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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박한솜
서울예대 극작전공 3학년. 1996년생.
hansom11@naver.com
스파링
작의
‘전과자의 자식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라는 짧은 유튜브 영상이 이 작품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프레임이 씌워진 채로 타인에게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느낀다. 요즘 사회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 사람에게 키워드를 심어놓고, 그 사람의 진심이나 노력, 일상을 들여다보기보다 그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전부인 것처럼 한 사람을 매장시키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사회현상을 보면서, 특히 자신이 원치 않은 프레임이 씌워진 채로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는 아이들은 삶 속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 과정마저도 모두 링 안에서 스파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등장인물
최예리(17세, 여): 체육특기생으로 경찰대를 목표로 두고 있다. 복싱 선수권대회를 준비하면서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만능인 모범생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에 아빠와 단둘이서 생활하고 있다. 종종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가정사를 꾸며내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파링 상대이자 단짝인 수아에게만은 이상하게도 진심을 자주 내비치게 된다.
정수아(17세, 여): 소년체전에서 순위권에 들 만큼 여자 복서 유망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폭행, 사기로 실형 3년을 살고 나온 전과자 아버지를 두고 있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엔 항상 장벽이 존재한다. 복싱 챔피언이 되어 자신을 옭아매는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소심한 성격이지만 유일하게 예리에게만은 속마음을 털어놓곤 한다.
김성진(38세, 남): 과거 복싱 챔피언으로 활약했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지금은 전남의 한 고등학교 복싱부의 계약직 코치이다. 아이들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끼며 흔들리지만, 자신의 생계가 걸려 있는 일이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박태성(43세, 남): 전남의 고등학교 복싱부 감독. 지독한 꼰대 마인드에 냉철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타 인물: 수아 부(父), 경찰 등
무대
무대의 사면에는 복싱장의 링을 연상할 수 있는 펜스가 쳐져 있다. 펜스 밖은 복도로 나뉘어 있다. 무대는 스파링 연습장이 되기도, 학교 상담실이 되기도, 각자의 집이 되기도 한다.
1장. 링 안
무대가 밝아지면 예리와 수아는 가드를 올리고 스텝을 밟으며 공격 타이밍을 살피고 있다. 두 사람이 천천히 발을 구를수록 낮은 베이스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고 둘은 박자에 맞춰 서로의 빈틈을 노린다. 공격과 방어를 하는 둘의 모습이 반복된다.
그때, 신경질적인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링 안으로 성진이 등장한다.
성진 그만, 그만. 둘 다 정신 안 차려? 대회 얼마 안 남은 거 몰라?
예리와 수아, 올렸던 가드를 동시에 내리고 숨을 몰아쉰다.
성진 정수아, 내가 복싱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했어?
수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수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진 최예리, 그럼 그 수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예리 (장난치며) 상대방의 심리 파악? 정수아는 INTP고, 저는 ESFJ니까 그건 이미 제가 이길걸요? T는 사고, F는 감정이니까. 제가 공감 능력이 더 높아요!
성진 뭐가 어쩐다고? 지금 장난이 나와? 다시. 수를 파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예리 그야, 상대방의 수를 먼저 파악해야죠. 공격이 들어오는 것을 읽고, 그전에 펀치를 딱! 수비하려고 가드를 올리기 전에 펀치를 딱! 코치님, MBTI 몰라요? 그 말이 그 말인데……
예리의 계속되는 장난에 수아가 피식 웃는다.
성진 이것들이 스파링 상대로 붙여놨더니, 절친노트 찍고 앉아 있네.
예리 아, 왜요. 스파링 상대끼리는 친한 것도 안 돼요?
수아 (웃음을 참으며) 죄송합니다. 예리가 계속 웃겨서……
성진 정신 차려라. 복싱은 신경전이다. 상대보다 공격이 늦으면 그땐 이미 네 정신이 케이오(KO)된 후란 말이야. (사이) 내가 죽기 전에 상대를 먼저 죽여야 돼. 알아들었어?
성진의 말에 두 사람, 고개를 푹 숙이고 숨만 몰아쉰다.
성진 대답 안 해?
수아 네. 알겠습니다.
성진 최예리, 경찰대 가고 싶다며? 왜 답이 없어.
예리 (마지못해) 알겠어요.
성진 그럼 오늘은 해산. 둘 다 곧 대회 접수인 거 알지?
예리,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털썩 누워버린다. 수아 역시 성진의 눈치를 잠깐 보다가 바닥에 앉는다.
성진, 링 밖에서 수건 두장을 집어 들더니 갑작스럽게 수아와 예리에게 던진다. 순발력으로 곧바로 잡아드는 수아와 달리 누워 있던 예리의 얼굴에는 그대로 수건이 날아와 꽂힌다.
성진 (피식 웃으며) 이거 하나 제대로 못 잡으면서 복싱이나 할 수 있겠냐?
예리 아이씨, 코치님!
성진 씨? 이게 코치한테 씨씨거리네, 이제.
예리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며) 비타민 씨가 가득한 에너지드링크를 꺼내려고 했죠. 미리 챙겨오는 센스~ 복싱의 기본, 이해와 배려랄까요?
성진 (음료수를 받아들며) 얼씨구. 링 아래로만 내려오면 아주 장난이 치고 싶어 미치지?
예리 옜다. 스파링 파트너, 너도 먹어라.
수아 (웃으며) 땡큐.
성진, 가방에서 종이 두장을 꺼내 수아와 예리에게 건넨다.
성진 이제 슬슬 접수해야지. 부모님한테 보여드리고, 참가신청서 싸인 받아와라.
예리 오. 진짜 접수하고 나면 이제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성진 학교에선 이미 이야기 끝났고, 특별훈련에 들어갈 거다. 각오해야 돼. 예리는 첫 출전이고, 수아는…… 말 안 해도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많으니까, 알고 있지?
수아 (기대감에 상기된 얼굴로) 네, 열심히 할게요.
예리 아니, 나가는 건 두 사람인데 왜 응원은 수아만 해줘요? 너무하네.
그때 감독인 태성이 무거운 표정으로 등장한다. 성진, 가볍게 인사를 하고 수아와 예리 역시 링 안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다.
성진 감독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태성 거…… 대회 출전 말인데.
성진 (웃으며) 오늘 신청서 나눠줬습니다. 애들도 열심히 하고 있고 이번에는 꼭 성과가……
태성 정수아 학생은 보류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수아, 그 말에 당황하며 종이를 꽉 쥔 채로 태성을 바라본다.
성진 예? 아니, 수아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유망주인데……
태성 (수아의 눈을 피하며) 유망주고 뭐고, 괜히 구설수가 있을 수 있으니까…… (작게) 어차피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일 텐데……
수아 네? 저희 아버지는 왜……
태성 거…… 뭐야. 정수아 학생 아버지가 빨간 줄도 하나 있지? 폭행이었나.
수아, 그 말에 짐을 챙기지도 않고 링 밖으로 뛰쳐나간다. 예리는 수아의 짐까지 챙겨 그 뒤를 따라간다. 성진, 안절부절못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태성 거…… 김성진 코치님. 부임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몰랐을 수도 있는데, 정수아 학생 아버지가 전과자입니다.
성진 (당황하며) 아니 음, 저 감독님, 아이가 저지른 범죄가 아니면 선수권대회에 참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수아도 열심히 하고 있고……
태성 (한숨 쉬며) 그러니까 내가 입학 때부터 반대를 했는데…… 그나마 폭행이면 모른 척 참가시키죠. 그만한 실력도 있으니까.
성진 그럼 대체 왜……
태성 살인자 자식이 우리 학교에서 복싱하고 있다 그러면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승을 해도, 우승을 못해도 학교에 좋을 게 없다니까요.
성진 (당황하며) 살…… 살인이요?
태성 아직은 용의자지만…… 전과가 있잖습니까. 자긴 절대 아니라고 한다는데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성진, 한숨을 크게 쉬더니 태성을 천천히 바라본다.
성진 아직…… 용의자고, 확실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왜 애가 그 피해를……
태성 이미 소문 다 퍼진 마당에, 살인자 딸내미가 사람 때리는 운동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성진 복싱은 사람을 때리는 게 아니라! 엄연한 스포츠입니다.
태성 (비웃으며) 거…… 낭만적으로 말하네.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거 같아요? 이번에는 예리 학생만 나가는 쪽으로 이야기 잘해봅시다.
성진 (사이) 아직 시간 남지 않았습니까. 애들한테 안 된다고 먼저 말하면 상처받으니까……
태성 성진 쌤, 곧 재계약이죠? 알아서 좀 잘합시다.
태성, 위협적으로 성진의 어깨를 툭툭 치고 무대 밖으로 나간다.
성진은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다가 힘없이 퇴장한다.
2장. 수아의 집
경찰 두명이 수아의 아버지에게 수갑을 채워 데리고 나간다. 그때 수아가 숨을 가쁘게 쉬며 무대에 등장해서 이 장면을 목격한다.
수아 아빠……
수아의 뒤로 예리가 가방 두개를 들고 따라 들어온다. 경찰 한명이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예리 대체 뭔 일인데? (당황하며)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수아 왜…… 왜 또.
경찰 1 (예리에게) 너가 수아니? 정범석씨 딸?
예리 아니, 저는 수아 친구고요. 쟤가 수아인데……
수아, 벙찐 표정으로 경찰 1을 바라본다.
경찰 1 (곤란한 표정으로) 아직 이야기를 못 들었나보네. 너희 아버지는 너무 큰 죄를 지었을 수도 있는 용의자라 우리가 데리고 가는 거야.
수아 (불안한 듯) 무슨 죄를……
경찰 1 얼마 전에 살인사건 난 거, 알고 있지? 이 동네 술집에서……
수아 살, 살인이요?
경찰 1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보호자는 없니?
수아 잘못, 뭔가 오해하시는 걸 거예요. 그럴 리가 없는데.
경찰 1, 불편한 웃음을 지으며 수아를 바라본다. 그러자 예리가 수아의 어깨를 토닥인다. 경찰 1, 그제야 도망치듯 무대를 빠져나간다. 수아,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예리 용의자라잖아. 분명 경찰이 착각한 걸 거야. (오버하며) 내가 또 경찰대 지망생으로서 이쪽은 꽤 빠삭하잖아? 확실한 증거가 없고, 용의자면 무죄추정원칙에 의해서 그…… 수사를 해야 되기 때문에! 무튼 아니야. 아닐 거야.
수아, 힘없이 웃는다.
수아 응. 착각한 거겠지. 우리 아빠…… 그런 사람 아니야.
예리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지금 정수아의 수를 딱 파악해 보아하니! 걱정은 끝났다! 방심하는 순간 잽을 날려야 공격 포인트~
예리가 장난스럽게 수아에게 잽을 날리자 그제야 수아, 편안한 듯 다시 웃는다. 예리는 그 모습을 보며 같이 웃는다.
수아 대회…… 나갈 수 있겠지?
예리 당연히 나갈 수 있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수아 혹시……
예리 (귀를 막으며) 아아아, 안 들린다. 첫째, 너희 아버지는 무죄추정원칙에 의해 곧 용의선상에서도 제외되실 거고. 둘째, 너는 아버지와 별개로 아무런 죄가 없으니까 대회는 당연히 나갈 수 있고. 셋째, 너는 우승까지 해서 승승장구할 것이다! 오케이?
수아 고마워.
예리, 바닥에 누워 수아에게 따라 누우라는 듯 바닥을 툭툭 친다. 그러자 수아 역시 따라 눕는다.
예리 그런데 너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대회가 제일 걱정되냐? 말하고 보니 웃기네.
수아 응. 그게 제일 걱정돼.
예리 (사이) 대체 너는 왜 그렇게까지 복싱에 목을 매는데?
수아 무슨 질문이 그러냐? 그러는 너는 복싱 왜 하는데?
예리 나야 뭐, 알잖냐. 체육특기생으로 경찰대 가려고…… 경력 하나라도 더 쌓으면 좋잖아. 가산점 1점이 얼마나 소중한데.
수아 경찰…… 그게 왜 되고 싶은데?
예리 꿈이니까. (웃으며) 이유가 뭐 따로 있나? 난 경찰 되면 억울하게 누명 쓰는 사람 없게 할 거야. 그러는 너는 왜 하필 복싱인데?
수아 (사이) 공평하니까.
예리 에? 그게 이유야? 야. 스포츠는 다 공평하지, 복싱만 그런가.
수아 (웃으며) 복싱은 일단 다 평등해야 경기가 시작되잖아.
여전히 모르겠다는 예리의 표정에 수아는 가방에 있던 복싱용품을 하나씩 꺼낸다.
수아 봐봐. 다 똑같은 글러브 하나, 마우스피스, 거기다가 이 트렁크에 나시 하나.
예리 주어지는 ‘템’이 똑같은 건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 아니야?
수아 나 53킬로, 너 52킬로. 그래서 우린 밴텀급 경기만 지원할 수 있지.
예리 동일 체급끼리 경쟁시키는 건 다른 것도 마찬가지잖아.
수아 공격의 조건도, 방어의 조건도 다 똑같잖아.
예리 흠, 그런가. 듣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수아 공평함의 끝이지. 오로지 운과 머리 굴리는 것으로 승부가 나는 게임.
예리 상대방이 던질 수가 뭔지 모르니까?
수아 그게 복싱에서 제일 중요하니까. (망설이다가) 뭣보다 복싱을 하고 있으면…… 뭔가 나도 남들 같아지는 것 같아서.
예리 (웃으며) 넌 원래 남들이랑 똑같거든? 너처럼 평범한 애가 어디 있냐?
수아 평범?
예리 너~무 평범해서 재미없지.
예리와 수아, 눈을 마주치고 웃는다. 예리가 갑자기 일어나 복싱 미트를 집어 든다. 수아, 그 모습을 보고 글러브를 낀다.
예리 (성진을 흉내 내며) 정수아, 복싱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했냐?
수아 (잽을 날리며) 상대방의 수를 파악하는 겁니다.
예리 그럼 지금 가장 중요한 마인드는?
수아 어?
예리 다 잘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수아 (웃으며) 다 잘될 거다!
예리와 수아, 웃는다. 암전.
3장. 링 안
부저 소리가 울리고, 예리와 수아 줄넘기를 하고 있다. 성진, 링 밖에서 한참을 고민하며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한참을 망설이던 성진, 링 안으로 들어오자 예리와 수아의 줄넘기 소리가 멈춘다.
성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찍들 나왔네. 하던 거 계속해라.
수아 아, 코치님. 잠시만요……
수아,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낸다. 그 모습을 보더니, 예리 역시 가방을 가져와 종이를 꺼내 성진에게 건넨다.
성진 (당황하며) 아, 신청서 벌써 가져왔냐?
예리 코치님이 최대한 빨리 가져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수아 저…… 아직 부모님 사인을 못 받았는데.
성진, 수아가 건넨 종이를 빤히 바라본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수아의 종이를 뒤로 넘기고 예리의 종이를 바라본다. 수아의 표정, 점점 어두워진다.
성진 최예리. 왜 사인이 없어?
예리 아, 엄마 아빠가 맞벌이라 바빠요. 어제 받으려고 했는데 너무 시간이 늦어버려서…… 오늘 아침에 받으려고 했는데 제가 늦잠을 자서 이미 두분 다 나가고 없어서요. 코치님이 좀 대신 해주시면 안 돼요?
수아 (망설이다가) 저도…… 코치님이 대신 해주시면 안 될까요?
한참 정적이 흐른다.
성진 아직 구속 중이시냐, 아버지?
수아 네. 근데 곧! 곧 풀려나실 거예요. 증거도 불충분하고……
성진 왜 말 안 했냐?
수아 뭘요?
성진 너네 아버지. 전과자라며. 폭행이었나, 사기였나. (한숨 쉬며) 거기다 이젠 살인……
수아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전에는 저희 아빠가 잘못한 게 아니라……
성진 어쨌든 죄를 지은 건 맞는 거잖아.
수아 이번엔 아니라니까요.
성진 (헛기침하며) 수아는…… 일단 기다려보자. 참가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가 않으니까.
수아 왜요?
성진, 수아의 물음에 당황한 듯 수아를 빤히 바라본다.
수아 왜 참가 못하는데요?
성진 (당황하며) 아마 신청이 안 될 거다.
수아 저는 죄 없는데요.
성진 거…… 아버지가 죄가 있으면 좀 그렇지 않겠냐.
수아 (고개를 푹 숙이며) 참가할 수 있잖아요. 그런 이유…… 결격사유에 없었어요. 저도 다 찾아봤어요.
예리 맞아요. 저도 찾아봤어요. 아니, 애초에 수아 아빠랑 수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성진 시끄러워. (헛기침하며) 일단. 다른 거 생각 말고 훈련에나 집중해라. (수아를 바라보며) 방법을 찾아보자.
성진, 퇴장한다.
수아, 고개를 푹 숙이고 링 한가운데 서 있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예리, 수아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퇴장한다.
낮은 베이스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다. 수아, 그 소리에 맞춰 천천히 자세를 잡는다.
수아 원투 더킹. 다시 원투 어퍼. 아니, 다시 원투 훅! 더킹! 스트레이트! 다시…… 다시…… 원투.
수아, 콤비네이션대로 허공에 주먹을 날리다가 한가운데 주저앉는다. 암전된다.
4장. 학교
조명이 다시 밝아지면 링 안에 의자 두개가 놓여 있다. 예리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는다. 그때, 성진이 무대 위로 등장한다.
성진 이게 진짜 뭔 일이냐. 머리가 아파 죽겠다, 정말.
예리 코치님…… (웃으며) 아닌 거 아시면서.
성진 얘기 들었다. 아니…… 그 평범한 양반이 무슨 살인 용의자가……
예리 왜 용의자겠어요. 아니니까. 증거가 없으니까요! 말도 안 돼요.
성진 (한숨 쉬며) 그런데 그날 거기는 왜 가셨대?
예리 네?
성진 이 좁디좁은 동네에서 너희 아버지 숙맥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예리 그……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성진 그런 양반이 왜 하필 그때 아가씨들 부르는 술집에나 들락거렸냐 이 말이지.
예리 코치님. 저희 아빠는 아니라니까요?
성진 (헛기침하며) 근데 그 술집에서 살인사건이 났잖아.
예리 코치님!
성진,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성진 그런데 왜 하필 그 술집에 들락거린 게 대회 앞두고 있는 두명의 아버지냔 말이야. 대회는 코앞인데…… 아주 그냥 미쳐버리겠다.
예리 저희 아빤 절대 아니에요. 아예 상대가 다르잖아요.
성진 뭐?
예리 코치님이 말했던 것처럼 저희 아빤 이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숙맥인데! (과장하며) 우리 아빠 벌레 한마리도 못 죽이는 사람이에요. 어! 그래, 잠자리 날개 이야기 알아요?
성진 잠자리?
예리 아니 글쎄, 잠자리 날개를 손으로 잡으면 녹아버린다나 뭐라나. 초등학교 때 곤충채집이 숙제였는데, 아빠 때문에 한마리도 못 잡았다니까요? 날개를 안 잡고 어떻게 통에 넣냐고요!
링 밖으로 수아가 천천히 다가온다. 엿듣는 것처럼 링 밖에서 링 안으로 귀를 가져다 댄다.
성진 잠자리라……
예리 (사이) 근데 수아 아빠는 전과자잖아요.
성진 전과자 쪽이 더 의심이 가긴 하지.
예리 (손톱을 물어뜯으며) 살인을 저질렀으면 저희 아빠가 아니라 수아 아빠가 저지르겠죠. 안 그래요? 이미 감방도 갔다 온 사람인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요?
밖에서 듣던 수아, 분노와 수치심에 주먹을 꽉 쥔다.
예리 우리 아빤 절대 아니에요. 그러니까 저 대회 나갈 거예요. (애써 웃으며) 코치님, 저랑 내기할래요? 우리 아빠가 얼마나 빨리 풀려나는지?
성진 그런데 말이다, 너희 집 왜 이혼한 거냐?
예리 네?
성진 네가 하도 엄마 아빠 얘길 자주 하길래 생각도 못했다. 같이 산다고 하더니…… 왜 거짓말한 거냐?
예리 하, 코치님. 그건 그냥…… 제가 어릴 때, 합의해서 한 거예요. 문제 있거나 그래서 그런 게 아니……
성진 (말을 끊으며) 됐다, 됐어. 네가 뭘 알겠냐.
예리 다시 주세요. 신청서.
성진 뭐?
예리 엄마 아빠 사인 둘 다 받아올게요. 그럼 됐죠? 다시 주세요.
성진 (한숨 쉬며) 너도 수아랑 마찬가지다. 누명 못 벗으면 대회고 복싱이고 경찰대고…… 네가 제일 잘 알잖냐.
예리 그러니까 가져간다고요. 아닐 거니까.
성진 (고개를 저으며) 가져가라, 가져가.
성진, 답답한 듯 링 밖으로 나가버린다. 예리는 성진이 나가는 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 차린 듯 다시 고개를 든다.
예리 설마…… 우리 아빠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 말도 안 돼.
예리, 안절부절못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예리 죽은 사람이 그 술집 주인이랬잖아. 근데 우리 아빠가 거길 왜 가? 여자 만나러? 아빠가…… 여자를 만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왜 갔지, 거길……
예리는 정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예리 우리 아빠만 아니면 되는 거잖아. 아빠가 아니란 증거만 있으면 되는 거네. (사이) 근데 아빠가 맞으면……? 아니, 아니지. 정수아 아빠가 살인자라는 증거를 찾으면 되는 거 아니야? 폭행으로 감방까지 갔다 왔잖아…… 빡 돌아서 홧김에 죽였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예리, 흥분했다가 다시 심호흡을 여러번 하더니 의자에 앉는다.
예리 정수아랑 나랑 어떻게 똑같아.
예리, 불안한 듯 글러브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때 수아가 안으로 들어온다.
예리 (놀라며) 뭐야? 정수아?
수아 왜 이렇게 놀래. 욕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예리 무슨 소리야. 그냥 갑자기 들어오니까 깜짝 놀란 거지……
수아 괜찮아?
예리 응? 야, 무슨 질문이 그러냐? 우리 아빠는 어차피 아닌데.
수아 (피식 웃으며) 너희 아빠도, 우리 아빠도 절대 아닐 거야.
예리 어? (애써 웃으며) 그래, 둘 다 아니겠지. 근데 너 왜 왔어? 나 때문에?
수아 아, 코치님이 대회 참가신청서 다시 하나 가져가라고 하셔서……
예리 코치님이…… 신청서를 가지고 가라 했다고?
수아 응. 너도 다시 가져간 거 아니야?
예리 (당황하며) 아, 내가 찾아줄게.
수아 내가 가져갈게. 여기 있네.
예리,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는다.
예리 수아야. 너희 아버지 아직 구속 중이시지?
수아 어? 뭘 그런 걸 물어?
예리 맞지?
수아 곧 풀려나실 거야. 우리 둘 다…… 너가 그랬잖아.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마인드가 필요한 거라고. 너도 그럴 거야.
예리 어?
수아 (사이) 너 안색이 안 좋은데? 오늘 쉬는 게 낫지 않겠어?
예리 아니야. 곧 갈게.
수아 무리하지 마.
수아, 예리의 어깨를 한번 토닥이고는 퇴장한다. 예리, 더욱 불안해진 듯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반복한다.
예리 왜 저렇게 여유로워? (주먹을 꽉 쥐며) 이렇게까지 공평해질 필요는 없잖아.
예리, 신경질적으로 밖으로 나가버린다.
5장. 링 안
시끄러운 음악이 재생되고, 무대는 링으로 바뀌어 연결된다. 성진이 태성과 함께 등장한다.
태성 설마 두명이 공범은 아닐 거고, 누군가 하나는 분명 풀려난다는 말인데. 거…… 상황 진짜 복잡해졌네.
성진 둘 다 출전시키면 안 되겠습니까?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연좌제를……
태성 (한숨 쉬며) 김성진 선생님. 아직도 그런 속 편한 소리가 나옵니까? 일단 둘 다 훈련시켜요. 애들 멘탈 훈련 위주로. 웬만하면 애들한테 정보 좀 캐서……
태성, 답답하다는 듯 성진에게 속삭인다.
성진 네……? 아무리 그래도 애들한테……
태성 아직 증거물은 안 나오고, 그렇다고 둘 다 출전시키기에는 불안하고…… 거…… 다른 방법 있습니까?
성진 애들이 뭔 죄가 있습니까. 어른들 잘못인데……
태성 성진 쌤, 애가 몇살이라고 했죠?
성진 이제 초등학생입니다. 그건 왜……
태성 코치 자리 성진 쌤 아니어도 할 사람 많습니다. 저는 다 쌤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어?
성진, 한참 대답을 못하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태성이 퇴장하고, 성진이 휘슬을 불자 수아와 예리가 스파링을 위해 무장을 하고 링 위로 등장한다.
성진 오늘은 좀 특별한…… 훈련을 할 거다. 복싱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뭐라고 했지?
예리 (스텝을 밟으며) 상대방의 수를 먼저 파악하는 것입니다.
수아 (스텝을 밟으며) 상대방에 대한 파악입니다.
성진 그래. 복싱은 이 멘탈! 멘탈 싸움이다 이거야. (사이) 너네 둘이 스파링 파트너로 몇년째냐?
수아 (멈칫하다가) 일년 정도 됐습니다.
성진 그럼 서로에 대한 파악은 끝났겠지?
예리 네.
성진 경기에서는 처음 보는 상대를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공격 습관부터 약점, 그리고 멘탈까지. 지금부터 그걸 훈련할 거다. 지금부터 스텝 밟으면서 가벼운 공격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다. 시작.
경기 시작을 알리는 부저음이 들리자 수아와 예리, 천천히 스텝을 밟는다. 성진, 무거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수아 (잽을 날리며) 최예리, 고 1.
예리 (잽을 날리며) 정수아, 고 1.
성진 다 아는 거 제외하고, 상대방 멘탈을 흔들리게 만들 걸 말해. 크게!
두 사람,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스텝을 밟는다.
수아 이혼 가정이다.
예리 뭐?
수아 (잽을 날리며) 정신 차려.
예리 (눈을 질끈 감으며) 아빠가 전과자다.
성진 그래, 그렇게.
수아 진짜 이럴 거야?
성진 (박수를 치며) 정수아, 반격 안 해?
수아, 다시 가드를 높게 든다.
수아 복싱하는 이유도 없으면서.
예리 넌 아빠한테서 도망가려고 복싱하는 거잖아.
수아 코치님 저 못하겠어요.
성진 정수아, 멘탈 안 챙겨? 한마디 한마디 다 반응할 거야? 실전이면 이미 끝났겠다?
수아 아니, 사생활이 왜 나와요? 그냥 스파링할게요.
성진 (무시하며) 계속해.
수아, 어쩔 수 없이 다시 스텝을 밟는다.
예리 (잽을 날리며) 사기 폭행 전과 2범.
수아 너네 아빠도 구속 중이잖아.
예리 전과자랑 우리 아빠랑 같냐?
수아 (피식 웃으며) 죽은 피해자랑 아는 사이라며.
예리 (멈칫하지만 금방 다시 자세를 잡고) 너네 아빠도 거기 밥 먹듯 들락거렸대.
수아 (펀치를 날리며) 너희 아빠도 자주 왔어.
예리 (피하지 못하고 맞은 후 숨을 몰아쉰다) 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수아 (가드 올리며) 멈추지 마. 우리 아빠, 거기서 알바했어. 서빙. (사이) 너희 아빠랑은 다르지.
예리 뭐라고? 정수아, 그만해.
성진, 휘슬을 삑삑 불며 압박한다.
성진 누구 마음대로 그만해. 계속해.
수아 (다시 펀치를 날리며) 나 이미 다 안다고.
예리 (피하며) 네가 뭘 알아. 우리 집에 대해.
수아 우리 아빠도 아니고, 너네 아빠도 아니야.
예리 뭐? 거기서 일했으면 더 의심 가는데?
수아 이제 그만해.
예리 계속해. 뭐가 찔리는데?
수아 그만하자고.
예리 (펀치를 날리며) 사기 치려다 실패해서 홧김에 죽인 거 아냐? 아, 아니면 같이 사기 치려다 그 여자가 내뺐을 수도 있지.
수아 (펀치를 날리며) 그냥 알바라고. 써주는 곳이 없어서…… 최저도 못 받고 일하는데! 그래도 좋다고 했었어.
예리 아, 최저도 못 받아서 죽인 거 아니고?
수아 야. 그러는 너네 아빤?
예리 우리 아빤 거기서 여자 건들 리가 없어.
수아 (펀치가 점점 강해진다) 그럼 뭐 우리 아빠는 그러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예리 (가드를 올린다) 그럼 누구야.
수아 니네 아빠가 아닐 거라는 보장도 없어.
예리 (힘이 빠진다) 우리 아빤 여자 안 좋아해. 그러니까 절대 아니야.
수아 (멈칫하며) 뭐?
예리 거기 가는 이유도 주인아저씨 만나러 가는 거라고. 연애하러. 그래서…… 이혼한 거니까.
정적이 흐른다.
성진 (당황하며 헛기침한다) 너무 격해진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집에들 가라.
성진이 도망치듯 무대를 빠져나간다. 수아, 한숨을 쉬며 글러브를 벗는다.
수아 너 근데 그거 아냐? 죽은 그 여자도 주인아저씨랑 연애했던 거.
예리 뭐?
수아 그날, 주인아저씨랑 그 여자랑 엄청 싸웠어. 근데 그때 너네 아빠도 왔었다고.
예리 너가 그걸 보기라도 했어?
수아 아빠한테 들은 거야. 너만 알고 있으라고.
예리 그걸 네가 왜…… 나한테 말해주는데?
수아 그야 네가 딸이니까.
예리 (애써 웃으며) 애초에 시작점이 다르잖아. 아무도 그 말 안 믿을걸?
수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예리 너네 아빤 이미 전과자잖아. 거짓말을 해도 너네 아빠가 했겠지. 누가 믿어, 그 말을. 너는…… 믿을 수 있어?
수아 야, 너 진짜. (사이) 이제껏 그런 생각 하면서 나한테 잘해줬냐? 뭐, 동정이야?
예리 그러는 너는…… 지금 이 상황이 아주 신나겠다?
수아 내가 왜?
예리 복싱이 공평한 게임이라 좋다며. 지금 이 상황, 네가 제일 바라던 그림 아니야?
수아 야…… 너 진짜. (한숨 쉬며) 됐다. 내가 뭔 말을 더하냐.
수아, 링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한다.
수아 근데 그거 알아? 나라고 태어났을 때부터 전과자 딸이었겠니? 그 타이틀 붙는 거 한순간이야. 백날 소리쳐도…… 사람들은 어차피 진실 같은 거 관심 없어. (씁쓸하게) 결국 너도…… 마찬가지잖아.
수아, 말을 끝내고 밖으로 나간다. 예리는 자리에 주저앉아 두려움에 손이 덜덜 떨린다.
수아 진짜 아빠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다…… 끝나는 건가. (글러브를 바라본다) 살인자의 딸?
예리, 천천히 일어나서 링 중앙에 선다.
예리 살인자의 딸이 경찰이다?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해? 살인자의 딸이 선생이다?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 살인자의 딸이 회사원이다? 딸 이력서에는 그런 내용이 기입이…… 안 되나? (사이) 살인자의 딸이 대학생이다. 살인자의 딸도 일상이 있다.
예리, 괴로운 듯 글러브를 벗어 무대 위에 던진다.
예리 그럼 이제 반대로…… 살인자의 딸은 모든 것을 그만두었다. 그래. 살인자의 딸은 정상적인 일상을 살 수 없다. 그래야지. 살인자의 딸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살인자의 딸은 죽어야 한다. (사이) 이거야?
예리, 허공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는다.
암전.
6장. 학교
조명이 밝아지면 무대 위에는 성진과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수아와 예리가 있다. 수아와 예리는 차례대로 신청서를 건넨다. 성진은 둘의 신청서를 받아 수아의 것은 옆자리에 두고, 예리의 것은 불편한 듯 가만히 들고 있다.
성진 너 진짜로 계속 복싱할 거냐?
예리 네.
성진 지금 상황,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냐.
예리 만약 그게 진짜 저희 아빠라고 하더라도…… 왜 제가 포기해야 해요?
성진 생각해봐라. 아무리 좋게 생각한다고 해도, 살인자 딸내미가 사람 때리는 운동 한다고 하면…… 물론, 스포츠라고 하지만.
예리 아직…… 확실한 거 아니잖아요.
성진 (한숨 쉬며) 그래, 네가 뭘 어쩌겠냐.
예리 그러니까요. (사이) 저는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해요?
성진 뭐?
예리 저는 뭘 해야 하는 거냐고요. 이 학교 들어오자마자 복싱부터 시작했는데…… 복싱도 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럼 경찰대는요? 그것도 안 돼요?
성진 (곤란한 듯)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냐?
예리, 답답한 듯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예리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요? 급식실만 가도 웅성거려요. 살인자 딸도 밥을 다 먹는다고. 수업시간에 잠깐 졸기만 해도 바로 어떻게 잠이 오냐고 해요. 그냥 제 행동 하나하나가…… 다.
성진 그거야 너네 아빠가……
예리 (말을 끊으며) 그런데요, 제가 사람 죽인 거 아니잖아요.
수아 예리야.
성진 됐다, 말을 말자. 나도 막막하다……
성진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신청서를 두장 다 챙기려다가 한장은 의자에 내려놓는다. 그러자 예리가 성진의 팔을 잡는다.
예리 쌤, 아시잖아요. 전 그냥 열심히만 했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사이) 그러니까…… 쌤이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성진 미안하다.
예리의 말에 성진은 부담스러운 듯 예리의 팔을 떼어내고 무대를 퇴장한다. 예리는 잠시 멈춰 서 있다가 무기력하게 다시 앉는다.
수아 (조심스럽게) 예리야……
예리 넌 좋겠다. 이제.
수아 뭐?
예리 이미 뉴스에도 나왔잖아. 피해자는 호모포비아였다. 근데 살인 용의자인 우리 아빠는 동성애자다. 그러니까 우리 아빠가 유력해졌잖아. (사이) 네 말이 다 맞더라. 한순간이야.
수아 아직 확정 난 거 아니잖아……
예리 (수아를 빤히 바라보며) 근데 있잖아, 넌 그거 이미 다 알고 있었지?
수아 어?
예리 그날, 우리 스파링한 날. 그때 너가 다 말한 거 아니야?
수아 무슨 소리야. 나 아니야.
예리 왜? 너 이 시합 절실하잖아. 네 입으로 네가 말했잖아. 이것만이 살길이라고.
수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예리 뭐?
수아는 한숨을 크게 쉬더니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긴다.
수아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내가 가서 말했어. 그래야 너 대신 내가 시합에 나가지. 그래야! 내가 살 길을 찾지.
예리 너……
수아 왜? 그게 나빠? (사이) 넌 이미 나한테 신경전에서 진 거야.
예리,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아 때리기라도 하게?
예리 (씁쓸하게 웃으며) 네 말이 다 맞더라. 타이틀 붙는 거. 그거 한순간이더라. 그냥…… 내 이름이 없어지더라고.
수아 야, 최예리.
예리 그냥 포기하는 게 어울리는 타이틀이잖아. (의자에 놓인 신청서를 든다) 난 이제 복싱 그만둘래.
수아 뭐?
예리, 손에 든 신청서를 찢는다. 수아는 당황하며 찢긴 신청서 조각을 줍는다.
수아 야, 최예리. 너 미쳤어?
예리 난 있잖아. 복싱이 너무 공평한 스포츠라 이제 싫어. (사이) 경찰도 싫어. 애초에 나한테 맞는 옷도 아니었어. 아, 이젠 그냥 못하는 거구나.
예리, 이 상황을 피하고 싶은 듯 밖으로 나간다. 수아는 주운 신청서 조각을 빤히 보다가 종이를 모아 주머니에 넣고서 퇴장한다. 암전.
7장. 링 안
성진, 전화하며 무대 위로 등장한다.
성진 아, 예예, 감독님. 둘 다 출전해야죠. 저희 학교 에이스들인데요. (사이) 진범도 잡혔으니 이제 문제없지 않겠습니까?
뒤이어 수아가 링 안으로 들어와 가방 안에서 글러브를 꺼낸다.
성진 어휴, 그래도 천만다행이죠. 선수 등록 일주일 남기고 다 해결됐으니까. 아이고, 저는 걱정도 안 했습니다. (수아 눈치를 보더니) 두분 다 어디 사람 죽일 인성들입니까?
수아 (어이없다는 듯) 코치님.
성진 (무시하고) 예, 예. 시합 전까지 훈련 빡세게 시키겠습니다. 당연히 메달권은 확정이죠. 그럼요.
수아 (더 크게) 코치님.
성진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수아, 전화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수아 예리, 복싱 그만둔대요.
성진 뭐?
수아 출전이고 뭐고 안 한다고 했다고요. 경찰대도 안 간대요.
성진 이제 다 해결됐잖아. 그게 뭔 소리야?
수아 복싱이 너무 공평한 스포츠라서 싫대요. (사이) 근데 진짜 공평한 스포츠라는 게 있을까요?
성진 (관심 없는 듯) 빨리 훈련 준비나 하자. 예리는 내가 얘기해 볼 테니까……
수아 쌤, 어쩌면 공평한 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어요. 안 그래요?
성진 ……뭔 바람이 들어서 답지 않게 쫑알거리냐. 언제는 복싱 아니면 안 되겠다며? 간절하면, 포기만 안 하면…… 다 살길이 생기는 법이다.
수아 (사이) 저도 복싱 그만둘래요.
성진 너 미쳤냐?
수아 전 이제 그냥…… 싸우는 게 싫어졌어요.
성진, 말이 나오지 않는 듯 머리를 감싸며 왼쪽과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성진 수아야. 복싱은 싸우는 게 아니라 스포츠다. 괜히 최예리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정신 차려. 대회까지 얼마 안 남았다.
수아 저 흔들리는 거 아니에요. 그냥…… 그만 때리고, 그만 맞고 싶어요.
성진 (화내며) 정수아!
정적이 흐른다. 정적을 깨고 예리가 무대로 등장한다. 예리와 수아는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성진 최예리. 너 정신 안 차려? 대회 얼마나 남았다고 훈련 시간에 늦어? (목소리를 높이며) 선수 등록 신청서, 빨리 줘.
예리 짐 챙기러 온 거예요.
성진 (답답한 듯) 이제 걱정할 일도 없잖아. 둘 다 아버지 풀려났고, 진범도 밝혀졌고. 선수 등록도 문제없고. 정신 차려. 복싱은 멘탈 싸움이라고 몇번을 말해!
예리 코치님. 저 복싱 안 할 거예요.
성진 (한숨 쉬며) 진짜 왜 그러냐. 너 내가 복싱 그만두라고 한 것 때문에 그래? 그땐 상황이…… 내 사정도 있었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예리 ……코치님.
성진 (말을 끊으며) 너 그냥 지금 선수 등록 신청서 쓰자. 내가 싸인하면 되니까. 원래 다 그렇게 하는 거야. 링 위에서 몸 풀면서 기다리고 있어.
성진, 무대 밖으로 조급하게 나간다. 링 위에 남은 수아와 예리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수아는 멋쩍은 듯 글러브를 만지작거리다가 주머니 안에서 찢어진 조각들을 테이프로 이어 붙인 신청서를 예리에게 건넨다.
수아 이제 그만둘 이유 없어졌잖아.
예리 (신청서를 받아들고서) ……넌 왜 갑자기 복싱 안 한다는 건데?
수아 그냥 싫어졌어.
예리 나도…… 그냥 싫어.
수아 그런 게 어딨냐?
예리 쪼잔하잖아. 상대방 약점 읽고 공격해야 한다는 게. 나 살겠다고……
수아 (사이) 우리 스파링 한판 할까.
예리 스파링?
수아 마지막으로.
예리 그래. 마지막으로……
예리와 수아는 글러브를 끼고 스텝을 밟기 시작한다. 낮은 베이스 소리가 커지기 시작하고, 둘의 스파링이 시작된다.
수아 원투 더킹.
예리 원투 어퍼.
수아 다시 원투 훅.
예리 다시 원투 스트레이트.
라운드 끝을 알리는 부저가 울린다. 그러자 수아와 예리는 동시에 무대에 널브러지듯 누워버린다.
예리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갔네.
수아 그러게. 없었던 일처럼.
예리 그런데 왜 우린 계속 싸우고 있는 거야?
수아 나도…… 잘 모르겠어.
예리와 수아, 씁쓸하게 웃다가 서로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민망한 듯 서로의 눈을 피한다. 머쓱하고, 어색한 공기가 무대 위에 가득하다. 예리, 먼저 일어나 수아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자 수아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난다. 두 사람은 다시 스파링을 이어가기 위해 자리를 잡고 스텝을 밟는다. 천천히 암전된다. 막.
심사평
대산대학문학상에 희곡은 총 61편 접수되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색다른 소재, 참신한 비유와 낯선 시선으로 탱글탱글한 청귤 상자 한박스를 받았습니다. 한알씩 맛보며 감탄하고 갸우뚱거리며 궁리하다 아쉬워하고 감동받았습니다. 각각 또랑또랑해서 고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작품을 볼 때마다 ‘희곡은 무엇인가?’ ‘어떤 작품을 감히 좋다고 말할 수 있나?’란 원론적인 질문에 시달립니다.
먼저 ‘희곡의 꼴’을 갖추었는지를 살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무대의 힘을 한껏 발휘할 텍스트인지를 가늠했습니다. 문장이 섬세하고 맛깔스러워 소설로 꾸리거나 영상언어로 펼치면 더 풍성해질 글들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장르의 문법을 빌려 희곡의 지평을 넓히는 시도가 문제라는 건 아닙니다. 약간의 지문을 가미한 대사로 전개되면 희곡일까, 줄글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여러 인물에게 나누어 발화시키면 희곡일까. 왜 하필이면 ‘희곡’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궁리를 미룬 게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SF, 판타지 등 새로운 틀로 현실을 담으려는 작품들이 넘쳤습니다. 파릇파릇했습니다. 그런데 신박한 아이디어가 제안으로 남고 이야기로 육화되지 못하다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아이디어란 악령에 사로잡혀 정작 할 말이 무엇인지를 잊는 마법에 걸린 셈입니다. 또한 이러한 신묘한 설정들을 설명하는 데 애정을 집중시켜 정작, 인물과 갈등은 안드로메다로 사라지는 사례도 목격했습니다. 허무맹랑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는 이해합니다만, 설명이 넘치면 의미와 재미가 앉을 자리가 줄어듭니다. 소재는 싱그러운데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사례도 아쉬웠습니다. 전형적인 캐릭터, 빌려온 고민, 익숙한 코드의 게으른 조합 등은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은 결과를 낳습니다. 아이디어와 색다른 형식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힘’을 지녔을 때 뜻깊습니다.
「갓고와 김치컴」은 생동감 넘치고 대표성을 지닌 캐릭터와 쇼 무대를 방불케 하는 코러스의 활용이 돋보입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을 데리고 하고픈 이야기는 뭐였을까라는 의문과 더불어 펼쳐놓았지만 밀어붙이지 못한 결말이 아쉽습니다. 곰삭히면 좋겠습니다. 「시간 저축은행」은 설정과 반전을 무기로 삼은 만큼 사건이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소동극으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런데 시간이나 관계에 대해 작가가 내린 결론이 낯익습니다. 만만치 않은 화두를 붙들었으니 작가 나름의 결론을 맺어 풍성한 의미까지 거두시길 기원합니다. 「가족력」은 시를 방불케 하는 참신한 표현과 공감할 만한 에피소드가 그득한 작품입니다. 에피소드들의 생경함은 독특한 심상을 만들어내 갤러리 벽에 걸리고, 인물들의 독백은 이어져 스크린에 투사됩니다. 세상을 낯설게 보는 시선과 아름다운 언어가 만나 ‘읽은 텍스트’로서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태와 심정을 다양하게 변주하여 두텁게 발라주는 표현의 풍성함에 비해 사건이나 의미 구현은 도돌이표를 찍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내면 분석이나 독백, 화자의 활용은 소설에는 맞춤이지만 무대에 적합한가, 심란했습니다. 「청어의 뼈, 코트나 바닥」은 실험성이나 도전정신이 빼어납니다. 감각적인 대사, 캐릭터, 인물을 주제로 밀어내는 상황이 빛을 발합니다. 영상의 활용방안을 궁리하고 남다른 표현방식을 모색한 점도 눈에 띕니다. 그런데 과도합니다. 장소 이동도 불필요하게 잦고 등장인물도 넘쳐나니 분량도 훌쩍 불어났습니다. 「불청객」은 당대의 고민을 두 인물을 통해 간결하게, 무리수를 두지 않고 차근차근 펼친 작품입니다. 문제의식이 돋보이고 현실에 대한 분석도 날렵합니다. 다만 2인극인데 두 인물 사이에 힘의 균형이 무너진 점이 아쉽습니다. 한명에게 너무 힘을 실어주어 다른 인물은 비난의 대상으로 머물렀습니다.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면 싶었습니다.
「스파링」은 권투 경기장이란 무대 표현방식, 청소년 둘을 설정해 이들의 고민이나 그들을 짓누르는 현실을 팽팽하게 담아냈습니다. 갈등요소가 기다렸다는 듯 때맞춰 등장하는 점에서 살짝 작위적이란 인상도 받았지만 현실의 모순을 이야기에 녹여내고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는 장점이 이겼습니다. 두 인물이 마주 보며 웃는 마지막 장면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푸릇푸릇했습니다.
무대를 그리고 그림을 펼치고 이야기를 들려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김나정 정범철
당선소감
처음 연극을 보고 압도되었던 2016년 여름이 기억납니다. 무대의 인물들과 감정을 나누고 온 마음을 다해 공감하며 극장을 나오던 순간, 앞으로 글을 쓰며 살아가겠다고 패기롭게 다짐했습니다. 하나의 키워드로 제 작품을 정의할 수 있다면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 외면당하고 상처를 입을 때조차 사람은 사랑 안에서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을 믿습니다. 낭만적이고 허무맹랑할지 몰라도 꾸준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일러주셨던 정일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덕분에 많이 성장했고, 온전히 사랑을 받고 주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희곡의 즐거움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해주신 조광화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18살 서울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옆을 지켜주며 안식처가 되어주는 다연과 초희, 항상 견고한 애정의 테두리를 제공해주는 곤, 작품 얘기로 함께 수많은 밤을 지새웠던 가장 큰 동료 룸메이트, 너무나도 사랑하는 분야를 같은 온도로 나눌 수 있는 ‘Overture’, 그리고 함께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있는 창작집단 ‘온탕’ 동료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내가 나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방황의 시기가 유난히도 길었던 저를 항상 믿고 응원해준 가족들에게 감사합니다. 넘어지지 않는 법보다 넘어졌을 때 거침없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덕분에 더욱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작가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설레는 마음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곳이 이곳이라 기쁩니다. 서투른 작품에 소중한 기회를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던 시기에 그 방향이 맞다, 잘 걸어가고 있다 응원을 받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면 공기가 달라진다고 느낍니다. 저 역시도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공기가 그들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자만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 분야를 순수하게 즐기며 꾸준히 써나가겠습니다.
박한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