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제22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신용목 안현미 2인을, 본심위원으로 김해자 유성호 이시영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와 본심위원의 추천을 통해 아래 총 9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고영민 『봄의 정치』, 김경인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김사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박경희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박기영 『무향민의 노래』, 박승민 『끝은 끝으로 이어진』, 안주철 『불안할 때만 나는 살아 있다』, 황규관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가나다순).
본심은 11월 4일에 진행되었는데, 모든 후보작이 저마다의 서정과 어법으로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심사진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오랜 숙고와 토론을 거쳤으나 수상작을 꼽는 데에는 어려움 없이 하나로 뜻을 모아 황규관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문학동네 2019)로 결정했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는 노동 경험의 핍진성을 토대로 한국 리얼리즘시의 뛰어난 한 수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시가 발 딛고 있어야 할 현실과 그 광활한 지평선을 활짝 열어주었다고 평가되어 올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평
김해자(金海慈) 시인
얼핏 보면 소소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중중무진(重重無盡) 화엄의 장면을 조화롭게 빚어냄으로써 나이테처럼 아름다운 이미지가 단아하게 퍼져나가는 박경희의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은 변두리 어법으로 핍진한 삶의 뒤안을 포용하는 품 넓은 모성과 대지의 시학이라 불릴 만하다. 짐승과 인간과 흙과 식물이 관계하고 회통하면서 상호교호적인 생명체로 거듭나는 신비와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이 시집은, 이질적 생명들의 교합이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장소로서의 생명의 본디 자리를 낮은 물소리로 지키며, 시베리아 얼음벌판조차 불타오르는 절체절명의 시대에 흙의 언어로 불을 덮으면서 ‘보고 듣는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일깨운다. 오래된 미래를 이 시대에 소환하는 귀한 시편으로 느껴졌다.
퍼내도 퍼내도 마를 것 같지 않은 ‘깊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탈향민과 무향민의 통절함이 우울과 탄식과 비애에 먹히지 않은 채 악착같이 삶을 일구며 미래를 낳는 장쾌한 정신이 가슴으로 다가드는 박기영의 시집 『무향민의 노래』는 전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에서 보여준 바처럼 긴 시간 저잣거리에서 단련해온 근육질의 언어가 곡진한 서사와 맞물려 삶을 긍정하게 하고 고난을 떨쳐 일어서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살아 있는 입말’ 또한 기층민중 생활서사의 뼈대를 단단히 받쳐준다는 느낌을 주었다.
나와 타자의 경계가 지워지는 지점에서 문득, 수많은 타자와의 긴장을 유지한 채 서정적 주체 안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삼투압을 견디며, 근자의 시단에 한층 팽배해진 과잉된 자아의식과 갇힌 언어를 홀연 넘어선 박승민의 시집 『끝은 끝으로 이어진』은 빈사 상태의 황폐화된 농촌 혹은 주변부 삶에 더듬이를 내밀하게 뻗어 ‘실패’와 ‘바닥’과 ‘소외’를 직시하고 수용하면서, “가까스로” “간신히”(「벼랑에 고드름」) 매달려 있는 실패한, 혹은 실패자로 낙인찍힌 민초들을 근대사의 편린과 만나게 한다. 때로 저널리즘 문법을 동원해 저 숱한 을(乙)들을 공공의 영역으로 불러와 그들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고 삶 자체에 대한 경외의 감정을 선사하면서, 본래 시가 그런 거 아니냐 질문하는 듯한 맵차고 단단한 시편들이 돋보였다.
황규관의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는 황폐와 불모화와 파괴와 부자유와 자폐의 방향으로 저울추가 이미 넘어가버린 근대문명에 딴지를 걸고 흠집을 내며 “고귀함 이외에는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한 시간」) 새로운 자유의 시간으로서의 시의 의미를 묻는가 하면, 자전적 체험과 내밀하게 결합된 이데아로서의 삶의 본령 속 직설적 언어를 통해 수없이, 날마다, 이윤을 위해 “끼워 죽이”면서도 노동을 추앙하고 신성시하는 척하는 이율배반적인 이 세계에 ‘큰 싸움’을 걸고 있다. “고장난 기계와 고장난 학력과/고장난 법률과 고장난 국가”(「끼워 죽이다」) 시스템에 호기롭고도 고독하게 거침없이 문제제기하고, 새로움을 향한 욕망을 의심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직선과 수직 대신 ‘호미’와 ‘강물’ 안으로 들어가 유영하는 듯한 곡선과 수평의 난장을 펼친다. 언뜻 보면 다소 진중한 개념어의 사용으로 선언적이고 이성적인 명제 같은 느낌을 주는 시편들도 보이나, 뒤집어 보면 ‘꿈이 병든 사회’에서 신체로서의 노동, 그리고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도구와 대지를 옹호하면서 세계로서의 몸을 사유하고 통찰하며 새로운 미래를 불러오려는 고투의 절박성이 낳은 불가피한 지점이 아니었나 생각하며, 진정한 자신과 결속된 이성과 비판과 각성의 언어가 필요한 시대에 묵시록적이고 때로 정치적인 생태주의를 몸으로 수행하는 시인으로서의 책무를 당당하게 감당했다고 생각한다.
고민 끝에 제 22회 백석문학상 수상작으로 황규관의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를 선정하게 되었다. 자기만의 서정과 어법으로 시적 성취를 보여준 여러 시인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리며, 황규관 시인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유성호(柳成浩) 문학평론가
제22회 백석문학상 심사에서는 박경희, 박기영, 박승민, 황규관의 시집이 최종 후보작으로 논의되었다. 한결같이 수상작으로 손색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예심을 통해 눈앞에 놓인 시집들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백석 시정신과의 친화, 미학적 완결성, 시인 생애에서의 중요한 결절 가능성 등을 생각하면서 네권 시집을 차례대로 읽어나갔다.
박경희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은 가장 투명하고 살가운 주변부 언어를 통해 이미 사라져간 것들을 되불러오는 특장을 지니고 있었다. 서정과 서사를 결속하는 방향을 취하면서, 구어적 전통에 뿌리를 내리면서도 삶의 비애와 감동을 환한 회화성으로 건네는 특유의 역량도 느껴졌다. 자신이 사는 공동체에 남아 있는 이야기와 웃음과 그리움의 정서를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전해준 견자(見者)로서의 위상이 각별하다. 그 점을 평가하여 박경희 시집을 적극 추천하게 되었다.
박기영 시집 『무향민의 노래』는 분단이라는 다소 거시적인 역사 현장과 함께 세밀한 원형적 존재론을 동시에 탐구한 결실이다. 지난 시집부터 아버지 세대의 역사를 들려주던 시인은 이번에 실향민 2세의 내러티브를 가멸차게 소개한다. 물론 고향을 둘러싼 이야기가 박기영 시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원적지’와 ‘무향민’은 서로 어긋나면서 흔치 않은 서정적 긴장을 촉발한다. 설움을 넘어 평화의 상상적 탈환으로 성큼 나아가는 역동적 음역이 새롭고 미덥다. 이 점, 박기영 시집을 추천한 까닭이다.
박승민 시집 『끝은 끝으로 이어진』은 삶의 지극한 슬픔과 존재론적 난경들을 특유의 울림으로 전해주었다. 특별히 그것을 폐쇄적인 허무로 등가화하지 않고 허기와 결기의 균형적 비전을 통해 다시 세워 올리려는 역설적 의지를 저류에 깔고 있었다. 소외와 비애를 가로질러 삶의 주변부에서 부르는, 우울하지만 생생한 보고서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최근 우리 시가 결여한 묵시적 에토스를 깊이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 퍽 긍정적으로 다가왔고, 그 점에 박승민 시집을 추천하게 된 근본 까닭이 있다.
수상작인 황규관의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는 노동 경험의 핍진성을 존재론적 기원의 한 축에 두고, 다른 한 축에 분명하고 서늘한 자연 사물의 운행 원리를 배치해가는 ‘시인 황규관’의 서정성이 보물처럼 빛나는 결실이다. 그의 시는 “바람결에 반짝이는 언어를”(「가장 큰 언어」) 통해 리드미컬하며 자유롭게 다가와서 읽는 이들의 마음속에 스스로 번져간다. 이제 그를 두고 자연 서정의 사제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김수영의 치열한 언어와 사유를 일견 잇고 일견 넘어서면서, 황규관은 삶의 가파름과 평화로움, 노동과 안식, 역사와 현재, 영원과 순간, 서사와 서정이 시를 써가는 한몸의 식솔들임을 선명한 표지(標識)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음악을 위해 점점 깊어지는 것처럼”(「묵상」) 훤칠하게 자라버린 언어적 율동과 “돌아가는 일과 떠나는 결단 사이에서/작렬과 고요 사이에서”(「저녁노을」) 불타오르는 내면의 서정적 양감(量感)이 감동적으로 들려오는 시집이다. “자연적 기원의 세계”(박수연, 해설)를 읽는 기쁨과 보람과 기대가 최종적으로 그의 시집을 수상작으로 선정하게 된 가장 신뢰할 만한 이유일 것이다. 수상을 마음 깊이 축하드린다.
이시영(李時英) 시인
박기영의 『무향민의 노래』 중 내가 주목한 작품은 전반부의 ‘도강기’ 연작, 피난지 대구에서의 스산한 삶을 돌아보는 「푸른 다리의 추억」 그리고 ‘평화상회’ 연작 등이었다. 앞선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집은 우선 그 압도적인 서사로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낭림산맥 사냥꾼 출신 아버지의 고단한 삶과 거센 평안도 사투리 등을 생생하게 되살린 입담과 묘사력 또한 예사롭지 않다. 도대체 요즘 한국시에서 누가 이런 시를 생산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옹골진 시적 표현은 아버지를 ‘여의는’ 순간, 혹은 그가 부재하는 순간 갑자기 힘을 잃는다. 그러나 이용악 이후 한국시의 소중한 자산인 서사적 전통을 되살린 점은 높게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황규관의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시는 「한 시간」이었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원용했던 1818년 영국 농촌의 방적공장과 1863년 사례를 삽입하며 그가 노래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절실한 ‘한시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태양에 몸을 내준 백사장을 맨발로 걷는 일
무거운 사랑을 토해내는 편지를 쓰는 일
저물녘이 되면 어두워져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일
그러면서 나직이 노래의 첫 소절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 ‘한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노동자에게 “고귀함 이외에는 다른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한 시간이/별똥별이 눈속으로 쏟아지는 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황규관의 이번 시집은 노동을 다룬 다수 시편들 속에서도 한 인간으로서의 ‘묵상’(같은 제목의 시도 있다)이 묵직하게 드리워져 있어 그 품이 넓다. 「돌아가지 말자」 「그들이 온다」 「자유는 무성하지만」 같은 나태와 일상을 거부하는 평범치 않은 ‘발언’이 촘촘히 박힌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는 한국 리얼리즘시의 한 수준을 보여주면서도 우리 시가 발 딛고 있어야 할 현실과 그 광활한 지평선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리고 김수영의 영향이 좀 과도한 듯하여 어딘지 읽기에 불편했던 그의 전작들을 ‘온몸으로’ 시원하게 돌파한 시집이라고 본다. 특히 나로서는, 다음과 같은 ‘성장통’이 아프게 박힌 구절을 읽으면서 황규관 시가 비로소 한국시에 자기 목소리를 독자적으로 ‘기입’하고 있다는 기쁨을 느낀다. 이 점을, 특히 축하한다.
제철소에서 교대근무를 할 때
내 작업복 안주머니에는 언제나
시집이 수줍게 웅크리고 있었다
틈만 나면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그고, 음악을 만들었다
“내게 파업이 아니면
아름다운 서정시를—”
—「한 시간」 부분
박경희의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은 앞의 두 시집에 비해 소박하다. 그러나 그 소박성 속에 담긴 오늘의 농촌 현실은 핍진하다. 그의 시적 현장은 “저승 가신 아버지가 하늘 깊어지고 콤바인 돌아갈 때쯤 되면/영락없이 오셔서 추수하느라 바쁘”(「꿈」)며, “햇살을 입으로 받아 우물거”(「정류장」)리는 노인들만 남은 곳이며, 무엇보다도 “늙으면 병들어 죽는 게 아니”라 “벽에 걸린 새끼 사진 들여다보다가 외로워서”(「가을밤에 부는 바람」) 고독사하는 할머니가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이 쇠락한 농촌은 그의 눈길이 닿는 순간, 의외의 생기로 빛나며 인간의 체온을 지닌 대지로 더운 김을 내뿜는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상당수 작품들이 ‘일기’처럼 평면성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김수영의 말을 빌리면, ‘모더니즘의 세례’를 너무 안 받은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현실을 소거한 채 자의식의 자동기술만이 ‘새로운 현대시’인 양 과잉 대표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시에 하나의 ‘다른 사례’를 제시한다.
또 하나의 본심 대상작인 박승민의 『끝은 끝으로 이어진』 또한 수작이지만, 내가 읽은 그의 전작에 비해 월등한 진전을 이루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소재의 다양성이 증대한 반면, 화자의 시점이 산일한 채 하나의 주제로 집중되지 못했다.
수상소감
피의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시
황규관 黃圭官
1968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고, 1993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산문집 『강을 버린 세계에서 살아가기』 『리얼리스트 김수영』 등이 있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쓸 수 있을까, 혼자 괜스레 가늠해보다가 결국 이것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생각임을 깨닫고는 합니다. 미래의 ‘현실’은 현재의 ‘현실’과는 사뭇 다를 터인 데다가, 현재의 ‘현실’이 미래의 ‘현실’의 원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으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앞으로 현재가 어떻게 진행될지 감도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이런 막막함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그동안 이 막막함을 인정하지 않고 미래의 ‘현실’을 섣불리 판단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도 없지 않습니다. 혹 이 오래된 미래의 ‘현실’에 대한 오만이 오늘날의 난경을 불러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근대인의 관점이 갑갑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당대의 관점으로 미래의 ‘현실’을 판단하려 했다면 그것은 분명 과거의 ‘현실’도 근대인의 눈으로 규정하고 편집해왔던 습관 때문일 겁니다. 인간에게는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자기보존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가 미래의 ‘현실’을 상상하려면 다른 눈이 필요할 것만 같았고, 그 다른 눈은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먼 행성 같은 데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 과거의 ‘현실’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백석의 「목구(木具)」라는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지만, 지나간 시간을 현재의 ‘현실’로 불러들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수원 백씨(水原白氏) 정주 백촌(定州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가계를 말하고 있지만, 백석은 제상에 쓰이는 ‘목기’를 통해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 것과 없는 것과 한줌 흙과 한점 살과 먼 옛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룩한 아득한 슬픔을 담”고자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함께 살았던 백석과 함께 현재의 ‘현실’을 관통해 미래의 ‘현실’에 가닿을 수 있을까? 한때 저는 이 물음에 부정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단지 백석을 재현하려는 시단의 오래된 흐름에 편치 않은 심사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것이 백석을 읽을 때 부정적으로 개입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목구」를 비롯한 백석의 시를 다시 읽다가 백석의 비근대적 ‘현실’이 우리에게 절실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시가 죽은 것들과 산 것들을,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을, 오랜 과거와 “피의 비”가 쏟아지는 현재를 담는 “목구”라면 미래의 ‘현실’도 두렵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이는 단지 「목구」에서만 느끼는 바가 아닙니다.
돌아보니 제게 이런 생각과 눈을 선물해주신 분은 지난여름에 우리를 두고 떠나신 김종철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다시 기억하면서, 이 상을 받는 감사와 송구함은 앞으로 쓰는 시를 통해 천천히 갚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