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초점
시를 잊는 시
김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
이재원 李在苑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름을 찾는 주체들의 문장: 신해욱 이근화 심보선의 시를 중심으로」 등이 있음. yajw8@naver.com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싶어, 빛을 내는 눈이 있고 뻗어가는 손이 있다. 그러나 서로 눈빛으로 만나고 손을 맞잡는다고 해도 알아보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안다’는 일은 ‘그것’을 ‘나’의 내부로 편입시키는 과정이며, 그럴수록 그것은 나로 인해 본질을 잃어가기 쉬운 까닭이다. 그래서 어떤 세계는 알고 있다고 믿어온 것들과 그로부터 이루어진 제 토대를 아예 무너뜨리며 출현한다. 시를 빼버릴 때 시가 완성된다(「팔레트」)고 쓰는 시인도 있는 것이다.
김언의 네번째 시집 『모두가 움직인다』(문학과지성사 2013)에서 꾸준히 발견되는 것은 가령 “그 개의 연령은 다시 태어나도 개입니다.”라는 식의 잘못된 문장과, 어느 이름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주체들, “돌멩이에서 떨어져 나간 바위”(「겨우 두 사람이 있는 대화」)가 가능해지는 세계다. 이 시들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우선 합리적 세계의 언어체계가 여기에선 지워져 있어서기도 한데, 이렇게 말들이 제 용도를 잊은 채 떠도는 것은 그 말의 주체가 언어의 한계와 더불어 서정에서의 자아중심적 세계가 지니는 한계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김언의 시에서 주체는 스스로 “나는 이 문장의 관리인입니다”(「공허한 문장 가운데 있다」)라고 정의하는데, 이때 ‘나’는 자아의 권한과도 같은 주관이나 선험적 판단능력을 가동하여 세계에 관여하지 않고 그것을 애써 잊고 ‘관리’만을 하는 축소된 역할에 머무른다.
이처럼 김언의 시는 언어의 용도와 자아의 습성을 걷어내려 하기에, “다른 사람의 입속에서”(「나는 식사하는 문장을 쓴다」) 움직일 수도 있는 “주어가 필요 없는 문장”과 “저 혼자 가는 문장”(「말 없는 발」)들로 빼곡한 것이다. 이때 언어와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 말의 주체와 그 바깥 등의 구분은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구축되어 있던 경계가 와해되며 어떤 틈이 벌어질 때에야, 고정된 의미체계로 소환될 수 없는 세계, 즉 주체 너머의 세계가 ‘모른다’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로서 이곳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르겠는’ 세계에서 좀더 실감되는 것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 자체다. ‘나’는 혼자이지 않기 위해 어딘가에 타인을 만들며(「미학」), 유령처럼 존재하던 “직전의 영혼”이 “그의 눈에 띄면서” “사람”이 된다(「유령 산책」). ‘나’의 존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뚜렷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타자와의 관계란 적이면서 애인이고 위험이자 아름다움이며, 간격이 필요한 복잡함이기도 하다(「미학」). 이는 그가 ‘돌’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듯이, 합리적 세계에서 모두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실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더듬고/돌덩이라고 확신하는”(「연기」) 모순과 오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알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얼굴을 더듬으며 다가가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무감하고 무심한 돌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며, 이때 타자의 본래성이 훼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와 ‘너’, “내가 아는 너와/네가 아는 나”(「혁명」) 사이의 어긋남을 알면서도 그 관계의 필요를 절감하기에, 김언의 시들은 무감한 간격이 지켜질 때 주체와 타자가 정직하고 진실되게 만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마주 잡은 손」). 그래서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본래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이미 통성명했지만 다시 만날 것처럼 그 이름을 잊는다(「이 물질의 이름」). 그렇게 많은 것을 빼버려서 무엇으로도 확정 지을 수 없는 세계, “색깔이 다 빠지고 나면 남는 색깔/너를 지칭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청색은 내부를 향해 빛난다」) 곳으로 타자의 자리를 돌려놓는다. 이것은 “몸 한 번 섞지 않고” “손 한 번 잡지 않고 애인이 되는 방식”(「말」)이다.
그러니 이 시집이 ‘시’에서 ‘시’를 빼려고 그토록 충실히 달려온 것은 자신마저 잊을 때 보존되는 세계가 있으며, 그제야 유지되는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나’ 아닌 것을 아끼는 마음으로 자신의 눈과 손을 거두었기에,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 채/당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겨우 두 사람이 있는 대화」) 존재하는 세계를 만났다. 이곳에서는 무엇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모두가 움직인다. 그래서 시를 잊는 동안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이 이상한 세계는 결국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