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정지아 鄭智我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1990년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등단.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등이 있음.

jiajeong@hanmail.net

 

 

 

말의 온도

 

 

사랑방으로 거처를 옮기겠다고 고집한 건 어머니였다. 이혼한 딸내미가 떡하니 안방을 차지하고 늙은 어머니를 사랑방으로 내쫓는 꼴이었다. 오랜 이웃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 그럴 거면 이사를 오지 않겠노라 으름장을 놓자 어머니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젊을 적에는 사랑방에 손님들이 들끓었어야. 남정네들이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삼시세끼 따신 밥상 척척 받아감시로 시나 읊어대는디 고거이 고로코롬 부럽드란 말이다. 죽을 날도 지났는디 나도 고로코롬 펜하게 살아볼란다.

사진 찍는 것도 불편해하는 어머니가 그날따라 대종상 여우주연상감이라 해도 손색없을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바람에 나도 깜빡 속고 말았다. 부랴부랴 사랑채 방 한칸을 개조해 욕조를 들이고 비데를 설치했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와 칠십년 넘게 살아온 집에서 사랑방 손님으로 옮겨갔다.

본채를 나 혼자 독차지하고 사니 편하기는 했다. 아마 어머니의 의중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좋기만 한 일은 없는 법, 하루 세번 밥 차려 나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족도 아닌 손님들의 밥상을 하루 세번 어머니는 어떻게 해 날랐을까. 어머니가 건너왔을 세월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벌써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평생 제시간에 밥을 먹어온 어머니의 배꼽시계는 전자시계보다 정확했다. 7시에 아침밥을 먹으려면 적어도 6시에는 일어나야 했고, 어머니 모신 지 이년 만에 나도 시계처럼 정확하게 눈을 뜨는 신기를 갖게 되었다.

아이, 비도 온디 멀라고 아침을 갖고 왔냐? 먹을 것 천진디.

다행히 가는 봄비라 우산을 쓸 것도 없었다. 포슬포슬 내리는 비에 벚꽃이 투명하게 젖어가는 아침이었다. 나는 쟁반에 들고 온 것들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우산 받치고 들고 올라먼 무거왔겄다이. 나가 오래 상게 니가 고상이다.

시간 맞춰 들고 오는 게 번거롭기는 해도 무겁지는 않았다. 평생 위병을 앓은 어머니는 뭐가 됐든 새 모이만큼 먹었다. 오늘 아침도 반 공기 남짓한 콩밥과 소고기뭇국, 조기구이, 접시 하나에 한젓갈씩 모아 담은 숙주나물과 애호박나물, 미역줄기무침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다 나를 위한 찬이었다.

아이고, 진수성찬이다이. 힘든디 멀라고 반찬을 요로코롬 많이 했냐?

다 내 반찬이야. 나 먹으려고 했구만 또 쓸데없는 걱정이다.

나도 된장찌개 좋아해야. 멀라고 내 반찬을 따로 허냐, 성가시게. 그냥 된장찌개만 해오제.

처음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아버지는 된장 없이 단 한끼도 먹지 않았고, 해서 우리 집 밥상에는 사시사철 끼니마다 각양각색의 된장국이나 찌개가 올랐다. 말갛게 끓여 각자 입맛대로 매운 고춧가루 팍팍 넣어 먹는 동탯국이나 무조림, 무생채, 상추겉절이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였다. 어머니를 모시기 전까지 나는 그게 우리 집안의 식성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모시기 시작한 초창기에 어머니는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 어른 한숟갈 정도나 겨우 먹고는 아이, 많이 묵었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머니 닮아 음식 솜씨가 나쁘지 않았고, 어머니가 해준 대로 했는데도 그랬다. 너무 먹지 않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 무렵, 오랜만에 비 내리는 숲을 보고 있는데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 오는 날이면 호박전 부치던 기억이 났다. 우리 식구 누구도 기름진 전을 좋아하지 않아 깨작거리다 말면 어머니 혼자 남은 전을 먹으며 중얼거리곤 했다.

비 오실 적에는 전인디……

혹시나 해서 가늘게 채 썬 호박을 듬뿍 넣고 밀가루는 조금만 넣고, 어머니가 해주던 대로 호박전을 부쳤다. 밥 한숟갈 겨우 먹던 어머니가 호박전을 두장이나 맛있게 먹었다. 내가 알고 있던 우리 집안 식성은 아버지 유전자의 식성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내가 발라놓은 굴비를 한점 먹고는 동자승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아이, 조기가 참 맛나다. 나가 딸을 잘 둬가꼬 늘그막에 이런 호사를 다 누린다이.

호사는 무슨. 서울 사람들은 더 좋은 것만 먹고 사는데.

아이가. 끼니마동 고기며 생선으로 배를 채우는 사램이 시상 천지에 워디 있다냐? 나만치 복 많은 사램 있으먼 나와보라 그래라. 나는 삼시로 요로코롬 큰 조기는 보도 못했다.

엄마 효자 아들이 보낸 거야.

오빠 이야기가 나오자 어머니는 짐짓 딴청을 부렸다. 내가 귀향한 뒤로 어머니는 늘 그랬다. 나를 고향으로 내려보낸 장본인은 큰오빠였다. 어머니 빼닮은 큰오빠는 어머니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었다. 아버지 없는 집에서 허리도 안 좋은 어머니가 혼자 어찌 사시겠냐며 날마다 전화를 걸어 걱정을 늘어놓는 바람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잔소리 많은 것까지 큰오빠는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오빠 등쌀에 나는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귀향을 하고 만 것이었다.

나를 등 떠밀어 보내놓고 정작 오빠는 고향에 잘 오지 않았다. 하기는 고향을 떠난 뒤 나도 그랬다. 명절 때, 부모님 생신 때나 겨우 고향을 찾았다. 늙은 부모가 둘이서 어떤 세월을 보내고 있을지는 관심 밖이었다. 나 살기도 바빴다. 오빠도 그럴 터였다.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 정년퇴직한 오빠는 대기업 이사네 뭐네, 교수 시절보다 더 바쁘게 사는 모양이었다. 알면서도 간혹 배알이 꼴리는 것은 내려가라 등 떠민 장본인이라서였다.

긍게, 니가 고상이 많다. 조기 굽는 것이 월매나 힘든디……

하나도 안 힘들어. 생선 굽는 기계가 있다니까. 올려놓으면 뒤집을 필요도 없이 그냥 구워지는데 뭐.

내가 내려오기 전만 해도 어머니는 커피포트로 물도 끓이고 전자레인지도 쓸 줄 알았다. 직접 밥을 하지 않게 된 뒤로 어머니는 기계 조작법을 자꾸만 잊어버렸다. 기를 쓰고 혼자 사는 편이 어머니의 기억력을 위해서는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효자 아들이 어머니의 기억을 더 빨리 지운 셈이다.

그러냐? 참말 좋은 시상이다이.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일찍 죽은 사램들만 불쌍허제.

어머니가 가스레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불과 이십년 전이었다. 우리가 가스레인지를 사준다고 해도 어머니는 손사래를 쳤다. 그 무렵엔 읍에서 멀리 떨어진데다 도로 포장도 되지 않은 우리 집에까지 가스 배달을 해주지도 않았다. 가스레인지를 들인 뒤에도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이 내려오면 굳이 아궁이에 불을 피워 숯 위에 생선이나 고기를 구웠다. 숯 향기가 배어 훨씬 맛있기는 했지만 불 앞에 쭈그려 앉아 수시로 석쇠를 뒤집어야 했다. 그 고달픈 노동으로 어머니는 우리의 배를 채웠다. 어머니는 자기 앞에 놓인 굴비구이도 그만한 노동을 거쳐 나온 줄 아는 것이다.

참, 큰오빠가 어젯밤에 돈을 오백이나 보냈습디다.

아이고, 잘했다. 고놈으로 우리 현이 등록금 하먼 쓰겄다. 이리 늙응게 워디서 돈 생길 디도 읎어서 쩌번에 현이 왔을 적에 용돈 한푼 지대로 못 준 것이 한이드만은 인자 맴이 놓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는 걸 보니 내 짐작이 옳았다. 어머니가 오빠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게 분명했다. 자식들에게 생전 그런 적 없던 어머니가 내가 온 뒤로 오빠들에게 자꾸만 아쉬운 소리를 했다.

현이 장학금 받았다니까! 오빠들한테 아쉬운 소리 좀 하지 마. 그만한 돈은 있다니까 자꾸 그래 엄마는. 오빠들 보기 창피해죽겠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알았다 알았어. 아가, 화내지 말그라이. 소화 안 된다. 다시는 안 그럴랑게 얼른 밥 묵어라.

어머니가 내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죽을 날 지나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은 어머니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디찼다.

진짜지? 한번만 더 그러면 도로 서울 가버릴 거야!

어매도 읎이 머시매 혼차 밥해 묵고 댕기니라 월매나 힘들 것이냐. 현이가 하도 짠혀서 그랬제. 다시는 안 그럴랑게 지발 화 풀어라이.

현은 내 귀향 계획을 누구보다 반겼다.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게 현의 로망이었다. 그런데도 현은 어머니의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다. 현이 어릴 때 내가 이혼을 한 게 이유였다. 한창때 아비도 없이 어떡하느냐고 어머니는 나만 보면 눈물바람이었다. 나 역시 아픈 손가락이긴 했다. 이혼했다고 통보했을 때 어머니는 본 적 없는 서슬 퍼런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재혼은 생각도 말그라. 애 딸린 에미가 재혼은 무신! 새끼 팽개치고 남자 바꾸는 것이 워디 사램이다냐!

그리 야멸차게 굴었으면서 어머니는 내가 남자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자식 키우고 사는 게 또 안타깝고 안쓰러워 눈물로 날을 지새웠다. 아버지 살아 있을 때는 두 노인네가 수시로 나를 찾아왔다. 온갖 먹을 게 담긴 라면박스를 두세개씩 들고. 내려가고 난 뒤에는 반드시 전화가 왔다.

싱크대 오른쪽 맨 아래칸 반찬통 뒤져보그라.

반찬통에는 당연히 돈다발이 들어 있었다. 두 노인네가 뼛골 빠지게 농사지어 만든 돈이었다. 자식들 다 먹고살 만하니 제발 일 좀 그만하라고, 사람들이 자식들 욕한다고, 오빠들과 내가 만날 때마다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없이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자식들 으름장에 변명이라도 하는 것은 어머니였다.

느그들 한창 클 때 잘 멕이도 못흐고 잘 입히도 못흔 것이 느그 아부지나 나나 평생 한이라 근다. 해준 것도 없음시로 자석들 등쳐묵고 살아 쓰겄냐.

잘 키웠으니까 촌구석에서 자식들 다 이만큼이나 됐지.

워디 우리가 잘 키웠가니. 느그가 알아서 잘 컸제. 니는 딸이라 집안일 거든다고 오래비들보담 곱절로 고생을 했는디…… 불평 한번 안코 잘 커줬어야. 참말로 고맙다이.

정말로 고마워죽겠다는 듯 매번 눈물을 글썽이며 등을 쓰다듬었지만 오빠들은 몰라도 내가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는 건 백퍼센트 거짓말이다. 어린 시절 나는 늘 입이 댓발이나 나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부모치고 차별이 덜했는데도 그랬다. 달이 뜨도록 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저녁을 준비할 때면 오빠들 들으라고 일부러 스텐 그릇을 집어 던지듯 다뤘다. 텃밭에서 채소 좀 따오라는 어머니 말에도 오빠들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매번 불뚝거렸다. 아침마다 도시락 싸는 어머니 옆에서 매눈을 하고 오빠들 반찬과 내 반찬이 하나라도 다른 게 있는지 감시했고, 오빠 중 누구라도 새 옷을 얻어 입은 날이면 식음을 전폐했다. 결국 어머니는 땡빚을 내서라도 내 옷을 살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진학할 때는 무려 보름을 굶었다.

귀허디 귀헌 딸자석을 워찌 천리타향으로 보내겄냐? 광주교대로 가자이.

귀하디 귀한 딸자식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때 서울서 대학원과 대학에 다니던 오빠 둘은 단칸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내가 가면 방 두개짜리로 옮겨야 하는데 농사짓는 부모님으로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오빠 둘 등록금만 해도 허리가 휘었다. 등록금도 싸고 기숙사도 있는 광주교대가 부모님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코딱지만 한 동네를 벗어나 서울로 가는 게 소원이었던 나로서는 딸이라고 차별하는 것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한 끝에 기어이 서울교대로 진학했다. 나는 그런 딸이었다. 불평 한번 없었다니. 어머니는 나이 들면서 좋지 않은 기억을 모두 지워가는 듯했다. 참으로 편리한 기억력이었다. 덕분에 불만 많고 까칠해서 걸핏하면 부모에게 대들던 나는 세상에 다시없는 효녀가 되었다.

엄마. 나 살 만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살 만허기는. 둘이 벌어도 힘든 시상인디 지 혼차 벌어서 제우제우 입에 풀칠이나 했겄지. 안 봐도 훤흐다.

현이도 이번이 마지막 학기고, 몇년 있으면 연금도 나오고, 명예퇴직하면서 받은 목돈도 있어. 뭐가 걱정이야. 여기 온 뒤로는 돈 쓸 일도 없구만.

돈 쓸 일이 왜 없겄냐. 보일라 지름값이다 가스비다 찬값이다, 목심 붙어 있으먼 돈 쓸 일 천지제.

오빠들이 다 줘.

머시매들이 머슬 알가니. 즈그들은 준다고 주겄제만 살림허는 여자헌티는 만날 모자란 것이 돈이여. 거개다 니 손이 오직이 크가니. 끼니마동 이리 비싼 생선을 한마리씩 턱턱 내놓다가는 만석꾼도 거덜 날 판이여. 느그 오래비들은 그런 속은 알도 못헐 것잉마.

그 굴비, 큰오빠가 보낸 거라니까. 오빠가 다달이 굴비 한두름씩 보내.

어머니 모신 뒤 어느날 오빠에게 물었다.

엄마가 젤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아?

호박전. 부추전도 좋아하시지.

딸인 내가 모르는 것을 오빠는 알고 있었다. 딸이라고 또 무슨 차별을 하나, 내가 세모눈을 하고 쌈닭처럼 덤비는 동안 오빠는 찬찬한 눈으로 부모님을 살피고 있었던 걸까. 도둑이 제 발 저려 괜스레 쏘아붙였다.

나는? 나는 뭐 좋아하는지 알아? 그건 모르지?

생김치.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

입도 짧은 애가 생김치만 있으면 밥을 두공기씩 먹었잖니. 그래서 너 아프기만 하면 엄마가 생김치를 담갔어. 가시내라 까탈스러워서 손이 두배는 간다고 엄마가 그러시더라.

어머니는 내 앞에서 한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아들에게 속을 털어놓으며 산 모양이었다. 고슴도치처럼 늘 가시를 세우고 있는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득 내가 아니라 오빠가 내려왔다면 어머니가 사랑채로 옮긴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채와 본채의 거리가 나와 어머니의 거리였다. 내가 만든 거리였다.

엄마 굴비 좋아해. 고깃국이랑 사골국도.

애먼 오빠에게 퉁명스레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날 이후 오빠는 다달이 사골과 굴비 한두름씩을 보낸다.

소고기뭇국을 떠먹던 어머니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니는 참말로 못허는 것이 읎어야이. 출근허고 사니라 밥도 지대로 못해 묵었을 것잉디 워치케 요로코롬 맛나다냐? 나가 헌 것보담 백배는 맛나다. 나는 펭상 밥만 험서 살았는디도 요런 맛이 안 나등만.

그럴 리가 만무했다. 어머니 솜씨는 동네서도 유명했다. 김장철이면 이 집 저 집 불려 다니느라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였다. 어머니가 담근 멸치액젓은 다른 집과 달리 감칠맛이 돌았고, 어머니가 말린 곶감은 유달리 분이 곱게 났다. 어머니 된장에는 골마지도 끼지 않았고, 구더기도 끓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 손이 금손이라고들 했다. 나도 솜씨가 없는 편은 아니지만 어머니에는 댈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요리를 즐기지 않았다. 현이 군대에 가고 난 뒤 만세를 불렀을 정도다. 아들 군대 가는 걱정보다 식사 준비로부터 해방된 기쁨이 더 컸다. 삼시세끼 먹는 것이 나에게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귀찮고 고통스러운 의식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달랐다. 어머니에게 음식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겨울이면 어머니는 두시간을 걸어 읍내 장에 갔다. 자식들에게 비린 것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동태 한궤짝을 머리에 이고 온 어머니는 펌프가 설치된 수돗가에서 차디찬 물로 반나절에 걸쳐 동태를 손질했다. 동지섣달 칼바람이 휘몰아쳐도 어머니의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손질한 동태로 끓인 국은 콩나물국처럼 맑디맑았다. 어머니는 꼬막도 일일이 칫솔로 닦았다. 우리 식구 먹을 양을 하나하나 칫솔로 닦으려면 그 또한 한나절이었다. 어머니 손은 겨우내 발갛게 곱아 있었다.

힘들게 누가 그러고 있어? 그냥 양재기에 담고 한꺼번에 박박 문지르면 되지.

어느 겨울, 보다 못한 내가 한 소리 했더니 어머니는 발간 손으로 꼬막을 박박 닦으며 말했다.

내 자석 입에 들어갈 것인디 그럴 수가 있가니. 하늘로 떠받쳐도 아깝고 귀헌 내 자석들인디. 부모가 자석을 귀히 여겨야 넘들도 귀하게 여기는 법이여야.

덕분에 우리 남매는 뻘 하나 없이 말간 꼬막을 먹고 자랐다. 귀하게 자란 어머니의 자식들은 서울로 간 뒤 한동안 서울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비쩍비쩍 말랐다. 올케들은 남편의 까탈스러운 식성 때문에 넌덜머리를 냈다.

나가 늘그막에 먼 복잉가 모리겄다. 니가 이리 잘해 멕여서 긍가 아픈 디가 한나도 없어야. 내 평상 첨이랑게.

내가 잘해 먹여서가 아니었다. 아버지 가고 내가 모신 뒤로 속병이 사라진 걸 보면 식성에 맞지 않은 음식이 문제였다. 남달리 예민한 사람이 아버지 식성대로 맵고 짠 것만 먹고 살았으니 위장병을 달고 살 수밖에. 나는 어머니 모신 지 몇달 만에 내 반찬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다. 엄마 입맛에 맞게 한 음식들이 도무지 당기지 않아서였다.

잘해 먹여서 그런 게 아니라 엄마 식성에 맞는 걸 먹어 그렇지. 엄마는 평생 어떻게 아버지 입맛에 맞추고 살았어?

내 식성이 워떤지 알기나 했가니. 니 아부지가 해달란 대로 해줬제.

자기 식성도 몰라?

나만 그랬가니? 그 시절에 여자들은 다 그랬을 것이다. 어매가 주는 대로 묵고, 남편이 묵자는 대로 묵고 살았제.

엄마는 고깃국이랑 사골국만 좋아해. 고깃국 중에서도 미역국은 꼭 남겨.

미역국도 맛나야.

맛있으면 왜 남겨? 엄마 미역국 싫어한다니까.

그냐?

어머니는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글고 봉게 시집오기 전에 생일이라고 워쩌다 미역국을 끓에주먼 손도 안 댔어야. 니 말이 맞는갑다.

어머니와 말을 하다보면 이상한 대목에서 심장이 저렸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고 외할머니의 딸이던 시절에는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지 않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머니가 아니라 한때는 마음껏 투정을 부려도 되는 딸이기도 했던 것이다. 열여섯에 시집와 스물둘에 큰오빠를 낳았으니 어머니가 어머니로 살아온 세월은 육십칠년, 어머니가 딸로 살아온 세월은 고작 십육년이었다. 어머니가 딸이었던 시절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시집오기 직전에 외할머니가 세상을 떴고, 어머니가 일찍 간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평생 애달파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 자신의 어머니가 살아 있던 어떤 시절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터였다. 그 시절은 가고 없으니 그만 돌아오라는 듯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광주 사는 둘째 고모였다.

둘째 고모는 정 많고 눈물도 많아 어머니에게는 제일 가까운 시누였다. 그러나 속엣것을 눈곱만큼도 감추지 못하는 솔직한 성품이라 한번씩 어머니 속을 뒤집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고모 때문에 속이 상해 장례식 내내 물 한모금 넘기지 못했다. 장례식장에 오자마자 둘째 고모가 우리 남매를 앉혀놓고는 자식이 셋이나 있으면 뭐 할 것이냐, 서울 가서 성공했다더니 아버지 건강검진 한번 안 시켰냐 호통을 쳤던 것이다. 고모 말이 다 옳았다. 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떴고, 건강검진만 해봤으면 피할 수도 있는 죽음이었다. 고모의 그 솔직한 말이 어머니에게는 비수였다. 어머니도 내심 우리에게 서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때도 이후로도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읍내 살던 고모가 집에 온 적이 있었다. 나는 고모가 온 줄도 모르고 무슨 책인가를 읽는 중이었다. 고모가 매운 손으로 내 등짝을 후려쳤다.

가시내야. 니는 어른이 왔는디 인사도 안 허냐! 자네, 야 버릇 좀 갈체야 쓰겄네. 지 어매가 동동거림시로 일허고 있는디 가시내가 발랑 드러눠서 머 허는 짓이대?

공부허는 중이잖애라. 쟈는 책만 잡으먼 전쟁이 나도 모린당게요. 긍게로 만날 일등이잖애라.

우리 남매가 서울에 모여 살 때 작은오빠가 오랜만에 온 어머니를 붙잡고 내 흉을 봤다. 샴푸 뚜껑도 안 닫고 아무 데나 던져놓질 않나, 비누통 물을 빼지 않아 비누가 퉁퉁 붇질 않나, 짜증이 나서 미치겠다는 거였다.

무슨 계집애가 우리보다 더해. 쟤 머리카락이 수챗구멍을 막아서 더러워죽겠다니까! 쟤 저러다 시집도 못 가. 저런 걸 누가 데려가겠어. 나라도 안 데려간다.

그날 혼이 난 건 내가 아니라 작은오빠였다.

니는 동생헌티 그거이 헐 소리냐? 글고, 긍게 막냉이가 공부를 잘허는 것이여. 집중력이 좋응게로.

공부만 잘하면 뭐 해? 더러워죽겠는데.

공부 잘하면 됐제 또 뭣이 필요허가니? 여자라고 다 깨끔해야 된다는 법이 있다냐? 더러와죽겄으면 죽겄는 니가 치우면 되겄다.

어린애처럼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작은오빠를 흘겨보고 있던 나는 어머니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기는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온 지 한두달 만에 낭창낭창한 서울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던 오빠 입에서 귀에 익은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아따, 신식이요이. 알고 봉게 우리 어매가 최고로 신식이그마.

어머니가 오빠 말대로 신식인지는 알 수 없다. 딸인 나를 대학까지 가르친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오빠들과 달리 교대에 보낸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자식 두고 재혼은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은 걸 보면 더욱 아닌 것도 같았다. 다만 누구 앞에서도 자식들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분명했다. 심지어 자식들에게조차 그 허물을 애써 덮는 사람이었다. 둘째 고모와 통화하고 나면 어머니는 번번이 소화제를 먹었다.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솔직한 둘째 고모가 분명 우리 남매 중 누군가의 흉을 봐서일 터였다. 그래서 나는 둘째 고모의 전화가 반갑기도 했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지난 주말에도 다녀갔는디 그거이 먼 소리대요? 성님은 벨소리를 다 하요이. 아무 문제 없당게요. 사이만 좋구만은 워디서 먼 소리를 들었대?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음성에서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지난 주말에 다녀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이 운운하는 걸 보니 내 이야기인 듯했다.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내 이혼을 철저하게 숨겼다. 이혼한 게 벌써 십오년 전, 이제는 털어놓을 법도 하건만 어머니는 이혼의 이응 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서울 살 때야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어머니 곁으로 오고 보니 숨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바쁘다고 몇년 동안 아내 한번 찾아오지 않는 남편이 어딨겠는가.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당연했다. 고모 성품을 닮았는지 친척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거짓말할 때마다 나는 짜증이 치밀었다. 참다못해 한번은 따져 물었다.

딸 이혼한 게 그렇게 부끄러워?

부끄러워 글가니. 요즘 시상에 이혼이 머 숭이나 된다냐? 씰데없이 숭잡힐깨비 글제.

흉이나 되냐는 앞말과 흉잡힐까봐 그런다는 뒷말 사이의 모순을 어머니는 훌쩍 건너뛰었다. 앞말은 나를 보는 어머니 시선이요, 뒷말은 남의 시선, 모순을 품은 그 마음이 모정일 터였다. 그 마음이 짜증스럽기도 하고, 그 마음에 죄스럽기도 했다.

어머니가 둘째 고모와 통화하면서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사이, 나는 처방약을 식탁의 어머니 자리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화를 잘 다스려 훈훈한 인사로 전화를 마무리한 어머니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먼 책이냐?

나는 손을 뻗어 표지에 적힌 내 이름을 톡톡 두드렸다.

워매! 니 책이냐?

별건 아니었다. 고향 내려와 남아도는 건 시간, 하도 심심해 읍내 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의를 들었다. 두어해 끄적이다보니 운 좋게 별로 유명하지 않은 공모전에서 입상을 했고, 도서관에서는 실적이 필요했다. 그 덕에 지원금을 받아 수필집을 몇부 찍었다. 서점에 놓일 일도 없고 누구에게 줄 일도 없었다. 다만 한 사람, 뛸 듯이 기뻐하지 않을까 싶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출판하기로 결정한 책이었다. 어머니는 밥 먹던 것도 잊고 책을 펼쳐 들었다.

식사 마저 하셔. 국 다 식겠네.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고개를 파묻다시피 책날개에 적힌 약력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서울교대 졸업, 서울대 교육대학원 박사, 삼십삼년간 교사로 재직, 어머니가 소리 내 읊는 한줄 한줄의 내 부끄러운 시간들이 어머니에게는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살맛 나는 시간이었다.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어머니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박사학위를 받던 날, 어머니는 내 박사모와 가운을 입은 채 기쁨에 차오르는 눈물을 꾹 삼키며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손으로 자꾸만 내 등을 쓰다듬었다. 고생했다는, 장하다는, 무언의 칭찬이었을 것이다. 늙은 어머니는 그때와 달리 말이 많았다.

우리 딸, 참말 대단허다. 배운 적도 읎는디 워치케 글을 다 쓰까이. 내 딸이 최고다!

내가 글 배우러 매주 두번씩 읍내에 갔던 걸 어머니는 까맣게 잊었다. 늙은 어머니의 오늘은 쉽게 잊히고, 묵은 기억은 선명해진다.

니는 에레서부텀 그랬어야. 못허는 것이 없었당게.

그 또한 거짓이었다. 나는 공부 외에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운동은 젬병이요, 나물 캐는 것도 다슬기 잡는 것도 동네서 꼴찌였다. 어머니의 가사노동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그런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너무 솔직한데다 낯가림이 심하고 까칠하기까지 해서 친구도 많지 않았다. 잘난 척도 어지간히 했다. 그런 내가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는 못하는 것 하나 없는 만능의 천재인 것이다.

니, 기억나냐? 다섯살이나 됐능가, 읍내 큰집 갔다가 니 혼차 장에를 다녀왔잖애? 큰집에서 장이 월매나 먼디…… 자개 자석들은 열살 넘도록 혼차 장에도 못 가는디 참말 똑똑허다고, 잘난 가시내 나놨다고, 큰어매가 두고두고 칭찬이 늘어졌어야. 니가 고로코롬 똑똑했당게. 그때부텀 나는 니가 크게 될 중 알았다. 장허다, 우리 딸. 참말로 장허다와.

교대 나와 남들 다 가는 교육대학원 졸업한 것이 전부인 인생이었다. 집에서 살림이나 살았으면 하는 보수적인 남편과 하루가 멀다고 싸울 때는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고, 점점 되바라져가는 아이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을 때는 내 인생이 고작 이 정도인가 허망하기도 했었다. 그런 인생을 어머니는 장하다고, 참말로 장하다고, 연신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어머니는 평범한 우리 남매를 하늘로 떠받칠 만큼 귀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고비마다 주저앉지 않고 그럭저럭 다시 일어날 힘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구, 그래, 엄마 딸 천재다 천재, 반내골 천재,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나는 꿀꺽 삼켰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내던졌을 말이었다. 어머니가 늙은 탓이다. 아니 내가 늙은 덕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그랬다.

아이, 여든다섯에 모르겠던 것을 여든여섯 됭게 알겄어야.

죽을 나이 지났다면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내는 어머니가 신기하기만 했는데 어머니 말이 옳을지도 몰랐다. 늙음에 있어서는 어머니가 선배다. 여든여섯에도 새롭게 알아지는 것이 인생이라면 환갑도 지나지 않은 내 앞에는 새롭게 알아질 것들 천지였다. 그러고 보니 글쓰기 강좌에 등록할 용기를 낸 것도 여든여섯 되니 알겠더라는 어머니 말 덕분이었다.

평소처럼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대신 나는 마지막 남은 굴비 살점 하나를 어머니 밥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굴비는 이미 식어 꾸덕꾸덕했다. 식은 굴비라도 배 속에 들어가면 어머니의 피가 되고 살이 될 터였다. 어머니는 식은 굴비를 세상에 다시없는 진미라도 되는 양 맛있게 먹었다. 평범한 우리 남매도 어머니에게는 저 식은 굴비와 같을 것이다.

아이, 나가 참말 무신 복잉가 모리겄다. 걱정이 한나도 없어야. 시상에 나맹키 행복한 사램이 워딨겄냐?

요즘 들어 어머니는 끼니마다 뜬금없이 행복하다는 고백을 했다. 큰오빠에게 말을 전했더니 한참이나 대꾸가 없었다.

엄마가 행복하시다잖아? 좋아하라고 전했구만 왜?

내 말에 오빠는 쯧쯧 혀를 찼다.

언제 철들래? 진짜 행복해서 하시는 말씀이겠냐? 자식 손주 맘껏 못 보시는데 행복은 무슨! 당신 가시고 나도 아쉬워하지 말라고, 우리들 편하라고 하시는 말씀이지.

모시는 나보다 어머니 마음 더 잘 헤아리는 큰오빠에게 꼬라지가 나서 쏘아붙였다.

엄마 맘 그렇게 잘 헤아리는 사람이 왜 오지도 않는대?

내가 꼬라지를 부리든가 말든가 오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그 쉬운 게 쉽지가 않네. 별일도 아닌데 뭐가 그리 바쁜지…… 다 핑계지 뭐. 일간 한번 내려가마.

오빠가 제풀에 꺾이자 꼬라지 부린 내가 민망했다.

됐어. 엄마는 오빠가 바쁠수록 좋아하셔. 내 자식이 잘나서 못 오는 거라고 스스로 가스라이팅하는 사람이니까 맘 쓰지 마. 오빠 일이나 잘해.

어머니가 웬일로 밥을 말끔히 비웠다. 세상에 내놓지도 못할, 내 이름으로 나온 책 한권의 힘이었다.

엄마, 마실 가세. 벚꽃이 만개했어. 이따 비 그치면 꽃구경하러 가세.

마을로 진입하는 길가에 며칠 전부터 벚꽃이 한창이었다. 햇빛 화창한 날의 벚꽃도 일품이지만 가는 비에 젖은 벚꽃은 고적하니 또다른 맛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어머니는 비처럼 흩날리는 벚꽃 아래 우두커니 서 있곤 했다. 그때의 어머니는 어머니임을 잠시 잊은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어머니가 어머니임을 잠시 잊었으면 싶었다.

갸는 정 읎어.

그 옛날 젊었던 어머니는 정 없이 일찍 떠나버린 어머니를 그리며 벚나무 아래를 서성였던 것일까? 그러나 늙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회한 같은 건 비치지 않았다.

그럼 산수유 보러 가세.

벚꽃보다 한달 먼저 핀 산수유꽃은 아직도 연노랑으로 산과 들을 수놓고 있었다.

갸는 속 읎어.

어머니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웃음이 번졌다. 어머니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서울 사는 셋째 고모는 부부싸움만 하면 우리 집으로 내려왔다. 한달이고 두달이고 눌어붙어 어머니 속을 끓이던 셋째 고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서울 고모만 생각하믄 미안해죽겄어야. 난중에 가고 난 뒤에사 알았는디 고숙헌티 허구헌 날 맞고 살았단다. 좋아허는 갈치나 양껏 지져줄 것을…… 죽어서도 나가 서울 고모 볼 낯이 읎다.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아 몰랐는데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어머니 마음속에도 때로는 지옥이 들끓었던 것이다. 그 지옥은 우리 때문이었다. 우리 먹을 것도 부족하던 시절에 시댁 군식구가 달가웠을 리 없다. 우리가 어머니에게는 천국이고 지옥이었다.

벚꽃이든 산수유든 아무 꽃이나 보러 가세.

꽃을 멀라고 나가서 볼 것이냐. 눈앞에 젤로 이쁜 꽃이 있는디.

낼모레 환갑인 딸을 보며 어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마음속에 봄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어머니의 따뜻한 말이 피워낸 봄이었다. 문을 닫기 전에 나는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내가 나가자마자 불을 끈 방 안은 어두침침했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시선은 하염없이 내 뒤를 좇고 있었다. 오래 햇빛을 보지 않아 희디흰 어머니의 얼굴은 이지러진 데 하나 없는 보름달 같았다. 내 걸음걸음 보름달의 환한 빛이 고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