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산문

 

시대의 걸출한 의인을 보내고

송기숙 선생의 영전에

 

 

박석무 朴錫武

다산연구소 이사장, 우석대 석좌교수. 저서 『다산기행』 『조선의 의인들』 『다산 정약용 평전』 『다산에게 배운다』 『목민심서,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 편역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산문선』 『다산시정선』 『역주 흠흠신서』(공편역) 등이 있음.

sm537@hanmail.net

 

 

1

 

지난해 12월 5일에 송기숙(宋基淑, 1935~2021) 교수께서 기세(棄世)하였다. 국문학자로서, 소설가이자 민주투사로서 의인의 길을 걸었던 송교수의 영면에 애도의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사의 요구로 간단한 추모의 글을 쓴 바가 있고, 우리 다산연구소에서 보내는 애도사도 썼지만, 그 두 글에서 못다 한 슬픔을 더 토로해서 애통한 나의 마음을 달래보련다.

송교수는 애초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학문을 강의하는 국문학자였다. 문학에 뛰어나 문학비평가가 되고, 작가로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역사소설이자 민중소설인 대작 『암태도』(창작과비평사 1981) 『녹두장군』(전12권, 창작과비평사 1989~94) 등을 썼다. 또 「도깨비 잔치」(『도깨비 잔치』, 백제출판사 1978) 「재수 없는 금의환향」(『재수 없는 금의환향』, 시인사 1979) 등 읽기 편하고 재미가 철철 흐르는 중단편소설의 작가였다. 학자로서 소설가로서 세상에서 큰 이름을 얻은 기득권자로서 독재시대에도 별다른 불편 없이 살아갈 처지였으나, 양심을 속일 수 없다는 지식인의 사명감 때문에 그 화려한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주투사이자 의인의 길을 걸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학자나 소설가로서 송교수에 대해서는 그 분야 전문가들이 이미 높은 평가를 내린 바 있기에, 나는 민주투사이자 의인,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그의 행적을 살피면서 추모의 뜻을 펴고자 한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강고한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국민적 저항을 막고, 체제의 지속을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부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악행의 하나가 바로 교육통제와 국민의식 주입을 위해 1968년 12월 5일 발표한 「국민교육헌장」이었다. 박정희정권의 국가주의적·전체주의적 교육이념을 담고, 헌장이라는 미명 아래 모든 교과서의 첫머리에 실어서 학생과 국민이 의무적으로 암송하도록 강요했던 독재권력의 방패였다.

반공과 민족중흥이라는 독재세력의 통치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이상으로 삼은 교육헌장의 내용은 발표 당시부터 많은 정치적 논란을 야기했다. 그러나 교육계나 정치권에서는 그런 잘못을 저지할 아무런 역량이 없었고, 민주화세력이나 학생운동권에서도 간헐적인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자유가 박탈된 학원가에서 이렇다 할 힘은 전혀 발휘되지 못했다. 1972년 10월 소위 ‘유신’이 선포되어 유신독재가 시작되면서는 더욱 강고한 탄압으로 대학가가 숨을 죽여, 교육헌장의 횡포는 그칠 날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1978년 6월 27일,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의 전남대 교수들이 마침내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반(反)교육헌장 선포문을 발표했다. 송교수의 구속을 비롯해 11명 교수 모두가 해직되는 대형 반유신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 한마디로 인간다운 사회는 아직도 우리 현실에서는 한갓 꿈에 머물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바로 알고 그것을 개선할 힘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을 교육하는 길이다”라고 선포하고는 당시의 교육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가했다. “사람이 사람을 마구 누르고, 자손대대로 물려줄 강산을 돈을 위해 함부로 오염시키는 풍조가 만연한 가운데,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존중하는 교육은 나날이 찾아보기 어려워져가고 있다. (…) 온갖 시련과 경쟁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는 진실이 외면되기가 일쑤요 소중한 인재가 번번이 희생되고 교육적 양심이 위축되는 등 안타까운 수난을 거듭하고 있다. 대학인으로서 우리의 양심과 양식에 비추어볼 때 (…) 국민교육헌장은 바로 그러한 실패(오늘날 교육의 실패—인용자)를 집약한 본보기인바, (…) 그 제정경위 및 선포절차 자체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라고 군사독재의 상징적인 헌장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그러한 결론으로 새로운 교육지표가 가야 할 방향을 네개 조항으로 정리했다. ‘첫째,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이기 위해 학원이 인간화되고 민주화되어야 한다. 둘째, 교육자 자신이 인간적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적 정열로써 학생을 가르쳐야 한다. 셋째, 진실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대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그에 따른 대학인의 희생에 항의한다. 넷째, 3·1정신과 4·19정신을 충실히 계승하여 평화통일을 위한 민족역량을 함양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라는 요지의 대원칙이었다. 전체주의적·국가주의적 교육을 통해 독재체제를 영구히 하려던 독재권력은 하늘처럼 우상처럼 일본의 교육칙어처럼 받들어지던 교육헌장에 대한 도전을 긴급조치 9호(유언비어 및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금지) 위반이라는 죄로 몰아 혹독한 탄압을 자행했다.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에 끌려간 송교수는 가혹한 고문(훗날 지병의 원인)으로 몸이 망가진 뒤 구속 수감되고, 동료 교수들과 함께 해직을 당하는 고난에 처했다.

 

 

2

 

「우리의 교육지표」 내용은 당시 교육계의 현실이나 학원가의 실상 및 사회현상에 비추어 보건대 진실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독재권력은 사실을 왜곡했다며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형식적 재판을 받게 했다. 6월 말에 구속된 송교수의 1심 결심재판이 1978년 8월 23일 광주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징역 7년이라는 중형으로 검사의 논고가 있자 변호인들의 변론이 이어진 다음, 마침내 송교수의 최후진술이 있었다. “교육지표 발표 동기부터 말하겠다. 작년 가을 서울대 학생들의 데모가 있었을 때, 학생들이 교수들에게 돌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학생이 교수에게 돌멩이질을 한다면 교육이란 이제 끝장난 것이 아닌가? 장유유서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교수에게 돌을 던질 정도라면 우리의 교육이 어찌 될 것인가? 그러면 현재 우리는 어떤가? 헌법 전문에 들어 있는 4·19정신을 기려야 할 4·19날 교수들이 마치 강의시간표 짜듯이 누구는 도서관 앞에서 몇시부터 몇시, 누구는 사범대 벤치 옆에서 몇시부터 몇시, 이런 식으로 보초를 서서 학생들을 감시해야 했다. (…) 시내에서 보초를 서는 경우에는 내가 맡은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술을 사주거나 저녁을 사주어야 했다. 이것이 과연 교수들이 해야 할 짓인가?”라고 말하며 교수들의 참담한 신세부터 토로했다.

최후진술은 계속된다. “어머니가 젖먹이 아이에게 젖을 안 줘서 애가 죽게 되는 경우 어머니는 아무 행동을 안 했지만, 안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부작위’의 범죄를 저질러서 살인죄와 같이 취급된다. 학생에게 진실을 가르쳐야 할 교수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행위도 똑같은 부작위 범죄라고 믿는다. 더구나 교수가 진실을 안 가르쳐주니까 다른 데서라도 배우겠다고 찾아가는 학생을 붙잡아서 밥 사주고 술 받아주며 못하게 하는 행위는 민족의 역사 앞에 무슨 죄목에 해당할 것인가. 정말 이 나라의 대학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느꼈다”라고 말하고는, “그래서 참다못해 학생들 앞에서 어떻게 체면이나 좀 세워보자, 돌이라도 좀 안 맞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무엇인가 해야겠는데 법규에 어긋나는 이야기나 겁나는 이야기는 다 빼고, 요즘 그 흔한 ‘성명서’라든가 ‘선언문’이라는 단어까지 피하고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이름으로 조심조심 모기 소리만 하게 오늘의 교육현실에 대해 교육자로서 발언만 함으로써 교수들의 위신이나 좀 세워보려 했던 것이다”라고 말하여 교육자의 양심상 ‘모기 소리’만큼의 발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심정을 참으로 솔직하게 피력했다.

이어 「국민교육헌장」이 민주교육의 본질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는 점을 조목조목 비판한 「우리의 교육지표」 내용의 정당성을 논리정연하게 설파했다. 마지막으로 검사의 7년 징역형 구형에 대한 심경을 말했다. 일제 식민통치 시절에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치안유지법으로 아무리 무거워도 1~3년을 넘지 않는 형벌이 내려졌는데, 동족끼리 양심상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 몇마디를 했다고 7년형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검사들을 호통치고 최후의 진술을 마쳤다.1

 

 

3

 

1979년 7월 17일 제헌절에 예상치 못했던 양심수 석방이 있었다. 송기숙 교수, 양성우 시인, 노준현 대학생 등 다수의 수인들이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1979년 7월 30일자로 간행한 앰네스티 광주지부 회보 제11호에는 1년여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송기숙 교수의 글이 실렸다. ‘민주발전은 점진적으로!’라는 제목의 글2은 징역살이에 대한 회고와 민주주의 발전의 당위성, 독재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대한 비판이 주요 내용이었다. “체포, 고문, 투옥, 극한적인 투쟁은 양자 간의 정당성 여부에 상관없이 그 투쟁 양상이 극한적이라는 의미에서 이 사회는 그만치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웅변한다. 투옥을 각오하지 않고는 자기주장을 내놓을 수 없는 사회, 투옥으로 입을 봉하고 탄압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경직된 상황 (…) 「우리의 교육지표」는 교육자의 개인적 현실이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너무도 맥없이 내몰리어버리고, 교육을 성립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학생과 선생 간의 인간관계의 파괴와 학문의 자유가 박탈된 현상에 대한 비판이었다”라고 말해 교육지표가 노린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감옥생활을 회고하는 내용에서는 의롭고 정당한 교수가 학생들의 뜨거운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사례 하나를 실감나게 서술해주고 있다. “내가 광주교도소 미결사에서 기결사로 전방이 되었을 때 이야기다. 나한테 배당된 독방 변소가 밑이 막혀 오물이 바닥으로 넘칠 지경의 험한 꼴이어서 이것을 퍼낼 것이 암담했는데, 마침 운동시간이어서 한시간가량 운동을 하고 왔더니 누가 그것을 말끔하게 퍼내고 방청소까지 깨끗이 해놓아 어리둥절했다. 학생들이 한 일이었다. 돌멩이를 던져 증오하던 교수가 자기들 마음에 맞는 일을 하자 변소까지 퍼주더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 순수무구한 정열 앞에 한동안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교육자로서 또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더구나 남을 위해 이만한 정열로 일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할 때 처량하게 살아온 내 과거가 벌떡 일어서는 것 같았다. 학생들을 무책임하고 철없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위정자들에게 당신들은 이만한 정열로 일해본 적이 있던가 묻고 싶고 이 강철도 꿰뚫을 정열을 투옥 등 탄압만으로 종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묻고 싶다”라는 준엄한 경고를 독재자에게 던지고 있었다.

끝으로 출옥 후의 소감을 절절하게 표현하며 글을 마쳤다. “나는 이전에나 이후에나 민주투사도 정의의 사도도 아니다. 다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싶은 교육자일 뿐이고, 또 내 자식들이 올바르게 교육되기를 바라는 다섯 아이의 아버지일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 이번 사건이 이 나라 민주교육의 발전에 조그마한 반성의 계기가 되어 한발짝씩 발전이 있기를 지켜볼 생각이다”라고 밝히면서 기독교계, 자유실천문인협회, 변호인단 등 옥중생활을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4

 

어둡고 괴롭던 시절, 유신독재가 국민 모두의 입을 막고 모든 언론에 재갈을 물려 검은 것을 검다고 말하지 못하고 흰 것을 희다고도 말하지 못하던 그때,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은 긴긴 암흑의 밤에 샛별 하나가 동쪽 하늘을 밝히는 듯한 희망의 빛이었다. 1978년 6월 27일 그날 오전에 11명의 교수들이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에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앰네스티 광주지부는 즉각 연락망을 동원해 저녁 6시경 광주YMCA 소강당에서 6·27사건의 보고대회를 열었다. 신부, 목사, 변호사, 교사 등 앰네스티 회원을 중심으로 5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운집했다. 당시 광주의 원로목사인 은명기 목사께서 개회 기도를 드리던 장면이 생생하다. “오! 하느님, 이 깜깜한 밤중에 동녘 하늘에 샛별이 떴습니다. 마침내 전남대 교수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며 일어섰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며, 눈을 감고 기도드리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감격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고문과 투옥의 떨림 때문에 양심을 속이며 포악한 독재에 입 한번 뻥긋하지 못했던 모두들, 송교수의 용기에 어느 누가 감동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높아 만인이 부러워하던 대표적 기득권자인 교수들이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고 대학에서 쫓겨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런 일을 감행했으니, 그들이 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의 앞에서 정의를 주장하고 자기의 희생을 감수할 용기를 지닌 사람을 우리는 분명히 의인이라고 말한다. 거사를 앞둔 26일 밤늦게, 나는 인적이 드문 광주공원의 계단 맨 끝에 앉아서 송교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이면 교육지표를 발표한다며 비장한 각오로 내 손을 잡으면서 뒷일을 부탁하던 송교수의 굳은 의지를 나는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광주 앰네스티 총무로서 양심수 돕기 운동의 한복판에 있었고, 감옥 경험을 했던 처지여서 송교수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입장이었다.

앰네스티 광주지부는 송교수와 송교수의 석방을 외치며 시위하다 붙잡힌 수많은 학생들의 변호인을 알선하고 영치금을 넣어주었다. 또 그들의 근황을 회보에 실어 모두에게 알리고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1978년 8월 12일 송교수의 첫 재판이 열리던 광주지법 대법정에는 300여명의 방청객이 몰렸다. 홍남순 이기홍 변호사에, 서울에서 이돈명 홍성우 변호사 등이 내려와 변론에 임하고, 우리 앰네스티 회원 다수와 서울의 백낙청 고은 김병걸 염무웅 천승세 이호철 송기원 윤흥길 김주영 이문구 조태일 황석영 등 다수의 문인이 참석했다. 또 재야의 원로이던 함석헌 이문영 교수, 문동환 박사가 함께했고 학생, 가족 등 입추의 여지 없는 인파로 가득했다. 회보에는 빠짐없는 기록이 있어 정확한 인명을 제대로 기억할 수 있다.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은 송교수의 구속으로 모든 문인들이 독재에 항거할 마음을 불러일으켰으며, 변호사, 교수, 교사, 학생, 종교계 인사들에게 이제는 싸워야 한다는 투쟁의지를 강화해준 거대한 의거(義擧)의 밑거름이 되었다. 1979년 제헌절에 형 집행정지로 출소한 송교수는 이제 교수도 소설가도 아니고 민주투사가 되어 반독재투쟁의 선봉장이 되었다. 불행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고 5·18민중항쟁이 일어나자 송교수는 또 내란죄에 얽혀 고문과 투옥으로 더 큰 고생을 해야 했다. 광주의 민주인사들이 모조리 구속 수감된 이 시기 광주교도소는 긴급조치가 무색하게 언론자유가 살아나던 토론의 광장이기도 했다. 송교수 외에 여러 교수, 목사, 신부, 교사들로 가득 찼고, 홍남순을 비롯한 변호사들도 함께 수형생활을 했다. 나는 그때 그들과 함께 죄수가 되어 고달픔을 모르고 생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5

 

5·18로 고생하다 출소한 뒤 송교수는 전두환 타도에 앞장서면서 홍남순 변호사와 함께 구속자협의회 등 투쟁단체들을 결성했고, 광주의 반독재투쟁의 맨 앞에 섰다. 나도 그분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일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투쟁을 계속하면서도 송교수는 작가의 사명감을 잊지 않고 작품활동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암태도』는 일제하 농민수탈정책에 맞서 궐기한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쟁의를 소설화한 뛰어난 민중소설이다. 대표작인 『녹두장군』은 12권의 거대한 대하 역사소설이다. “갑오농민전쟁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든, 농민들의 주체적인 농민전쟁으로 형상화하고”3 19세기 말 외세의 압력 등 피폐한 민족현실 속에서 봉건관료와 토호층의 수탈을 거부하며 갑오동학농민전쟁으로 뛰어든 농민의 전형을 풍부한 민중언어와 현재적 문체로 그려낸 민족·민중소설의 거작이다. 송교수는 “민중이 자발적인 합의에 이르면 엄청난 힘이 분출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광주항쟁 때도 느낀 사실이지만 나의 민중사관에 대한 낙관론은 바로 이런 데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후기, 12권 328면)라며 민중사관에 의한 민족·민중항쟁에 역사발전의 추진력이 있음을 믿고서 저술한 작품이었다고 술회했다.

민중의 힘과 저력을 굳게 믿으며 역사발전을 낙관하던 송교수는 그렇게 무섭고 두렵던 잔인한 독재·학살자들 박정희, 전두환에게도 곧은 선비의 자세로 저항할 수 있었으니, 그의 양심과 의기(義氣)는 천하의 대장부만이 지닐 수 있던 걸출한 의인의 그것이었다. 이제 이승에서는 송교수를 만날 수 없다. 같이 일하던 시절 두려움과 공포심을 떨치지 못해, 일을 벌이기 전이나 뒤에 그렇게도 맛있게 마시던 술맛을 잊을 수 없다. 일을 위해서는 만나지 않는 날이 없었고, 만났다 하면 술동이가 바닥이 나도록 마시고 또 마시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 구수한 말솜씨, 그 너털웃음, 그 다변의 말. 이제 송교수는 만날 수 없으니, 누구와 술을 마시고 세상을 걱정할 것인가.

『자랏골의 비가』(창작과비평사 1977)를 읽으며, 전라도 사투리의 보고이던 글솜씨에 빠져들던 기억이 새롭다. 한잔만 더 하자고 권하고 권하던 그의 주벽이 통째로 생각난다. 전남대 대학원생이던 송교수와 나는 캠퍼스에서부터 만났다. 고문 후유증으로 바깥출입을 못하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참으로 자주 만나 독재자들에게 한없는 욕을 퍼부으며, 마시고 또 마시면서 세월을 보냈다. 모든 것은 잊더라도 몇가지는 잊지 않아야겠다. 민중만이 역사의 주체이고, 민중이 자발적인 합의에 이르면 엄청난 힘이 분출된다는 그의 민중사관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소설가, 민주투사, 의인, 나의 영원한 형님, 영면하소서.

 

 

  1. 최후진술의 요지는 그해 9월 28일 간행한 국제앰네스티 광주지부 회보 제6호에 실려 정확한 내용이다. 또한 『인권과 민주화의 산실: 광주앰네스티운동 30년사』(국제앰네스티 광주지회 엮음, 새날출판사 2005)에 「최후의 진술」로도 실렸다.
  2. 『인권과 민주화의 산실: 광주앰네스티운동 30년사』 참조.
  3.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엮음,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참조.

박석무

저자의 다른 계간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