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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신용 金信龍
1945년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 시편』 『잉어』 등이 있음. summal54@naver.com
다시, 전지(剪枝)
전지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거참, 나무들 시원하게 이발 한번 잘하네!” 한다
나는 어리둥절해진다.
내가 언제 나무의 머리를 깎는 이발사가 되었나?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서 쳐다보니 나무들 정말 이발을 한 것 같다.
뒤로 젖히면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의자에 앉혀
거울에 비친 나무의 두상(頭相)에 맞춰
머리를 깎아준 듯하다. 마치 아이의 아픈 이빨을 실로 묶어
발치(拔齒)를 해주는 듯한, 서툰 가위질 솜씨지만
벽에 걸린 ‘이삭 줍는 사람’의 복제 사진처럼
조금 경건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다만 섭섭한 것은, 뒤로 젖히면 편안하게 다리 뻗고 누울 수 있는
의자에
나무를 눕히고
얼굴에 비누거품을 잔뜩 묻히고
차마 면도는 해줄 수 없었다는 것,
그런 해학 속에 숨긴 푸근한 익살로,
비누거품이 피어오르도록 해줄 수는 없었다는 것
그래, 이제부터의 전지는, 나무를 이발소 의자에 앉히는 것
이발소 의자에 앉혀, 비록 녹슨 연탄난로로 데운 물이지만
나무의 머리카락이 윤이 나도록 세발(洗髮)을 해주는 것
거미줄도 물방울의 벤치가 되어주는 것처럼
갈 곳 없어 떠도는 물방울들의, 의자가 되어주는 것처럼
라면에 바친다
언제였더라? 내가 라면을 처음 먹은 것은
얼큰한 해장국을 먹는 듯한 국물 맛과 곱슬곱슬한 면발의 탄력성에 내가 매료된 것은
어쩌면 알따미라 동굴의 벽화를 처음 발견한 눈빛도 그랬을까?
어둡고 축축한 동굴 속에서 몇만년 전 인류의 발자취를 찾아낸, 눈빛
돌도끼로 사냥을 하고, 동물의 뼈로 잡은 짐승의 생김새를 기록한
아, 우리의 먼 조상들 때부터 저렇게 살았구나!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우리를 안도하게 했던-
이제 어떤 곳에 놓여도, 허기의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 같았던—
그 라면 한봉지를 사들고, 돌아오는 때면
마치 꽃이 솜으로 된 목화씨처럼 포근하곤 했었다
그것은 식욕이 던지는 창이 아니라, 나무가 가만히 내려놓는 그늘 같은 것이었다
그 그늘에,
물 한컵쯤과, 조그만 불만 있으면
수줍은 듯, 끓어오르던
라면
얇은 양은냄비 같은 방이 환하게 밝아지던, 라면
그 하루의 허기 속에, 마치 목화씨처럼 묻혀 있곤 하던
오늘도 라면을 끓인다. 그 그늘에, 목화씨처럼 묻혀 라면을 끓인다
그래, 목화씨는 얼마나 포근했을까, 꽃이 바로 솜이였으니
씨방이, 포근한 솜의 이불로 덮혀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