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재클린 로즈 『숭배와 혐오』, 창비 2020
모성, 그 심원한 어둠에 관하여
권영희 權英姬
서울시립대 영문과 교수 yhkwon@uos.ac.kr
‘엄마는 자식을 위해 살아야 한다’라는 명령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식과 가족을 위해 엄마 본인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한국사회의 풍토를 보면 벌써 오래전 한명 아래로 떨어진 세계 최저 수준 출산율은 아직도 강고한 모성의 신화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모성에 대한 오래된 질문과 새로운 도전을 소상히 살피는 『숭배와 혐오: 모성이라는 신화에 대하여』(Mothers, 2018, 김영아 옮김)의 저자 재클린 로즈(Jacqueline Rose)가 지적하듯이 모성은 페미니즘이 초창기부터 줄곧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온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다. 왜 우리는 이른바 ‘페미니즘 이후’ 시대에 이 익숙한 사실을 새삼스레 마주하며 다시 모성을 사유해야 하는가? 저자의 문제의식은 엘리자베뜨 바댕떼르(Élisabeth Badinter)를 인용하며 말하는 것처럼 상황이 더 나빠졌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한편으론 본질적 모성과 그 중요성을 주창하는 생태모성주의(eco-maternalism)가 부상하면서 여성을 다시 가정으로 복귀시키는 흐름이 나타났다.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제도적·문화적 여성 억압이 상당한 정도로 개선되었음에도 페미니즘의 급진적 요구들에 대한 반동 역시 여타의 이념들—가령 생태주의—과 합종연횡하는 형태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악화된 현실의 또다른 측면은 신자유주의 모성 주체의 등장이다. 엄마 역할에 무한 책임을 지우는 모성 이데올로기는 전반적으로 악화한 삶의 여건들과 맞물려 어쩌다 엄마가 된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엄마 노릇에 따르는 ‘고통과 희열’ ‘사랑과 증오’의 스펙트럼을 고루 경험한 독자라면 깊이 공감하며 읽겠지만, 『숭배와 혐오』는 평소 모성에 거리를 두고 싶은 독자가 읽더라도 곱씹어볼 만한 생각거리로 가득하다. 사실 이 책은 모성에 대해 제대로 묻고 답하는 일이 인간·사회·역사에 관한 진지한 사유와 직결된 작업임을 새삼 절감하게 만드는데, 이 점은 저자가 사회 현실의 제반 측면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발언해왔고 정신분석이론에 정통하며 다양한 시대와 지역의 문학을 섭렵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이상화된 모성이 하는 역할과 그 “치명적 힘”(242면)이 무엇인가이다. 모성을 주제로 한 사회비평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1976년에 나온 『우리를 낳은 여자에 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Of Woman Born, 한국어판 제목은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이다)에서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가 개척한 글쓰기 스타일을 계승하고 있다. 모성연구 분야의 고전인 리치의 책은 제도로서 모성에 대한 인류학·사회학·심리학·정신분석·문학을 가로지르는 담론 분석을 하면서도 이런 학문적인 접근을, 세명의 아들을 출산하고 양육한 저자 본인의 경험과 섞는 방식으로 모성의 억압성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리치의 책과 비교하면 『숭배와 혐오』는 저자 본인의 모성 경험을 전경에 위치시키지는 않는다. 대신 비슷하게 학제적인 접근법을 보여주고 현실과 담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한개 장을 통째로 엘레나 페란떼(Elena Ferrante)에게 할애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문학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문학적 글쓰기는 숭배와 혐오라는 이중의 신화 너머 모성이 연루하는 고통과 희열, 심지어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에 이르기까지 잘 드러나지 않는 진실들을 통찰하는 계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페란떼를 인용하며 저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모성의 “문학적 진실은 아직 탐구되어야” 한다.(234면)
로즈의 글쓰기 스타일은 모성의 신화가 유지·강화하는 근본적인 경계들을 해체하는 데에 모성의 비판적 잠재성이 있다는 이 책의 주제와도 조응한다. 전체적으로 모성신화의 치명적 위험을 조명하는 작업이 워낙 압도적이라서 모성의 새로운 윤리적 가능성, 즉 “우리가 만든 경계선이 근본적으로 취약함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어머니와 관련해 다른 윤리나 세계를 세울 수 있는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라는 생각의 중요성은 가려지기 쉽다. 페란떼를 논의하는 맥락에서 이 화두를 던지며 저자는 모성을 “자기 충족과 자기통제의 신화”에 대해 “일종의 성나고 분노에 찬 응수”로 볼 것을 제안한다. 우리들 자신이 “자족적이며 근본적으로 구별 가능한 개인들”이라는 관점은 전적으로 “헛소리”이며 “우리의 몸은 우리의 재산이며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의지에 종속되고—이것이 가장 위험한데—전세계가 우리 지배 아래 있다”라는 생각 역시 거짓된 믿음이라는 것이다.(211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생각을 담고 있는 대목으로 읽혔는데, 저자가 좀더 깊이 있는 논의를 전개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이 책의 단점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페란떼의 작품세계에 대한 논의가 다른 문학 작품들을 다루는 구절들에 비해 모성이라는 주제상의 틀에 갇히지 않고 흘러넘치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하고 싶다.
모성은 워낙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온 만큼 일반화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주제다. 그 점에서 저자가 자신의 위치, 즉 1세계 백인 중산계급 여성의 자리가 자신의 모성 경험을 구성하는 점을 자의식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필수불가결하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외조모와 어머니로부터 홀로코스트의 상흔을 이어받은 딸이자 중국에서 아이를 입양한 어머니로서 경험을 들려주는데 사실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 등의 차이들이 모성의 신화와 그 효과를 어떻게 변주하는지는 이 책 전체의 관심사다. 가령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빈곤층 흑인 여성들이 앓는 우울증이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적 유산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논의하는 대목이나, 씬디웨 마고나(Sindiwe Magona)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면서 노동자계급과 유색인종 여성에게 중산계급의 가정성 신화가 부과될 때 어머니로서 이들이 짊어지는 물질적·정신적 부담이 중산계급 어머니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대목은 특히 주목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모성신화의 역사성이나 모성이 필연적으로 연루하는 계급정치의 함의를 본격적으로 논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점은 리치의 전작에 비해 아쉬운 점이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 너머, 모성이 현 시점에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 측면이 있다고 할 때 현실의 어떤 조건이나 역사적 계기를 통해 그렇게 된 것인지 살펴보는 작업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산계급 여성성 이데올로기가 하층계급 여성의 모성에 끼치는 영향이나, 특히 한국사회의 맥락에서는 결혼이주여성의 모성 경험에 내포된 인종 및 계급정치도 더 활발하게 탐구되면 좋겠다.
모성에 대해 감춰진 진실 가운데 재클린 로즈가 지목하는바 육아, 구체적으로는 수유에 수반되는 성적인 쾌락이라는 문제도 가부장제적 성관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청하는 사안임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성기 중심의 협애화된 섹슈얼리티 관념을 전제할 경우, 젖을 먹이는 엄마가 경험하는 쾌감은 변태적 욕망이나 은밀한 죄의식의 원천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애당초 프로이트의 유아성애 이론이 내포한 혁명성 자체가 성기 중심의 섹슈얼리티는 결코 우리가 경험하는 성애나 성적인 욕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즉 발달 단계의 마지막 지점이지만 온몸이 아닌 특정한 신체 지점들로 쾌락의 근원이 쪼그라든 상태에 불과하다는, 놀랍도록 독창적인 관점에 있지 않았던가. 모성의 또다른 심원한 어둠은 페미니스트 여성마저 자유롭지 못한 모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데, 이 때문에 여성 주체는 어머니로부터 분리되고 또한 깊은 상처를 수반하면서 자기분열이 초래된다. 리치가 예리하게 짚어냈듯이 페미니스트들이 자매애(sisterhood)에 바탕을 둔 연대를 주창해왔다는 사실의 이면에는 어머니 또는 딸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기를 거부하고,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지 않겠다는 깊은 모성공포(matrophobia)가 자리한다. 모성의 새로운 윤리적 가능성에 대해 로즈는 “아이를 낳는 것은 이방인을 환대하는 행위이며, 그 결과 어머니 노릇은 (…) ‘우리 자신의 낯섦과의 가장 강렬한 형태의 접촉’이 된다”(183면)라고 말한다. 다소 이상적으로 들리는 이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여성 주체 자신들의 모성공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둠은 우리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