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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임정민
1990년 부산 출생. 2015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좋아하는 것들을 죽여 가면서』가 있음.
learntaste@naver.com
링크 산책시키기
저녁이 되면 잠에서 깨
여긴 내가 잠 속에서 생각했던 곳은 아니지
근데 그래도 돼
교환일기의 첫 글자를 쓰려고 했을 땐
둘이서 건설하고 있는 풀장의 벽에 기대어
아직 공기뿐인 공사판에 앉아
그냥 바람이라도 맞고 있는 것 같았지만
오늘 저녁엔 자두 씨를 물고서
다름을 비추는 생각이 이유가 되게끔
입안의 무언가를 계속 굴려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근데 그래도 돼
나의 부재가 언제든 미수에 그치듯이
대부분의 우리는 말문이 막히면
둥근 접시 위에서 주저된 허공이 돼
나는 ‘비가 온다’라는 문장을 쓰려고 태어난 애
세상에 없는 말을 써보려던 계획에서
뱉은 모든 단어들이 목소리가 된다는 거
그런 걸 언제까지나 피하면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애
그래도 모두가 서사의 영향을 받는대
마음을 다쳐보지 않고도
천천히 멀어지는 것들 외부에 놓인 채
모두가 신비의 영향을 받듯이
가끔은 정말로 잊고 살지만
가위눌린 출몰은 내가 깨기 전에
아직 꿈속인 나의 곁에 앉아
심해의 문장들을 쓰며
저녁 담배를 피우다가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곳에 다다라
그냥 넘어져서 사라져버린 것 같다
근데 그래도 돼?
만약 여기가 소망들이 모인 사적인 성지라면
관계를 무찌른 불확실한 근원이라면
나도 언젠가 하늘로 쏟아져도 돼?
그러면 나는 그냥 구름 속에서
링크를 산책시키면서
어쩌면 그 아이의 심각한 눈을 계속 외면하면서
걸어갈 수도, 미움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때때로
바닥에 고인 물을 밟고
유령으로 다시 나타날 수도
우리가 천문처럼 만질 수 있는 것으로 태어났다면
멀어진 채 일기를 쓰지 않아도
누군가는 우리의 사라짐을 향한 지향을
그저 가만히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밤에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겨서
무언가 안 보이는 것들이
다른 날과는 다르게
조금 빠르게
회전하는 날이 오면
이제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시간 안에서 폭죽이 될 수 없어
정말로 최악인 상념들은
하루 뒤편에 있는 산란인지
모래 속의 평온인지
*
「저녁에 나가는 산책을 그렇게 기뻐하다니」
「나도 좋다」
너를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앉아 이상한 말들을 쓰고 있으면
링크는 침대에 누워
이불에 반쯤 얽혀서
편안한 잠에 들어 있다
이제 물론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가능한 날이 왔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네가 사라진 상태에서
네가 있는 것처럼 가정하고…… 다시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언어 위에 언어를 쓰고 있는 거지만
저녁이 되면 잠에서 깨
무얼 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게 돼
다만 조금 전까지 누가 있었던 것만 같은
방 안의 의자에 가서 천천히 앉으면
마치 너와 등을 맞대고
기어코 서로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
해명할 수 없는 모험의 주인으로서
모두의 위화감을 따른 포도주잔을 들고서
기쁨을 한번 만회해보려는 사람들이 있어
수면 위로 물풀의 자국들이 이어지는 곳이었어요
수면을 타고 끝없이 미끄러지며
오늘 밤의 좌절을 실현하는
물속에서의 일사병 같았어요
몸 없는 넝마들의 순찰을 피해서
초보 낚시꾼 같은 모습으로,
물풀로 글씨를 쓰고 있었어요
코를 막게 하는
비린내 나는 간증들
그리고 계속 집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어
집을 완성하고 나면 다시 다른 집을 짓기 위해서
장소를 옮기는 한 무리의 땀 흘리는 사람들
네가 언젠가 꿈같은 경험을 하고 나면
약간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게 다 그냥 꿈같다고만 말할 것 같아서
그게 슬플 것 같아서
우리는 서로의 미래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
링크는 아직 잠에 들어 있고 나는 무언가 쓰다가 다시 지우고 있다
어쩌면 아침이 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다만 나는 조심스럽게, 없는 걸 써보려던 욕망에서 조금 벗어나
한번쯤 우리를 그냥 완전히 잃어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어떤 글도 쓰지 않을 것처럼
편지나 일기를 교환하며 서로를 남겨보는 일에서부터
또 어제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 반성을 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거짓을 말했다고 스스로 믿을 때만 언어가 옷을 입고 산책을 시작하는 일에서
멀어지고 싶은 것처럼
어젠 그런 일도 있었다
학교에 있을 때 어쩌다 긴 졸음에 빠졌었는데
갑자기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잠에서 깼는데
주변에 나와 같은 중학생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고
그냥 링크를 산책시켜야겠단 생각이 들어
무단으로
조퇴를 했다
조퇴를 하고 있는데 인적이 없는 어느 골목으로 접어들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고
먹구름이 오면
링크를 산책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 저녁의 모든 일이 실패할 것만 같아서
조금 더 재빠르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근데 그날따라 여긴 내가 상상하던 곳이 아닌 것 같은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닌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그런 두려움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때도 너는 없었고
어쩌면 그냥 평소보다 저녁이 조금 빨리 오는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집에서 산책을 기다리고 있는 링크를 떠올리자
이상하고 허무한 마음이 들어
길 위에 서서
그냥 이렇게 혼잣말을 뱉고 말았던 것 같다
비가 온다
you think you know me
끝없이 앞으로,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지
망설임이 있더라도
부서지기 직전의 무릎을 가졌을 때
위태롭게 넘어지는 듯한 잔망을
무수히 반복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 이제는 다음에 침범할 단념들을 얘기할 차례
길가에 블록처럼 쌓인 벽돌들이 마침내 수필에 가까운 대지가 될 때
들려오는 것은
서로의 영혼을 높게 쌓은 후
결별을 테러하는 목소리
귓가를 채우는 싸움들은 계속 은폐만을 놀이한다
침묵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온갖 전위들은 흥미로울 수밖에
그러나 단념에 관해서라면
한결같은 처음들은 매번 자비를 잃은 채
쉼 없이 함구해, 나란히 걷고만 있을 때
반면에 멈출 수 없는 추락하는 사랑의 태도들은
우릴 떠나 시작을 감행하기도 하지
새로운 결들 위에서
스스로 환생이란 고정관념 안에서
우습게도 위험을 한번 감내하려는 듯이
계절이 바뀔 때의 외출은 때로 먼 곳에 있는 자갈의 소리를 추적해가지만
기어코 입을 다무는 선언은
언어가 견뎌내려고 하는
폭염으로의 변화로만 번져가지
우리는 말을 벗어나 어쩌면
흐르는 물감의 자세로만
대칭을 이루고
미움을 받들려 해
선연히 스치는
저마다 옥상에 남은 작은 새들은
비록 형체는 없지만
기이함에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고
허전한 날개의 고요한 부름과 같아져
행운이야말로
목마른 자에게는 있어서는 안 될 교육이겠지만
우리는 시간의 주검을 완파하기 위해
손에 든 검은 봉지들, 검과 같은 날카로운 것들을
남김없이 기원으로 상정한다
영원을 말하는 자를 믿지 말라곤 했으나
공간에 퍼지는 숨결에 단숨에 휘말리듯이
검은 눈의 심벌 또한 마음을 하나씩 버린다
돌아서본 적 있는 결심이 주체가 될 때는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기분으로
막을 수 없다면 나를 알게 할 수밖에 없다며
물가에 몰래 낙서를 몇개 그어버리고
심령까지 나아갈 사견들에 얼굴을 묻은 후
기억은 빗나가고 매일 나아가고 가장 부딪히면서 팽이같이 전염을 쌓는다
선택을 마친
펼쳐진 강을
다시 건널까
저녁 약속을 향한 이모지는 문자 밖에서 이성의 형상으로 튀어 오르고
어둠을 빚는 것은 도로 아래에 있는 수로들
정교한 선의로 인해 흐르는 물결 안에서
용기로 가장한 트라우마와
때때로 무력한 몸들
쇳소리를 남기면서
기어코 빛이 되고야 말 거라는 일변도의 주문이면서
무언가를 위해 연소되는 동력인 채
흩뿌려진 지력과
코드화된 지리멸렬에 관한 이야기로
외연을 연성하면서
끝없이 앞으로, 무릎을 끌고 나가면서
내 생각엔 우린 끝나갈 것 같아, 말한다
놀이를 멈추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증거를 남기는
청록으로 짙어지는 소요와
소요를 닮은 응시하는 그림자 속에서
변화를 기록하는 말이 내 것이더라도
쉴 곳을 지나친 후 결국 무엇이 달라졌는지 잊더라도
이제 너만이 나를 분명하게 안다
이 어둠과 저 어둠을
번갈아 뛰어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