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모르는 만큼 배울 수 있는 기회의 장
▶ 언제부터인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투어(套語)를 접했다. ‘한국적’이라는 말이 희소성·고유성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면 문자로서의 한글, 세계에서 가장 긴 모노드라마 판소리, 세계 그 어디에도 없는 시형(詩形)인 시조시가 그 예일 것이라고 꼽곤 했다. 그런데 지난호의 특별좌담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를 접하고는 동학을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학이 우리 고유의 사상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이다. 한글, 판소리, 시조문학, 동학은 세계 유일의, 순수 ‘한국산’인 셈이다. 세상은 아는 것만큼 보이고 모르는 것만큼 배운다. “도올은 정통적인 학문 수련을 받은 사람인데 우리나라 학계에서 상당히 배척하는 인상이 있고, 이런 자리를 통해서라도 어떤 역사적인 자리매김을 다시 해야 한다”(83~84면)라고 한 백낙청의 언급이 인상적인데, 창비의 열린 지평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지점이었다. 밥도 옷도 안 되는 동학사상에 매달린 김용옥의 성취를 알아보는 그 눈이 인연이 되어 독자들에게도 동학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용옥의 『동경대전』이 출간됐다는 정보는 정기구독자로서 누리는 덤이었다. 무엇보다 이번 특별좌담을 통해 우리 땅에서 태어난 생각의 토종을 귀하게 여기는 일은 사상의 독립운동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빌려 입은 양복, 즉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서구식 민주주의가 우리 몸에 맞지 않아 어색하고 거추장스러웠던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우리 삶을 규율해온 기존 질서와 사고에 대한 전환점을 숙고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참석자 가운데 비교적 후학인 박맹수 원광대 총장을 비롯해 더 많은 이들이 그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를 독자로서 소망해본다.
박신산 yhbak1@hanmail.net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슈를 모아내다
▶ 촛불혁명의 의미와 지난 5년간 한국 정치의 변화, 언론과 미디어의 방향, 정의와 공정 문제 등 여러 사회현상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담과 논평으로 채워진 지난호 특집을 읽으며 ‘개안(開眼)’이 되는 듯했다. 촛불혁명 위에 세워진 정부이기에 기대가 컸고 그에 부응하는 부분도, 부족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질병의 확산 등 시대 흐름이 급박하게 변화하고 기존의 경제적·정치적 기반이 변화를 따라오지 못했기에 정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 역시 감안해야 할 것이다. 촛불광장에 나왔던 시민 각자의 청사진이 다르고 현 정부에 실망하는 부분도 많겠지만, 하나하나 촛불을 밝혔던 그 마음을 내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새기길 바라본다. 잊고 있었던 동학을 꺼내어 오늘날의 촛불의식과 연결한 특별좌담 또한 굉장히 인상 깊었다. 동학농민운동 하면 학창시절 국사책에 실린 전봉준의 법정 출두 사진 정도만 어렴풋이 떠오른다. 동학을 중심으로 한국의 종교와 사상에 ‘수평적 플레타르키아’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여러 인물의 생애 및 당대의 사회배경과 더불어 알 수 있어 흥미로웠다. 앞으로 기대하는 점이라면 젊은 학자들의 생각도 들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심도 깊은 이번 특별좌담에 이어 젊은 감각으로 이런 좌담을 열어줄 사람도 있다면 좋을 듯싶다. 한기욱의 평론을 통해서도 큰 감동을 느꼈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가부장적 제도의 핵심인물로, 저항하고 무찔러야 하는 존재로 다룬 작품이 많았는데 신경숙 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이와 다르게 그려냈다는 점이 와닿았다. 한기욱은 비극적 역사의 파편을 온전히 받아내면서도 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아버지의 삶을 작가가 “시각 중심의 사실주의 재현의 평면성을”(348면) 뛰어넘어 후각적으로 그려낸 점을 조명하는데, 해당 대목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사실주의’를 느끼게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동안 잊힌 천안함사건에 관한 이태호의 글이 기억에 남는다. 사건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야 생존장병들의 치료도 가능한데, 사건의 진실이 숨겨져 있는 상황에서 ‘패배자’라는 날선 비난과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기심에 오히려 그들의 상처가 헤집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간 천안함사건에 대한 논란을 잘 알지 못했기에 나에게는 우선 낯섦과 당혹감을 주는 글이기도 했는데, 수많은 사건 중에서 우리는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깨어 있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한나 gys20@naver.com
우리의 존엄성, 문학을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 가을호에 실린 강화길 소설 「복도」에는 우리를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살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사람들. 주인공은 자꾸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괜찮지 않지만 그 사실을 직면하기 두려운 마음, 그리고 괜찮아야만 한다는 간절함이 막연한 낙관이 된다. 왜 평범한 사람이 받는 혜택은 어딘가 모자라야 한다고 생각되는 걸까. 그런 기이한 지점, 인간의 위선을 고민해볼 수 있었다. 김려령의 「기술자들」은 일과 집의 의미를 동시에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직업은 사회의 인정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져 개인의 생존과 존엄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곤 하며,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사회가 인정하는 직업을 꿈꾼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한정적이고, 정직한 땀의 가치를 폄하하는 세상에서 다양성은 존중받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몸으로 무언가를 뚝딱뚝딱 해내는 사람, 전신의 감각으로 일을 기억해내는 사람을 멋있게 그리는 소설이 더 필요하다. 문학에서 말하지 않으면 정말 사라질지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일하고, 각자의 노동을 존중받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 삶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을호의 시 중에서는 최지인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가 기억에 남는다. 거리가 피로 가득했던 과거의 ‘그날’과 현재의 고통이 조우하는 장면을 감각적인 언어로 잘 표현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을 떠올렸는데, 시에 인용된 구절의 각주를 보니 시인은 올해 미얀마에서 일어난 시민운동을 떠올리며 쓴 듯하다. 의도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이 시의 마지막 페이지에 홀로 적힌 “악은 물러가라”라는 문장이 오래도록 생각났다. 상식적이고 당연한 듯 존재하는 ‘악’이 언제쯤 모습을 감추게 될까. “피처럼 용감”하고 뜨거운, 동시에 평범한 시민들이 더는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송현지 justicia00@naver.com
‘인간다움’을 잃은 인간에게 울리는 경종
▶ 여러 시인의 다채로운 시선과 높낮이 다른 목소리 중에서 나의 결에 맞는 구절을 읽어낼 때는 일종의 전율까지 느껴진다. 시는 여전히 어렵지만 하나같이 아름다운 단순성을 가져서 주룩주룩 읽어가다보면 어느 순간 심연으로 침잠해가는데 그러다 훅, 나를 끌어올리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가을호에선 이설야 시가 바로 그러했다. 노예제를 그저 과거의 일이라 하기엔 현재의 세계는 그 과거의 적나라한 잔재이기도 하다. 아프리카의 금 그어진 땅, 그 국경선만큼 깊고 진한 가난, 거기서 빨아올려 먼 나라에 뿌려지는 풍요로움. 그러한 부와 빈곤의 대비에는 여전히 채찍과 벗겨진 손톱, 진흙쿠키와 ‘레스타벡’(아이티에서 무보수로 남의 집 가사노동을 하는 아동)이 있을 것이다. “노예의 땅에서 자란 아이들을/다시 노예로 파는/그것은 백인의 신들에게서 배운 기술”(「레스타벡」), 그리고 그들에게서 다시 배운, 그래서 또다시 다른 인간을 비인간으로 착취하는 우리의 기술. 여기서 더 나아가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착취와 불평등, 포악함의 무게 추는 지구에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식물이 편히 발 디딜 공간조차 없게 만든 인간에게로 기운다. 레스타벡이 이 세계의 새로운 노예제와 슬픔에 적응했다면, “완벽하게 이 세계의 기후와 슬픔에 적응”(「툰드라 육식조」)한 동식물들도 있다. 생물을 비생물로 대하는, 그저 인간 자신의 안위만을 중시하는 태도. 이쯤 되면 ‘비인간적’이라는 말에 의구심이 든다. 사전적 의미로는 ‘사람답지 아니하거나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것’. 어쩌면 가장 비인간적인 것이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것은 아닐까. 툰드라 육식조가 마음껏 자랄 수 있는 지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몸을 숨길 수 있을지 가늠하느라 자라기를 주저하지 않는, 비닐도 플라스틱도 없이 마음껏 열대야 속을 날 수 있는 지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레스타벡이나 노예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진, 어쩌다 그 비슷한 의미의 말만 들어도 모두가 헛구역질을 하며 역겹다 말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채봉 euphoria7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