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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숙인 『또 하나의 조선』, 한겨레출판 2021

있었던 그대로의 조선 여성

 

 

최지녀 崔智女

홍익대학교 조형대학 조교수 chora@hongi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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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여성은 기록의 세계에서 별도의 작은 범주에 속하곤 했다. 예를 들어 18세기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인 이규상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은 ‘유학자’ ‘선비’ ‘문인’ 등의 세분화된 범주에 남성들을 구분하여 배치하고, 그 뒤에 ‘규열록(閨烈錄)’과 ‘규수록(閨秀錄)’을 두어 여성 인물을 소개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책으로 민백순이 역대의 한시를 가려 뽑은 『대동시선(大東詩選)』은 한시를 시체(詩體)별로 구분한 후 시인의 이름을 기재하고 작품을 싣고 있는데, 여기서도 여성 시인은 마지막 부분의 ‘규수’라는 항목에서 별도로 소개되고 있다.—‘무명씨(無名氏)’보다는 앞이다!

이러한 책의 편차(編次)는 우선 조선의 역사에서 두각을 드러낸 여성이 남성에 비해 드물었다는 점, 그리고 남성들이 여성을 아마도 그 존재 조건에 있어 남성과 구분되는 존재로 여겼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성은 그 소수성으로 인해, 비(非)남성임으로 인해 별도의 범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여성의 입장에서라면 어떨까? 여성 가운데도 숨은 인물이 더 있다고, 이러한 사람도 있고 저러한 사람도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을까? 여기 ‘시대의 틈에서 ‘나’로 존재했던 52명의 여자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또 하나의 조선』이라는 책은 마치 그러한 조선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오랜 기간 유교와 여성을 화두로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의 노작(勞作)으로, 한겨레신문에 2년간 연재한 내용을 다시 손보아 엮은 것이다. 눈길을 끄는 표제 ‘또 하나의 조선’은 다층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여성의 존재와 역사가 남성 주류의 역사에서 배제되어왔다는 의미로, 또 한편으로는 비록 역사의 표면에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여성의 역사가 남성들의 역사와 복합적인 관계를 맺으며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백제 사람이라고 알려진 ‘도미 부인’을 제외하면 각 장마다 15명 안팎의 조선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은 신분과 나이는 물론 살았던 지역, 좋아하는 일이 제각기 달라 그 구색이 아롱다롱하다. 노비인 돌금, 기생인 황진이, 왕비인 정순왕후와 강진의 김은애, 안동의 장계향, 북경의 한계란과 무당 추월, 불자(佛子) 이예순, 천주교도 정난주 등이 모두 책 속에 함께 있다.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에 다루다보니 인물의 성격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1장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거나 익명성에 가려진 여성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담았다. 병자호란으로 피란길에 오른 경험을 『병자일기』라는 한글 일기로 남긴 남평 조씨, 치부(致富)와 재산 관리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화순 최씨, 성종의 유모이자 ‘비선실세’로 권력을 누린 백씨 등의 이야기는 새로운 동시에 각기 다른 의미로 조선 여성들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걷어낸다. 2장에서는 조선 가부장제의 희생자 혹은 공모자로서 극적인 삶을 산 여성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진다.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한 사실과 ‘절의’라는 담론의 분식(粉飾) 사이에 존재하는 논개,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 권력의 암투 속에서 희생된 민회빈(愍懷嬪) 강씨, 천민의 신분에서 정경부인이 되어 중앙 권력을 좌지우지한 정난정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이들의 생애는 양란(兩亂)으로 상징되는 조선 후기 격동의 역사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비극적인 드라마로 읽힌다.

3장은 성(性) 혹은 욕망의 문제로 인해 핍박받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병자호란 이후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환향녀(還鄕女) 윤씨, 남편 이외의 남자와 사통한 혐의로 처벌받은 유감동, 양반 남성의 강간에 고통받았을 노비 향복 등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이 장에서는 조선시대 여성이 맞닥뜨린 편견을 통해 오늘날 여성의 현실을 짚어보는 저자의 비판적이면서도 착잡한 시선을 만나게 된다. 4장에서는 주로 자신의 문집을 가진 여성 학자나 문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의 저자 의유당 남씨, 『규합총서(閨閤叢書)』의 저자 빙허각 이씨,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의 저자 윤지당 임씨 등은 기존에 이름이 꽤 알려져 있는 이들이다. 풍요한 가문 출신도 있고 빈한한 가문 출신도 있지만 이들은 주로 양반의 아내로서 가족 혹은 남편의 지지를 받으며 학문이나 문학으로서의 글쓰기에 성과를 남길 수 있었다. 이들이 “밥 짓고 반찬 만드는 틈틈이”(『규합총서』 서문) 이룬 학문과 문예의 소중한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큰 미덕은 상상이나 희망으로서가 아닌, 있었던 그대로의 조선 여성의 모습을 여느 책에서보다 많이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극과 소설, 웹툰이나 웹소설과 같은 인터넷 기반의 역사물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의 생생한 원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낯설게도 느껴지는 다양한 모습이 실은 조선 여성들의 삶에 조금 더 근접한 큰 그림인 셈이다. 다만 그들이 생각과 감정, 욕망을 지닌 존재였다는 사실이 바로 ‘주체의 성격’을 담보하지는 못할 터이다. 허난설헌과 그의 시에 등장하는 여성이 “마음의 주체, 자유를 추구하는 주체”(119면)인지, 노비 돌금이 “감정과 욕망의 주인”(233면)인지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성별과 신분에 대한 차별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주체성’ 혹은 ‘주체성의 실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더 복합적인 고려를 요하는 문제인 듯하다. 책 속의 여성들이 “나로 존재했던” 양상 또한 이런 점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한 자료를 군데군데 현대어로 옮겨 실어 서술의 실감을 돋우고 원전을 읽는 맛을 느끼게 하는 것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원전 자료를 번역하여 실은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가능한 한 실증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과거의 여성을 재현하고자 했다. 풀어 쓰기 까다로운 역사적 배경이나 가족관계에 대한 서술도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설명하려 한 시도가 엿보인다. 요즘 입말에 가까운 어휘나 표현이 등장해 연재물 특유의 발랄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도 있다.

저자가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조선시대의 역사 공간을 거쳤다는 사실 말고는 특별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5면)고 말한 것은 “조선 여성들의 일반적인 삶”(6면)이라는 관념에 대한 도전일 것이다. 그러나 서로 무관한 듯 보이는 여성들 사이의 공통점, 그들의 삶이 연결되는 지점, 나아가 이들 여성이 개인과 집단의 차원에서 ‘남성들의 조선’과 가졌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은 이 책이 남기는 무언의 숙제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