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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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사회주의라는 마지막 출구

 

 

슬라보예 지젝 Slavoj Žižek

슬로베니아 뉴블랴나대학 사회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관념철학에 기초하여 대중문화, 미학, 급진적 정치이론 등에 관한 전방위적 사유를 전개해온 철학자. 주요 저서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까다로운 주체』 『신체 없는 기관』 『시차적 관점』 『팬데믹 패닉』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등이 있음.

 

 

최신의 데이터는, (매우 불균등하나마) 백신 접종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긴장을 풀고 과거의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감염자 수가 다시 증가하고 새로운 락다운 조치가 기다리는 등) 팬데믹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재앙들이 부상하고 있다. 2021년 6월 말 미국 북서부와 캐나다 남서부 지역은 열돔현상(heat dome)—고기압마루가 따뜻한 공기를 가두고 압축해 기온이 솟구치면서 해당 지역에 불볕더위가 발생하는 기후현상—으로 기온이 섭씨 50도에 육박하면서, 밴쿠버 날씨가 중동보다 더 더웠다.

이 이상기후현상은 훨씬 폭넓은 과정의 한 정점일 뿐이다. 최근 몇년간 스칸디나비아 북부와 시베리아 지역의 기온은 주기적으로 섭씨 30도를 넘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북극권의 북쪽에 위치한 시베리아의 베르호얀스크에 관측소를 두고 있는데, 지난 6월 20일 그곳의 기온은 섭씨 38도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지구상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가장 추운 지역으로 알려진 러시아 오이먀콘의 기온은 그 어느 해 6월보다 더운 31.6도까지 올라갔다. 요컨대 기후변화는 북반구를 태우는 중이다.

열돔현상이 지역적인 것은 맞지만, 분명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에서 비롯된 전지구적인 기후교란 양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 현상이 해양 생물에 미치는 재앙적인 결과는 이미 명백하다. “아마도 ‘열돔현상’이 캐나다 해안에서 10억 개체에 이르는 해양동물을 죽였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브리티시콜롬비아 지역의 과학자들은 실상 고온으로 인해 홍합이 익어버렸다고 말한다. “보통은 해안을 걸을 때 조개껍데기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날씨가 더워지고 있고 이런 과정이 몇몇 지역의 극단적인 사태에서 정점에 도달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조만간 그 사태들은 일련의 전지구적인 차원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로 수렴될 것이다. 2021년 7월 독일과 벨기에에서 발생한 수재 역시 그런 티핑 포인트 중 하나였고, 이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재앙은 가까운 미래에 발발하지는 않겠지만 여기에, 즉 어디 먼 아프리카나 아시아 국가가 아니라 바로 여기 선진적인 서구의 중심부에 존재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동시다발적인 위기와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져야만 할 것이다.

폭염현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산업의 무분별한 자연 착취의 결과지만,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사회조직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2021년 7월 초 남부 이라크에서는 기온이 섭씨 50도까지 치솟은 동시에 전면적인 단전사태가 발생했다. 에어컨도 냉장고도 전등도 켤 수 없게 되면서 그 지역은 생지옥이 되었다. 이 재앙적인 결과는 명백히 (수십억 달러의 오일 머니가 착복되는 등) 이라크 정부의 심각한 부패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밖의 숱한 데이터들을 냉정하게 검토하면, 그로부터 하나의 간명한 결론이 도출된다. 집단이든 개체든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최종적인 출구는 죽음이다(그런 점에서 데릭 험프리Derek Humphry가 1992년 발간된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을 지지하는 자신의 책에 ‘최종 출구 final exit’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타당하다). 최근 폭발하는 생태위기는 인류 자체의 (집단자살이라는) 최종적인 퇴장을 현실적인 전망으로 제기하고 있다. 파멸로 향하는 그 길에서 벗어날 마지막 출구는 있는가? 아니면 이미 너무 늦어버려서, 우리는 그저 고통 없는 자살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는가?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

 

그러니 우리는 이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생태위기로부터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지 중심이 아니기에 그간의 삶의 방식을 바꾸어 개인주의를 제약하고, 새로운 연대를 구축하며, 지구상의 생명체 가운데 인간의 대수롭지 않은 위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훈을 낳는 통상의 깨달음을 피해야만 한다.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으면서 번성하는 지구가 있어야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도 존재한다. 우리가 환경유해물질에 반대하는 것은 그저 우리 인간이 중독될 걱정 없이 숨 쉬며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물과 공기 또한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을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식의 깨달음 말이다.

지구온난화와 여타 생태적 위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환경에 대한 강력한 집단적 개입, 즉 생명 형태들 간의 연약한 균형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인 개입 아닌가? 평균 기온의 상승을 섭씨 2도 이내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의 평범한 종이 아니라 지구 생명체 전체의 관리자로서 이야기하는 (그리고 행동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구의 재생은 명백하게 우리의 ‘더 작고 신중한 역할’이 아니라 거대한 역할에 달려 있으며, 그 점이야말로 인간의 유한성과 한계에 관한 그 모든 이야기 이면에 있는 진실이다.

우리가 하늘과 바다의 생명을 돌봐야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맑스가 말한 ‘보편적 존재’, 즉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스스로를 총체적 자연의 한 계기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임을 뜻한다. 인간의 한계와 유한성이라는 안락한 겸손으로 도피하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것은 파국으로 향하는 잘못된 출구이다. 보편적 존재로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복잡한 혼합체(complex mixture)로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거기에는 (티모시 모튼 Timothy Morton이 말하는 ‘하이퍼오브젝트 hyperobjects’처럼) 너무 거대하거나 미세해서 인간이 직접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쓰레기나 오염물질로 여기는 것도 포함된다. 모튼에게 생태적이라는 것은 이렇다.

 

원시적인 자연보존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콘크리트의 부서진 틈에서 자라는 잡초를, 그리고 이어서 콘크리트를 면밀히 살피는 것이다. 그것 또한 세계의 일부이자 우리 자신의 일부이다. (…)

모튼은 현실이 “기이한 낯선 존재들”, 즉 “알 수 있지만 동시에 섬뜩한 것”들로 가득하다고 썼다. 모튼에게는 이 기이한 낯섦이야말로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온갖 바위와 나무, 테라리움(terrarium)과 플라스틱 자유의 여신상 모형, 준항성(準恒星, quasar) 및 블랙홀 그리고 마모셋원숭이의 환원 불가능한 요소이다.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대상을 지배하려는 데서 벗어나 대상을 파악하기 어려운 채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낭만주의 시인들이 미와 숭고에 대해서 열광적으로 썼다면, 모튼은 자연에 편재하는 기이함에 반응한다. 양쪽 모두에게 자연적인 것의 범주는 무섭고, 흉하고, 인공적이고, 해롭고, 혼란스러운 모든 것을 포함한다.1

 

팬데믹 중에 맨해튼의 쥐들에게 닥친 운명은 그런 혼합체의 완벽한 예시가 아닐까? 맨해튼은 인간과 바퀴벌레 등의 존재와 더불어 수백만마리의 쥐로 이루어진 살아 있는 시스템이다. 팬데믹이 절정이었을 때 시행된 봉쇄조치는 모든 식당의 폐쇄를 포함했기에, 식당의 음식물쓰레기를 먹고 사는 쥐들에게는 식량 공급원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쥐들의 집단 아사가 벌어졌고, 많은 수의 쥐들이 새끼 쥐를 먹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식당의 폐쇄는 인간에게는 식습관의 변화를 야기하되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반면 인간의 동료로서의 쥐들에게는 재앙이었다.

최근 역사에서 벌어진 비슷한 또 하나의 사건은 ‘동료로서의 참새’와 관련된다. 대약진운동 초기였던 1958년 중국 정부는 ‘새는 자본주의의 대표적 동물이다’라고 선포하고, 매해 한마리당 4파운드가량(1.8킬로그램—옮긴이)의 곡식을 먹어치운다고 여겨졌던 참새를 박멸하기 위한 대규모 캠페인을 전개했다. 참새 둥지를 없애고, 알은 깼으며, 새끼들은 잡아 죽였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조를 이루어 냄비를 시끄럽게 두드리는 일에 동원되었다. 둥지에서 쉴 수 없도록 방해해 지친 참새들이 공중에서 떨어져 죽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대규모 캠페인은 참새의 개체 수를 격감시켜 거의 멸종 단계까지 몰아갔다. 그러나 1960년 4월 중국의 지도자들은 참새가 논밭에서 엄청난 숫자의 해충 또한 잡아먹어왔다는 것을, 그리하여 쌀 생산량은 캠페인 이후에 증가하기는커녕 상당히 감소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참새의 제거는 생태 균형을 교란했는데, 천적이 사라지자 해충들이 작물을 파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참새가 사라지면서 불어난 메뚜기 떼가 농촌 지역을 휩쓸면서, (광범위한 숲의 파괴와 살충제 오용 등) 대약진운동이 이미 야기한 생태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생태 불균형은 수백만명이 아사한 당시의 대기근을 악화시킨 원인으로 지목된다. 마침내 중국 정부는 사라진 참새 떼를 보충하기 위해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 25만마리의 참새를 수입하는 안을 채택했다.

그러니 다시, 현재의 버거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상황이 버거운 것은, 우리가 지구상의 한 종이면서 동시에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대한 관리자 노릇이라는 불가능한 임무를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수월해 보이는 여타의 출구로 나가는 데 실패했기에 (그리고 지구의 기온은 상승하고 바다는 갈수록 오염되고…… 있기에) 최종 출구 이전의 마지막 출구는 점점 더 한때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라고 불렸던 것과 비슷한 모습이 되지 싶다.

 

 

필요한 모든 수단의 동원

 

여기서 내가 고려하는 것은 어떠한 종류의, 20세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회주의’의 재건이나 연장이 아니며, 전지구적인 중국 모델의 채택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상황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요구하는 일련의 조치들일 뿐이다. (한 국가가 아니라) 모두가 생존의 위협에 직면할 때 우리는 최소 수십년간은 지속될 전시 비상사태에 돌입하게 된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수천만명, 어쩌면 수억명의 인구가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까지도 포함하는 전대미문의 도전에 맞서 그저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미국과 캐나다의 열돔현상에 대한 해법은 피해 지역의 구제를 넘어 전지구적인 원인을 공략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이라크 남부 지역의 재난사태는, 그런 상황에서 사회의 붕괴를 막자면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할 수 있는 국가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 모든 과제들은—바라건대—오로지 강력하고 강제적인 국제 협력, 농업과 산업에 대한 사회적 통제 및 규제, 그리고 (예컨대 소고기를 덜 먹는) 기본적인 식습관의 변화와 전지구적인 보건 시스템 등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좀더 면밀히 검토하면, 대의제 민주주의만으로는 이런 임무를 감당하기에 충분치 않으리라는 것이 명백하다. 장기 목표를 시행할 수 있는 훨씬 더 강력한 행정 권력이 인민들의 지역별 자치조직 및 반발하는 국가들의 의지를 무력화할 수 있는 강력한 국제기구와 결합해야 한다.

나는 새로운 세계정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조직은 엄청난 부패의 기회를 낳을 것이다. 시장을 폐지한다는 의미에서의 공산주의 또한 내가 말하려는 바가 아니다. 시장 경쟁은 국가와 사회의 규제와 통제를 받겠지만 그 역할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쓰는가?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진정 급진적인 모든 체제의 네가지 측면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선, 주의주의(voluntarism, 主意主義)가 있다. 요구되는 변화는 어떠한 역사적 필연성에 기반하지 않으며, 역사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거슬러 달성될 것이다. 벤야민(W. Benjamin)의 표현처럼 우리는 역사라는 기차에 비상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다음은 전지구적 연대와 보건 시스템, 그리고 모든 이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내세우는 평등주의(egalitarianism)를 꼽을 수 있다. 그다음은 완고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테러’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서, 우리가 이미 진행 중인 팬데믹에 대처하는 조치들을 통해 어느정도 겪어본 것이다. 바로 여러 개인적 자유의 제한과 새로운 통제 및 규제 양식이다. 마지막은 인민에 대한 신뢰다. 평범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는 어떠한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나아갈 길

 

이 모든 이야기는 병적인 디스토피아적 전망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곤경에 대한 단순하고도 현실적인 평가의 결과다. 위에서 제시한 길을 가지 않을 경우, 미국과 러시아에서는 이미 현실이 된 완전히 미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두 나라의 권력층은, 정부는 어떠한 조건에서도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수천명이 몇달간 살 수 있는 거대한 지하 벙커에서의 생존을 준비하고 있다. 요컨대 자신들이 권한을 행사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져도 정부는 계속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부와 경제 엘리트들은 이미 이런 시나리오에 대비하고 있고, 이는 그들이 지금 경보음이 울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거대 갑부들이 지구 밖 우주 어딘가에서 사는 미래상은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머스크 E. Musk, 베이조스 J. Bezos, 브랜슨 R. Branson 같은) 몇몇 거대 갑부의 민간 우주비행 시도는 지구에서의 생존을 위협하는 재앙으로부터의 탈출 판타지를 표출한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탈출할 곳이 없는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번역: 이정진(李廷進)/영문학 박사

 

* 이 글은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Jacobin)에 실린 “Slavoj Žižek: Last Exit to Socialism” (2021.7.21.)을 옮긴 것이다. ⓒSlavoj Žižek 2021/한국어판 ⓒ창비 2022

 

 

  1. Morgan Meis, “Timothy Morton’s Hyper-Pandemic,” The New Yorker 20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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