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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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최은미 崔銀美

1978년 강원 인제 출생. 200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 『목련정전(目連正傳)』 『눈으로 만든 사람』, 장편소설 『아홉번째 파도』, 중편소설 『어제는 봄』 등이 있음.

alfmrlal@naver.com

 

 

 

장편연재 4

마주

 

 

나는 툭하면 운다.

걸핏하면 울고, 아주 작은 걸 계기로 걷잡을 수 없이 울기도 한다. 지칠 때까지 운다. 울다 지쳐서 잠이 들고, 진이 빠진 채 일어난다.

술에 취하면 피아노를 친다. 밤 열한시에도 치고 새벽 두시에도 친다. 그런 날은 윗집 아랫집 옆집한테서 욕을 먹는다. 나는 내가 욕을 먹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초가 보이면 불을 붙이고 싶어지고 케이크를 보면 자르고 싶어진다.

최근에 좋아한 건 레몬파운드케이크.

마음 편하고 피곤한 날의 섹스를 좋아한다. 일 다 끝난 날 하는 거. 한 뒤에 안 씻고 아침까지 잠드는 거.

아이를 낳고 기초체온이 37.3도가 되었다. 코로나 이후에 동네 내과에서 출입을 거부당했다.

한밤에 분식 포장마차 앞에서 혼자 어묵을 먹고 있는 여자를 보면 가서 말을 붙여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몸속 염증을 다스리는 데 좋은 식품은 사과/견과류/감귤/당근/토마토/계란노른자/닭고기.

수미와의 카톡 창은 한여름에 멈춰 있었다.

수미가 아직 음압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수미가 70일에 가까운 시간을 보낸 그곳은 인근 시에 있는 한 시립 의료원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기 입원이었다.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는 면회는 당연히 안 됐고 수미 가족들이 수미한테 필요한 것들을 종종 병원에 전해주고 오는 듯했다. 퇴원 시 폐기할 수 있는 이불, 퇴원 시 폐기할 수 있는 슬리퍼, 퇴원 시 폐기할 수 있는 티셔츠와 속옷. 완치 뒤 밖으로 나올 땐 그곳에서 쓰던 것을 모두 두고 나와야 했기 때문에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반입할 수 있다고 했다.

7월 초쯤, 수미한테 다녀온다는 서하 편에 더치커피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 수미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커피 잘 마시겠다는 말 끝에 병실 사진 하나와 병실 창밖을 찍은 사진 하나가 와 있었다.

혈압기와 소독키트 등이 놓인 선반 옆으로 벽 한면을 채우고 선 커다란 음압기가 보였다. 의료원 로고가 찍힌 침대 커버와 소형 냉장고, 라디에이터 위에 빨아 널어놓은 타월 몇개.

내부 공기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음압병실이었기 때문에 에어컨을 켤 수도 창문을 열 수도 없는 곳이었다. 창틀에는 못이 박혀 있었다. 그 창틀 너머로 작은 공터가 보였다. 벤치 몇개와 나무 몇그루, 병원 어디에나 하나씩 조성되어 있을 법한 크지 않은 뜰이었다. 병실에서 보이는 그 창문 밖 뜰이, 두달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수미가 본 유일한 바깥 풍경일 것이었다. 그 뜰 벤치 중 하나였다. 어떤 여자아이가 앉아서 책인지 휴대폰인지 모를 손안의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핏 서하인 것도 같았지만 화면을 확대해봐도 모습이 뚜렷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냥 창밖을 찍었는데 마침 거기에 누군가 앉아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수미가 그 병실에 들어간 건 봄이었는데 창밖엔 한여름이 와 있었다.

과호흡으로 응급실에 다녀온 뒤 나는 그 사진 이후로 멈춰 있는 수미와의 메시지 창을 자주 열어보았다. 몸은 좀 어떠냐고 메시지를 보내볼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선뜻 말을 걸 수 없었다. 수미와 큭큭거리며 나누었던 수년간의 대화들이 지난봄 이후 툭툭 끊어져 있었고 그걸 열어볼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올라왔다. 응급실에 다녀온 뒤부터 나는 내 심리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퇴원을 하고도 내게 메시지 한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인지, 몸도 마음도 편치 못할 수미에 대한 걱정인지 모를 것들이 뒤섞이면서 수많은 감정의 파편들을 만들었고 그게 여기저기서 튀어 오를수록 나는 자신이 없어졌다.

수미한테 들키지 않을 자신. 이 상태에서 먼저 메시지 한줄이라도 보낸다면 나는 수미한테 내 서운함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왜 들키고 싶지 않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전과 다르게 수미와의 메시지 창에 이상한 긴장감이 생겨버렸다는 것이었다. 연락을 안 하고 있는 채로 나는 계속 수미와의 연락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급기야는 그런 긴장감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수미를 빨리 만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건 다 수미를 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전처럼 수미와 가까이 앉아서 시답잖은 소리를 하면서 웃고 나면 수미가 격리되고부터 아슬아슬하게 쌓여갔던 이 긴장감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편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미용실에 가기로 했다.

코로나 대유행 이후에 제대로 미용실에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 올라온 머리가 지저분해 보였다. 뿌리염색을 하기 위해 가운을 입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일회용 케이프를 어깨에 두르고 양쪽 귀에 비닐커버를 씌울 때도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목에 넥페이퍼를 두르자 신호가 왔다. 이대로 있으면 곧 곤란함이 밀려올 것이라는 느낌이, 그것이 오는 느낌이,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숨을 쉴 수 없던 그때의 공포감이 다시 살아났다. 가장 두려운 건 아무리 호흡이 곤란해져도 미용실 안에선 마스크를 벗을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헉헉거리면서 마스크를 벗었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존재 자체로 이들에게 아주 곤란한 손님이 될 수 있었다. 응급실 의사가 말해준 대로 가방에 파리바게뜨 종이봉투를 넣어 다니고 있었지만 가방은 저 멀리 입구 사물함에 있었다.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손끝과 발끝이 저려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단골 선생님의 새로 온 어시스턴트가 정성스럽게 둘러준 가운과 케이프와 커버와 페이퍼를 뜯어내고 미용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죽을 것 같은 상황을 다시 겪지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몇달 만에 찾은 미용실에서 뿌리염색을 하는 데 실패했다.

거울도 보고 싶지 않았고 기분도 엉망이어서 어느날은 드라이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종수나 오은채와 다른 공간에 있고 싶을 때 차 안은 내가 편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운전을 하면서 그동안은 터널을 특별히 의식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터널로 들어선 순간 예고도 없이 손끝 발끝에서 느낌이 오기 시작했고 도로 위에서 숨을 쉬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미용실에서보다 몇배는 더 큰 당혹감이 찾아왔다.

송미림 의사가 연결해준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건 그렇게 미용실에 이어 터널까지 겪고 난 뒤였다. 그제야 이게 단순히 호흡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자각이 왔다. 미용실도 갈 수 없고 운전도 할 수 없는 삶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나는 호흡 곤란의 공포를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어 만사를 조심하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곳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코로나19 사전 문진표 링크와 함께 오는 기정병원의 예약 알림톡을 다시 받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런 마음으로 가을이 오는 걸 보고 있었다. 8월 말에 다시 시작된 코로나19 대유행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던 9월 초였다.

 

*

 

“요새는 비타민D가 각광을 받고 있어요.”

기정병원 로비에서 수미를 만났던 날, 나는 비타민D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여름 끝 무렵의 대유행으로 거리두기 단계가 다시 올라가면서 모든 까페에서 취식이 금지될 때였다. 저녁 아홉시 이후론 온 가게가 문을 닫았다. 그런 와중에 나는 여름내 닫았던 공방 클래스를 다시 열려고 시동을 걸고 있었다. 객담 배양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왔던 것이다.

내가 하기도 심부에서 힘들게 끌어올린 가래에선 어떤 균도 검출되지 않았다…… 이제 나는 본관의 호흡기내과가 아니라 구름다리를 지나 별관의 신경정신과로 간다. 다른 질병코드 번호를 받는다. 비타민D에 대해 생각한다.

신경정신과 의사는 송미림 의사보다 서너살 정도 많아 보이는 여성 의사였는데,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모니터 옆에 놓인 핸드크림이었다. 카밀 오리지널 100ml. 의사는 나와 똑같은 핸드크림을 쓰고 있었다!

“우리 질환은 오전 햇빛이 좋아요. 저녁엔 쉬어야 좋고요. 잠들기 한두시간 전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우리 질환’이란 아무래도 공황장애를 말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의사가 덧붙였다.

“요새는 비타민D가 각광을 받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용실과 터널에서 숨이 막혀올 때의 공포감과 당혹감에 대해 좀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의사에겐 비타민D 또한 중요할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요새 비타민D와 공황장애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을지도 몰랐다. 의사가 비타민D 얘기를 하는 동안 컴퓨터 모니터에서는 계속 카톡 알림이 깜빡거렸다. 나는 그게, 그러니까 신경정신과 의사한테 지금 카톡을 보내는 사람이 송미림 의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이 친할까? 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은 시간이 맞으면 종종 점심을 같이 먹는 사이일지도 몰랐다. 모처럼 병원 밖으로 나가 밥을 먹은 날에 둘은 병원 앞 사거리에 있는 올리브영에 들른다. 카밀 핸드크림을 하나씩 산다. 진료실로 들어가기 전에 병원 뒤뜰에 앉아 잠시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그때, 그들은 잠시 이나리 환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이나리라는 사십대 여성 환자의 가슴 통증과 호흡 곤란에 대해. 그러다 알게 되는 것이다. 호흡기내과적 질환과 신경정신과적 질환이 별개가 아님을. 이나리라는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진단이 필요함을.

그들이 딱 삼분이라도 나에 대해 그렇게 의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구름다리를 지났고 본관 로비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에스컬레이터가 점차 1층을 향해 가는 것과 같은 속도로 로비 중앙 벽의 대형 스크린이 눈에 들어왔다. 스크린에서는 기정병원 유튜브 영상이 나오고 있었는데, 영상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내가 방금 만나고 온 그 신경정신과 의사였다. 책상 위로 내가 본 것과 똑같은 핸드크림이 보였다. 의사는 진료실에서보다 훨씬 멋져 보였고 진료실에서는 들을 수 없던 내용(공황장애의 모든 것)에 대해 너무도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스크린 앞으로 걸어갔다. 영상 안의 의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어떤 둑이 있다고 해보죠.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은 여기까지 차오르고 차올라 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한방울이 딱 떨어지면서 그 둑이 넘치는 것입니다. 항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서 있다 나는 ‘정상입니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수미가 본관 출입구의 열화상 카메라를 막 지나고 있었다.

수미와 이 시간에 이 로비에서 보기로 약속을 한 터였는데도 나는 조금 당황했다. 치료와 극복 같은 단어가 들려오는 스크린 앞으로 수미가 걸어오는 걸 봤을 때, 나는 내가 수미를 만날 날을 최대한 미루고 싶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수미가 격리병동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싶었지만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수미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무것도 안 듣고 싶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것들은 계속해서 몰라도 좋을 것 같았다.

“똥머리를 해야 돼, 언니.”

몇달 만에 만나서는 나는 머리도 길지 않은 수미한테 그런 얘기를 했다. 병원 내 까페 또한 취식 금지였기 때문에 커피를 사 들고 본관과 별관 사이의 벤치에 가 앉은 참이었다. 수미도 나도 옷소매 위에 ‘정상’이라고 쓰인 열감별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내가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기 시작했던 그때 수미는 코로나19 후유증으로 호흡기내과를 들르고 있었다. 한시간 뒤에 수미는 흉부 엑스레이 촬영이 잡혀 있었다.

흉부. 그곳을 촬영할 땐 목에 액세서리를 하면 안 된다. 와이어가 있는 속옷을 입으면 안 되고. 거기까지는 알고 있었는데 한가지가 더 있었다. 똥머리였다. 여름내 내가 기정병원 방사선사한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그것이었다. 똥머리 하세요, 환자분. 똥머리!

나는 수미가 계속 만나게 될 송미림 의사에 대한 이런저런 인상을 늘어놓았고, 그러다 수미 또한 격리 내내 주기적으로 하기도 가래 검사를 받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확진 판정을 받던 날, 수미가 역학조사관과 주고받은 사진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코로나19 진단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던 새벽, 수미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문자 대신 전화를 드린 이유는 양성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전화기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다음 말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역학조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역학조사관은 수미한테 셀카를 보내달라고 했다.

“셀카를?”

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보냈어?”

수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기로 수미는 평소에 셀카 같은 걸 찍어 보관해두는 타입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한테 자기 얼굴을 찍어 보내는 수미를 나는 잘 상상할 수 없었다. 양성 판정 연락을 받았을 땐 이미 고열에 눈알이 빠질 것 같은 상태였고 누군가한테 맞은 것처럼 온 근육이 아파왔다. 수미는 그런 상태로 그 새벽에 자기 얼굴을 찍어서 역학조사관에게 전송했다. 카드내역도 모두 캡처해서 보냈다. 그에 대한 답신처럼 한참 뒤 역학조사관이 사진을 보내왔다. 몇군데의 씨씨티브이에 찍힌 어떤 여자의 모습이었다.

본인 맞습니까?

역학조사관이 물었고, 수미는 아마도 그런 것 같다는 답을 보냈다. 날이 밝고 구급차가 수미를 실으러 오기까지, 수미는 그렇게 밤새 다섯시간에 걸쳐 역학조사관과 통화를 하면서 동네 씨씨티브이에 남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증상 발현 전 며칠 동안 자신이 한 일을 확인하고, 확인받았다.

“씨씨티브이 속 여자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그 생각 말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며 수미가 나를 보았다. 자신이 격리 내내 겪은 죄책감을 다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는 듯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그간의 공방 안부를 차마 쉬운 말로 묻지 못하겠다는 듯이. 얼굴엔 봄보다 기미가 많이 올라와 있었고 커피를 마시려고 마스크를 내릴 때마다 주름이 선명한 건조한 입술이 드러났다. 슬랙스 핏은 여전히 좋았다.

“오다 보니까 거기,”

수미가 말했다.

“좌회전 신호 생겼더라. 원래 비보호였잖아.”

수미가 격리병동에 있던 시간은 비보호였던 곳에 신호등이 새로 생기기도 할 만큼의 시간이었다. 계절 하나가 지나간 시간이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났던 시간이었을까.

그날 방사선실로 들어가기 전, 수미는 병원에 코로나 완치자 혈장 기증을 할 거라고 했다.

나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와 벤조디아제핀계 안정제 하나씩을 처방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

 

수미가 역학조사관에게 받은 씨씨티브이 사진 중엔 아마도 새경프라자에서의 사진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봄에 마지막으로 본 수미의 모습은 새경프라자 앞에서 3층의 공방 창문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던 모습이었다. 내가 수미한테서 서하를 데려왔던 밤이었다. 나는 어쩌면 수미가 완전히 낯선 타인을 통해 그때의 자신을 확인해야 했을 거라고, 이게 내가 맞다고, 내 딸이 내게서 도망쳐서 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며 울고 있는 여자가 내가 맞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

 

오래된 의료원 병실 창문엔 커튼이 달려 있지 않았다. 입원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수미는 방호복을 입고 매일 병실에 들르는 간호사에게 커튼을 요청했다. 제발 커튼을 달아주세요, 선생님. 창문 밖 벤치에 어떤 여자아이가 앉아 있어요. 그리고 밤이 되면 제가 너무 보입니다. 창문으로 병실이 너무 비쳐요. 제발 좀 가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수미가 두번 정도의 식사와 또 두번 정도의 PCR 검사를 거부하자 병원에선 며칠 후 커튼을 달아주었다.

“그후엔 안 보였어?”

“뭐가?”

“매일 와서 앉았다 가는 여자아이.”

“보였지. 하지만 내가 커튼을 열 때만 보였어.”

나는 그 아이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글쎄……”

수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스크를 썼으면 그 동네 사는 아이일 거고, 안 썼다면……”

“안 썼다면?”

나는 병원 본관과 별관을 잇는 구름다리를 올려다보았다.

“마스크를 안 썼다면, 과거에서 왔겠지.”

 

*

 

그것은 내 짐작이 맞았다. 수미의 휴대폰이 격리된 수미한테 타격을 줄 거라는 것. 수미가 매일 혈압과 체온을 재고 일주일에 두번씩 PCR 검사를 하면서 그곳에 있던 70여일 동안, 수미의 아이폰은 시시때때로 수미에게 ‘과거의 오늘’ 동영상을 만들어주었다. 아주 오래전 사진들을 넣어두었던 클라우드에서도 알림을 보내왔다. 바깥에서의 수미라면 알림을 꺼버렸겠지만 음압병실에 혼자 있던 수미는 알림을 끄기엔 너무 외로웠는지도 몰랐다. 음압기 소음에 빨려들어갈 것 같을 때마다 붙들 것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나는 사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미가 어떤 결정을 하든 지지해줄 마음도 있었다. 가장 큰 변화라고 해봤자 수미의 이혼, 수미의 독립, 그보다 더한 게 있을 수 있을까? 남편과 서하를 기정에 두고 혼자서 다른 곳으로 떠나기? 수미가 그런 결심을 했을 가능성도 나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 혈장 기증을 하러 간다는 수미를 볼 때만 해도 나는 수미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얘기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

 

수미와 나는 그것을 포토 표정이라고 불렀다. 아이들이 어릴 때 카메라 앞에서 보이던 특유의 표정이었다. 아마도 어린이집을 다니면서부터 만들었던 표정일 것이다. 선생님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아이들은 코를 찡긋하면서 눈과 입을 한껏 움직여 웃는 표정을 지었는데 선생님이 보내온 사진 속 그 표정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지금 어린이집에서 잘 지내고 있구나, 이렇게 즐겁게 잘 놀고 있구나, 일을 하면서 그 표정 덕분에 안심한 날이 많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여행을 가서 내가 사진을 찍으려 할 때도 아이는 그 표정을 습관적으로 지어 보였다. 엄마나 선생님이 휴대폰 카메라를 갖다 댈 때마다 어차피 치러야 할 일이라는 듯 기계적으로 짓던 그 밝은 표정을, 수미도 알고 있었다. 유치원 때까지도 종종 짓던 그 표정을 초등학생이 되자 아이들은 잘 짓지 않았다. 아이가 여행지 포토존에서 부루퉁하게 서 있으면 나는 사진을 건지기 위해서 아이의 옆구리를 기습적으로 간질이곤 했다. 그러면 아이는 못 참고 웃음을 터뜨렸고, 여행지에서 돌아오면 나는 아이가 웃던 그 순간의 표정을 여행의 기억으로 간직했다.

나는 은채를 보면서 이렇게 묻고 싶을 때가 많았다.

은채야, 넌 왜 저렇게 예쁜 아기들을 좋아하지 않아?

은채야, 넌 왜 강아지 고양이를 보면 꺅 소리를 내면서 달려가 쓰다듬지 않아?

은채야, 넌 왜 나무를 좋아하지 않아?

은채야, 이거 너무 아름답지 않아?

수미가 언젠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었다.

서하가 아기였을 때, 안고 젖을 먹이다보면 갑자기 젖꼭지가 시원해질 때가 있었다. 이상해서 내려다보면 젖을 먹던 아기가 웃고 있었다. 입을 벌려 웃느라 젖꼭지에서 입을 떼고, 그러다 다시 젖을 물고, 한참 뒤 젖꼭지가 또 시원해져서 내려다보면 아기는 또 웃고 있었다.

그 애들이 ‘우리 거’였을 때, 서하는 수미 거, 은채는 내 거였을 때, 저녁이면 아이가 옷자락을 붙들고 칭얼거릴 때가 있었다.

엄마, 기분이 안 좋아. 그래서 안아줘.

그래서 아이를 안아주었다.

어떤 날은 그럼에도 안아주지 않았다.

크록스를 신고 수박 부채를 든 채 옷과 머리가 다 젖도록 공원 분수대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이가 나를 불렀다. 과거의 오늘에, 내 아이가 내 거였을 때, 열이 나는 아이를 품에 안아 올리면 가슴에 불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냄새가 너무 좋아서 아이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가, 어떤 날은 내 살갗에 아이가 닿는 게 싫어서 좀 떨어져달라고 사정했다. 그래도 아이는 사랑한다고, 엄마 사랑해, 안방 문틈으로 사랑한다는 쪽지를 밀어넣었다. 싱크대 위에 하트를 가득 그려넣은 색종이를 올려두었다.

그애가 내 거였을 때, 십년 전 오늘에, 십이년 전 오늘에, 나는 그 아이가 어떤 눈으로 나를 보며 우는지 본 적이 있다.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주문처럼 중얼거린 적이 있다. 크지 말라고. 여자아이가 되지 말고 내 아기로 있으라고. 나만 보라고.

소나무랑 소나기는 무슨 사이야, 엄마?

이제 그애는 그런 걸 묻지 않는다.

내 음식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하지도 않는다.

앞니가 흔들린다고 울지 않고, 쥬쥬 기타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혼자 운다.

여자아이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운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열세살 여자아이한테, 어느날 나는 외친다.

은채야, 머리 긁고 손톱 보는 것 좀 하지 마!

어느날은 애걸한다.

은채야, 나 좀 안아줘.

어느날은 홀로 사무친다.

은채야, 널 사랑해!

지난봄에 수미가 말했다.

어느 저녁에 서하와 식탁에 둘이 앉아 밥을 먹는데, 무슨 말인가 끝에, 서하가 더는 어떻게 하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눈물을 가득 머금고, 손을 떨면서 수미를 쳐다보았다고.

그렇다고 해도 나는 수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응급실에 다녀온 이후부터 나는 엘사네일 사장과 제법 친해졌다. 그녀는 나보다 적어도 열살은 어린 나이였는데도 나를 상가 동료로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119에 전화를 걸어주었던 데 대한 감사 표시로 나는 큰맘 먹고 젤 페디큐어를 예약했다. 민트초코케이크 캔들을 하나 만들어 들고 예약시간에 맞춰 가자 엘사네일 사장이 꺅 소리를 질렀다.

“이거 먹어도 돼요? 이거 진짜 먹어야 될 것 같아요!”

캔들 심지만 없다면 정말 먹을 것도 같았다. 디저트 캔들을 보고 많이들 보이는 반응이었다. 원데이클래스에서 제일 반응이 좋은 것도, 공방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조회 수가 가장 많이 나오는 것도 디저트 캔들이었다. 와플 캔들, 마카롱 캔들, 까눌레 캔들, 머핀 캔들…… 보기만 해도 달콤한 것들을 앙증맞게 만들어 인스타에 올리면 팔로워 수도 더 늘었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캔들은 초의 원형과 소이왁스의 흰빛을 그대로 살린 오브제 캔들이었다. 인스타 피드를 오브제 캔들로 우아하고 심플하게 채운 공방들을 보면 나는 언제나 기가 죽었다. 나리공방은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하고…… 쉬웠다.

“발에는 오로라 젤이 진짜 예쁘거든요. 해보실래요?”

민트초코케이크 캔들을 선물받은 엘사 사장은 그날 내 발에 특별할인가로 오로라 젤이라는 것을 해주었다. 그것은 자석이 필요한 일이었다. 엄지발톱에 푸른색 컬러를 얹은 뒤 자석을 발톱 주위로 천천히 돌리자 인력에 이끌리는 바닷물처럼 발톱 위의 젤이 미묘한 층을 만들며 일렁였다.

“진짜 오로라 같아요!”

진짜 케이크 같다고 했던 엘사네일 사장처럼 나는 외쳤다. 우리는 서로의 인스타를 팔로우했다.

그날 엘사 사장은 오로라 젤이 굳기 전에 발톱 끝에 나비 한마리씩을 올려주었다. 밤에 보면 더 예쁘다는 말과 함께.

내 발에 오로라와 나비가 생긴 건 그날이었다.

 

*

 

엘사 사장은 5주 후에는 젤을 제거하러 와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5주가 아니라 10주, 15주가 더 지날 때까지도 오로라와 나비가 내 발톱에 있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 발로 나는 호수를 건너 사과밭으로 갔다.

그 발인 채로 다른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보았다.

얼음 트래킹을 할 때도 내 발톱엔 푸른 오로라와 나비가 있었다.

지금은 없다.

 

*

 

케이크 캔들과 오로라 젤로 인사를 트고 얼마 뒤 나는 엘사 사장을 따라 기정로 임차인 모임에 갔다. 거기서 새경프라자 임차인들도 몇 만나게 되었는데 새경프라자에 들어온 지 이년 차가 되어가는 엘사네일과 레이싱 게임방 외엔 대부분 오년이 넘은 가게들이었다. 봄까지는 크게 타격이 없던 곳들도 저녁 아홉시 이후 셧다운이 이어진 여름 대유행을 지나면서 휘청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대출에 카드론으로 임대료를 돌려 막고 있었고 누군가는 매출 적자를 메꾸기 위해 배달 일과 대리운전 일을 하고 있었다. 임대 만기까지만이라도 버티다 접어야 할 것 같다는 말도 수시로 들려왔다. 유튜브를 열면 확진자 브이로그들 사이로 자영업자들의 폐업 브이로그가 줄을 이었다.

지난봄부터 클래스를 열지 않은 여름까지, 나는 홈공방을 하면서 모아두었던 돈으로 임대료 적자를 감당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거의 바닥이었다. 가을부터는 정말 사활을 걸어야만 빚을 지지 않고 공방을 지킬 수 있었다. 상가 복도나 화장실에서 만나면 엘사 사장과 나는 자조 섞인 인사를 나누는 게 습관이 되었다. 숨을 들이쉬어봐, 월세가 빠져나가고 있어. 숨을 내쉬어봐, 역시 월세가 빠져나가고 있어.

“요새 저는 바에서 죽을 팔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와인바 사장이었다.

“코로나 이후로 재룟값이 너무 올랐습니다. 오늘 새벽시장에 갔는데 토마토값이 미쳤더라구요. 가게 연 지 육년인데 이런 가격 처음입니다.”

엘사 사장과 친하다는 수제버거집 사장이었다. 그나마 있던 단골들마저 떨어질까봐 가격도 못 올리고, 직원은 내보내고,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남편은 거리두기가 격상될 때마다 야근의 연속이었고, 집에는 삼시세끼와 온라인 학습 지원이 필요한 초등 저학년 아이가 있었다.

수제버거집 사장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임차인들이 모인 곳은 중앙공원이 내려다보이는 한 상가건물의 꼭대기층 회의실이었다. 창문 맞은편으로 중앙공원에 면한 상가건물 하나가 보였다. 익숙한 건물이었다. 1층의 이디야 커피와 편의점을 시작으로 학원, 요양병원, 학원, 요양원이 위로 이어졌고 꼭대기 몇개 층은 교회로 쓰이는 건물이었다.

지금은 은채가 저 건물 안에 있을 시간이었다.

지난봄의 줌 영상 폭로사건이 아니었다면 서하도 역시 저 건물 안에 있었을 것이다. 서하가 어디로 학원을 옮겼는지는 은채도 나도 알지 못했다. 수미가 이 동네에서 학원 차량 기사 일을 더이상 못하게 된 건 확실했다.

학생이나 학부모 중에 확진자가 나오면 학교에서는 실명 거론을 자제시키는 분위기였지만 학원들을 통해서 거의 특정이 되었다. 같은 날 발생한 A초등학교 확진자와 B중학교 확진자가 남매이며 둘 다 부모 중 모의 확진을 통해서 감염되었다는 것 등의 얘기는 수업 여부 확인을 위해 학원 원장한테 전화만 걸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간밤에 구급차가 어느 동 어느 라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단톡방에 말이라도 돌면 범위는 더욱 좁혀졌다.

초등학생 아이와 중학생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여자의 코로나19 확진 판정은 두개의 학교와 수개의 학원, 거기 다니는 아이 친구의 자가격리와 아이 친구 형제의 등교 중지, 아이 친구 막냇동생의 긴급 보육 중지로 이어졌고, 그 아이들 엄마의 출퇴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확진된 여자가 완치 뒤 돌아와서 십여년 동안 아이를 키우며 산 이 동네의 네트워크에 다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임차인 모임이 있던 그날도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언제든 수미한테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동네를 떠나기로 했어.

요양원과 학원과 교회가 있는 그 건물의 한층에는 재활 요양병원을 광고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양·한방 협진/재활전문치료/중증환자요양/공동간병.

병원 이름 옆으로는 중앙공원을 지나다닐 때마다 수시로 보게 되는 사진이 선명하게 인쇄돼 있었다. 몇년째 그대로인 사진, 젊은 여성 간병인이 남성 노인 환자의 휠체어를 밀며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코로나19 방역지침 분류에 따르면 은채가 수업을 듣고 있는 저 건물은 취약시설과 집합금지시설 밀집 건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 임차인 모임에서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고위험시설군이었다.

“현대프라자 저기는, 통째로 고위험시설만 모여 있는 곳이에요.”

엘사 사장이 말했다. 헌팅포차와 노래연습장, 줌바댄스, 감성주점, 단란주점, PC방…… 그런 것들이 현대프라자에 골고루 포진해 있다는 것이었다. 현대프라자 임차인들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프라자 건물주가 착해지기로 결심했는지 아닌지였다. 그건 다른 임차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두기로 타격을 입은 소상공인들을 위해 임대료를 일정 기간 인하하자는 ‘착한 임대인’ 캠페인 얘기가 몇개월 전부터 들려왔지만 기정로 어디에서도 착한 임대인이 있다는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뉴스와 신문에 나오는 착한 임대인들은 대체 어느 동네에서 뭘 먹고 사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다. 임대인들끼리도 만나서 당신 착해지기로 했느냐고 서로 물어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정로의 소상공인들끼리는 그게 하나의 인사가 되었다.

“그쪽은 어때요? 새경프라자 건물주님은?”

“글쎄요, 아직은. 다음 달은 착해지시려는지.”

“사람은 뭘 먹으면 착해지나요?”

“아무래도…… 견과류죠.”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사람이 착해지는 데엔 견과류만 한 게 없죠.”

 

*

 

〈코로나19 소멸기원 제16회 경기북부 희망과 치유 음악예술제〉

중앙공원의 가로등 배너에 미니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모임을 끝내고 내려와 엘사 사장과 함께 중앙공원을 가로질러 가다가 그것을 보고는 사진을 찍었다. 축하공연 출연진 중에 엄마가 두번째로 좋아하는 「미스터트롯」 멤버가 있었다. 엄마한테 행사 현수막 사진을 보내고 난 뒤 나는 남자 노인을 간병하는 젊은 여자의 사진이 있는 재활전문 요양병원의 현수막을 올려다보았고, 곧 은채 학원이 끝날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해가 짧아져서 날이 금세 어두워지고 있었다. 기정로는 날이 어두워지는 동시에 골목골목이 불빛으로 살아나는 번화가였지만 셧다운이 시행되고 나서는 9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어둑하게 잠겨 있는 곳이 많았다.

공방에 가서 정리를 하고 오면 은채가 끝나는 시간에 맞출 수 있으려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공원 건너편 보도로 수미가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혼자는 아니었고 별은씨 별선씨 별주씨와 함께였다. 그들은 마치 지난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처럼 편안하고 친숙하고 스스럼없어 보였다. 수미한테선 기정병원 벤치에서 나를 대할 때의, 가장된 편안함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눈치 보게 했던 예민한 조심성도 없어 보였다. 수미는 웃으며 걷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다.

나는 그때 잘 몰랐다. 일년 후에도 같은 자리에 다시 ‘코로나19 소멸기원 예술제’ 현수막이 걸리리라는 걸. 나는 어둑어둑해지는 가로등 배너 아래에 서서 이런 생각만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서운함을 당신에게 들키지 않으리라.

잡아떼리라.

 

*

 

지금은 할 수 없는 것들을 마음껏 하던 때, 은채와 서하가 초등 중학년이었을 때니 이삼년 전쯤이었다. 어린이날이 금요일인, 이른바 5월의 황금연휴였다. 은채는 수미네 가족을 따라 파주의 한 글램핑장에 가 있었다. 오종수는 그날 일이 있었고 나는 오후 느지막이 글램핑장에 들러 수미의 가족과 저녁을 같이 먹고 은채를 데려올 생각이었다.

어딘가로 놀러 가지 않으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한 날씨였고 수미가 아니었다면 이런 날 은채를 데리고 어디 가서 놀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기에 나는 보답으로 먹을 걸 잔뜩 실었다. 자유로를 타고 북쪽으로 내처 달리다보니 능선 전체가 철쭉으로 뒤덮인 동산이 보였다.

산 중턱에 썰매 슬로프와 수영장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카라반 몇개를 지나 숲 안쪽으로 들어가자 해먹을 내건 오두막들이 나타났다. 은채와 서하는 래시가드 차림으로 오두막 안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수미는 테이블에 팔을 괴고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수미의 남편은 침대에 기대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수미의 남편한테 인사한 뒤 수미를 보며 외쳤다.

“언니, 여기 너무 좋다!”

나무들에서 뻗어 나온 풍성한 잎이 오두막 사이마다 층을 이루며 우거져 있었다.

“피톤치드가 막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 나도 나중에 여기 와서 좀 묵어야겠다.”

사실 그럴 생각은 별로 없었다. 숲에 머무는 건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내가 알기로 수미도 나처럼 캠핑을 안 좋아했다. 산속에 1박도 아니고 2박씩이나 예약을 하다니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은채 어머니가 뭘 아시네. 여기 아주 기가 막히죠? 근처에 이만한 데가 없어요. 은채 어머니, 고기 좀 드시나?”

수미 남편은 생긴 건 깍듯했는데 슬쩍슬쩍 말을 짧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서하와 은채는 물썰매를 타려고 어느새 나간 뒤였다. 수미랑 둘이서 마시기엔 좀 적적했다는 듯 수미의 남편이 냉장고에서 맥주부터 꺼내왔다. 하지만 나는 차를 가져간 터였다. 고기나 몇점 먹고 빛 축제나 좀 보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물방울이 송글송글 돋아난 맥주캔을 보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고기를 굽기 시작하면 굉장히 흔들릴 것 같았다.

망설이는 사이 수미는 내 쪽으론 커피만을 밀어주고, 남편과 둘이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 부부는 서로 말도 안 섞고 캔도 안 부딪치고 빠른 속도로 각자 맥주를 비워내기 시작했다.

“언니, 오늘 꽤 마시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월드콘 사 올걸!”

“월드콘이요?”

수미의 남편이 물었다.

“언니 술 먹고 나면 후식으로 월드콘 먹잖아요.”

“그랬나?”

수미의 남편이 수미를 보았고,

“모르시는구나……”

혼잣말처럼 나는 조그맣게 덧붙였다.

“월드콘이야 뭐, 내가 이따 열개라도 사 올게.”

그런 말을 하는 수미 남편을 나는 잠깐 쳐다보았다.

“서하 아버지, 여기 매점엔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아예 없어요. 제가 아까 매점 들러 왔거든요.”

“매점 들렀다 왔어? 좀 풀어놔봐.”

그러면서 수미가 나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수미의 저 표정은 맥주를 팔백 씨씨 정도 먹었을 때 나오는 표정. 나는 수미의 손바닥을 탁 쳤고, 우리는 동시에 소리를 내서 웃었다. 수미와 내가 웃자 수미의 남편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그냥 마셔요, 은채 어머니. 대리 부르면 되죠.”

그러면서 수미의 남편이 반팔셔츠의 팔 부분을 어깨까지 말아 올렸다. 더워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손부채질을 하면서. 구릿빛 맨팔 전체가 드러났다. 동네에서 볼 땐 몰랐는데 근육이 상당했다. 팔뿐이 아니었다. 사십대 중반의 회사원이 저 몸을 유지하려면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번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야 할 것이다. 술 먹고 입가심으로 월드콘도 안 먹겠지. 라면은 먹고 살까? 어쩌면 맥주 한캔당 트레드밀 몇분인지를 계산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수미 남편이 술을 권했기에 나는 대리 대신 오종수를 불러볼까 하는 생각에 전화를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 물썰매 슬로프를 오르내리고 있는 서하와 은채한테 손을 흔들어주었고, 오종수한테는 못 오겠다는 답을 들었다. 소원 메모카드가 달린 메타세쿼이아를 따라 조금 걷다가 다시 아이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쪽으로 걸어갔다. 막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젖은 꼬마들이 종종거리며 지나갔고 저쪽에서 수미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수미를 불렀다.

“언니!”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선후를 제대로 배치하기 힘든 여러 장면들이 뒤섞여 있다.

나는 수미와 썰매 슬로프가 보이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아마도 서하와 은채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니다. 수미가 나한테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물썰매를 타자고 한다. 너무 재미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눈썰매는 타봤어도 물썰매는 타본 적이 없고 여벌 옷도 가져오지 않았다. 다 젖고 말 것이다. 수미는 커다란 튜브를 어깨에 메고 슬로프 꼭대기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정수리 위로 물방울이 튀고 비명과 환호가 빠른 속도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수미가 숨을 몰아쉬며 나한테 외쳐 묻는다.

술을 먹고 바지에 오줌을 싸본 적이 있느냐고.

뭐라고? 솔직히 나는 그런 주사는 없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이래로 갖가지 주사를 보고 들었지만 오줌은 아직 겪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왠지 그걸 겪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오줌에 버금가는 어떤 것을 겪을 것만 같은 생각이. 옷도 내리지 않고 그냥. 흘러내리도록. 스며들도록. 뜨듯해지다가 금세 오한이 들고 축축해지도록. 햇빛. 기울기. 물방울. 무지개. 비명. 아이들 손에 막대폭죽을 열개씩 쥐어주고 우리는 빛 전구가 밝혀진 아치 터널 아래에 서 있다. 밤이 오고 사방이 빛나는데 수미가 갑자기 나한테 화를 낸다.

“니가 뭔데 내 애를 평가해?”

나는 당황한다.

“응? 니가 뭔데 내 인생을 평가해?”

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뭔가를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수미한테 말려드는 것만 같다. 수미는 관자놀이까지 화가 차올라와 있다. 수미는 술을 먹었고, 수미는 썰매를 탔다. 더한 걸 했을 수도 있다.

나는 아차 싶으면서도 어쩌지 못하겠는 채로 수미의 억지에 화가 나는데, 수미가 달아오른 얼굴을 들이밀수록, 취기를 피부로, 눈으로 뿜어낼수록 자꾸 눈앞에 수미 남편의 몸이 떠오른다. 수미의 머리카락 위로 수미 남편의 삼각근이, 수미의 입술 위로 수미 남편의 겨드랑이털이 자꾸 어른거리는 것이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나는 내 뺨이라도 때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서 더이상 참지 못하고 은채를 부른다.

“은채야! 가자! 지금 당장!”

나는 화난 티를 내려고 급발진하듯 차를 출발시킨다. 글램핑장을 벗어나자마자 칠흑 같은 시골길이고, 수미의 형상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이제 정말로 화가 올라와서 나는 제정신이 아닌 채로 도로로 올라선다. 숨소리만으로 내 기분을 알아챈 은채는 뒷좌석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불빛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숨을 좀 가라앉히고 나서야 나는 내가 내비도 켜지 않은 채 방향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아챈다. 여기로 가면 어딜까. 문산? 임진각? 나는 은채를 부른다.

“은채야, 어떡해. 길을 잘못 들었어. 어떡해.”

“여기가 어딘데?”

“이대로 가면 아무래도 북한이 나올 것 같아. 어떡해!”

은채가 오종수한테 전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 엄마가 지금 북한으로 가고 있어! 계속 가면 북한이래!”

전화기에서 오종수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차 돌리라고 해. 차 돌려!”

“엄마, 아빠가 차 돌리래!”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돌린단 말인가.

 

*

 

그날에 대해서, 그러니까 내가 북한에 갈 뻔했던 날에 대해서 수미와 나는 그 이후에 따로 얘기를 나눈 적은 없다. 다만 나는 말조심을 하게 됐다. 공방에 온 서하가 이러이러했다고, 서하 성격이 이러저러한 것 같다고, 나는 그런 말을 했을 뿐인데 갑자기 수미 인생을 평가한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수미를 보면서 가끔 생각했다.

‘내가 수미 딸로 태어나지 않은 건 천운이다.’

임차인 모임에서 나오다 수미를 본 그날, 나는 은채 저녁을 챙겨주고 다시 공방으로 나왔다. 어쩐지 수미는 일행들과 누군가의 집에서 술을 한두잔 할 것 같았고, 그런 채로 기정로를 지나다 공방에 불이 켜진 걸 보면 들를 것 같았다.

수미는 정말로 들렀다.

마치 공방에 처음 들른 사람처럼 진열대의 필러 캔들 앞에서 한참 캔들을 보다가 하나 마나 한 얘기를 몇마디 했다. 그뒤엔 이런 말도 했다.

“나리 너 휴대폰에 카드 단말기 연결해서 결제할 때, 휴대폰 키패드 소리가 블루투스 스피커에 그대로 울리잖아. 나는 니 공방 떠올리면 그 소리가 제일 먼저 생각나.”

한겨울을 빼고 늘 썬캡을 쓰고 다니던 수미지만 격리병동에서 나온 뒤 수미는 더이상 썬캡을 쓰고 다니지 않았다. 지난봄에 나는 수미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때로 냉소했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느낀 사람이었는데, 지금 수미에게선 내가 감지할 수 있었던 미세한 결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로 건너가버리거나 무언가를 보아버린 사람처럼 이즈음 수미에게선 일종의 태평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미와 늘상 주고받던 인사들도 이제 어떤 식으로 건네야 할지 문장을 고민할 때가 많았다.

서하는?

예전엔 이렇게만 물어도 됐다.

은채는?

수미가 그렇게 물으면 나는 열은 다 내렸다거나 그건 그만두기로 했다거나 지금 집에 혼자 있다거나 하는 말들을 바로 이어서 할 수 있었다.

공방 테이블에 좀처럼 앉지 않은 채 진열대 주위를 서성이는 수미를 보면서 나는 이런 말들을 입속으로 굴리고 있었다.

서하랑은 좀 어때?

서하는 좀 어때?

서하는 어떻게 지내?

서하랑은 어떻게 지내?

그중 어떤 문장으로든 나는 수미와 서하에 대한 얘길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서하는?”

수미는 내게 등을 보이고 서서 시선을 고정할 곳이 필요하다는 듯 큐브 캔들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내게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 둘째를 가질까 해.”

처음에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 아이를 하나 더 낳을 거야.”

나는 수미를 보았다.

아마도 피식, 하고 웃었을 것이다.

수미의 표정을 보고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도 웃음 말고 다른 것은 나오지 않았다. 70일 동안 음압병동에 갇혀서 내린 결론이 아이를 하나 더 낳는 것이란 말인가?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수미가 보였다. 저기서 수미가, 딸 학원 줌 수업 영상에 집 안을 깨부수는 장면이 송출된 여자가, 그 딸과의 관계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대신 새 아이를 낳아 새로운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서하는?’이라는 물음에 가장 적극적인 회피로 답하고 있었다.

나는 비웃고 싶어졌다.

경멸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예전부터 경멸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 세상엔 여러 여자가 있었다. 자신을 학대한 남자와 비슷한 남자만 만나는 여자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그 상황과 조건 속으로 자신을 기어코 다시 밀어넣는 여자들이 있었다. 자신이 가장 취약했던 그곳으로 맨몸인 채 뛰어들어도 만회가 가능하다고 믿는 여자들이 있었다.

아이를 새로 낳고 싶어하는 게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나는 수미를 더 납득할 수 없었다. 납득하고 싶지도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아이를 정말 가진다 치자. 그러려면 남편이랑 자야 될 텐데? 남편이 자준대? 니 남편이 너랑 자준대?

남편이랑 잘 거냐고!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앉아 경멸부터 분노까지, 나조차 알 수 없는 A부터 Z까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 순간에, 나는 수미한테 뭔가를 간파당한다.

들켜버린다.

미동도 않고 서서 수미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겠다는 듯, 확인하기 전엔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한 표정으로 수미가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던진 한마디가 나한테 불러오는 파장을 수미가 잔인하게 훑어서 가져가고 있었다.

 

*

 

주방 싱크대 서랍에는 아이가 오래전 내게 준 러브레터가 있다.

침대 협탁 서랍에는 유통기한이 남은 콘돔이 있다.

공방의 가림막용 커튼 뒤에는 토이 클리너가 있다.

배우 정선경 연관 검색어는 사약.

진로이즈백 굿즈로 나온 두꺼비 소주잔에 캔들 만들기.

그것은 산 사람을 위한 초다.

나리공방에서 만드는 초는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초.

초를 만든 다음 날엔 비커에 양잿물을 푼다.

나는 매일매일 양잿물을 푼다.

꽃 중에선 개나리를 싫어한다.

문현동 곱창전골 밀키트.

지속 가능한 애플힙 만들기.

엘사네일에선 왁싱도 할 수 있다.

오종수가 술을 먹고 택시에서 내게 카톡을 보낸다. 상상을 초월한 오타가 날아온다.

열화상 카메라를 같이 통과했다.

니 몸을 채운 색.

중대본 긴급재난문자의 까만 삼각형.

코로나19 생존자.

삼십년 전 오늘.

 

*

 

공방 창문을 열고 양잿물을 풀다가 나는 본다.

열두살, 어쩌면 열한살.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길을 걷는데 맞은편에서 차가 온다. 다정하게 말을 하던 엄마는 순간 거칠게 아이를 잡아채며 뭐라 소리를 친다. 나는 본다. 엄마가 딸아이의 티셔츠를 잡아끌 때 여자아이의 맨어깨가 순간적으로 드러난다. 길거리에서. 나는 아이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휩싸이는 것을 본다.

내게 항진은 그럴 때 온다.

수치심에 싸인 여자아이의 얼굴을 예고도 없이 맞닥뜨릴 때.

삼십년 전 오늘이 내 눈앞으로 와 박힐 때.

그때 나의 자율신경계는 항진된다.

심장이 빨리 뛰고 호흡이 가빠지고 체온이 올라간다.

수미는 미쳤다.

나는 택시에서 내린 오종수한테 말한다.

“술 먹고 톡하지 마. 죽여버릴 테니까.”

술을 먹고 온 날 오종수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씻고 침대로 와서 자거나 양말을 신은 채로 소파에서 자거나. 오종수는 씻는 걸 택한다. 말갛고 말랑말랑해져서는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침대로 기어 올라간다. 나는 식탁에 미동 없이 앉아서 그런 오종수를 탐색한다. 미친 수미에 대해 생각하고, 미세한 근육통과도 같이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어떤 열기에 대해서. 그게, 어쩌면 객담을 뽑은 뒤부터 여름내 오종수와 금욕 생활을 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당장에 알아볼 수도 있지만 술 먹은 남편을 자극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술 먹은 날은 덜 단단하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아침이 오기를.

 

*

 

한낮에 공방은 햇빛과 소음을 적당히 가두고, 또 적당히 걸러낸다. 빛들은 블라인드 사이를 조금만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 그렇게 들어온 빛이 오래된 상가 바닥에 도형 몇개를 만든다. 불도 끄고 블라인드도 모두 내리면 한낮의 공방은 어둑하면서도 환한 기이한 상태가 됐다. 기정로의 소음은 창문 바로 밖까지만 머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진 못하지만 사라진 것도 아닌 소음들이 공방을 어느 때보다도 내밀하게 만드는 그 시간대를 나는 많이 좋아했다.

그 시간에 들를 때 수미는 늘 제정신이었다.

블라인드를 내린 환하고 어둑한 공방에서, 제정신인 채로, 수미가 내게 말했다.

“나리야.”

“응.”

“너한테서 남자랑 자고 온 냄새가 나.”

나는 수미를 보았다.

그럴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다.

나는 남자랑 자고 왔으니까. 그것도 불과 두시간 전에.

역광이어서 수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경멸이래도 상관없었다.

내겐 초대장이 있었다.

2020년 이후로 온 마을의 축제가 금지되었는데 호수 너머에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풀리고 1단계가 막 시작된 뒤였다.

가을이었다.

수미도 나도 그게 얼마나 짧을지는 알지 못했다. (1부 끝. 연재를 마칩니다)

 

* 의료원에서의 격리 생활을 그린 대목에서 『코로나에 걸려버렸다』(김지호 지음, 더난출판사 2020)를 일부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