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20년 6월 4일에 회의를 열고 강경석 안희연 이설야(이상 시 부문) 김미정 김정아 송종원(이상 소설 부문) 및 『창작과비평』 상임편집위(기타 부문)를 예심위원으로, 박철 백낙청 백지연 전성태를 본심위원으로 위촉해 심사진을 구성했다.

예심위원들은 7월 17일까지 각 부문에서 그 성취가 인정되는 대상작을 선정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만해문학상 규정에 따라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한 예심에서 시집 5종, 소설 5종, 기타 2종(총 12종)을 본심 진출작으로 선정했다.

이어서 4인의 본심위원들은 8월 5일 1차 본심을 열고 다음 6종을 최종심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이상 소설), 고형렬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박기영 『무향민의 노래』, 황규관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이상 시), 김종철 『대지의 상상력』(기타).

9월 11일 열린 2차 본심(최종심)에서는 더 본격적인 논의가 재개되었다. 우선 김종철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이 본상 수상작으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공감이 심사자들에게 애초부터 있었다. 다만 수록된 논문들이 비록 새로 수정과 보완을 거쳤다 해도 대부분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처음 발표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근 타계한 저자에 대한 인정과 경의를 특별상으로 표현하는 데 만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어서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본상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심도있는 논의 끝에 심사진은 최진영 장편소설 『이제야 언니에게』를 본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한 사회의 뿌리 깊은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향한 끈질긴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이 우리 시대의 페미니즘 서사가 도달한 단연 뜻깊고 중요한 성취라는 데 심사위원 전원이 뜻을 모았다.

 

 

 

심사평

 

박철(朴哲) 시인

우선 갑자기 겪게 된 김종철 선생의 부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선생을 문필가라기보다는 사상가로 믿어오던 차에 『대지의 상상력』을 꼼꼼히 읽으며 커다란 상실감과 충만감이 교차했다.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아쉬움이 이제야 현실로 다가왔다. 책을 출간하며 수정하였다고는 하지만 글은 대부분 1970~80년대 선생이 아직 영문학자로서의 책무에 전념할 때의 것들이다. 다소 현학적이되 미래를 전망하는 시야가 남다르고, 외국문학에 대한 글임에도 또박또박 읽으면 쉽게 읽히는 평문의 드문 모범 사례를 재발견해 가슴이 뜨거워졌다.

처음 듣는 이름과 역사적 사건이 즐비해도 지적 향유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요즘 흔히들 본문보다 해설이 더 이해하기 어렵다는 풍토에서 우리 모두 깊이 새겨야 할 덕목이라 믿는다. 또한 신세대나 주류 문학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그 광맥을 따라가며 결국 보석을 발견해내는 선생의 넓은 안목 역시 그의 부재 뒤에 오는 늦은 깨달음이었다.

수록 원고가 다소 오래된 면이 있으며, 어쩌면 선생도 원치 않았을 것 같은 본상 심사에 여타 대상작들과 나란히 놓지 않고 이 ‘특별한 존재’에 특별상을 드림으로 최대한의 대우를 해드리는 데 내 의견을 보탰다.

원래, 시란 그런 것이고, 시의 가치를 견줄 잣대란 매우 협소하다. 더불어 시를 창작하는 입장에서 동료의 글을 품평하기란 거의 고통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만큼 공부가 되는 경우도 드무니 특히 그간의 고형렬 시를 되짚으며 읽고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사유의 폭을 넓히며 끊임없이 삶의 길을 묻는 고형렬표 시의 아이덴티티는 이번에도 확고해 보인다. 영탄이나 감상에 휩쓸리지 않고 단독자로서 중력의 질서를 거부하는 경지는 독자에게 읽는 정성을 요하지만 시의 숲에 다가설수록 번득이는 통찰과 개척지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다만 고형렬은 이 독자의 수고와 자신의 각고 중에서 의연히 자신의 길을 감으로 독자에게 보다 큰 정성을 요구한 모양이다. 이전의 성과와 더불어 찬사를 보낸다.

황규관에게 김수영이나 백무산 두 시인의 진전된 버전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도식적이다. 이미 그는 뚜렷한 목소리로 노동자・생태・반자본・반문명에 대한 나름의 정제 시기를 넘어 이제 생의 근원에 이르렀다고 본다. 시집 앞부분이 특히 좋았고 「불에 대하여」 「바람의 길」 등은 원시반본의 비원까지 명료하다. 황규관의 시정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며 그가 담당할 것이 확실해 보이는 우리 문학의 한 축이 궁금해진다.

박기영 시를 보는 명암은 선명하다. 인류 문명을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논해야 할 이즈음에도 여전히 분단이 절박한 현실임을, 그래야 하는 이유를 시는 죽비처럼 내려치고 있다. 그 실종되는 현실이 또한 요즘 젊은 세대에겐 오히려 새롭고 넓은 지평으로 다가설 것이다. 분단문학이 아니라 삶의 문학으로서 박기영 시의 귀중함이기도 하다. ‘도강기’ 연작은 얘깃거리와 무관하게 서사문학의 수작들로 꼽을 만하다. 시는 때로 기교의 과잉이 간절함과 감동을 상쇄시키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 반대편의 좋은 예가 박기영의 시편들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른 문제지만 그가 어느 지면에서 토로했듯 30여년간 시를 놓은 흔적은 숨기기 어려워 보인다. 시도 끊임없이 연마되는 노동의 하나이기에 역사적 소명 앞에 정진된 문학적 노고도 가미된다면 선 굵은 시인의 면모가 충분하다.

김금희 소설은 우선 읽기 달달하고 그러면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 묵직한 작품들이다. 맛나고 영양도 충분한 음식이라 할까, 문장과 이야기 전개의 유연성이 남달리 탁월하다는 점은 이미 정평이 되었다. 다른 수록작에 비해 수작은 아니지만 「쇼퍼, 미스터리, 픽션」에서 야간시장의 ‘둠둠바 둠둠바’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는 포장마차 전경은 가히 시적 에필로그라 할 만하다. 다만 다수 의견이 『경애의 마음』을 비롯한 그간의 작업에 비해 다소 아쉽다는 평가가 나왔는데 나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미투운동의 기술적 문제가 논의되는 시기다. 그렇다 해도 한국사회에서 성평등, 성폭력의 고질만큼 급박하고 첨예한 화두가 더 있을까.

읽을 때 바로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며 흥분시키는 글들이 있는가 하면 최진영의 『이제야 언니에게』처럼 되읽음으로써 진가를 드러내는 글들이 있다. 수려한 문장 없이도 치밀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십대들의 심리묘사는 그만큼 현실감을 더한다. 솔직히 처음에는 중요한 문제다 정도에서 멈추었으나 다시 읽으며 좋은 소설이라는 안도와 감동이 밀려왔다. 세계와 나, 안과 밖의 동시성이랄까 은밀한 일기 형식을 보편적 세상사와 일치시키는 능력도 남다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거듭되는 이 단순한 질문 앞에 흔쾌히 최진영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백낙청(白樂晴) 문학평론가

한동안 심사를 안 하고 독서마저 게을리한 터라 예심을 통과한 12권을 심사하는 일이 상당한 고역이었다. 하지만 우리 문학의 활력을 새삼 확인하는 기쁜 시간이기도 했다.

김종철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이 본상 수상작으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공감이 애초부터 있었다. 영문학을 비롯한 외국의 무게있는 작가들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처럼 순탄하게 읽히는 문체로 씌어졌다는 것이 학계뿐 아니라 평단에서도 하나의 모범이 되어야 옳다는 점에도 모두 공감했다. 다만 수록된 논문들이 비록 새로 수정과 보완을 거쳤다 해도 대부분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만해문학상의 관행이 가급적 창작품에 수여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근 타계한 저자에 대한 인정과 경의를 특별상으로 표현하는 데 만족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창작품 중에서도 시와 소설은 장르가 다른 만큼 단순비교가 불가능하다. 어느 쪽을 택할지 오래 논의했고, 소설 중에서도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에 대해 의견이 처음부터 일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진영의 『이제야 언니에게』가 뛰어나고 특별한 작품임은 모두가 인정했고 수상작으로 최종 합의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김금희 소설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가 작가의 남다른 재능과 감각으로 빛나고 있으나 장편 『경애의 마음』만 한 무게를 지녔다고 보기는 힘들고, 저자가 지금도 좋은 단편을 발표하고 있음에 비추어 다음을 기약해도 좋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언니에게』는 친족강간이라는 낯익다면 낯익은 사건을 다루었으나 사건의 경위, 사건 이후의 진행, 저자의 기법 그 어느 하나도 뻔하지가 않다. 즉시 경찰에 고발하는 고등학생 피해자의 적극성도 남다른데 이런 그의 성격은 사건 이전 삶의 묘사나 사건 후 처음으로 일기를 다시 쓰기로 결심하는 소설 첫머리의 모습에서도 인상적으로 드러난다(“오늘 겨우 한 단어를 쓰게 되더라도 내일 다른 단어를 얹고, 또 단어를 쌓아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왜냐면, 다들 지우려고 하니까”). 고발 이후에 벌어지는 진행이 약간 낯익은 것은 사건의 특수성이 어떠하든 거의 엇비슷하게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때문이다. 반면에 제니가 강릉의 ‘이모’한테 가서 고통스러운 치유의 과정을 시작하는 것은 제니만의 경험인데, 더 주목할 점은 치유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그가 대학에 진학한 뒤 다시 깊은 절망과 정신적 방황을 겪다가 어렵사리 재출발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치유가 ‘단방’에 완성되었다면 이 소설은 다소 낯익은 ‘힐링’ 서사가 되었을 것이다.

시집들을 검토하는 도중에 나는 이런 제안을 했다. 김종철의 저서에 본상을 안 주더라도 그가 말하는 ‘대지의 상상력’ 그리고 이런 대지의 파괴와 상실을 초래하는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통찰과 분노를 심사의 한 척도로 삼으면 어떻겠냐고. 그럴 경우 여러 위원들이 높이 평가한 고형렬 시집은 미흡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가 이미 자기만의 경지를 확고히 이룩한 시인이고 이번 시집은 전작들에 비해 한결 독자에게 친근해졌으며 일상의 현실에 더 다가온 점은 나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때도 시인의 분노와 통찰이 어느 수준인지 불분명하고 이따금 피력되는 그의 통일염원도 분단현실에 대한 치열한 항거라기보다 말하자면 ‘소년’다운 꿈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이 시집에 상을 주었을 때 잘못 주었다고 말할 사람은 드물겠지만 나는 그것이 좀 너무 안전한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시 분야에서 준다면 박기영이나 황규관처럼 주류문단에서 거의 외면하는 시인을 부각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박기영의 『무향민의 노래』에는 실향민인 아버지와 ‘무향민’으로 태어나고 자란 시인 세대 들이 겪은 분단의 아픔이 여실하게 담겼다. 그렇다고 고난의 기록만은 아니며, 넘치는 생명력과 뛰어난 시적 서사의 힘이 살아 있다. 전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에 비해 회고조가 줄고 소재가 다양해졌으며 인식의 섬세함도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의 선호는 황규관 시집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김수영의 세례를 충분히 받고도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세상과의 근본적 불화와 대안 세계에 대한 비전을 열정적으로 쏟아내는 점을 사주고 싶었다. 예컨대 표제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에서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웃음이 너무 많다 노래는/없고 이파리 한 장 내밀지 못하는/언어가 객차 안에 가득하다//(…)//이번 차는 내 것이 아니다/행선지가 너무 명확하다”라는 발언은 거침없는 진술이되 고지식한 언어와는 거리가 멀다.

수상작 자체는 ‘대지의 상상력’을 얼마나 발휘하고 있냐는 물음이 나올 법도 하다. 물론 나는 최진영이 앞으로 더 장대하고 풍성한 작품을 써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제야 언니에게』 주인공의 강인한 생명력은 결국 대지로부터 받은 생명의 힘일 터이며 그 생명력을 지켜내려는 간고한 싸움 끝에 마침내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라는 통렬한 현실인식을 획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백지연(白智延) 문학평론가

만해문학상 특별상으로 선정된 김종철의 『대지의 상상력』은 비평의 현재성과 창조성에 대한 생각을 여러가지로 새롭게 일깨운 저작이다. 이 책을 읽으며 『녹색평론』 발행인으로 긴 세월 생태운동과 담론을 일구어온 저자의 사유 바탕에 문학적 상상력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구문학의 고전에서 제 3세계와 아시아의 작품들에 두루 걸쳐 있는 비평적 읽기는 문학작품을 잘 읽는 일이 왜 시대와 역사를 통찰하는 일과 연관되는지를 명료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통해 전달한다. 더불어 민중성과 민중문화, 민중예술에 대한 저자의 뿌리 깊은 지지와 관심은 지금의 문학비평이 새롭게 고민해야 할 비평적 주제를 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인용된 ‘뿌리를 박은 채 변화’한다라는 리비스의 전언은 김종철 비평이 스스로를 향해 다져온 굳건한 신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문학비평이 누구든지 함께 작품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나누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협동적 창조의 작업임을 몸소 보여주는 성과다. 이 시대의 비평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현재적으로 일깨우는 이 책의 수상에 깊은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드린다.

박기영의 『무향민의 노래』는 우리의 삶에서 마땅히 보존되어야 할 소중한 공동체의 기억을 서사적이고 설화적인 시의 형태로 포착한다. 이야기시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는 개개의 시들은 분단현실의 역사를 구체적인 삶의 시공간으로 생생하게 살려놓는다. 북방적 상상력이 스며 있는 지역언어의 복원 역시 이 시집이 소망하고 지향하는 평화통일에 대한 간절함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황규관의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에는 상당히 다양한 시적 흐름과 모색의 기운이 담겨 있다. 생명과 노동이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피폐한 현실을 향한 뜨겁고 직설적인 전언, 핍진한 고향의 기억과 서정적 회상, 존재의 근원을 찾는 신화적 탐구가 다양하게 어우러지면서 특유의 강렬한 어법을 만들어낸다.

고형렬의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은 단정하고 밀도 높은 언어의 조탁력을 통해 구도적 세계를 향한 오랜 시적 정진을 보여준다. ‘캄캄한 물길이 정신의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나’를 향한 시적 성찰에 감도는 긴장감이 서늘하게 와닿았다. 현재적인 삶의 시공간과 사회적 풍경을 담백하게 다루는 일련의 시편들은 세속과 신성의 길항이 적절하게 조화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현실과 아득한 과거의 시공간이 겹쳐지며 환기되는 시적 발견의 순간들이 마음 깊이 남았다.

김금희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자의 시선에서 우러날 수 있는 부드럽고도 비범한 소설적 묘사를 담고 있다. 김금희 소설은 자칫하면 한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평범한 일상 속 세세한 감정의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웃음과 눈물, 공감과 치유, 애도와 기억은 그 누구에게나 존엄하고 평등한 삶의 순간들을 환기하는 감동을 준다.

대상작들이 보여주는 깊은 미덕을 새기며 각고의 토론을 진행한 끝에 본심위원들은 『이제야 언니에게』를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이 작품은 그동안 우리 문학에 축적되어온 페미니즘적 인식에 기반해서 사회구조 깊숙이 작동해온 성차별과 불평등, 가부장제의 관습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소설은 친족성폭력이라는 사건에서 시작하여 고통스러운 기억을 딛고 사회적 시간을 회복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사려 깊게 형상화한다. 진상을 규명하지 않고는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기억은 거듭 그날,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기록의 구조를 통해 우리에게 간절한 목소리를 전달한다. 한 존재의 삶을 결코 자극적 소재로 소모하지 않으려는 소설적 분투는 평면적인 고발의 기록으로 점철되기 쉬운 서사들에 대한 경종으로도 다가왔다. 차별과 혐오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분노하면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힘을 얻어 앞으로 조금씩 걸어가는 인물의 의지는 그 자체로 절박한 소설의 한 형식을 이룬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존엄한 방식으로 꾸려가려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는 소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한 사회의 뿌리 깊은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향한 끈질긴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 시대의 페미니즘 서사가 도달한 단연 뜻깊고 중요한 성취이다.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수상을 축하드린다.

 

전성태(全成太) 소설가

역시 김종철 선생이 차지하는 마음이 컸다. 『대지의 상상력』과 함께 남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는 희랍 시인 아이스킬로스가 직접 쓴 묘비명이 소개되어 있다.(「희망을 위한 보이콧」) 아이스킬로스는 작가로서의 성공보다 침략당한 그리스를 위해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운 참전 경험을 비문에 남겼다고 한다. 옛 그리스 세계의 건강성을 말해준다고 선생은 적고 있다. 한 위대한 시인이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중요하고 자랑스러운 업적이 공동체를 위해 싸운 일이었다고 거리낌 없이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 김종철 선생을 돌아본다. 그의 존재로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말해볼 수 있을까.

『대지의 상상력』의 머리글을 읽자니 스스로 밝힌 행장처럼 여겨져 북받치는 감회가 있다. 서구 근대의 극복을 모색하고 실천한 생태사상가로서 선생의 상상력이 문학에 기반하고, 문학의 장에서 얻은 것들 덕분이었다고 회고해서 위안이 되었다. 소개된 해외의 문학적 전범들 역시 다양한 접점에서 한국문학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미나마따의 작가 이시무레 미찌꼬에 대한 강의에서는 생태적 상상력의 문학적 실체를 체감케 하고, 식민지 마르띠니끄 사람 프란츠 파농이 혁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조명하며 ‘프랑스 부르주아 문화의 내면화’를 인식론적 한계로 짚는 대목은 존재론적이고 가슴 아팠다. 나아가 선배 세대의 모색들을 뒤늦게 추체험해보는 호기심도 북돋웠다. 에세이의 자유로운 형식을 빌리고 있다지만 하나같이 어려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읽기 편한 글을 다시 만날 길 없다. “나를 발견하는 데는 죽음 너머 시간까지 필요하겠지?”(「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고형렬 시인의 시구를 빌려 추모의 마음을 새긴다.

고형렬 시인의 시편들에 깊게 감응했다. 내 마음 가려운 데 있어선지, 시절이 그래서인지 화자가 묵은 자리들을 홀로 역방하며 내놓은 회한의 언어들은 마음 굳은 데까지 스며들어왔다. 「사북(舍北)에 나갔다 오다」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헤어지다, 그 겨울 혜화역에서」 같은 시들, 미망의 존재들을 기억하는 방식들이 좋다. 영원성이 불가한 세계를 받아내는 쓸쓸함이 정직하여 회한이 단단한 눈처럼 뭉키지 않고 빈주먹처럼 남는다. ‘시간을 세월로 만드는 게 삶’이라는 전언에 수긍이 간다. 영북지방의 찬 고원을 배회하는 듯한 공간성이며 ‘먼 훗날’이라는 미래시점이 생성하는 아득함에도 사무치는 바가 있다. 본상이 시 쪽으로 기울었다면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을 편들었을 것이다.

김금희 작가의 단편들에는 급격히 붕괴되는 상실이 아니라 마모되듯이, 천천히 빠져나가듯이 허물리는 상실감이 있다. 시간, 젊음, 열의, 호의, 사랑 같은 것들이 아픈지도 모르게 물러난 자리가 ‘현실’이 아닐까 돌아보게 한다. 전작 『경애의 마음』의 성취가 내게는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소설집 『오직 한 사람의 차지』에서 엿보이는 새로운 모색들이 또 어떤 광휘로 펼쳐질지 기다리겠다.

최진영 작가는 자기 소설의 주인공과 가장 깊이 사귀는 소설가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최진영의 서사는 하나같이 한 사람과 깊이 교감하고 나온 듯한 여운을 남긴다. 『이제야 언니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진가는 성폭력 이후의 삶을 다룬 데 있다. 흔히 ‘생존자’라고 일컫는 성폭력 피해자가 거듭거듭 시달리는 고통의 세부며 그 바닥을 치고 자기 생명력으로 일어서는 지난한 과정은 실감의 층위를 넘어서서 격통과 감동을 준다. 짧은 소설이지만 주인공의 자취가 역력해서 결코 짧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만한 호소력과 공감력을 가진 인물을 소설에서 만난 것도 오랜만이다. 이 상이 작가에게 가는 영광이라기보다 마치 제야씨에게 보내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그런 독후감 때문일 것이다. 작가님들께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수상소감

 

제야는 오래 살아남을 거야

 

최진영 崔眞英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팽이』 『겨울방학』,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등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 백신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는 자주 마음이 불편해지는 사람입니다. 무심코 한 저의 말이나 행동, 타인의 눈빛이나 웃음이나 어떤 태도 때문에. 저의 불편함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은 애초에 만들지 말거나 불편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라고 당부합니다. 저는 입을 다물고 생각합니다. 불편한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을 수 있는 현명함을.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냉정함을. 나는 대체로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이므로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고, 상대의 기분을 먼저 살핀 뒤 그에 맞춰 내 기분을 부풀리거나 구기는 사람이므로 냉정함과도 거리가 멀지만, 어쨌든 사사건건 현명하고 냉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내가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지도 않을 것이며 당신 말처럼 애초에 나의 불편한 마음을 말하지도 않았겠지…… 뭐야, 나 이해받고 싶었나…… 혹시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우리의 분위기를 망쳐버렸나…… 사건 밖에서 ‘하지 마’라고 말하는 당신은 역시 나보다 속이 편해 보인다…… 그렇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번씩 질책과 침묵과 후회와 자책과 깨달음의 굴레에 빠집니다. 깨달은 대로 살지 못해 우울해하고 많은 당신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혼자만 옳은 사람이기도 싫고 혼자이기도 싫고, 현명하거나 냉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고 싶습니다. 불편한 것은 왜 불편한지 계속 쳐다보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이제야 언니에게』를 쓰면서 저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언니에게』를 출간한 뒤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이제야 언니에게』는 저 혼자만의 힘으로 쓴 소설이 아닌 것 같아요.

북토크에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 소설은 소설 같지 않아요. 저는 소설을 쓰지 않았어요. 너무 많은 현실을 옮겨 적었을 뿐입니다.

글을 쓰는 동안 현실에 현실을 보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소설을 쓰는 이유를 매일 되새겨야 했습니다. 외면하고 싶은 순간에도 책을 다시 펼쳐 『이제야 언니에게』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합니다.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수상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한 생각은 ‘큰일이다’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쓴 것은 소설이 아니고, 혼자만의 힘으로 쓰지도 않았고,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고, 이건 내가 받을 상이 아닌데…… 그렇다면 이것은 제야에게 주는 상이다. 제야의 상이므로 기쁘게 당당하게 받자. 그리고 저는 다시 큰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염려가 아닌 기대로 가득 찬 큰일. 앞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제야의 말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제야는 더 멀리 달려갈 수 있을 거야. 제야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제야는 훨씬 오래 살아남을 거야. 제야를 모르지 않고 제야와 다르지 않은 우리를 위해 부디.

 

독자에게 썼던 편지의 마지막 부분을 여기 다시 옮깁니다.

 

2019년 2월 12일 제 일기에 저는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이렇게 고통 가득한 글을 누가 보려고 할까?’

그리고 또 이런 문장을 썼습니다.

‘믿을 것이라면, 믿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최선을 다해 믿어야 한다.’

 

제야와 함께 상을 받는 이 순간만큼은 겸손해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마다하지도 않겠습니다. 속 편한 당신의 눈치를 보지 않을 겁니다. 현명하거나 냉정하지 못해서 불편하고도 예민한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