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거인을 보았다
백상웅 시집 『거인을 보았다』
이강진 李康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위기의 시대에 대한 두가지 처방: 송경동과 장석원 시의 정치적 가능성」 「종언의 시대를 살아가기: 시와 정치는 무엇이었는가」 등이 있음. shlee968@naver.com
어느 시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그중에서도 세계의 현실과 밀착하고자 하는 시들은 특히나 시론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된다. 현실의 아픔을 시라는 형식에 담아내는 일이란, 필연적으로 그 형식이 야기하는 불가능성들과의 대결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섣부르게 드러내는 일은 시를 실패하게 한다. 반면에 시적 형식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일은 자칫 현실의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진퇴양난을 타개하기 위한 고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백상웅(白象雄)의 『거인을 보았다』(창비 2012)는 이러한 고뇌의 계보 속에서 그가 내놓은 대답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글에 특별한 제목을 붙일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거인을 보았다’라는 표제가 이미 백상웅 시집의 주요한 지점을 관통하고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이 동음이의의 제목이 호명하려는 ‘거인’은, “하릴없이 태양을 잡아당겨 어둠을 길어지게 하고, 태양에 얼음을 용접해서 눈발을 자주 마을로 불러들였”(「거인을 보았습니다」)던 존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같으면서 또한 다르다고 이야기해야 온당하겠다. 백상웅이 마주쳤던 ‘거인’이 생의 이면에서 마주친 현실의 대타자를 의미했다면, 그의 시집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거인’은 한 시인의 너머에 비춰지는 세계 그 자체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시인이 “이번 생도 비정규직이다. 봄날 간다. 한 철 흥하다가 흩날린다”(「봄의 계급」)라고 적었을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싶어진다. ‘백상웅의 시는 아픈 현실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공동체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식의 수사들. 그의 시가 ‘감성의 재분배를 통해 현실과는 또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희망에 찬 전언들. 이런 식의 문장들이 백상웅의 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어쩐지 시와 현실에 대한 저 상투적인 관계 설정은 오히려 그들이 만들어냈다는 공동체의 바깥으로 우리를 밀어내고 마는 듯하다. 한편의 시로부터 현실의 맨얼굴을 직접 연역해내려는 독법은, 시인이 그려내는 개별적인 주체들을 세계적인 존재의 자리로 격상시키는 일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와 같은 존재가 되는 순간 현실을 옥죄는 대타자만큼이나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하여, 백상웅의 시를 통해 세계의 모순을 손쉽게 발견하고자 하는 독법은 안타깝지만 “볼넷, 볼넷”이다. “딱딱 떨어지는 각운”(「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이 탐이 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방 한 칸의 옆구리를 터서 또다른 방을 만든”(「거인을 보았습니다」) 것에 불과하므로. 『거인을 보았다』를 읽으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세계의 뿌리를 흔드는 거인도, 그 거인에 의해 굴러가는 현실도 아니다. 그 속에서 흔들리는 한 개인의 모습이다. 그는 “이주한 지 한참 되었는데 이제야 정식으로 시민이”(「전입」)된 ‘몫 없는 자’이며, “소유보다는 공중화장실과 공동주방을 선택한”(「우리의 단련」) 삶의 표상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 누추한 삶을 그려냄으로써 그것을 야기한 체제의 방식들과 대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를 둘러싼 모든 추괴함을 온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실의 부정성을 세계에게서 빼앗아 자기에게로 가져온다. 이를테면 “날을 꼬박 새우고 창밖을 본다, 어깨 부딪치며 출근하는 사람들./인력이다./나는 무력시위 중이다.”(「인력」) 같은 문장을 보자. 아마 상투적인 독법이라면 ‘무력(無力)’과 ‘무력(武力)’을 넘나드는 모종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나설 것이다. 하지만 백상웅의 시에서 “무력시위”라는 말은 전적으로 ‘무력(無力)’하다. 그는 다만 무력하므로, 거짓으로 치장된 것보다 오히려 단단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명징한 현실이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은, 그것과 대결하여 쉬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만큼이나 허망하다. 현실이란 “누군가는 국경 저쪽의 동네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동네라고도 하니,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어 환장할 노릇”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은 “그 이상한 동네에서 희망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절대 없었”(「복기하는 골목」)다는 엄혹함으로 온통 우리를 휘감고 있다. 이에 시인은 “나는 오늘 태업하오./볼펜만 돌리며 껌이나 씹겠소.”(「태업의 강도」)라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방법을 선택한다. 저 부정의 역사를 끝맺기 위해 스스로 “막다른 골목”(「뱀의 둘레」)을 소환하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끝이란 포기한 자의 절망이 아니라 역전을 꾀하는 자의 기민함이 된다. 시인과 ‘거인’이 함께 “태업”을 선언한 그 자리에서는, “침략의 역사”와 “음주가무의 역사”가 뒤엉키고, “상관없이 몽롱한 말들이 춤추며 술잔 기울면 그냥 날마다 산다이”(「산다이傳」)가 될 것이므로. 그곳에서라면 우리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마침내 모두가 ‘거인’이 된 현실 저 너머의 세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