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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기준영 奇俊英

1972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연애소설』 『이상한 정열』 『사치와 고요』, 장편소설 『와일드 펀치』 『우리가 통과한 밤』 등이 있음.

ariel_1@naver.com

 

 

 

결속과 끈기

 

 

손민우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여섯살 때 수십초간의 전신 경련을 세차례 겪었다. 그는 그게 자신이 호랑이로 둔갑하는 과정일 거라는 이상한 확신을 품었기에 한번은 증상이 발현되기를 기다리며 일부러 몸을 떨어본 적도 있다. 그의 부모는 집안에 순환계통 질환의 유전력이 있다는 사실을 신경 쓰며 근심이 깊어져 한동안 아이를 극진히 과보호했다. 그러다 대학병원의 유명한 전문의로부터 검사 결과 병증은 아니라는 소견을 들었고, 이후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린 아우구스티노는 부모의 기쁨이 되고자 제 몸 상태뿐 아니라 매일 새로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낱낱이 부모와 나누었다. 그는 평균 신장인 부모와는 달리 중고등학교 시기를 거치며 키가 농구선수만큼 자라났다. 그리고 서른두살에는 바라오던 대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제 서른다섯이 된 그는 서울 소재 한 성당의 보좌 신부로서 사목하며, 신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본당의 신자들 대부분이 그가 산책과 술을 즐기는 사제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날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고깃집에서 교우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제 부모가 오랫동안 전통시장에서 손두붓집을 하며 만나온 단골들과의 일화 한토막을 흘렸을 때, 옆 테이블에 있던 한 초로의 부인이 그의 얼굴에서 빛을 보았다. 찬 겨울날 윤슬을 바라보고 있을 때처럼 깨끗한 기쁨이 마음에 차올라 그걸 ‘빛’이라고 인식할 수 있었다. 신부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기억에서 지워지고 난 뒤에도 대화 도중 해사해지던 그의 표정만큼은 부인의 뇌리에 남아 며칠이고 맴돌았다. 부인은 이끌리듯 성당을 찾아가 그저 멍하니 미사를 몇번 경험했다. 제대 앞에 선 신부를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이 성가를 부르는 소리, 기도문 외는 소리를 들었다. 신자들은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친절하며 목소리조차 온화하다고들 말했다. 부인에게는 다른 점이 더 크게 보였다. 그가 보기에 젊은 아우구스티노는 매우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 미사 전후에 고해소 앞에서 고해성사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겸허한 태도, 고요히 흔들리는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알 수 있었다.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는 신부의 감각이 무슨 강렬한 전기 신호처럼 부인의 온몸으로 전달되는 듯했다.

부활절을 나흘 앞둔 봄날이었다.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평일 저녁 미사 후 성당 앞뜰에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고서 사제관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갑자기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신자 셋이 그를 에워싸며 허둥거렸다. “신부님, 신부님, 신부님! 왜 그러세요?”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양팔로 몸을 감싸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 보는 풍경을 음미하는 사람처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뒤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고, “괜찮아요” 하고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는 다음 날 저녁 미사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부인은 신부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를 다시 보게 되는 날에는 반드시 놓치지 않고 인사를 건네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달이 바뀌어 5월이 되었을 때, 부인은 성당으로 나갔다. 평일 정오 무렵이었는데, 보슬비가 내린 뒤라 날이 약간 흐렸다. 미사는 이미 한시간여 전에 끝난 터라 성당 앞뜰은 조용했다. 마침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뜰 한쪽의 성모상 앞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부인은 신부가 기도를 마치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신부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신부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신부님께 차를 한대 사드리고 싶은데 받아주세요.”

“무슨 말씀이시죠? 절 아세요?”

“받아주세요. 필요하실 거예요.”

“누구시죠?”

“신부님이 모르는 사람이요.”

휭 하니 바람이 불어와 부인의 목에 감긴 하얀 실크 머플러 끝자락이 나풀거렸다. 부인이 가녀린 손가락으로 머플러의 매듭을 매만지다가 그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가슴께에서 멈추었다. 마치 고음으로 치닫기 전에 어떤 성악가가 그러는 것처럼 그 모습이 묘하게 품위있어 보였다.

“혹시 이 동네로 이사 오셨어요?”

신부가 묻자 부인은 시선을 비껴두며 “헬레나”라고 읊조렸고, 이내 다시 신부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구자영 헬레나. 갓난아기였을 때 세례받았다고 해요. 성당에 다녔던 기억은 흐릿하게만 남았어요. 다른 동네에 살아요. 그럼 전 신부님께 차를 사드릴 수 없나요?”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웃었다. 경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만약 그에게 날개가 있었다면 한껏 푸드덕거리며 웃었을 것이다. 그 순간 충동감, 그가 잊었으나 그의 세포는 기억하고 있을 기분 좋은 충동감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활랑거렸기 때문이다. 먼 곳으로 쌩쌩 달려나가고 싶다는 갈망은 사춘기 때 불현듯 찾아오곤 했는데, 주로 이런 상상으로 번져가곤 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대형 덤프트럭의 적재함 상단에 위태롭게 왼손으로 매달려 있다가 한순간에 날쌔게 오른손으로 맞바꾸어 잡고, 또다시 왼손으로 맞바꾸어 잡고, 또다시 오른손으로 맞바꾸어 잡고…… 그러다 그는 트럭에서 손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장면을 그리며 집 밖으로 튀어나가 친구들과 축구를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찬물로 씻고 난 뒤에 저녁 기도를 하고서 푸른 소용돌이무늬가 있는 차렵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잠들었다.

“농담 아닌데요.”

구자영 헬레나는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지만, 제 말의 참뜻이나 진정성을 성마르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성당에서 따뜻한 차 한잔 드시겠어요? ‘만남의 홀’이 있어요.”

“실례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겠어요.”

“비가 또 올 것 같죠? 우산은 가지고 오셨어요?”

헬레나는 아우구스티노 신부의 상냥한 질문에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예보를 못 봤어요”라고 답했고, “신부님께 고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고 말을 이었다.

신부는 그때 헬레나의 목소리가 특이하다고 느꼈는데, ‘예보’에 섞인 약간의 콧소리 때문일 수도, 좀 망설이다가 내뱉느라 날숨이 섞여든 ‘마음’의 발음 때문일 수도 있었다. 헬레나는 자신의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상체를 약간 기울이고 선 신부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코끝에 펜으로 톡 찍은 듯한 검푸른 점이 하나 나 있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신부님, 전 어리석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답니다. 연습이라도 해보면 용기가 나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지난달에 가벼운 녹음기를 하나 샀어요. 조용한 시간에 여태 해본 적 없는 말들을 녹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곧 깨달았지요. 저는 제 목소리를 흉내 내지는 못하리란 걸.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신부님께 그대로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저를 무례하다거나 올바르지 않다고 미리 판단하지 않으시기를 부디 바라요.”

후두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성당 사무실에서 우산을 하나 챙겨와 헬레나 자매님께 씌워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그보다 헬레나가 한발 빨리 움직였다. 헬레나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신부에게 내밀었다. 신부는 이마와 코끝에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을 느끼며 그걸 받았다. 작은 플라스틱 네임태그처럼 생긴 검은색 녹음기였다. 헬레나는 “처분에 맡깁니다, 신부님” 하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신부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만 좇았다. 한 젊은 여자가 뜰 안으로 들어서며 알록달록한 우산을 펴 들었고, 헬레나가 그 곁을 지나쳐 성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는 지난겨울부터 옷장 서랍 속에 넣어두고 한번씩 눈길을 주게 되는 양말과 피케셔츠가 있었다. 초등학생 남녀 복사 둘이서 그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양말은 겨자색이었는데, 복사뼈가 닿는 자리에 주황색 실로 둥근 해가 수놓아져 있었다. 하늘색 피케셔츠의 가슴팍 한쪽에는 금빛 별 하나가 수놓여 있었다. 어린이들이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걸 신부님께 드리려고 자수를 배웠어요” 했을 때, 그는 심장이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초보자의 솜씨이니만큼 해와 별의 테두리는 매끄럽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그 점을 속상해하면서도 각자 기대했던 그림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건지 생글생글, 피식피식 자꾸 웃었다.

“좋은 날에 저희 생각하면서 입으세요!”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모든 날이 좋은 날이라고 말해왔다. 고통과 갈등에 둘러싸일 때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매일매일의 기원 속에서 우리는 평화를 얻는다고. 물론 그건 성직자인 그에게도 종종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어린이들이 사제의 말에 자기들의 온기를 실어 나르는 이런 시간이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사제관 침실로 들어온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옷장 서랍을 열고 자수가 놓인 셔츠와 양말 옆에 헬레나에게서 받아온 녹음기를 내려놓았다. 주임 신부인 안드레아 신부는 부드러운 성품이지만 완고한 면도 있어서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되면 경솔하게 처신했다며 그를 나무랄 게 분명했다. 글라라 수녀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헬레나를 성서읽기 모임으로 이끌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보기에 나이 든 헬레나에게는 헬레나의 방식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모든 게 하느님의 의지일지 어떻게 알아? 아침부터 비가 오고 우산이 없는 헬레나 자매님이 내게 차를 사주겠다면서 녹음기를 쥐여주고 사라지는 이런 게.’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 앞에서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정돈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이 순간을 돌아보며 ‘의지’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자신을 흥미롭게 들여다보았는데, 비로소 그게 눈앞에 벌어진 현상을 수용하는 자신의 직관이나 태도를 표현한 단어라는 걸 깨달았다. 사전에서 그 뜻풀이를 무어라고 하든지 간에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고, 아마도 구자영 헬레나에게도 그러할 것이었다.

 

*

 

‘너무해. 너무해. 미친 사람이 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구자영은 빗줄기가 굵어질 즈음 바로 택시를 불렀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기분이 멍해진 상태여서였겠지만 가랑비를 맞으며 거리를 헛도는 게 좋다고까지 생각됐었다. 결국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해진 채로 택시에 올랐고, 그때부터는 샤워, 미지근한 우유 한잔, 침대 생각뿐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때 친구 한미정이 전화를 걸어와 그에게 주말 오후 4시, ‘테누토’의 창가 자리 4인석을 예약하고 싶다고 말했다.

“테누토는 이제 없어. 팔았어.”

구자영은 그렇게 대답하면서 얼른 집으로 가 욕조에 물을 받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그로부터 두시간 반쯤이 흐른 뒤, 구자영은 한미정과 제집 식탁에서 사과계피차를 나누어 마시며 일종의 격려이자 대답을 부추기는 말, 이를테면 “네가 어련히 잘 결정했을까만은…… 그래도 여태 잘해온 일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거기서 미약하게나마 무슨 힘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자신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처럼 들렸다.

구자영은 지난해 말에 팔년간 운영해왔던 레스토랑 ‘테누토’를 처분했다. 가정집으로 쓰이던 것을 사들여 개조했던 곳으로, 첫 이년과 마지막 이년을 제외한 사년간은 호황을 누렸다. 인터넷 검색창에 ‘테누토’를 치면 호평들에 엮여 떠돌고 있는 관련 이미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가게의 내벽 색깔은 구자영이 직접 골랐는데, 색이름이 ‘라벤더 포그’였다.

“요식업은 더는 못하겠어. 물려버렸어. 음식 냄새 맡는 것만으로도 속이 거북해지고 그래. 그만 멈추라는 신호겠지.”

“너 어디 아픈 거니?”

“그런 건 아냐.”

“그렇담 귀띔도 하나 없던 게 좀 섭섭하다 얘. 우리 지난 3월에 혜란이 아들 결혼식에서 얼굴 봤고, 그때 너 별말 없었잖아.”

“오늘이 있을 줄 알았나보지. 한동안 조용히 지내고 싶었거나.”

한미정은 대체로 약간의 흥분 상태에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 드는 습성이 있었는데, 마침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서 능구렁이 같은 구자영과의 우정이 이만큼이나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이라며 뻐기듯 자평했다. 구자영은 별다른 토를 달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관계에는 고유하고 핵심적인 패턴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패턴은 중요한 문제였다.

한미정과 구자영은 오래전에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 당시 구자영네 아버지는 식구들을 서울에 두고 홀로 귀향해 사과농장을 하고 있었다. 한미정은 오 남매 중 셋째, 구자영은 외동이었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아서 자주 어울려 다니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들을 상대에게서 발견하게 될 때마다 일기장에 적어두었다. 한미정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뒤에야 구자영의 어머니가 그 고등학교의 음악 교사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때는 교과서의 여백에 ‘충격! 충격!’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반나절 후 구자영을 만났을 때는 “어쩌면 이래?”를 몇번 반복한 끝에 속도 없이 먼저 웃음보를 터뜨렸다. 학업에 대한 압박감이 다른 감정들보다 중요해지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소원해졌다. 재회의 날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찾아왔는데, 모교의 체육관이 무너졌기에 이루어졌다. 중학교 동창회장이 체육관 신축기금을 마련하겠다는 취지로 연락책을 두고 여기저기 전화를 넣으며 공지사항뿐 아니라 동창들의 안부도 실어 날랐기 때문이었다. 구자영은 그때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한미정은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앉은 구자영이 더없이 의욕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모습이라 적잖이 자극받았다. 당시는 지난 시간, 지나간 마음이 모두 나달나달 해진 듯 느껴질 만큼 역동적인 변화의 시기였던지라 둘 사이에는 아마도 무너진 체육관처럼 재건해야 할 무엇들과 그 필요가 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성취가 중요하게 여겨졌던 때였던 만큼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어떤 식으로 맹렬히 허둥거리고 있는지 정도만을 안부로 주고받다가 다시 멀어졌고, 시간은 더 무정히 흘러갔다. 그래서 한미정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소식, 구자영이 아이가 있는 사업가와 결혼했다는 소식은 제삼자의 입을 통해 서로에게 뒤늦게 전해졌다. 한미정은 ‘내 자식 키우는 것도 이렇듯 힘든데 남의 애를 어떻게 키우려고’ 하며 속으로 안타까워하다가 이내 그 감정을 ‘내 코가 석자!’ 하는 식의 자조로 바꾸었다. 매우 성숙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구자영이 선망마저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한미정은 이번에는 구자영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걸까 궁금했고, 아직 그들의 인생에 작게나마 모험의 시간이 더 남아 있을지를 그로써 간접 확인해보고 싶었으며, 구자영의 새로운 선택과 발견이 무엇이든 응원해주는 게 옛친구의 미덕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그럼 너는 이제……”

그때 구자영이 끼어들었다.

“내가 열살 때 친척 어른들이 외가 사랑방에 모여서 우리 엄마가 포도막염으로 눈이 멀 거라고 수군거리는 걸 들었어.”

한미정은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열살 무렵의 추억이라면 앞니 두개가 빠진 채로 동물원의 철제 우리를 따라 돌며 ‘꺅! 꺅!’ 소리를 질러대 오랑우탄과 공작새를 자극했던 것이었다. 기분이 고조되어 나대고 있는 동생이 너무도 성가셨던 그의 오빠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가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다.

“그때 하늘에서 이런 메시지가 울려 나오는 것만 같았어. ‘천장이 무너져 내릴 거다. 벽이 갈라지고 수도관이 터질 거야. 도망칠 방법은 없어!’ 밤마다 집중력을 끌어모아 생각했어. 사방이 컴컴한 데 혼자 남겨진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무서울까, 얼마나 답답할까, 하면서. 나는 아이였고, 엄마를 많이 사랑했으니까.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엄마가 나았어. 병원에서도 그렇게 호전된 사례는 드물다 했어. 천장도 멀쩡하고, 벽도 수도관도 멀쩡하고! 난 너무 신나서 매일 방방 뛰어다녔지. 근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드는 거야. ‘이렇게 기쁜 티를 계속 내다가는 언젠가 벌을 받을지도 몰라. 누가 행운 보따리랑 불운 보따리를 바꾸어서 잘못 배달한 거면 어떡해?’ 그래서 난 밖에서 엄마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않게 됐어. 그후로도 꽤 오랫동안.”

한미정은 잠시 생각에 잠겨 “그게 그랬던 거구나……” 하며 고개를 갸웃했고, 그러다 웃음 지으며 할 만한 말을 찾아냈다. “너희 어머니 노래 참 잘하셨는데.”

“응. 엄마가 진씨를 참 좋아했는데. 그 사고뭉치를.”

구자영은 멀리 떨어져 사는 남편을 언제부터인가 ‘진씨’라고 불렀다. 그의 성씨가 ‘진’이었다. 둥근 얼굴형에 눈웃음을 잘 치고, 슈트와 스웨터, 따뜻한 색이 잘 어울리던 사람. 허풍선이 친구들이 위성처럼 그를 쫓아다녔다.

“그랬었나?”

“응. 진씨가 광대 기질이 좀 있잖아. 재주 많고, 사람 기분도 잘 맞추고.”

한미정은 ‘사기꾼들한테도 그런 기질이 있는걸’ 하고 생각했기에 구자영과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부령호텔 스카이라운지. 거기 레스토랑에서 홀서빙할 때 진씨를 처음 봤어. 일주일간 거의 매일 자기 어머니랑 식사하러 왔거든. 바닷가 휴양지에 어머니랑 단둘이 와서 경양식 챙겨 먹는 남자는 거기서 그 사람 하나뿐이었을걸.”

“얘, 근데 홀서빙을 네가 왜? 위장 취재 같은 건가?”

“아니. 그게 그때 내가 새로 구한 잡이었어.”

“……”

“진씨가 오면 서빙하는 내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거야. 무슨 연정을 품고 있던 것도 아닌데. 한 날은 진씨가 빙글거리면서, ‘나 좋아해요? 아니면 누구한테 쫓기는 중이에요?’ 하더라고. 쫓긴다는 생각은 한번도 안 해봤는데, 그 말 듣고 어찌나 뜨끔하던지.”

“왜, 너 그때 무슨 문제가 있었니?”

“문제야 없는 때가 따로 없지. 근데 그때는 내가 잘 숨어든 줄만 알았어. 잘못한 게 있어서 숨어 있고 싶었거든. 진씨가 날 알아본 게 내 새로운 문제가 됐지.”

진씨는 사업에 크게 실패한 뒤에 치통을 심하게 앓았고, 인상이 초라해졌다.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슬픔이 배었다. 그래도 신이 나면 말재간을 부려 사람을 홀딱 반하게 하는 그 재주는 어디 가지도, 썩지도 않았다. 가는 데마다 늘 새 친구들이 생겼다. 지금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거처를 마련해 낚시용품을 판매하는 동성 친구와 지냈다.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대?”

“진씨? 좋아. 그 사람 걱정은 안 해. 세주가 좀 걱정이지. 그래도 걔가 한국 들어올 때쯤이면 상황이 조금은 나아져 있지 않을까? 과거에 우리가 어쩌지 못한 문제들을 이제 와 만회하기란 힘들겠지만, 그래도 만나게 될 거야. 끝장나지 않았으니까. 세주는 진짜 한국 다시 들어오고 싶어해. 그런 것 같아. 딱 이년만 기다려달라고 했어. 난 행복하게 기다릴 수 있겠다고 말했어.”

세주는 진씨의 딸 이름이었다. 그리고 세주는 구자영의 딸이기도 했다. 세주는 어릴 때 충격적으로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그 존재만으로도 구자영을 한 자리에 얼어붙게 할 만했다. 그런 아이의 두번째 엄마가 된다는 일에는 특별한 조심성과 각성, 담력과 체력이 모두 필요할 것만 같았다.

“천사 같은 아이였는데, 악마 같은 데도 있었지. 좀더 많이 안아주고 싶었는데. 재활원에 들어갈 거래. 이번엔 결심을 단단히 한 것 같아.”

구자영이 세주와 한집에서 산 시간은 십년 남짓이었다. 그로선 최선을 다했으나, 세주는 열일곱살이 되자 생모와 살겠다며 영국으로 떠났고, 지금은 술독에 빠져 사는 서른살이었다. 언젠가 세주는 구자영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웃 주민이 가족 유품을 정리하며 연 벼룩시장에서 굉장히 마음에 드는 그림 한점을 좋은 가격에 샀다며 열렬히 설명해주었다. 그때는 그게 대마에 취해 지껄이는 헛소리란 걸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리운 목소리에 실려 온 변화무쌍한 감정들이 너무나 소중해서 황홀했고, 옛날에 어린 세주와 젊은 날의 진씨, 그리고 자신이 즐거이 헤엄쳐나갔던 드넓은 바다와 부드러운 공기, 하늘빛, 새들의 움직임, 여름날의 냄새가 떠올라 눈물이 조금 났을 뿐이었다.

한미정이 컵 바닥에 가라앉은 사과 조각을 티스푼으로 건져내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세주에 관해서 뭐라고 말을 보태야 할지 몰라 곤란하기만 했다. 그에게도 딸이 둘 있었으나 그의 관점으로 볼 때 그들은 평범하게 착하고 무난하게 이기적이었다. 그리고 세주에 관한 구자영의 마음에 관해서라면, 그건 상상으로도 근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얘, 괜찮아질 거야. 넌 언제나 나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긴 하다만……”

한미정은 거기까지 말하고서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구자영을 살짝 흘겨보며 웃었다. 그는 구자영이 테누토를 정리할 생각이었다면 그곳에서 마지막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자기를 좀 배려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게 솔직히 아직도 좀 짜증이 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오랜 친구, 이 능구렁이는 지금 탈피(脫皮) 중인 모양이야. 낯설고, 놀랍고, 신기하고, 또 약간은 징그러워.’

한편, 구자영은 오래전에 엄마에 관한 이러쿵저러쿵을 한미정에게조차 함구해버린 것처럼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함구하고 있었고, 그게 무엇인지도 분명히 의식했다.

 

‘처분에 맡깁니다, 신부님.’

 

*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산책 길에 본당 주일학교 교사인 청년부원 노주원 베드로와 신담희 베로니카를 만났다. 그들은 마침 분남이네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분남이는 첫영성체 교리반에 다니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으로, 연로하신 할머니와 함께 잡스러운 물건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 허름한 집에 살았다. 신부는 분남이가 ‘멍 때리기’와 암기를 잘하며, 팥이 든 빵을 싫어한다는 걸 기억했다. 또 언젠가는 성호경을 읊으며 성호를 긋다가, ‘아멘’하는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짝’ 박수 소리를 내고는 쑥스러워하며 제 아랫입술을 꼬집듯 비틀었던 것도 기억했다.

“신부님, 언제 축구 시합 하셔야죠.”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베드로의 인사치레에 청년부원들과 어울려 종종 축구를 했던 게 작년 이맘때 일이었단 게 떠올라 미소로 화답했고, 교사들과 헤어져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분남이와 분남이의 외할머니인 김순례 데레사를 위해 기도했다. 그는 신동일 야고보가 운영하는 안경원의 출입문에 ‘개인 사정으로 금일 쉽니다’라는 쪽지가 붙은 것을 보았고, 한 꼬마가 어린이놀이터의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라 운동화 바닥의 흙먼지를 털어내려 탕탕탕, 발을 구르는 것을 보았다. 과일 트럭이 ‘달고 싱싱한 참외가 왔어요’ 하는 소리를 흘려보내며 동네를 천천히 훑듯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고, 진숙희 스텔라가 사는 신송빌라를 지나칠 때는 그 집 창가에 장미허브가 담긴 작은 화분과 새까만 발바리 땡이가 있으리란 것도 잠깐 떠올렸다. 그가 계속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걸어 나갔기 때문에, 그가 지나쳐간 모든 자리, 매 순간들이 신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성물판매소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교우들을 만나 그들의 묵주와 성상에 축복했다. 사제관으로 들어와 이틀 뒤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강론할 내용을 정리하고 묵상했으며, 안식년을 맞은 홍숭길 스테파노 신부가 요사이 구약성서를 필사하고 있다는 소식을 안드레아 신부로부터 들었다.

이날 저녁 미사는 안드레아 신부가 집전했다.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침실 책상에 앉아 헬레나의 녹음기에 담긴 목소리를 들었다.

신부에게 전해진 헬레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신부님, 며칠 전에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사이)

 

“배경은 모래바람이 부는 사막이었어요. 제 앞으로 칠팔십명쯤 되는 사람들이 주유소를 향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목이 말라서요. 휘발유 40리터 값을 치르면 생수가 담긴 작은 페트병 하나가 제공됐거든요. 모두 거기까지 차 없이 걸어온 사람들뿐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들 했어요. 제 차례가 가까워질 때쯤 고맙게도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전 고장이 난 주유기 앞으로 가 생수 한병을 받아 들었어요. 주유기에는 ‘경고’라고 적힌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뭘 경고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어요. 저는 앞서 생수를 사 간 사람들이 사막 여기저기에 주저앉아 물을 마시는 모습을 훑고는 주유소 사무실 쪽으로 몸을 틀었습니다. 아담한 초록색 컨테이너였는데, 그곳 창가 테이블에 뜻밖에도 신부님이 앉아 계셨어요. 사제복 차림으로요. 놀랍게도 그곳은 간이 고해소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설명해준 사람은 없었지만, 저는 그냥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신부님 맞은편에는 어린이 두명이 나란히 앉아 있더라고요. 전 한발짝도 더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세상에! 꿈속에서보다 훨씬 더 목이 타더라고요. 저는 그날 오전 내내 좀 불길했는데, 사막, 신부님, 사람들, 두 아이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는데다 제가 고해소에 이르지도 못한 채 그냥 눈을 떠버렸다는 것 때문이었어요.”

 

(사이)

 

“지금은 조용한 저녁시간입니다. 저는 집 소파에 앉아 제 목소리를 녹음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일을 신부님께 털어놓고 싶어요.”

 

(사이)

 

“오래전, 첫 직장에 다닐 때였습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절 찾아왔어요. 그는 자기를 제 중학교 동창이라 소개했습니다. 당시 모교 졸업생들 사이에 무슨 기금 마련 건으로 새 연락처들이 공유되면서, 그런 알음알음으로 그도 제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었죠. 장온조. 그 사람 이름입니다. 전 그때 잡지사에, 온조는 의류회사에 다니고 있었어요.

온조는 저에 대해 좋은 추억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전학생이었던 온조에게 제가 학교 뒷산에 예쁜 오솔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었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카시아 향기가 나던 그 오솔길이 기억이 났어요. 제가 그곳을 좋아했던 것도요. 하지만 전 그애도, 그애를 그곳으로 이끈 일도 모두 기억에 없었어요. ‘그게 네가 날 찾아온 이유야?’ 제가 물었더니, 자기가 거기 혼자 가서 가끔 울었대요. 전 그냥 우스갯소리라고, 날 만나러 온 핑계를 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싫지는 않았던 게, 온조는 외모가 수려하고, 참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사이)

 

“오개월 동안 아홉번을 만났어요. 호감은 있었지만, 연애감정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7월 더운 여름날 처음 만나 11월이 되니 연락이 끊겼습니다. 돌아보니 둘이서 탁구도 치고, 밥도 먹고, 같이 영화를 본 적도 한번 있고, 남산자락을 걸었던 적도 있어요. 한번은 제가 온조한테 인간이 너무 지겹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살면서 그럴 때가 있잖아요. 환멸을 어쩌지 못하는 순간들이. 온조가 듣고는 조용히 웃었어요. 왜 하필 온조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모르겠어요. 제가 교만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죠. 나중에야 그걸 오래 생각하게 됐어요.”

 

(사이)

 

“온조는 새벽에 혼자 산을 타다 실족사했습니다. 저는 장지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조는 듯한 모양새로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났고, 화장터에서는 시신이 화구로 들어가는 것까지만 보고서 벤치에 앉아 있다가 따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조문객 숫자보다 떠도는 말이 많았던 장례식이었습니다. 온조 여동생이 제일 많이 울었어요. 누군가는 온조가 회삿돈 횡령에 가담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체불 임금과 빚에 치이고 있었다고 했어요. 또 누군가는 온조가 산을 무척 좋아했다고, 또 누군가는 좋아하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어요. 유약한 게 그의 취약점이라고도, 유연하고 깔끔하며 세련미가 있는 게 그의 매력이라고도 했어요. 그런 소리를 사방에서 듣고 보니 온조는 정말 내가 모를 사람 같았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온조가 땀을 많이 흘렸던 것, 그래서 제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던 장면만 자꾸 떠올랐어요.

생각해보면, 전 온조가 지닌 어둠에 끌렸던가봐요. 그는 제게 각인된 강렬한 감각을 건드렸어요. 어렸을 때 밤마다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거든요. 사방이 컴컴한 데 혼자 남겨진 사람에 대해서요. 죽음에 대해서요. 신부님, 전 그걸 못 잊어요. 그런데도 결국엔 알아챈 게 없죠. 아홉번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다 놓쳤죠.

그 일은 제게 영향을 끼쳤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이해하지 못한 사람을 간직하기로 한 그 순간부터요. 제 오랜 비밀, 장온조가 평온한 영면에 들기를 기도합니다.”

 

밤이 되어,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잠옷 차림으로 침실 끄트머리에 정물처럼 앉았다. 일과를 마치고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되면 그에게 제일 먼저 익숙하게 찾아드는 감정은 피로와 외로움이었다. 그는 그걸 담담히 수용했고, 또 그 감정이 힘을 잃고 물러가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오늘은 실은 기쁘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어제나 그제, 혹은 일년 전이나 십년, 이십년 전처럼. 그는 협탁 옆에 세워둔 기타를 바라보았다. 신학교 동기인 임찬식 가브리엘 신부가 사개월 전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는 그걸 가지고 와 침대에 다시 걸터앉았다. 그에게는 조금 작은 듯 보이는 이 통기타는 가브리엘 신부의 소유였을 때는 클래식과 올드팝 연주에 적합한 전문가용으로 보였다. 하지만 초보자인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로 넘어온 뒤부터는 단조롭고 이상한 즉흥곡들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신부는 약한 소리로 연주하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글라라 수녀는 기뻐한다네

새로운 오르간 연주자가 나타났다네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덩달아 기뻐한다네

오늘은 비가 내렸고

또 비가 개었지

 

*

 

전례 준비실에서 복사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두 어린이, 류준 그레고리오와 김희송 안젤라가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 후 제대 초에 불을 밝혔다. 성당 2층에서는 오늘 새로 온 오르간 연주자가 미사에 앞서 벌써 20분째 성가 반주를 연습하는 중이었다. 헬레나는 은은하게 울리는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열 중간쯤 한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레고리오가 오르간 연주자의 모습을 보려고 몸을 틀어 뒤쪽으로 고개를 빼 들었다가 성가대석 양쪽 상부 창의 스테인드글라스 중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그가 좋아하는 이미지가 빛을 입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빨간 불꽃과 흰 새가 떠올라 있는 작품으로, 그레고리오가 느끼기에는 그 불꽃과 새를 감싸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을 것만 같았다. 커다란 괄호 모양으로 떠올라 있는 두 손이 불꽃과 흰 새를 보호해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이라 상상했다.

헬레나가 합장한 손끝을 입술에 댄 채로 눈을 감고서,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가 입 밖으로 끌어내자마자 그 말은 미묘한 힘을 응축하며 마치 새로운 언어인 것처럼 헬레나의 귀에 와닿았다. 그레고리오와 안젤라가 미사를 준비 중인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인사하기 위해 제의실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