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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현림 申鉉林
1961년 경기 의왕 출생.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 등이 있음. abrosa@hanmail.net
알을 굴리며 간다
어쩜 이리도 희고 따스할까
눈처럼 세상을 응시하고
과거에서 흘러나온 꿈인 듯
커다랗게 부풀었구나
고구려나 신라 시대가 아니라서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지 않지만
알은 매끈매끈한 사람의 피부야
이 무서운 세상에 그 얇은 껍질은 위험해
모피알 정도는 돼야 안 다치지
알 속의 시간들이 흩어지지 않게
내가 살살 굴릴게
살림이 늘고, 아는 사람이 느는데,
내 안의 생은 동굴처럼 적막해
알이라도 굴리지 않으면 안돼
내가 볼 수 있는 동안만 알이겠지
내가 사는 동안만 굴릴 수 있겠어
온몸으로 쏟아지는 밤빛 속에서
깊은 밤 도시를 굴리며 나는 간다
반지하 엘리스
1. 팬티가 어디 갔지
팬티가 어디 갔지
그 튼튼한 면팬티가 없으면 나갈 수가 없다
팬티공장에 다니는 그녀는
팬티를 잃는 건 몰락이다
신분상승도 힘든 그녀라
팬티공장으로 가기 위해
팬티를 입어야 한다
가다가 성폭행당할 위험도 있고
가다가 주머니에서 돈이 쏟아지듯
따스한 물이 흘러나올지 몰라
팬티 없이 원피스만 입는 건
가을바람이 그녀의 골짜기를 쓰다듬는 일이며
색다른 애무에 젖는 일이며
사내 없이도 새로운 쾌감에 들뜰 기회지만
쾌감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다
그녀의 안전은 팬티로부터 온다
팬티 없이는 미래도 없기에
온 방을 뒤집어엎었다
팬티를 찾으러
2. 윈터 와인
어디로 갈까 어떻게 할까
무덤 한삽 깊게 판
반지하 집에서 죽음의 경전을 읽으며
그는 반가사유상처럼 고요히 앉아 작은 창을 보았다
더 잘 살기 위한 경전만큼 날은 흐렸다
반지하의 우울보다
혼자 있는 편안함을 음미하며
팝송 썸머 와인을 들으며 손님을 기다렸다
어디로 갈까 어떻게 할까
라디오라는 오래된 무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은 와인 맛보다 붉고 진했다.
까페 건물은 몇겹 껴입은 외투처럼 든든했다
전쟁이 나도 방공호가 따로 없고
창문만 닫으면 왕릉이었다
고대로부터 몰려오는 눈보라도 무료였다
어디로 갈까 어떻게 할까
지상의 유리창이 흔들렸고
작은 눈보라 풍경이 마음을 흔들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술손님만이 아니라
자기편이 될 여인을 찾으러 나가고 싶었다
우산처럼 간단히 접을까 말까
장사도 안되는데
서둘지도 말며 조급해도 말며 리듬에 실려
오래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어떻게 할까
3. 아득한 나날
내 몸은 폐가야
폐가를 허물고 일어서는 목수가
망치를 들고 어디로 갔지 모두 어디로 가지
내 팔은 하얀 가래떡처럼 늘어나지도 않고
쓰다듬고 끌어안고 싶어도
사람들에게 닿지 않는다
사랑하는 당신, 어디에 있지
사랑하는 당신, 함께 나무 심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당신, 나는 몹시 춥거든 보일러가 고장났거든
문마다 밖에서 잠겨 열 수도 없고
전등 아웃, 폰 배터리 아웃
러브 배터리 아웃
일어설 수도 없이
몸은 방바닥 밑으로 자꾸 가라앉는다
천천히 기도의 푸른 등불을 켜고
머리카락 한올씩 차례로 불을 켜봐요
횃불 같아
나만큼 추운 당신에게 달리는 횃불
당신 얼굴에 비친 거리에 물고기가 날아다닌다
당신 얼굴에 비친 세상이 얼마나 눈물겨운지 나는 안다
당신 얼굴에 엎질러진 파란 하늘을 얼마나 그리웠는지 너는 아니
오늘도 둥둥 가슴북을 치며
당신 그리워
길 떠나는 횃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