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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주선 金周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토록 따뜻할 수 있는 세상, 따뜻해야 할 세상: 2010년대 감정 교육 방식의 한 경향」 등이 있음.

rangrang9908@naver.com

 

전성태 全成太

소설가. 소설집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 『늑대』 『두번의 자화상』,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등이 있음.

jstroot@hanmail.net

 

조경선 曺京仙

국어 교사, 이음학교 교장, 전(前) 전남국어교사모임 회장, 저서로 『서울 여자 시골 선생님 되다』 등이 있음.

jksksh1018@hanmail.net

 

 

 

 

왼쪽부터 조경선 김주선 전성태 Ⓒ 신나라

왼쪽부터 조경선 김주선 전성태 Ⓒ 신나라

 

 

전성태(사회) 봄호 문학초점 사회를 맡은 소설가 전성태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곳은 전남 순천의 골목책방 ‘서성이다’인데요, 문학초점 좌담을 주로 서울 창비 사옥에서 하다가 서울이 아닌 곳에서 하는 건 처음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상황도 길어지고 있는데 『창작과비평』 독자들께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이는 소풍 같은 지면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작년 봄부터 이곳의 순천대학교에서 학생들과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눌 책 중에 호남 지역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있고, 작가들이 작품에서 지역 이야기를 다루고도 있어요. 지역이라는 화두도 곁들이며 이야기할 거리들이 많아 대화가 기대됩니다. 초대손님으로 가까운 곳에 계신 두분을 모셨는데 인사 부탁드립니다.

 

김주선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평론가 김주선이라고 합니다. 조선대학교의 재난인문학 연구사업단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고, 광주 문예지 『문학들』의 편집위원으로 있습니다. 두분 선생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조경선 저는 전남 광양 이음학교의 교장으로 있는 조경선입니다. 이음학교는 전라남도교육청 공립 위탁형 대안중학교인데요, 학교에 적응하기가 어려운 아이들을 위탁받은 치유성장학교라는 기조로 개교한 지 1년 반 됐습니다. 그전에는 참여·실천문학, 계급문학에 관심을 갖고 영등포노동자문학회에서 활동하다 농민운동 하려고 고흥으로 와서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했습니다. 평소 동료 교사들과 함께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교실에서 함께 읽을 수 있는 좋은 문학작품에 대한 고민도 나눠보고자 합니다.

 

 

최백규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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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 최백규의 첫 시집으로 시작해볼까요. 시인이 “나를 번역할 수 있다면 뜨거운 여름일 것이다”(「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시집 전체의 키워드 중 하나는 ‘여름’입니다. 여름은 가장 예민한 성장기, 어린 시절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여름이라는 맹렬한 이미지하고 달리 시들이 전체적으로 죽음으로 채색돼 있기도 합니다.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해요. 8년 만의 첫 시집이니 시인에게는 궁리하고 모색하는 시간이 꽤 길었을 텐데, 시집이 고유한 색채로 단단히 묶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경선 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두분이 깊이를 더해주시면 좋겠습니다.(웃음) 읽으며 시인의 삶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첫 시(「향」)부터 부모님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금호강 너머가 보이는 대구를 배경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영’과 만삭의 어머니 ‘선’의 이야기가 나오죠. ‘나’는 아직 어머니의 배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씻어도 빈손에서 향냄새가 가시지 않는”다고 말해요. 시집을 읽어나가면 젊은 아버지가 암에 걸려서 죽는 것까지 천천히 그려지는데 태어나지도 않은 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직감하는 내용의 시가 처음에 등장하니 강렬하기도 하면서 시집을 열기에 정말 알맞았던 것 같습니다. 또 우울한 시대상 역시 시 안에 잘 담겨 있어요. 시인이 1992년생이니까 2010년대의 시대상이라 생각돼요. 특히 이명박정부 시절에 이십대 청년들은 맹렬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보수정치와 극심한 경쟁, 실업난을 겪었는데, 당시의 보편적 정서가 시집 전반에서 느껴져요. 학교현장에서 보면 아이들은 스물 이후의 삶에 대해 오히려 잘 상상하지 못해요. 어른들은 스무살만 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말하지만 실제 이십대의 삶은 이 시집에서 볼 수 있듯 “열병”(「치유」)이나 “열꽃”(「열꽃」)처럼, 뜨거운 갈망과 열정이 있어 막 달아오르기도 하지만 관계나 사회, 우주 속에서 굉장히 막막하거든요. 영화 「버닝」에서 유아인이 연기했던 인물의 모습처럼요. 사랑과 인생에 대해 갈망하지만 아직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상실과 어려움이 시에서 느껴져서, 또 이것을 지금 한국사회의 젊은 청년들은 보편적으로 다 겪고 있겠구나 싶어서 말하자면 ‘이십대의 초상’을 두루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성태

전성태

전성태 시작이 아니라 기승전, 마무리까지 하시는군요.(웃음) 따지고 보면 젊다는 게 슬픈 건데 최백규 시집을 요즘 세대의 초상으로 읽으니 더 창백한 이미지로 떠올라요. 구체적인 시어를 선택해서 그것으로 비롯되는 상징을 만들어내는 힘이 굉장히 뛰어난 것 같습니다. 예컨대 ‘장마’라는 시어가 ‘물바닥’이라든가 ‘여름방학’ ‘식지 않은 이마’와 같은 이웃 말들을 거느리며 시집에 산재해요. 이 시어가 발화되는 걸 보면 “문득 이 계절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덫」)라거나 “왜 비가 그쳐도 우리의 장마철은 끝나지 않는가”(「장마철」)라고 하며 아픈 시절을 훑기도 하고, “비를 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미래”(「숲」)라며 같이 젖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죠.

 

김주선 처음에는 시인의 나이를 모르고 읽었습니다. 시집 전체에 죽고 아프고 다치는 이야기들이 일관되게 등장하더라고요. 보통 그런 일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겪게 되곤 하잖아요. 그래서 시인을 막연히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으로 상상했던 거예요. 또 시집이 아날로그라고 할까요, 옛날 분위기도 좀 나잖아요. 옛날 사물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고, 그러다보니 어렴풋이 학생운동 같은 느낌도 받았고요. 근데 읽다보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승화나 달관의 태도보다 강렬한 에너지, 일종의 열정이 느껴졌어요.

 

전성태 대결의 밀도 같은 것 말이지요? 「애프터글로우」같이 신에 대해 말하는 시편에서 저도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신을 배운 이후로 미안하다는 말보다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다” 같은 구절 말이죠.

 

김주선 또 여름밤에 대해서 “저물어가는 여름밤이자 안녕이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라고 하는 대목은 어떤 결연함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요. 말씀하신 대결의 밀도가 정확한 표현인 듯합니다. 달관이나 깨달음을 통한 해탈보다는 여전히 세상과 대결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구나 싶었던 거죠.

 

전성태 시집에서 주요 시어들을 추출해보면, ‘화분’ ‘여름’ ‘장마’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시인이 상징적으로 쓰는 건 장마인데, 그 위에 가난과 죽음, 병실과 같은 이미지가 더해지고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 또 어머니의 병환까지 연결됩니다. 자칫 감상주의로 빠지기 쉬운 흐름인데 시인이 고독한 화자를 잘 구축해낸 것 같아요. 이 시편들이 현재 시인의 나이보다 더 어린 시절, 성장기로 구부러져 있어서 노스탤지어에 잠식될 수도 있을 텐데 그 위험에서도 벗어나 있는 것 같고요. 역시 ‘대결’을 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해설에 나오는 ‘레트로’ 감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든 시인들이 거쳐온 통과의례 같은 첫 시집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시를 구성하는 화소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요즘 시와는 조금 다른 듯하죠. 저는 이러한 감성이 다소간 선배 시인들에 대한 경도로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겁고 유려한 호흡, 고전적 어투, 사라져가는 삶의 풍경 재현이라든가 고독한 화자의 이미지가 이 시집을 친근하고 가깝게 느끼게 하는 동시에, 회상에서 길러진 우울한 정조, 가난과 상실감, 시인이 시를 대하는 태도는 한국 서정시의 익숙함 가운데 있어요. 박상수 시인도 해설에서 신대철 이성복에서 기형도 조연호 박준으로 이어진 그 계보를 이야기해놓기도 했죠.

 

김주선

김주선

김주선 노동을 이야기할 때 조금 다르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본인 노동에 대해서는 시 쓰는 것 말고는 거의 언급이 없다시피한데, 그 대신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올라가 이야기합니다. 요즘 노동을 말하는 대다수의 작품들이 회사생활을 다루고, 또 그것을 다루는 태도 역시 ‘쿨’하거나 명랑하게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아예 공장이나 일용직이 나오다보니까 다르다고 느낀 것 같아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을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연장해서 감각하는 것도 말씀하신 레트로 감성을 느끼게 하는 요소인 듯싶습니다. 언뜻 일종의 제스처처럼 읽힐 여지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대체로는 시집 안에서 잘 버무려진 듯해요.

 

조경선

조경선

조경선 어렵다는 인상 때문에 교사도 학생도 젊은 시인의 시집을 읽기 어려워하지만, 이 시집은 문학 시간에 함께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사하는 문장이나 작법이 말씀하신 트렌드에 조금 벗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그래도 제게는 레트로라는 키워드보다 지금 이십대 청년의 모습이나 시선이 더 강하게 다가오는 시집이에요. 「치유」라는 시를 보면 “일을 하다 가벼이 접질린 너를 업고 돌아왔”어요. 그러고 “어지러이 널린 술병을” 줍고 “시뻘건 라면 국물에 즉석밥을 말아 먹으며” “해롭고 불안”하다 느끼면서 동년배로 짐작되는 ‘너’의 발목에 “찬 수건”을 얹어줍니다. “단화 한켤레를 선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단화와 라면 국물과 즉석밥의 시대를 사는 청춘들이 서로의 살갗에 귀를 대면서 치유하고자 하는 우정 같은 게 느껴져요.

 

전성태 90퍼센트의 죽음 이야기와 10퍼센트의 사랑, 미래에 대한 기대, 생명에 대한 긍정이 자리 잡고 있는 시집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어요. 10퍼센트를 적극적으로 읽어낸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죽음이 압도하고 있고, 살아 있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기척처럼 아주 미약하게 드러나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신뢰가 가더라고요. 시를 통해서 전달하려는 전언이 얼마나 진정한가에 대한 고민이 깊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시집 끝에서 두번째에 실린 「2014년 여름」의 마지막 구절은 “소년이 끝났다”이지요. 이 시집을 통해서 ‘소년 시절’이 잘 갈무리된 듯합니다. 이 소년의 행로와 함께 앞으로의 시도 기대해보겠습니다.

 

 

김윤환 『내가 누군가를 지우는 동안』(모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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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 김윤환 시집으로 넘어가볼까요. 시인이 전주에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시집이 나온 모악 출판사는 전북의 문인들을 주축으로 지역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주의 출판사예요. ‘시인의 말’ 중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이 “아득한 기억을 붙잡고/매달리다가 마침내 그 풍경을/지우기 위해 시를 써왔다”였어요. 제게는 자신의 시가 과거의 기억으로 많이 향해 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 그것에 대한 시인 나름의 양해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말이 자신의 시세계에 대한 소개처럼 느껴져요. 우리에게 익숙한 서정시와 함께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에서 만났던 시도 꽤 있어서 흥미로웠고요. 시인이 실제 목사이기도 한데 읽다보면 화자가 목회자 같다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들어요.

 

조경선 4부에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시들이 모여 있어서 인상이 깊게 남는 것 같아요. “강대상에 올라”(「주일서정」)간다든지 “강단(講壇)의 위엄이/강단(降壇)의 위험으로 바뀌는 줄도 모르고/목청을 돋우며 살아왔네”(「몽학도(蒙學徒)」)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누구의 인생이 이럴까 생각해보니까 저도 목사님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김주선 「갱생의 뿌리」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려면 먼저 원수가 분명히 보여야 한다 원수를 발견하는 것처럼 충격적이고 두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하죠. 성경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게 사실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시인은 “저주가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저주의 강을 건너야 한다”면서 “거듭남의 뿌리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 곳이 아니라 원수를 가장 깊이 저주하는 고통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해요. 그래야 갱생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요. 변증법적인 원리죠. 「위험한 의식」도 비슷해요. 사람들이 세족이니 청결이니 하는 것을 바라겠지만 사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노아의 홍수 이래/무균의 샘은 없”을 뿐만 아니라 “정화수에 비친 제사장의 얼굴/그 눈에 티끌”이 묻어 있기 때문이에요. 지젝(S. Žižek)식으로 말해 자기 얼룩은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완전한 청결’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삶의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이렇게 기독교적 상상력과 변증법적 통찰이 잘 버무려진 시편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성태 그 부분을 좀더 연장해보자면 종교와 문학의 변증법도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시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시를 꼽자면 「갱생의 뿌리」예요. 다윗을 시인으로 칭하며 저주의 고통을 겪어낸 다윗이 위대하다고 하잖아요. 성(聖)과 속(俗)의 길항관계처럼 이분법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한다면 시인의 길과 목자의 길이 서로 회통하는 광경을 보는 듯했어요. 그게 사람의 길이다, 하며 편들어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조경선 「몽학도」의 “길을 몰라 길을 잃은 적보다/아는 길을 고집하다/길을 놓친 적이 많았네”라는 구절은 일견 단순하고 평범한 잠언같이 들리지만 시인이 스스로의 삶을 성찰한 주요 메시지입니다. 앞서 읽은 최백규 시의 청년들이 길을 몰라 헤매기도 하는 반면 기성세대는 정말 아는 길을 고집하다가 실수가 생기고 도태되기도 하거든요. 그런 현실을 담담하게 진술한 것 같아서 밑줄을 쳤어요. 「칼집」은 “칼을 빌려다 시를 다듬는데//한마디씩 다듬을 때마다 손마디가 날아가고//(…)발목이 날아갔다”라며 시를 쓰는 치열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게 벼린 시가 “칼집을 빠져나와//알몸의 바람으로 훨훨 사라져갔다”는 구절도 인상적이고요. 「늦봄의 문」의 마지막 문장은 “평화를 노래”하고, “무덤을 비추는 빛을 볼” 줄 아는, “이 땅의 시인”이며 “이 땅에 목사”로 살고 싶다는 시인의 간절한 바람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전성태 저는 또 무심하고 단순하게 쓴 서정시들에 끌리기도 하더군요. 「맨 끝에 도착한 발」이라든가 「늙은 우물」 「판도라」 「절정」이 그랬어요. 「무우」를 보면 “차라리 내가 꽃이었으면/차라리 내가 빛에 타들어가는/외눈박이였으면//바람 숭숭 들어간 하얀 무우(無憂)/지옥에서 천국을 복사하는/근심 없는 백치였으면”이라며 가정법을 사용해 시를 전개하는데, 이렇게 단순한 어법이 오히려 독자와 공명하는 지점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인물열전 같은 시들도 재밌는데, 「늦봄의 문」은 문익환 목사를 바로 옆에서 감각할 수 있는 이야기 시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좀 익숙한 세계죠. 거칠게 묶자면 중년 시인의 회환이 담겨 있는 시편들은 상대적으로 재미가 덜하기도 했습니다. ‘내 시가 기억을 겨냥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면 그 회한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거예요. 저는 그것이 형식에 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태도에 대한 고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태도가 뒷부분의 종교와 만났을 때는 긴장감 있게 형성되는 반면, 자기 인생하고 만났을 때는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경선 “오십이 넘은”(「구름꽃집」)과 같이 화자의 나이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게 드러난 부분들은 저도 읽으면서 멈칫하게 되었어요. 나이 정보가 시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결정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50세’ 이렇게 나와 있으면 ‘중년의 감성’이라면서 흥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고요. 시를 통해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는 부분은 좋았어요. 군대에서 제대한 둘째 형이 취직한다고 도장을 파러 도청 앞에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에서는 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하고(「탄착점」) 황석영 작가의 방북사건도 시(「늦봄의 문」)에 들어와 있어요. 「수세미오이꽃」에서는 한국전쟁과 이제껏 이어져온 분단현실을 그리고요. 식모살이(「그리운 봉자 씨」)나 콜센터, 물류센터 노동자(「투명한 그물」)의 모습을 통해 산업화의 단면이나 최근의 노동현장까지 볼 수 있죠.

 

김주선 나이가 들어 삶에 대한 깨달음이 깊어지면 실험적 시도나 미학적 특질의 강화보다 삶의 통찰을 보여주게 되는 경향이 있기도 한데, 이런 점은 김윤환 시인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매력이라면 매력인데 아쉽게 볼 수도 있겠다고 여겨져요.

 

전성태 아무튼 이런 목사님이 있으면 그 교회에 한번 가서 앉아 있어보고 싶어요.(일동 웃음)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저주가 사랑이 되기 위해서 먼저 저주의 강을 건너라고 설교하실까 싶어요. 주일에 예배 집전하러 “구두 대신 슬리퍼” 딱딱 끌고 나가서 예배당을 둘러보는데 “맨 뒤켠 어디쯤 남루한 청년 하나”가 “물끄러미 손수건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순간 예배당의 불을 끄고 싶었”(「주일서정」)다는 말을 하기도 하잖아요.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지만, 뭐랄까 인간의 세계에 아주 밀착됐던 한 시인이자 목회자의 초상이 잘 드러난 시집 같아요.

 

 

박정대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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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 우리 이제 겨울로 갑시다. 박정대 시집입니다. 아까 잠깐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오늘 읽은 세 시집의 교집합을 찾아보면 ‘레트로’가 아닐까 싶어요. 최백규 시에서는 다시 아릿해지는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이, 김윤환의 시집에서는 민중시들이 가진 기율들이 그랬고, 이번 시집에서는 우리가 함께 겪어온 인물, 음악, 영화와 사진, 시와 같은 텍스트는 물론 술과 혁명과 낭만, 그리고 대륙적 상상력이니 하는 그리운 코드들이 즐비해요. 박정대의 열번째 시집을 어떻게 감상하셨나요?

 

김주선 저는 사실 소설 비평을 주로 하다보니 시집을 매번 챙겨 읽거나 경향을 파악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박정대 시인의 시집도 이번에 처음 접하게 됐어요. 그런데 시집을 읽으면서 시적 화자하고 실제 시인과 분리를 시켜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조경선 맞아요. 「오, 이 낡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27 행성에 내리는 센티멘털 폭설」(이하 「오, 이 낡고」)에는 여러 유명 작가, 음악가, 철학자 사이에 본인이 나오죠. 본인 초상화뿐 아니라 자기가 그린 그림이 실려 있기도 해요(「이절극장」). 시 본문에 자기 이름도 왕왕 나오고요.

 

김주선 읽으면서 이분은 정말…… 멋있는 분이시다.(일동 웃음) 요즘 찾아보기 어려운, 멋을 간직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랄, 극동, 북방, 시베리아를 떠다니는 이방인, 변방의 오랑캐가 되어서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 새로운 것을 찾아 떠도는 호탕한 사내가 그려지는 시들이에요.

 

전성태 보헤미안 기질이 듬뿍 담겨 있는 시인데, 지금 시기에 읽으니 코로나 때문에 다락방에 갇혀 있게 된 어떤 사람이 떠올라요. 반은 술에 취해 있고 말이죠. 그러니까 몽상으로 많은 여행을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코로나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시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조경선 예전에 읽었던 책과 보고 듣던 음악, 영화, 사진, 이 모든 것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내서 다시금 시인이 주석을 다는 느낌의 시집입니다. 인용되는 예술가와 작품들을 보면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것도 같아요. 톰 웨이츠, 빅토르 최, 보들레르, 랭보, 윤동주, 영화 「이글라」와 「아비정전」 등 셀 수가 없죠. 서유럽과 러시아의 대륙을 넘나들며 시가 뻗어나가는 상상력이 무척 크고 선도 굵은 것 같아요. 근데 또 현실은 「이절극장」이라는 시에서처럼 정선의 조그만 마을에 오두막집을 짓고 그리운 동무들을 부르고 싶어하는 듯한데 그럴 만한 형편이 못 되는 처지가 역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 그 격차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성태 시인이 낭만주의자, 탐미주의자인 것은 분명하고요. 그런데 그것을 자기도 인정을 딱 하고 밀고 나가버리니까 저 역시 어느정도 인정하게 돼요. 시인의 포즈가 ‘나 그런 사람 아니야’였다면 참 재미없었을 거예요. 내키는 대로 형식 실험을 다 해버리고 있습니다. 이 자유로움이 말씀대로 멋있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좀 강요받았나 싶기도 하지만요.(웃음) 사실 저는 혁명, 이런 단어가 나왔을 때는 처음에 조금 당황했어요. 저는 문학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이제 개인어로 추락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너무나 그립고 새뜻한 단어처럼 나와서 뭐지?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혁명’에 대해서는 끝까지 내 언어감각을 밀쳐놓고 읽었어요. 그런데 시집을 통과하고 나면 시인이 감당하고 있는 혁명이라는 게 마냥 우스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인이 문학, 시 쓰는 행위를 통해서 꿈꾸고 있는 어떤 혁명성이나 이 세계에 대한 불편함 혹은 몽상 같은 것들을 존중하게 됐다고 할까요. 나와 그가 가지고 있는 혁명의 이름값은 여전히 다른 것 같지만 그의 혁명도 소중하고 고유하다 생각했습니다. 한편 ‘음악’이라는 요소도 이 시집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지죠. 소재로 등장할 뿐 아니라, 음악가에 대한 끝없는 친연성을 넘어 음악과 시를 거의 동일시하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또 시에 대한 태도 역시 자신이 그려놓은 시의 악보를 내어놓으니 독자가 마음대로 편곡해도 된다는 쪽으로 보이거든요. 그런데 주석을 이렇게나 많이 달아놓은 데서는 오히려 편곡, 오독은 안 된다는 완고함이 읽히기도 했고요. 이 시의 형식적인 실험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보셨어요?

 

김주선 시 하나에 12면에 달하는 많은 주석을 단다든가(「대관령 밤의 음악제」 27~58면) 다큐멘터리 내용을 나열하기도 합니다(「삼나무 구락부 8진」). 27명의 음악가, 철학자, 작가들의 사진이나 초상화와 함께 그들의 이름과 삶에 대해 하단에 적어놓은 시도 있죠(「오, 이 낡고」). 이 시집이 가진 내적 일관성 위에서 시집의 시도들이 모두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시에 대한 규정이나 장르적 위계, 시어의 어울림에 대한 통상적 견해를 혁파한 게 일종의 민주성을 달성한 것으로 보여 긍정적으로 생각된달까요? 그런데 이 실험은 “이절은 일절과 삼절 사이에/사랑은 삼랑과 오랑 사이에”(「이절에서의 눈송이낚시」 261~75면)처럼 자칫 너무 가벼워 보일 위험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시집에서 보이는 일종의 낭만성을 다른 문예사조적 관점에서 비판하기도 쉬운 것 같고요.

 

전성태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인장을 박아놓은 부분이 눈에 띄기도 했어요. ‘내면의 리얼리즘’이라고 하잖아요. 「대관령 밤의 음악제」의 방대한 주석처럼 이 시집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낡은 시집도 들춰보고 겨우내 시집 한권과 사귀어봐야 할 것 같았어요. 이제는 시 혹은 시집이 감성의 키워드나 링크로써 기능하면서 아주 두꺼운 텍스트, 무한대의 텍스트가 될 수 있잖아요. 그런 시간을 공유하면서 기꺼이 ‘내면적 동지’가 되고 말죠.

 

조경선 지역적인 특성에 대해서 한마디 더해보자면, 시인의 고향이 강원도라는 것을 알고 나니 말하자면 대륙적인 심상이라는 것에 좀더 눈이 갑니다. 강원도라는 북쪽 끄트머리에서는 북방이나 대륙같이 화통한 것들을 더 쉽게 바라볼 수 있다고 할까요. “구름과 구름 사이에 걸쳐 놓은 양탄자가 마르고 있었다, 먼 곳에서 말 타고 돌아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오, 이 낡고」) 같은 구절을 보면, 남쪽 사람들은 말 타고 돌아온다는 표현 잘 안 할 것 같거든요. 그런 정서가 확실히 있구나 싶었어요. 제가 몸담고 있는 전남국어교사모임에서 전남교육감 인정 문학 교과서를 준비 중이에요. 전남 지역의 사건, 언어, 인물, 역사성 등이 투영된 작품을 수록해보자는 방향성을 가지고, 꼭 이쪽 출신 작가의 작품으로만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성, 공간성이 작품에 반영되는 사례를 모으려고 해요. 학생들이 내가 사는 지역, 내 삶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게 구체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문학작품을 선별해 모아가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지역색을 가늠해보니 무척 재미있습니다.

 

전성태 시집 세권에 대한 독후감은 이렇게 마무리를 지어볼까 합니다. 역시 시 독서는 한권의 시집에서 통일되게 드러나는 시적 화자를 만나는 재미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오늘 읽은 세 시집은 그게 선명하게 잡혔고, 한자리에 앉혀놓기 불가능해 보이는 개성 강한 세 시인의 초상을 발견할 수 있어서 아주 유쾌했습니다.

 

 

손병현 『쓸 만한 놈이 나타났다』(문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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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 소설로 넘어가보죠. 『쓸 만한 놈이 나타났다』는 손병현의 두번째 소설집이에요. 첫번째 소설집과의 사이에 장편도 두권 있었는데, 그중 2017년에 나온 『동문다리 브라더스』(문학들)라는 장편과 이번 소설집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적으로 또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 8편은 각각 5·18 부상자나 일반 시민 피해자,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들불야학과 유족 어머니의 이야기, 또 여전히 가시지 않는 간첩 배후 조종설, 일상적인 호남 차별 등 다양한 방식으로 5·18을 조명하고 있어요. 김주선 선생님이 관련 연구도 하시고 전문가이니 말씀을 열어주시면 어떨까요.

 

김주선 일단 주목되는 점은 앞서 짚어주셨듯이 소재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점이에요. 5·18을 아주 다각도에서 접근하고자 한 작가의 포부가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물론 그중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파괴된 삶, 트라우마같이 그동안 기존 문학에서 비교적 자주 다루어진 이야기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80년 5월’을 넘어서 ‘지금 현대의 사람들이 만들어가고 있는 5·18은 어떤 모습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어 의미가 깊습니다. 「민주유해자」는 이 안에서도 독특한 작품이에요. 5·18 당시 상무대 영창에서 고문을 당한 ‘홍철’을 중심으로 유공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은 무엇인지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쓰는 게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유공자라는 게, 말을 꺼내기 어려울 만큼 성역화되어온 측면이 있거든요. 또 소설에서는 짧게만 나오지만 유공자 보상 같은 이권을 두고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이런 소재를 수면 위로 끌어내 대놓고 쓴 경우는 저는 처음 봤어요. 성역의 한꺼풀을 벗겨내고 5·18을 좀더 다각도로 담아내기 위한 노력이 돋보입니다.

 

전성태 연구에 따르면 그간 5·18 소설들은 기억의 재현, 죄의식의 표출, 상처의 치유를 주로 다루었다고 해요. 선배 작가들은 당사자로서 5·18을 재현하는 문학,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나 트라우마 쪽으로 많이 창작해온 게 사실이에요. 다음 세대가 그걸 넘어서 새로이 5·18을 써야 한다면, 단순한 재현을 넘어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이 소설은 그보다는 선배 세대의 전철을 밟고 있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그래도 사회·역사적 측면에서 봤을 때 5·18을 현재의 이야기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말해져야 하는 측면을 작가가 용기 내서 개진하고 있어요. 또 작가가 가지고 있는 어떤 집념이나 사명감도 높이 사고 싶고요.

 

조경선 학교에서는 기념일이나 이슈에 맞춰 다양한 자료로 공부하고 생각해보는 ‘계기수업’이라는 것을 합니다. 역사과, 국어과 선생님이 만나서 5·18에 대한 어떤 작품을 아이들과 함께 읽을까 고민해보기도 하는데, 생각보다 마땅한 책이 많지 않습니다. 너무 길거나 어렵지 않아야 하는데, 이 소설집이라면 중·고등학교 교재로 강력히 추천할 만합니다. 하나만 고르자면 마지막 작품인 「광장」이 가장 좋을 것 같고요. 80년 5월 어느날 전남도청 앞 광장을 차지한 군중들이 “시국얼(을) 논해 보는 것도 존일(좋은 일)”(178면, 괄호는 인용자)이라 마이크를 들고 한마디씩 하는 말을 중심으로 전개되죠. 끝까지 광장에 모여 대동세상을 꿈꿨던 강렬한 열기가 느껴지고, 마지막에 “군인 아저씨들이 또 오셔브렀네요이. (…) 자, 모다 애국헐 준비되얐소?”(197면) 하는 부분의 감동도 커요.

 

김주선 「태극기 아래서」의 의미도 짚고 싶어요. 이 소설은 5·18 때 아들을 잃고 “우리 아들 폭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127면)기 위해 민원실, 경찰서를 돌아다니며 “분탕질”(133면)을 시작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어머니는 점차 다른 민주화운동, 농민운동, 환경운동 현장에서도 자리를 지키고, 세월호 분향소에서 유가족과 부둥켜안고 울기도 하죠. 5·18 유족과 부상자, 구속자 등이 중심이 돼 설립된 단체인 ‘오월어머니’ 두분의 전화 인터뷰에 기초한 소설이라고 해요. 어머니들에게 어떤 의식이 싹트는 과정이 활동, 참여 같은 수행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바꾸는 수행적 의식이라고 하는 게 이렇게 탄생하는구나. 어떤 사상이나 이념, 이론을 넘어서는 변화가 이런 수행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 새삼 들어서 감동적으로 다가왔어요. “우덜은 모냐 경험했기 땀시 그 고통이 어짠 것인지 알고도 남제”(148면)라는 어머니의 말에서 보이듯 경험적 차원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연대나 소통의 보편적 지평 같은 것이 아주 설득력 있게 전해집니다.

 

조경선 어머니 목소리로 전라도 사투리를 구현하는 대목들은 정말, 서울말 하나 끼어들 자리 없이 서술이 막 달려가는데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이 참말로 마지막이다 생각헌께로 아무리 이빠지럴 앙물어도 발싸심이 나고 숨이 가빠집디다. (…) 남편 글씨가 바람탄 것 맨치로 삐뚤빼뚤 한허고 흔들립니다. (…) 하나뿐인 아들 사망 신고서를 쓰는 애비 맘이 오죽했을지 짐작허나 마나 물어보나 마나 빼따구에 바람 든 것맨치로 시리고 애랬겄지라”(126면) 같은 부분 등 광주의 말맛이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과 엉겨붙으면서 살아 있다는 점만으로도 소설의 가치가 크다고 봅니다.

 

전성태 단순히 말을 옮기는 차원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단어들을 포착해내는 감수성이 있어요. 「배고픈 다리 밑에서 홍탁」도 무척 잘 읽었는데 여기서도 구술이 갖는 힘이 드러나죠. 다소 틀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손병현 작가의 소설적인 활력은 구술 형태로 쓰인 부분에서 최고로 살았다고 봅니다.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민주유해자」에서 홍철이 가진 피해 당사자로서의 트라우마가 중요하게 부각되지만, 아내의 캐릭터는 너무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형상화에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내 역시 남편의 트라우마를 함께 짊어지고 있는 존재인데 소설 속에서 무력하게만 그려지다가 결국 홍철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지요. 이런 부분은 오히려 5·18의 현재적 재현에도 한계로 작용할 것 같아요. 또 「생선매운탕」에서 호남 차별 발화들이 경상도 상관으로부터 나오는데 이렇게 단순한 정형화도 오히려 불편한 감이 있더라고요. 「광장」의 “내 피에 경상도 피라고 써져가 있습니꺼? 그건 아니지 안씁니꺼?”(193면) 같은 시원한 구절과 비교하면 차이가 느껴지죠.

 

조경선 저 역시 「배고픈 다리 밑에서 홍탁」에서 홍어와 광주를 연결하는 비유는 조금 편리한 수사로 읽혔습니다. 근래 전라도 지역을 비하하는 용어로 자주 쓰이고 있어서 오히려 편견을 강화하거나 지역을 규정해버리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전체적으로 섬세한 묘사나 감정적으로 이끌리고 깊숙이 느낄 만한 장치들은 다소 부족해서, 고증에 좀더 충실한 다큐멘터리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5·18이라는 역사적 소재가 너무 강렬한 탓인지 소설 속의 캐릭터나 대화 등에서 정동적으로 반응할 여지가 크지 않은 점이 아쉬워요.

 

전성태 저도 고민이 많은 지점인데 작가 개인의 한계로만 돌리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문학도 나이를 먹는다고 봐요. 우리 사회가 아주 급격하게 변화해가면서 몇년 전 일들도 현대 소설 속에서 빠르게 과거화되기도 하는데, 그 반면 5·18 문학은 계속 변화가 축적되어오지는 못한 것 같단 말이죠. 물론 임철우 한강 김경욱 등 지속적으로 5·18을 다룬 작가들은 있었지만 그외에는 전반적으로 너무 헐겁게 삼사십년이 흘러가버렸어요. 문학은 층층이 쌓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작품이 나오는 건데, 그게 부재하다보니 작가들이 과거의 시간대로 바로 접속하는 식으로밖에 할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여기 순천에도 여순10·19사건이 있었죠. 70여년 만에 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사실 여순에 대한 소설이 많지 않아요. 김동리의 단편 「광풍 속에서」나 김승옥의 단편들에서 조금, 그리고 『태백산맥』(조정래 대하소설)에서 다루어지고, 지금은 잊혔지만 여수 현장을 직접 체험한 뒤 1963년에 쓰인 전병순의 장편소설 『절망 뒤에 오는 것』이 있죠. 지역사회와 단체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구술사가 유의미한 성과라고 할 수 있겠어요. 어쩌면 70년 동안 여순은 문학적으로 나이를 먹지 않았어요. 저도 당장 여순에 대해서 쓰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지만 어떤 문학적인 토대에서 쓸 수 있을지 고민스럽단 말이에요. 이 헐거운 시간, 유산이 작가들에게도 조금씩 데미지를 준다고 보여요.

 

김주선 작가가 다소 반복적인 방법으로 5·18을 다루고 있는 것은 여전히 광주에서 그런 5·18이 목격되고 있기 때문인 이유도 있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든 우선은 쓰는 게 맞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오늘 나눈 이야기가 우리 문학과 작가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하고, 써야 한다고 믿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시면 좋겠다는 말을 꼭 덧붙이고 싶습니다.

 

 

오선영 『호텔 해운대』(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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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 이제 광주에서 부산으로 옮겨서, 오선영 소설집을 함께 살펴보죠. 부산에 거주하고, 그 지역 대학을 나와 그곳에서 여성 대학강사이자 여성 작가로 활동하는 정체성을 소설에 심어뒀어요. 이것을 문제화한 작품들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소설 속 화자들이 감각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 나아가서는 ‘지역 작가’ ‘여성 작가’로서의 삶에 대해 아울러서 이야기해볼 수 있겠습니다.

 

조경선 20대까지 서울에서 보내다 이후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수록작 한편 한편 인물과 사건에 굉장히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우리들의 낙원」인데요, 「호텔 해운대」도 그렇고 아주 작은 경험을 대단히 부풀리다가 그것이 깨져버리는 순간이 무척 인상적이에요. 「우리들의 낙원」의 주인공 ‘미연’은 전학 온 부산에서, 오직 서울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동네에서 제일 큰 목욕탕집 딸 ‘수빈’과 친해지게 돼요. 가세가 기울어 서울 집값을 이겨내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온 것인데도 이웃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롯데월드와 가까운 강남 어디쯤에서 살다 이사 온, 깍쟁이 서울내기”(47면)로 스스로를 위치시키던 엄마와 마찬가지로 미연 역시 롯데월드에 가본 적이 있다는 아주 작은 경험 하나를 과장해 친구들 사이에서 우월함마저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 미연이 서울에 있다고 했던 서울대공원이 실은 경기도 과천에 있다는 웃지 못할 사실이 드러나고 미연은 수빈과 서서히 멀어지게 되죠. 미연은 수빈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랜드피아노같이 자기가 가지지 못하는 화려한 물건들을 보고 ‘있는 척’이 통하지 않는 현실을 자각한 바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을 거예요. 여기서 미연은 지역성과 계급적 격차를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전성태 저는 「우리들의 낙원」은 아쉽게 읽었어요. ‘서울’을 제동기(制動機)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게 이 소설집이 가진 사회과학적 의미이겠지만 그게 너무 앞으로 드러난 경우라고 보여요. 반면 「호텔 해운대」는 서사가 한발 앞으로 나와 있다고 할까요, 이쪽이 좀더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서술이 탁월하죠. 주인공 ‘수정’이 라디오의 퀴즈 이벤트에 당첨돼 5성급 호텔 숙박권을 받게 되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능숙하고 세련되게, 모든 것이 익숙한 단골손님처럼 행동하”(22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호텔에 입성하는 과정이 소극처럼 진행되다가 다음 날 호텔 테라스에 딱 섰을 때 “제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다는, 가지려는” 남자친구의 욕망과 자신이 그것을 “줄 수 없다는 것”(36면)을 직감하며 수정이 느끼게 되는 절망감, 소외감이 의미심장하게 드러나요. 시간제 대학강사 ‘희정’의 이야기인 「다시 만난 세계」의 경우 페미니즘이 서울부터 부산까지 당도하는 파문과, 1990년대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지금에 이르는 파문, 두개의 파문이 대학 안에서 겹쳐지는 모습이 굉장히 적실하게 그려져 있어요. 작가가 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도 진정성 있게 느껴지고요. 지역 무명작가로서의 삶이 너무나도 잘 드러난 「바람벽」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작가나 강사가 중심인물로 등장하는 소설 속 세계가 일반 독자들한테 얼마나 실감 나게 다가갈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대학에 있고 또 작가이기도 하니 더욱 실감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주선 확실히 예술 하는 분들이 더 공감하면서 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글이든 그림이든 작가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느끼게 되는 꿈과 현실 사이의 갈등, 문화적 계급과 경제적 계급 사이의 괴리감이 소설집 전반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예전에는 무척 힘들었거든요. 맨날 접하는 것이 문학·영화·미술 같은 예술작품들이다보니 일상에서도 어느정도의 미적 양식이 갖춰진 것을 향유하고 싶은데 이쪽 공부를 계속해서는 경제적인 처지가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보이고, 그럼 내가 바라는 생활양식을 포기한 채 길을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은 정말 ‘작가’들에게는 보편적인 경험일 거예요. 「바람벽」은 부산의 소설가 ‘정현’이 서울의 출판사에서 첫 소설집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추억하는 소설인데, 친구인 ‘지수’와의 관계가 흥미롭습니다. 둘은 부산의 대학 문학회에서 만나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죠. 지수는 다시 수능시험을 쳐서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 문예창작과에 합격”해 몇년 후 “중앙지 신춘문예에 당선”(201~202면)되고요, 정현은 교직이수를 마치고 부산에서 중학교 교사가 됩니다. 정현은 “여유와 낭만 그리고 적당한 외로움이 깃든 전형적인 예술가”처럼 사는 전업작가 지수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생활비가 모자라면 종종 정현에게 돈을 꾸기도 하는 지수가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192면) 자신을 내심 부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감정의 파고가 실감 나게 그려져 있어요.

 

전성태 조금 이따가 이야기할 임솔아 소설집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요즘 젊은 작가, 특히 여성 작가들이 말 그대로 어떤 ‘각오’를 가지고 작가가 되는지 너무 잘 드러나 있죠. 경제적 토대가 취향을 뒷받침해줄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삶이 요즘 적지 않은 작가들이 걷고 있는 길 같다고도 보여요. 책 전체로 시야를 넓혀서 보면, 이야기로서의 소설과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이 섞여 있다는 인상이에요. 수록작 중 가장 최근작인 「도서관 적응기」에서는 또 이야기 세계로 돌아온 것 같은데 이 움직임도 재밌습니다. 「호텔 해운대」처럼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앞으로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주선 문화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에서 두가지 마음이 대립하는 느낌을 말씀드렸는데, 이를 넘어서거나 아예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도 기대하고 싶습니다.

 

조경선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을 왜 읽을까, 하는 질문을 해봤어요. 제가 「우리들의 낙원」을 인상 깊게 읽은 이유는, 사실 감추고 싶은 나의 모습이 소설에 투영되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어요. 저도 ‘서울에서 왔다’는 이상한 우월감이 있는 한편, 문학을 좋아하는데 작가가 되지 못하고 국어 교사로 사는 것에 대한 열등감도 있어요. 「바람벽」에서 잠깐 자비출판 이야기도 나오는데, 저도 작품을 모아 자비출판을 해봐야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을 굳이 출판했다는 것이 또 용납이 되지 않는 거예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러면서 문학에 대한 갈망은 있지만 계속 문학과는 멀어지고요. 직업인으로서 안정된 삶을 추구하면서 세상을 향한 예민함은 잃어버리고 있다는 불안도 그렇고, 이 소설집 곳곳에 저의 모습이 들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삶의 모습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여주면서 공감이든 성찰이든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한다는 게 소설을 읽는 이유라는 생각을 했어요. 나아가 다양한 인물과 세계를 선입견 없이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고요. 특히 많은 학생들을 만나는 교사들이 자신의 경험에만 한정되지 않도록 소설 작품을 더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성태 지역을 통과해서 서울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떻게 말하면 결핍의 층위가 하나 더 주어진 작품들이 있는데요. 오늘 함께 읽은 오선영은 물론 김유담 소설도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런 작품을 읽을 때 각도를 조금 달리해서 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인물에게 조건처럼 주어진 결핍보다 결핍이 만들어지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구조를 봐야 해요. 단지 작가 몇명이 선보이는 색깔이 아니라 꽤 문제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고 봐요. 다수 작가들에 의해 서울 중심의 문학이 전개되다보니 지역의 문제는 소수의 문제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지방 살기의 상실과 욕망은 훨씬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선영이나 김유담 등의 작가들은 그러한 상실과 욕망의 삶을 보다 다층적이고 풍부하게 보여주는 측면이 있죠.

 

 

임솔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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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 벌써 오늘의 마지막 책이네요. 임솔아 소설집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시와 소설 다 쓰는 작가고, 개인적으로는 고통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있어 발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계성을 고찰하면서 연대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세부적이고 전위적으로 끌어오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첫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문학동네 2019)은 문단 내 성폭력, 미투 사건을 가로지르는 기압골이 높은 시간대가 반영된 측면이 있다면, 이번 소설집은 폭풍 그후의 이야기처럼 점검도 하고 회복에도 심혈을 기울이는 등 잔잔해진 시간들이 놓여 있어요. 생존자들과의 연대는 운동이기도 해서, 그 내부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은 내상도 입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작가는 그 내상의 후일담을 매우 정직하면서도 고통스럽게 직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조경선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는 독서모임의 회원 게시판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소설입니다. 색다르게 마피아게임을 해보자는 제안이 게시판에 올라온 가운데 멤버인 ‘지유’의 탈퇴 글을 시작으로 각자 자신의 사연이나 모임에서 느꼈던 불편함 등을 담은 글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미묘한 갈등이 드러나요. 언제부터 게임이 시작된 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 경계가 흐려져 결말이 나고도 여전히 궁금하고 여운이 남는 소설이었어요. 순천에 소설과 거의 비슷하게 자기 나이와 신분을 밝히지 않는 ‘부끄부끄’라는 독서모임이 있어요. 십대부터 육칠십대까지 한 열몇명이 모이는 이 모임을 저도 일년쯤 나갔죠. 토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직업이나 신분이 노출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저는 교사라는 제 신분이 노출되는 것에 큰 거리낌이 없었어요. 거짓인지 진실인지 모호해지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교사라는 것을 스스로 밝힌 ‘진영’처럼 말이에요. 실제로 제가 있었던 모임에서도 몇몇은 소설에서처럼 자기 공개를 불편해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더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전성태 이 책이 독자들에게는 어렵게 다가가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작가가 어떤 상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잖아요. 「그만두는 사람들」의 경우 주인공 ‘나’는 작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피해자 연대 활동을 하다가 입은 상처 같은 것들이 잠복되어 있는 모습이에요. 그게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아서 처음 접한 독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가의 전작을 죽 읽어온 독자들이면 소설이 어떤 맥락에서 펼쳐지고 있는지 비교적 이해하기 쉬울 것이고요. 선한 일을 하려고 모인 연대 모임도 사람의 관계 문제이므로 권력적으로 작동하려는 속성이 있잖아요. 이 부분도 놓치지 않고 관계를 선한 방향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게 임솔아 소설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맺은 이 관계가 폭력적이지 않으려면, 내가 훼손되지 않는 것, 내가 주체적으로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듯합니다. 작가가 연대의 윤리성을 수준 높게 묻고 있다고 봐요.

 

김주선 어떤 집단이든 각자의 입장이나 관점의 차이에 따라 관계가 쉽게 파괴될 수 있잖아요.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에서 잘 드러나 있듯이 사람들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나아가 반응 없음을 통해 어떻게든 의미의 표지를 읽어내요. 이런 것들이 지독하게 반복되면 지쳐서 ‘그만두고 싶다’며 나가떨어지게 되는 거죠. 「그만두는 사람들」의 주인공도 “그 사건 이후로 나는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억지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변”(27면)했다고 고백하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여기에서 빠져나오느냐일 텐데, 주인공이 친구로부터 “살아 있어야 돼”라는 문자를 받는 장면이 중요해요. 나는 “처음에는 그 문자에 적잖이 당황”(26면)하며 뜬금없다고 느꼈지만 사실 다른 걸 하나씩 삭제하다보면, 결국 살아 있음 하나만 남게 되죠. 소설에서는 혜리와의 메일도 중요하게 그려지고 있어요. 이미 한국을 떠날 때부터 지쳐 있던 혜리 역시 거주하던 스웨덴에서마저 인종차별을 겪는 등 심적으로 엉망인 상태였는데, 두 사람이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조금씩 힘을 얻고 바깥에 나갈 수 있게 되잖아요. 끔찍한 사건을 겪은 사람이 자신의 외부와 교통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통 불가능성만 강조할 게 아니라 교통하기 위한 ‘방식’을 발명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소설이라 인상 깊었습니다.

 

전성태 또 하나 특징으로 작가가 천착하는 고민의 세부를 치열하게 파고들 때 형식적인 실험을 곁들이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네요. 특유의 언어적 감각을 동원해 여러 사람의 입장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등 더 풍부해질 수 있는 서술 방식을 추구해요. 두분이 말씀하신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는 등장인물 각자가 올린 게시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인물들의 이름이 다른 단편들과 중복되기도 해 수록작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도 소설이 성취하는 미학적 깊이에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치열성이 느껴져요.

 

조경선 여러 상징이나 열린 결말이 이 소설을 좀더 미적으로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며 계속 생각하게 만들죠. 그러면서도 사건과 인물이 현실에 뿌리를 잘 내리고 있어 생동감이 있어요. 문학계 권력 남용 문제를 이슈화한 동료, 초파리 실험실에서 일하다 산재를 당한 어머니, 관계에 집착하며 자해를 하는 학생과 그의 상담교사, 주택 매매 사기를 당한 프리랜서 편집자 등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적 문제를 교차시키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그만두는 사람들」 속 목숨을 걸고 밤바다를 헤엄쳐 섬으로 건너가는 노루를 한번 더 보기 위해 창가에 선 ‘나’처럼 작가는 위태롭지만 경이로운 삶의 장면들을 계속 관찰하고 미적으로 기록하는 데 큰 성취를 보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김주선 문학을 공부하다보면 인간에 대해 깊이있게 파고들고, 고통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냐 끝없이 물어야 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제 인생은 대중소설처럼 풀리기를, 적어도 엔딩만큼은 ‘해피’하길 바라곤 해요. 근데 소설을 그렇게 쓰면 깊이 없다고, 현실과 너무 쉽게 타협한다고 욕을 먹겠죠.(웃음) 그렇다고 해피엔딩을 바라는 게 없는 마음은 아니잖아요. 이 딜레마를 소설에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초파리 돌보기」가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가인 ‘지유’와 엄마 ‘원영’의 이야기인데, 산재로 추정되는 병을 11년간 앓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원영의 일을 지유가 소설로 쓰고 있어요. 원영이 지유에게 “원영이가 깨끗이 다 나아서 건강해지는 결말을 써줘” 하고 말하자 지유는 “그렇게 쓰면 뭐 해. 소설은 소설일 뿐인데”(61~62면)라고 답하지만 결국 지유는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는 “가장 시시한 문장으로”(69면) 소설을 마치죠. 지유가 결말을 그렇게 쓰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소설이에요. 엄마의 인생에 해피엔딩을 선물하는 서사가 무척 감동적이어서 제가 만약 엄마에게 서사를 그려준다면 이런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전성태 해설을 쓴 홍성희 평론가의 언어를 빌리자면 임솔아 작가는 ‘진짜’와 ‘가짜’로서의 자신을 추궁하는 데서 문학을 출발한 작가라는 인상을 줍니다. 주체가 훼손되지 않는 관계에 대한 열망이 글쓰기의 윤리적 질문에까지 나아가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소설이 전위적이라는 인상이 드는 것 같습니다. 벌써 마무리를 할 시간이 되었네요. 오늘 함께하신 소감을 간단히 들려주실까요?

 

조경선 사피엔스들은 왜 이렇게 관계 맺고 싶어하고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할까요. 오늘 읽은 소설의 인물들도 누군가 자기 얘기를 물어봐주기를 바라왔던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서, 특히 코로나 시대에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없을수록 상대방의 존재나 삶의 형태에 더 관심을 기울여주고 서로 확인하며 연결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주선 사실은 몸이 좋지 않은 상태로 3년 정도를 보내다가 최근에야 조금 좋아졌습니다. 아파서 책도 잘 못 읽는 바람에 집에 책이 엄청 쌓여 있어요. 몸이 아프니까 어떤 일에도 여력이 없어서 평론도 그만할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웃음) 여하간 몇년 만에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됐는데 오길 너무 잘했구나 싶습니다. 평소 뵙고 싶었던 선생님들 직접 만나게 되어서 기쁘고 이제 다시 힘을 좀 내보자 하는 생각도 들어서 오늘 자리가 제게 참 소중하고 의미가 깊습니다. 지면을 만들기 위해 안 보이는 곳에서 신경 써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다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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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태 사회를 맡고 어떻게 대화를 풀어갈까 고민이 많았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여기가 어딘지 다 잊고 사람, 작가, 작품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아요. 책방을 나서야 여기가 순천이구나, 알 것 같습니다. 또 희한한 건 이야기하다보니 작가에 대한 애정이 생기고 더 친애하게 되었어요. 문학초점이 이런 자리 같아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공감대 만들며 문학을 이야기해서 참 좋았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2022.1.27. 순천 골목책방 ‘서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