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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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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혁진 河赫進

서울예대 문예창작전공 2학년. 1996년생.

10deristhenight@naver.com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김행숙의 『사춘기』 다시 읽기

 

 

1. 왜 다시 사춘기인가1

 

시는 부단히 움직인다. 시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시는 언제고 다시 읽힐 수밖에 없다. 물론 이때의 ‘다시’는 단순 반복으로서의 다시가 아니라 방법과 방향을 고친 변화와 진화로서의 다시다. 요컨대 다시 읽기는 그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혹은 오해)되어왔던 텍스트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시간을 통과하며 달라진 시각이 새로운 관점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문학사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들려오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단 역시 사회 전반에 걸쳐 폭로된 ‘젠더 트러블’ 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문학사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잃어버린 10년’이나 다름없는 시기였다. 진은영이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라고 고백한 이래로 ‘감각적인 것’(문학)과 ‘정치적인 것’(현실)의 관계를 둘러싼 수많은 말과 글이 쏟아져 나왔지만, ‘시와 정치’ 담론 역시 여성의 현실을 포함하는 장(場)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2000년대에 등장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으로 무장한 젊은 시인들”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그것이 “신랄한 비판”이든 “애정어린 충고”든 “뜨거운 격려”2든 여성주의와는 무관한 지점에서 성맹적(gender blind)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2000년대의 시, 그중에서도 여성 시인들의 여성시를 ‘지금 여기’의 달라진 감각과 관점으로 다시 읽는 작업이 요청된다. 이를 통해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담론들이 사실은 젠더적으로 편향된 개념과 가치는 아니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누구의 사춘기였나

 

2000년대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을 일컫는 표현 중에서 지금까지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명명은 권혁웅의 ‘미래파’일 테지만, 그 내용을 가장 성실하게 작성한 평론가는 신형철일 것이다. 그는 ‘기존의 서정’, 즉 “‘자아’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시적 사유는 많은 경우 불가피한 나르시시즘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타자성을 자아의 영역으로 “동일화하려는 관성”이야말로 “서정성의 어떤 본질적 관성”3이라고 덧붙인다. 그래서일까. 그는 ‘새로운 서정’이 보여주는 ‘나’의 ‘없음’에 주목한다. 2000년대에 등장한 시인들은 서정적 자아의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기 위해 그 메커니즘의 핵심인 ‘나’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다른 글을 통해 “뉴웨이브의 핵심은 ‘나’에 대한 발본적 반성에 있습니다”라고 정리하며, “저는 자아(ego)와 주체(subject)를 구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4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뉴웨이브의 특징을 고백체로 서술할 때, 그의 논의에는 논리적 정합과 윤리적 호소가 뒤섞여 있다. 예컨대 그가 새로운 시가 펼쳐 보이는 ‘진경’을 맥락화해야 할 필요성을 말하며, “비록 그것이 착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다 하더라도”5라고 덧붙일 때, 뉴웨이브는 미학적 가능성뿐만 아니라 일종의 윤리적 정당성까지 부여받는다.

추측건대 이는 한 평론가가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 주장했던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그늘 아래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고뇌한 흔적일 것이다. 신형철은 공교롭게도 그의 첫번째 평론집의 첫번째 글에서 “근대문학이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근대문학의 ‘전부’라 믿었던 어떤 ‘부분’이 괴사한 것”이라며 카라따니 코오진의 주장을 반박한다. 따라서 그가 문학을 “본래 난장이였고, 더 작게는 ‘짱돌’이었으며, 더욱더 작게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고 정의하며, 문학의 자리를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 위치시킬 때, 다시 말해 “정치(의 윤리)”가 아니라 “윤리(의 정치)”6를 주창할 때 진실의 자리는 이미 정해진 것이 된다.7 결국 뉴웨이브라는 발견은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한 평론가의 바람이 담긴 발견이었으며, 그렇기에 그 발견은 있는 것을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각색해서 본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혹 역시 자연스레 제기된다. 요컨대 ‘종언’ 이후의 ‘미래’로 여겨졌던 2000년대의 시에서 우리가 보지 않은 혹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이쯤에서 우리는 2000년대의 ‘포스트-진정성’ 담론이 “시인이 아닌 평론가가 내면화하고 추구한 것”이었으며 그마저도 “‘비장애인 이성애자 지식인 남성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의해 공유되는 에토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인아영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논의가 2000년대 문학담론장에서 “장애인, 퀴어, 비지식인, 여성은 주체로 포섭되지 않았거나 그럴 수 없었다”는 사실을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문학담론장을 주도했던 ‘타자성’ 역시 젠더적으로 편향된 개념이었던 것은 아닐까. 많은 여성 작가가 등장하고 활동했던 200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적 관점의 비평이 드물다 못해 거의 전무한 이유는, 이른바 ‘타자의 윤리’라는 이름으로 논의되었던 2000년대의 윤리가 모두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주체에 따라 제한적으로만 가능했던”8 윤리였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타자’라는 이름 안에 너무 많은 내용을 욱여넣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2000년대 시의 특징 중 하나로 고통, 불안, 신음, 비명 등의 감각이 이미 포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명백히 존재하는 징후가 충분히 진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바로 거기에 우리가 보지 않았거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우선 신형철은 뉴웨이브가 보여주는 “모든 엽색과 기행에는 어떤 연극성이 있는데, 이 연극은 왠지 모를 비감을 자아낸다”고 말한다. 자아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난 주체들이 자유를 즐기기는커녕 “자유로움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9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뉴웨이브 시인들은 “문장의 주어인 ‘나’와 그 문장을 쓰는 ‘나’ 사이의 간극을 인식하고 그 틈을 힘껏 벌려 놓”는다고 정리하며, 다시 한번 그들의 화자를 “‘자아’라는 화사한 인공정원”과 대비되는 “‘주체’라는 끔찍한 폐허”10로 의미화할 때, 비감과 신음은 새로운 주체들이 치르는 낭만적 분투의 결과로 지나치게 미학화되고 만다. 요컨대 신음 소리로 가득 찬 세계는 분열되고 해체된 비서정적·탈서정적 주체들이 자신의 윤리와 미학을 실험하는 무대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박상수 또한 스스로 “감정의 귀족주의”라고 명명한 시적 경향에 대해 “최근 젊은 시인들에 대한 논의는 주로 ‘환상’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말하며, “그런데 그 환상이 주로 주체의 고통에 찬 비명을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전면화되고 있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그 역시 “‘환상’이야말로 젊은 시인들의 시 세계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요소라는 전제”11에도 불구하고 환상이 “주체가 호출한 쾌락의 근원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짓-진실’”12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만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고통, 신음, 비명, 비감 등의 감각을 여성의 목소리로 해석하는 독법은 시도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여성 시인들에 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서정’과 ‘새로운 서정’이라는 대립, ‘더 큰 자아’와 ‘새로운 주체’라는 힘겨루기 사이에서 ‘여성’이라는 단어는 “이 계열의 시인들은 (…) 여성적인 태도 속에서 미적인 세련을 과시하며 또 한편으로는 연극적 과장의 태도 속에서 감각과 감정에 대한 열렬한 몰입을 보여준다”13와 같이 미학적 특징을 꾸며주는 수사로만 겨우 등장할 뿐이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오생근은 김행숙의 『사춘기』를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자동기술의 방법에 의존하지는 않았다더라도 다분히 초현실주의적이라는 것”이라고 말하며, “대상을 명료화하기보다 모호하게 만들고, 의미를 형성하고, 완성시키기보다 의미를 해체하고 분산시킨다”14고 덧붙인다. 이장욱은 『사춘기』의 해설에서 “이 시집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귀신들은 우리에게 낯익은 시적 어조나 적절한 깨달음이나 잘 조율된 감정의 흐름 같은 것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많은 경우, 그녀의 화자는 전래의 ‘서정적’ 화자가 아니다 (…) 이 화자는 대개 개별화되고 구체적인 개인일 뿐, 서정의 힘으로 삶과 세계를 규정하려는 시인의 직접적 분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15고 덧붙인다. 두 사람의 논의 역시 김행숙 시의 화자를 ‘기존의 서정’에 대응하는 ‘새로운 서정’으로 해석한다는 점, 김행숙 시의 감각과 환상을 의미나 현실과는 무관한 ‘분열’ ‘해체’ ‘꿈’ ‘무의식’ ‘불분명성’ ‘불연속성’ 등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봤던 논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보인다.

결국 우리는 2000년대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과 새로운 시를 둘러싼 담론들이 “페미니즘 같은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지점에서”16 논의되었다는 객관적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이장욱이 ‘아이들, 여자들, 귀신들’을 주변에 놓고 ‘어른들, 남자들, 산 자들’을 중심에 놓을 때, 그리고 “나는 (후자의—인용자) 이 셋 모두에 해당한다”17고 고백할 때, 이미 예견된 사태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남성성=보편=중심’, ‘여성성=특수=주변’이라는 이분법적 위계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여성의 존재는 중심의 바깥에 놓인 주변적 존재로, 여성의 목소리는 현실을 벗어난 환상의 목소리로 타자화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남성성을 결여한 것으로 그려지든 극복한 것으로 그려지든, 여성성을 남성성의 대립항으로 이해하는 순간 여성의 존재와 목소리는 과잉 여성화 혹은 과소 여성화라는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시를 ‘기존의 서정’과 ‘새로운 서정’, ‘더 큰 자아’와 ‘새로운 주체’라는 이분법적 대립 속에서 이해하는 것 역시, 그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타자성’ 안에 ‘여성성’을 무성적으로 포함한다는 점에서 위험의 소지가 다분하다.

 

 

3. 감각의 질서

 

그렇다면 김행숙의 『사춘기』는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사춘기였던 걸까. 미래파의 전위이자 200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논의되어왔던 김행숙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주로 ‘비인칭’ ‘감각’ ‘환상’ 등이었다. ‘익명의 중얼거림’(신형철),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감각과 느낌’(이장욱),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의 풍경’(오생근)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김행숙 시의 감각과 환상을 의미나 현실과 무관한 특징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이면에 존재하는 고통, 불안, 신음, 비명 등을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혹은 해석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예컨대 박상수가 김행숙의 시에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무위에 가깝다”고 단언할 때 시의 내용은 사라지고 감각만 남는다. 결국 박상수는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는 “슬픔과 비명과 공포가 뼛가루처럼” 묻어난다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하지 않은(못한) 채, “김행숙의 시적 자아는 어떠한 상처도 없이 감각의 무한을 즐긴다”고 말하며, “김행숙을 읽으면서 어떤 장면을 온전히 느낌에 충실한 순간으로 감각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치러야 할,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온갖 관계의 층위와 모순들을 거의 금욕적인 수준으로 지우고 억제해야 가능해진다”18고 덧붙인다. 그런데 과연 현실과 환상, 의미와 감각은 정확히 반대되는 개념일까.

 

김혜순은 여성 시인들이 환상 공간을 현실 공간에 즐겨 겹치는 이유를 ‘삶과 죽음의 두 차원’에 관련 지어 얘기한다. 그녀는 여성 시인들이 보여주는 환상 공간은 ‘비현실’ 혹은 ‘반현실’이라는 현실의 부정태로서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다시 말해, 환상을 현실이 ‘아니다’로 규정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환상은 현실과 분리된 절대적인 외부가 아니라 현실의 균열과 심연 속에 내재해 있는 외부, 은폐된 외부라고 보는 것이다. 환상에 대한 김혜순의 관점을 우리는 ‘외부의 내재성’ 혹은 ‘초월의 내재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19

 

인용한 부분은 김행숙이 선배 여성 시인 김혜순의 시론에 대해 쓴 글의 일부다. 요컨대 우리는 시에 있어서 현실과 환상을 ‘안과 밖’이라는 이원론적 구도가 아니라 ‘표면과 심층’이라는 일원론적 관계로 새롭게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현실과 환상이 명백히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시의 내용과 의미가 새롭게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행숙의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동안 의식세계에서 버려진 지대로만 읽혀왔던 김행숙의 환상 공간이 사실은 현실의 심층이며, 고통, 불안, 신음, 비명의 진원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0년대를 주도했던 거대 담론의 그늘에 가려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김행숙의 여성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그의 시가 가진 여성시로서의 가능성은, 감각과 환상을 다시 읽는 작업과 함께 재검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김행숙의 시에는 ‘감각의 질서’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 언뜻 보면 모순처럼 보이는 단어의 조합이지만 그의 시에서 ‘눈’처럼 부유하는 감각과 환상 속에는 ‘돌멩이’ 같은 규칙과 질서가 분명 존재한다.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지. 그리고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았네. 어떤 소리가 새어 나갈지 알 수 없었네. 나는 놀러 다녔어. 나는 취미도 개성도 없지.

 

매일 밤 나는 눈을 감으면서 세상이 감기는 걸 느끼지. 이렇게 간단히 세상이 바뀌는걸 뭐, 하고 중얼거리네. 가로수들이 엎어지고, 길은 혀처럼 도르르 말렸어.

 

육중한 동물들이 희귀한 교미 장면을 보여주곤 했어도 에로틱해지지 않았네. 뿌옇게 흙먼지만 일었지. 나는 다른 종에게 취미를 느낀 적이 없어. 눈을 감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느끼는 건 아니야.

—「기억은 몰래 쌓인다」 부분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도 함께 감긴다. 감은 눈 안에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나’는 실컷 놀러 다닌다. “이렇게 간단히 세상이 바뀌”다니. 인용한 시는 확실히 “취미도 개성도 없”는 일인칭 화자의 환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가로수들이 엎어지고, 길은 혀처럼 도르르 말렸어.”와 같은 묘사가 만들어내는, 마치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풍경 역시 환상성을 더하는 요소다. 그런데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등장한 “육중한 동물들”의 “희귀한 교미 장면” 뒤에 따라붙는 진술이 눈길을 끈다. “나는 다른 종에게 취미를 느낀 적이 없어. 눈을 감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느끼는 건 아니야.” 이 진술은 현실의 규칙과 질서를 벗어난 듯 보이는 환상, 꿈, 무의식의 층위에도 제약과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문장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는 ‘눈을 감으면서 깊어지는 세상’(환상)에 머무르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면서 어리둥절해지는 세상’(현실)으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다만 “눈곱처럼 떼어놓아야 할 게 있다고 느끼지.”라는 문장만이 현실과 환상의 관계가 이항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 연결된 관계임을 흔적처럼 말해줄 뿐이다.

김행숙의 시에서 환상은 현실로부터의 불가역적인 탈주가 아니다. 이러한 특징은 “나는 뱀을 빌려 고백하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사라진 계단」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백의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는 듯한 화자의 선언에서 “뱀”이라는 대상만큼이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빌려”라는 표현이다. 빌린다는 것은 얼마간 쓰다가 도로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렇다면 화자는 말 그대로 영영 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잠깐 뱀을 빌리는 것이며, 그마저도 “뱀의 성질이 아니라 뱀의 모양을 빌”리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환상이 주는 상승의 감각은 화자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지만(“뱀이 당신을 감아 오르고 있다. 느낌이 좋다.”), 그러한 상태는 “잠시,” 동안만 지속될 뿐이다. 이내 환상은 “도중에 스르르 사라지는 계단”처럼 사라지고, 화자는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그리고 오후 세 시 이후부터 걸어 다녔다.”). 흥미로운 것은 환상의 알레고리인 뱀이 수직운동(감아 오르는)을 하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과 달리, 현실의 ‘나’는 수평운동(걸어 다니는)을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미리 말하자면 이후의 논의를 통해서는 이러한 수직축과 수평축이 각각 ‘의식의 축’과 ‘시간의 축’으로 확장되고, 확장된 두 축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좌표평면이 김행숙의 감각과 환상을 해독(解讀)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는 천천히 기울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무의식을 의심한다.

 

그는 내 계산대로라면 세계에서 두번째로 노오란 은행나무에 50초 후면 머리가 닿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무의식을 의심한다.

 

여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곱게 일어나서 꺼풀을 조금씩 뜯어가는 운동장. 흙먼지 속에서 한 아이가 달리고 공이 붕, 공중으로 떠오른다.

 

나는 그의 무의식을 의심한다. 그러니까, 그는 어디를 경과하는 중일까?

—「기우는 사람」 전문

 

한눈을 팔다 발을 헛디디기라도 한 것일까. ‘나’의 눈에 비친 ‘그’는 “기울어지고 있다.” 화자의 “계산대로라면” 남자는 “50초 후면” 완전히 넘어질 것이다. 그런데 찰나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장면은 마치 슬로우모션이 걸린 비디오처럼 느리게 재생되고 있다. 사실 한 남자가 넘어지는 장면을 ‘목격’한 것만으로는 특별한 시적 정황이라고 할 수 없다. 인용한 시의 특별함은 화자가 넘어지는 남자를 초고속카메라로 촬영하듯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효과는 세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나는 그의 무의식을 의심한다.”라는 문장을 통해 형성되는데, 다시 말해 ‘50초’라는 시간은 ‘무의식’이라는 의식이 개입하며 제동이 걸린다. 흘러가는 시간의 축에 갑작스레 의식의 축이 개입하면서 이 시만의 이상한 감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김행숙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이상한 감각과 낯선 질문은(“그러니까, 그는 어디를 경과하는 중일까?”), 시간의 축(수평)과 의식의 축(수직)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좌표평면 위에서 가까스로 규칙과 질서를 획득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좌표평면 위에 『사춘기』를 대표하는 화자 집단인 ‘아이들, 여자들, 귀신들’을 올려놓아볼 수 있다.

 

 

4. 그녀들의 환상통

 

네겐 햇빛이 필요하단다. 여자는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을 산책했다. 햇빛은 어디 있지요? 난 뭔가 만지고 놀 게 필요해요. 나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도 어딘가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엄마, 라고 말했다.

얘야, 너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란다. 그리고 세상은 많이 변했단다. 여자가 유모차를 밀던 손을 놓았다.

구른 건 바퀴뿐이었을까? ……내 차가 들이받은 나무는 허리를 꺾었다. 나뭇잎 나뭇잎이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를 나는 들은 것 같다. 아아아, 내가 처박힌 여기는 어딜까?

—「삼십세」 부분

 

우선 여자들이다. 여자들을 먼저 살펴보는 이유는 김행숙의 『사춘기』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화자는 그것이 귀신이든 아이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용한 시는 복수의 화자가 불규칙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김행숙의 시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네겐 햇빛이 필요하단다”라고 말하는 화자, “햇빛은 어디 있지요?”라고 답하는 화자,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여자는 나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원을 산책했다.”고 설명하는 화자까지 총 셋이다. 우리는 “얘야, 너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란다.”라는 문장을 통해 두번째 화자와 세번째 화자가 동일 인물임을 추측할 수 있으며, “나는 엄마, 라고 말했다.”라는 문장을 통해 그들과 첫번째 화자가 모녀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유모차를 타고 공원을 산책하던 아이는 어느새 운전석에 앉아 나무를 들이받은 어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교통사고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화자가 떠올리는 사람이 엄마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 유년 시절 엄마와의 경험이 현재 삼십세가 된 화자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원초적 기억’임을 알 수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멈출 수도 없이 서른이 된 화자가 “방향을 틀기 위해”서는 원초적 기억으로 “잠시 후진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듯 그녀들의 삶은 순간을 통해 전승된다. ‘그녀’의 원초적 기억이 ‘그녀’인 셈이다.

「삼십세」의 화자들이 모녀 관계가 아니라 모자 관계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물론 열려 있다. 그럼에도 「삼십세」의 ‘나’를 여성으로 읽은 것은, 이 시집에 일인칭 화자인 ‘나’가 여성임을 전면에 드러내는 시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매일 아이들을 낳지.”(「8월의 사랑」), “내가 임신한 게 아니라구요.”(「점은 무럭무럭 자라네」), “나는 아주 질긴 여자입니다.”(「즐거운 식사」), “나는 거대한 여자다.”(「당신의 악몽 1」), “나는 우유를 주는 여자일 뿐이고,”(「천국의 아이들 1」) 등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김행숙의 『사춘기』는 시인과 시적 화자를 동일시하는 방식, 즉 저자성에 의지해 텍스트를 해석하는 전략을 차치하더라도 화자의 정체성을 여성의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우리는 “영원히 여자들 품에 안긴 여자애이기를 원했어요. 나는 그녀들의 얘기를 귀에 꽂고 다녔어요. 내 입에서 그녀들이 흘러나와/깜짝, 놀라기도 했어요.”(「여자들의 품」)라는 고백을 통해 ‘나’의 자리에 ‘그녀’를 기입해 읽는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님을, 이 시집이 ‘그녀들’의 시집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우히히, 정말 장난이 아니었어. 사람들은 귀신 들린다고들 하지만 사람에게 먹힌 귀신에 대해 들어봤니? 히히히, 그래서 늙은 귀신들은 사람을 피해서 다녔지만 내가 세상에 귀신으로 남은 이유는 순전히 사람을 피해서 우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재밌어, 어떤 나무나 오토바이 어떤 전봇대 ……에 비길 수 없이 사람을 그냥 통과할 때, 단숨에 어떤 一生(일생)이 한 줄로 정리될 때, 정말 神(신)이 된 기분이야. 얼레리꼴레리

—「귀신 이야기 2」 부분

 

다음은 귀신들이다. 인용한 시의 화자가 귀신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는 바지만 “나무”든 “오토바이”든 “전봇대”든 가릴 것 없이 “그냥 통과할” 수 있다고 말하는 화자는 몸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몸이 없는 화자가 “세상에 귀신으로 남은 이유는” 무엇도 “우회할 필요가 없”이 “사람을 그냥 통과”하는 일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귀신은 사람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며 “신이 된 기분”을 만끽한다. 인간의 몸을 벗어난 귀신이 인간의 조건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이 인간을 비웃고 신이 된 기분을 누리며 사람의 “일생”을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죽음이라는 초월을 경험한 것과 관련이 있다. 죽음 이후에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귀신 이야기 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에서 김행숙이 인용한 배수아의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죽기 전에 인간은 시간이 많지 않”지만 “죽은 다음에는 그렇지 않”다. 이미 죽은 존재인 귀신에게는 다음이 없기 때문이다(“죽은 다음에는/다음은 다음이 아닙니다.”). 이를 앞서 살펴봤던 좌표평면 위에 두어서 보면, 귀신은 현실의 깊은 곳에 자리하는 환상이라는 점에서 의식 축(수직)의 한 지점을 차지하지만, 시간 축(수평)의 규칙과 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같은 복도입니다. 그런 복도라면 나는 복도 위의 복도와

복도 아래의 복도를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걸레를 밀며 달려갔다 달려왔지요. 그런 복도라면 어느 쪽도 이쪽이어서 우리들은 계단을 함부로 오르내렸지요.

—「입맞춤: 사춘기 2」 부분

 

마지막은 아이들이다. 인용한 시에서 화자는 둘이다. 단수 화자인 ‘나’와 복수 화자인 ‘우리’. 그런데 단수 화자인 ‘나’는 딱 한번 등장한다. “선일여자고등학교 2층 복도 같은 복도”를 발견한 ‘나’는 “그런 복도라면 나는 복도 위의 복도와/복도 아래의 복도를 미끄러질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후 ‘우리’로 대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적 공간인 “선일여자고등학교”가 실제 시인의 모교라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이어지는 내용이 ‘나’의 기억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단수 화자인 ‘나’의 기억 속에서 복수 화자인 ‘우리’는 자타(自他)의 구분이 희미하다. “욕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 선일여고 학생들은 경계 없이 서로를 넘나든다(“우리들은 계단을 함부로 오르내렸지요.”). 그들 “사이에서”는 “못 할 말”도 없다. 이는 사춘기를 함께하는 또래집단의 특성과 연관이 있다. 사춘기 시절은 세상에 ‘나’만 남기고 싶은 욕구와 세상에서 ‘나’를 지워버리고 싶은 욕구가 공존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친구들: 사춘기 6」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여러 인칭대명사의 주인을 찾아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주소록을 만들기로 한 날이었”다는 정황 외에는 주어진 정보가 희박할뿐더러 인물들의 말과 행동 역시 “일목요연”이나 “실용”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의 화자는 “여기에 내가 있고 여기에 내가 없고 저기에 내가 있고 저기에 내가 없고 3시에 바닷가에 있었고……”라는 어지러운 문장처럼 불분명하고 불명확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알 수 없는 화자들은 불투명하지는 않다. 오히려 어떤 말과 행동을 누구의 것으로 읽어도 상관이 없을 만큼 그 사이의 구분과 경계가 희미하다. 아이들은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를 앞서 살펴봤던 좌표평면 위에 두어서 보면, 아이는 과거의 기억을 담당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시간 축(수평)의 한 지점을 차지하지만, 의식 축(수직)의 규칙과 질서를 구분하지 않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김행숙 시의 감각과 환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주체는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아이들 귀신들과 각각 시간의 차원과 의식의 차원에서 동거하며 그들을 통제한다. 우선 아이들과의 동거다. 「울지 않는 아이」에서 “아이들의 악몽은 모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자동차 같아서 피하기가 어려워요.”라고 털어놓는 그녀의 머릿속은 소란스러운 사고 현장이다. 더 큰 문제는 “내 머릿속은 보육원이죠.”라고 고백하는 그녀와 “아주 조용하죠.”라고 묘사되는 세계가 불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했듯 이 불화를 현실과 환상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둘은 이원론적 구도가 아니라 일원론적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현실의 바깥이 아니라 심층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한편 그녀가 고요 대신 소란을 감당하는 이유는 그녀가 “더 이상 울지 않는 아이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내린 눈이 마을을 고립시키”는 것처럼 고요가 현실을 고립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 외에는 “아무도 그 마을에 대해 들어본 적” 조차 없기 때문에 표면의 세계는 심층의 그녀가 “아이들의 악몽을 덮을 이불을 준비”하는 일까지 도맡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세계는 그녀에게 “콩나물을 사고 두부를 사”는 일상을 강요할 뿐이다. 그녀가 보고 듣는 것을 세계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현실인 것이 세계에서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귀신들과의 동거다. 「귀신 이야기 1」에서 산 자(현실)와 죽은 자(환상)는 하나의 존재로 그려진다. 화자인 ‘나’와 귀신인 ‘그녀’는 거울을 사이에 둔 하나의 존재다. 화자는 “그녀와 나는 사이좋게 지”낸다고 말하지만, “난 그때 네가 꼭 죽을 줄만 알았는데,”라는 귀신의 말투에서는 묘한 적의가 느껴진다. 우리는 “너는 십 년 만에 비춰보는 내 거울인데, (…) 앞만 보면 세상은 화려강산이니? 거울집은 칠흑인데,”라는 귀신의 고백을 통해 적의의 원인을 추측할 수 있다. 하나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풍경을 누렸다는 사실이 원한이 된 것이다. 결국 귀신은 “外道”(외도)를 마치고 화자의 “五臟六腑”(오장육부)를 기차처럼 통과한다. 이때 “너는 엑스레이만 찍었니? 그냥 싸르르 지나가는 복통이었니?”라고 묻는 귀신은 명백하게 화자의 바깥이 아니라 심층에 있다. 복통이라는 현실의 고통은 환상의 존재라고 생각했던 귀신이 엑스레이로도 찍히지 않는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신호다. 이처럼 ‘그녀’의 현실과 환상은 “사랑하는 쌍둥이”처럼 “늘 한애”다. ‘그녀’와 ‘그녀’는 “흩어지면 함께 죽는”(「8월의 사랑」) 하나의 존재인 것이다. 이제 김행숙의 시는 다시 읽힐 수밖에 없다. 그녀들의 환상통(phantom pain)이 가짜가 아닌 진짜 고통, 환상이 아닌 현실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5. 나가며

 

이 글은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 문학사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잃어버린 10년’이나 다름없었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미래파의 전위이자 200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김행숙의 『사춘기』를 ‘지금 여기’의 달라진 감각과 관점으로 다시 읽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2000년대의 담론들이 젠더적으로 편향된 개념과 가치는 아니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했으며, ‘타자’라는 이름 안에 갇혀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여성’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환상의 목소리로 타자화하는 ‘남성성=보편=중심’, ‘여성성=특수=주변’이라는 이분법적 위계를 전복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했고, 의미나 현실과는 무관한 지점에서 이해되어왔던 김행숙 시의 감각과 환상을 시간의 축과 의식의 축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좌표평면 위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녀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글은 1990년대에 활발하게 논의되었던 여성주의 담론이 2000년대 들어 일종의 백래시(backlash)에 부딪히듯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여성주의 담론 역시 2020년대에 반복되는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쓰였다. 미래는 예상할 수 없기에 과거를 반성하는 것으로 다가올 시간을 준비하고자 했다. 끝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이 기존의 논의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기존의 논의들은 분명 김행숙 시의 어떤 측면을 매우 효과적으로 부조해냈다. 다만 그 논의들에는 여성주의적 평가와 해석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달라진 감각과 관점으로 텍스트의 가능성과 담론의 넓이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단언컨대 우리는 그때 읽어내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목소리까지 읽어내야만 한다. 물론 달라진 감각과 관점으로 김행숙의 『사춘기』 다시 읽기를 시도한 이 글 역시 ‘다시’ 읽혀야 할 것이다. 오늘의 ‘지금’과 내일의 ‘지금’이 또 한번 다를 것이므로 화살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날아가는 중이다.

 

 

 

심사평

 

이번 제20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총 21편으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7편이다. 그중 본심 심사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Fake Article에 대한 시론: 문학으로서의 지적 사기」 「위악의 잉여: 이준규론」 「닫힌 자들을 위한 플랜 B」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김행숙의 『사춘기』 다시 읽기」, 이렇게 4편이다. 네 작품 모두 범상치 않은 야심과 패기,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문학적 독해력을 갖추고 있어서 뜻밖에 한국문학의 미래를 낙관하게 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Fake Article에 대한 시론: 문학으로서의 지적 사기」는 정보통신기술이 급속하게 발달한, 소셜미디어 중심 사회에서 전통적인 소설 장르의 쇠퇴 이후 어떤 새로운 소설 장르가 가능한지를 타진하는 글이다. 이 글은 전통적인 소설 장르의 분화(分化)와 변이를 추적하면서 한국문학 생태계의 변화를 전망하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의 사례로 제기된 작품이 발표된 지 10년도 더 된 소설이거나 페이스북 게시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들이 현재 시점에서는 설득력을 얻기가 어렵다는 인상이다. 지금의 한국문학 전반의 변화에 좀더 밀착된 논의가 더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위악의 잉여: 이준규론」은 라깡의 욕망이론에 기반해 이준규 시의 반복과 반복 속 변이라는 언어놀이를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의 운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라깡의 정신분석학은 분명 기존의 익숙한 소통 논리가 아니라 새로운 감각과 논리로 자기만의 폐쇄적 유희를 반복하는 이준규의 시를 분석하기에 적합하지만, 이 글에서 라깡의 이론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전개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게다가 시인의 언어를 따라 하듯 논리적 비약이 자주 발생하는 모호한 문장들은 이준규 시에 대한 접근을 오히려 가로막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적 난해를 통해 이준규 시를 분석하려는 야심찬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닫힌 자들을 위한 플랜 B」는 강화길의 작품들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을 모색하는 보통의 플랜 A의 실패 이후, 오직 고통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한 자기 안에 닫힌 채 탈출구를 찾는 플랜 B로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참신하고 흥미로운 글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참신한 발상은 강화길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도달하지 못한 채 평이한 작품해설에만 머물고 만다. 강화길 소설에 대한 분석이 전체 한국사회와 문학의 흐름 속에서 종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도 아쉽다. 좀더 포괄적인 비평적 관점이 요청된다.

당선작인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김행숙의 『사춘기』 다시 읽기」는 2000년대 미래파와 2010년대의 새로운 서정론이 기존 시의 프레임을 깨고 새로운 시적 선언을 했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하지만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발상 때문에 여성 시인의 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음을 비판하면서 시작한다. 일단 기존 시단에 대한 자기만의 비판적 시각과 목소리를 드러내는 문학적 야심이 놀랍고 반가웠다. 계속해서 이 글은 김행숙 시에 나타난 환상을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과 환상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아니라 현실의 표층과 심층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통해 접근함으로써 김행숙 시의 환상을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무르익은 듯 적실한 문학적 통찰과 한국문학계 전반에 대한 이해가 돋보였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

오랜 논의 끝에 당선작은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으로 선정되었지만 최종심에서 논의된 다른 작품들이 보여준 문학적 도전은 이후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앞으로 더 풍요롭고 새로운 한국문학을 위한 이들의 도전이 계속되기를 바라본다.

심진경 한기욱

 

 

 

당선소감

 

다시 광화문입니다.

 

2015년 봄, 스무살의 저는 구호를 외치고 행진을 하며 광화문거리의 골목골목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2022년 겨울, 스물일곱살의 저는 다시 광화문에서 이 상을 받습니다. 더없이 기쁜 소식이지만 마냥 기쁠 수만은 없습니다. 기억이라는 단어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봅니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겸연쩍은 단어를 만지작거리다가 끝내 믿어보기로 합니다. 때마침 기억으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세월호를 인양하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특별법을 제정하라.

 

오롯이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을 사람들이 차가운 거리 위에서, 그보다 훨씬 더 차가운 시선 속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해야 했던 광화문광장. 아무래도 이 글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겠습니다. 지금 여기의 제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유가족분들과 도시락을 나눠 먹었던 밤. 하루 종일 걷고 목이 터져라 외쳐도 차벽과 살수차 앞에서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수많은 밤. 우리의 유일한 바람은 슬퍼할 수 있는 자격이었고,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권리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살아 있는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서,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바뀌는 사이 참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은 예전만큼 자주 보이지 않고, 기억공간이 철거된 광장은 바리케이드에 둘러싸여 공사 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참 많은 사람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잊어버리지는 않았으니 잃어버렸다고 할 수밖에요. 미련한 저는 지금도 가끔씩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이름을 불러봅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 속 가사처럼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 해.

 

어쩌면 우리는 우리 몫의 슬픔뿐만 아니라 우리 몫이 아닌 슬픔까지 책임지려고 했기 때문에 다투고, 싸우고, 헤어졌던 게 아닐까요. 우리는 최후까지 지켜져야 하는 게 슬픔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니까요. 저는 이제 광장이 아닌 까페에서 피켓이 아닌 연필을 들고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회대학교를 떠나 서울예술대학교로 가던 날, ‘세월호참사를 가장 깊게 겪은 도시구나’ ‘용산 참사가 꼭 십년이 되는 날이구나’, 떠올린 걸 보면 우리는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 서로의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읽고 쓰는 일로 제 몫의 슬픔과 이자를 꼬박꼬박 갚아나가겠습니다.

 

물론 갚아나가는 와중에도 누군가에게 계절과 마음을 빚지겠지만 말입니다.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꺼이 자신의 계절과 마음을 나눠준 사람들. 하나하나 적을 수 없다는 사실이 글을 쓰는 내내 아쉽지만, 당신이라면,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제가 가진 가난한 언어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다시 한번 당신에게 기대어보기로. 맞습니다. 이 편지는 절 위해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에게 보내는 기별입니다. 당신의 슬픔이 외롭지 않게 하겠다는 것. 그것이 부족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입니다. 우리 함께 멀리 가요.

 

마지막으로 수민,

 

나는 수민도 사랑도 영영 모를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마디를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수민을 사랑한다는 문장일 테니. 숲〔林〕은 나무〔木〕와 나무〔木〕가 손을 맞잡게 써야 예쁘게 써진다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 부디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거나 놓치는 일이 없기를.

하혁진

 

 

  1. 이 글은 김행숙의 첫번째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를 주요 텍스트로 삼는다. 이하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작품명만 표기한다.
  2.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69면 참조.
  3.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웰컴, 뉴웨이브」,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185면.
  4. 신형철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 뉴웨이브 총론」, 같은 책 274면.
  5. 신형철 「문제는 서정이 아니다: 웰컴. 뉴웨이브」, 같은 책 186면.
  6.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21세기 문학 사용법」, 같은 책 17~19면.
  7. 이에 대해서는 박상수 역시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아/주체’를 ‘동일화/비동일화’ ‘현실/실재’ ‘의식/무의식’ ‘권위/권위의 해체’ ‘알고 있는 것/모르고 있는 것’ ‘화사한 인공정원/끔찍한 폐허’ ‘정상/일탈’ ‘구속/자유’로 의미화한 뒤에 “진실은 언제나 후자에 있다고 주장하는” 식의 논리는, “너무나도 손쉽게 문학의 가치를 옹호하는 논변으로 전락해 이제는 아무런 실제적 효과도 발휘시키지 못하는 죽은 윤리”라는 것이다. 박상수 「무한(無限)의 주인: 신형철의 ‘윤리 비평’과 2000년대 “뉴웨이브”를 둘러싼 외설적 보충물에 관하여」, 『귀족 예절론』, 문예중앙 2012, 190~92면.
  8. 인아영 「눈물, 진정성, 윤리: 한국문학의 착한 남자들」, 『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참조.
  9. 신형철 「진실은 앓는 자들의 편에: 2005년, 뉴웨이브 진단 소견」, 앞의 책 205면.
  10. 신형철 「전복을 전복하는 전복」, 앞의 책 275면.
  11. 박상수 「2000년대 한국 시에 나타난 환상의 의미와 전망: 환상의 정신분석적 독법을 위한 시론(試論)」, 앞의 책 87면.
  12. 같은 책 104면.
  13. 박상수 「무한의 주인」, 앞의 책 207면.
  14. 오생근 「서정시의 해체 혹은 새로운 서정의 탐구: 진은영, 김행숙, 이장욱의 시」, 『문학과사회』 2005년 여름호 참조.
  15. 이장욱 해설 「아이들, 여자들, 귀신들」, 『사춘기』 124~25면.
  16. 같은 글 141면.
  17. 같은 글 124면. 부연하자면 이장욱의 해설은 내용적으로 봤을 때 페미니즘 비평으로 분류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문제는 역시 ‘페미니즘 같은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지점에서’라는 표현일 텐데, 이는 당시의 상황이 “‘페미니즘 같은 이데올로기’와는 분명히 구분 짓는 일이 한 시인의 뛰어난 시적 성취를 강조하는 비평적 작업으로 이해되고 있는 시간”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장은정 「죽지 않고도」, 소영현 외 『#문학은_위험하다』, 민음사 2019, 99~103면 참조.
  18. 박상수 「이제 기억을 버리고 상부구조로 Shift할 때다: 기억과 정체성의 관계를 통해서 살펴본 김행숙·조연호·황병승의 시 세계」, 앞의 책 46~50면.
  19. 김행숙 「‘여성-되기’와 ‘시-하기’: 김혜순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에로스와 아우라』, 민음사 2012, 24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