 스윙을 떠올린다」 「정발산 송연우」는 세상에 없는 노래다. 현은 이 시집을 같이 만든 동료들인 스윙 마니아 김선영 편집자, 연우 엄마이자 책의 추천사를 써준 김나영 평론가를 떠올리며 상상의 곡들을 지었다. 책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고 타인의 수고가 곁들여짐을 말하고 싶어서 “‘누구에게 바친다’를 내 방식인 각주 형식으로 바꿔서 넣었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호시절’이라는 시집은 허밍처럼 속삭인다. “우리 같이 있어요.” 여기, 사람이 있는데 늘 하나가 아닌 둘이 있고, 혼자 있을 때조차도 고독이 너무 커서 자신을 둘로 분리해서 대화하고 있다. 『호시절』은 어떤 시집이야? 누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무슨 시집이야

사랑 시집

 

이곳은

두 사람이 사는 집

—「영원 칸타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