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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토록 몰염치하고 모진 사랑
이혜경 소설집 『너 없는 그 자리』
이소연 李素姸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불우한 자들의 불꽃놀이: 김애란론」 등이 있음. sodasu98@naver.com
오랜만에 만난 그는 많이 변해 있다. 그리고 육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님을 새삼 일깨워준다. 우리는 예전에 이혜경(李惠敬)의 소설 속에서 주어진 운명을 묵묵히 인내하고 깊은 연민으로 감싸안는 인물들을 만나 함께 울었거니와, 이제 “순정성의 미학”(박혜경)이란 감탄으로 오롯이 덮을 수 없을 만큼 그 얼굴은 복잡한 모양으로 깨지고 갈라졌다. 그의 새로운 소설집 『너 없는 그 자리』(문학동네 2012)에 담긴 이야기들은 이미 떠났거나, 곧 떠날 것처럼 서늘한 표정을 지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리고 그들은 더 격렬하고 농밀한 사랑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애인처럼 몹시 모질어졌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모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묶고 있는 온갖 걸쇠들을 과감히 끊어버리는 결기를 품은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낸다. 모진 현실은 과거라는 시간, 그리고 고향 혹은 집이라는 공간에 순순히 머물도록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어리석은 미련을 품은 자신에 대한 환멸, 상대방의 배신, 터져나오는 광기, 불시에 엄습하는 자연재해 등…… 그런 조건이 도저히 물릴 수 없는 ‘불가항력’인 것으로 판명될 때 그들은 어떻게 그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자신을 보존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울음을 삼키고 독을 품어온 그들은, 자신에게 슬픔만 안겨준 이 삭막한 세상을 버리고 스스로 탈주를 감행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 고독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 무슨 노릇일까. 그렇게 매섭게 끊고, 모질게 거절하고, 단호하게 떠나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집의 표제작이자 서두에 놓인 「너 없는 그 자리」에는 독자들의 등을 서늘하게 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상대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토로하던 화자의 어조가 백팔십도 바뀌는 대목이다. “당신 알아?”(28면) 아니, 모른다. 질문의 상대방도 그리고 독자도. 그는 우리가 차차 밝혀질 소설의 정황에 대해서, 작가를 비롯한 우리 자신의 깊은 내심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그를 ‘알고’ 있다고 믿었던 이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 물음은 서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점이면서, 한편으로 작가가 자신의 숨겨져 있던 이중성을 언어에 본격적으로 새겨넣는 순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순정한 연인 혹은 누이라고 알고 있던 여인들 내면에 소름끼치는 원한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 사는지 모른다. 어쩌면 화자뿐 아니라 작가 역시, 그를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믿는 독자들을 불신과 놀라움에 빠뜨리는 일에 가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한마디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변화를 알린다. 그리고 그의 소설들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잇따라 발작에 가까운 광기, 복수심, 원한, 증오 같은 ‘인간적인’ 속성을 속속 마주하게 만든다.
이러한 광기는 짝사랑하는 남자를 향한 집착에 가까운 열정이나(「너 없는 그 자리」), 염치없이 벌어지는 노년의 불륜과 이를 지켜보는 며느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동요로(「감히 핀 꽃」), 그리고 자신에게 사기를 친 연인에 대한 사무치는 복수심(「해풍이 솔바람을 만났을 때」) 등으로 변주된다. 이들 인간 군상이 벌이는 희비극의 한쪽 정점에 ‘축제’가 자리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죽음’이 있다. 「그리고, 축제」에서 작가는 유년기에 겪은 성폭력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방황하는 한 여성을 그린다. 그녀가 발리라는 이국의 섬으로 떠나 경험한 것은 대규모 테러로 인해 소중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다. 그들에게 축제는 절망적인 일상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탈출구 같은 순간이다. 또한 이는 현실의 억압에 짓눌린 여인들이 자신의 절망을 배출할 수 있는 틈새이자 히스테리 증세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축제’를 통해 은유적으로나마 자신의 광기를 발산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절망을 딛고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지만 세상에는 그런 기회마저 허락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실은 거의 대다수가 「꿈길밖에 길이 없어」의 갑선처럼 “미쳐지지도 않는”(190면) 상태로 죽거나, 죽지 못해 살아간다. 우리에게 새록새록 좌절만 안겨주는 이 몹쓸 세상으로부터 어떻게든 탈출하려면, 누구든 언젠가는 맘먹고 자신을 결박하는 사슬을 미친 듯이 흔들어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종내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상처투성이 과거, 고향의 상실, 가족과 연인의 부재라는 위태로운 상황을 넘어서려면 독기라도, 이마저 안되면 억지라도 부려야 할 것이 아닌가. 이혜경의 소설은 이 미친 사랑의 노래를 당혹스럽게, 때로는 서늘하게 변주하고 있다. 그리고 힘겹게 손을 뻗어 욕망의 입을 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