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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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혜진 金惠珍

1983년 대구 출생.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중편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 등이 있음.

suspens77@naver.com

 

 

 

축복을 비는 마음

 

 

경옥의 이름은 경옥이 아니었다.

그걸 알고 나서도 인선은 무심결에 그를 경옥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면 경옥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거나 왜 계속 그렇게 부르느냐고 핀잔을 주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솔직히 그 이름 은근히 마음에 드시는 거죠, 그죠?

경옥이라는 이름은 경옥이 직접 알려준 것이었고, 인선은 나이에 비해 약간 촌스럽다고 생각했을 뿐 가명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몇달을 그렇게 부르다보니 버릇이 된 모양이었다.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았다.

지난겨울, 인선은 경옥을 처음 만났다.

모처럼 만의 휴일이었고, 인선은 거실 소파에서 커피가 식기를 기다리다가 졸음에 빠진 것을 알았다. 탁자에 올려둔 휴대폰이 울린 탓이었다.

인선씨, 집에 있지? 이따가 오후에 한 집 할 수 있어?

양사장이었다.

오늘요? 어딘데요?

인선은 습관적으로 그렇게 물었고 양사장은 열평이 안 되는 원룸이라고, 신입 하나만 데려가도 충분하다고, 자신은 도저히 시간이 되지 않는다며 사정했다. 사람들의 말소리, 라디오 소리, 청소기 소음 같은 것들로 양사장의 목소리는 들리다 말다 했다. 인선은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오전 아홉시. 다들 한창 일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였다.

오늘 그 집 책임지고 마무리 좀 해줘. 인선씨도 이제 그만하면 베테랑이잖아. 신입 하나 보내줄게.

신입을 보내면 어쩌라고요?

에이, 완전 신입은 아니야. 한국 사람이고. 말귀 알아먹으니까 뭐든 시키면 되잖아. 다른 건 문자로 찍어줄게.

얼마짜리인데요?

똑같지 뭐. 수수료 제하고 바로 입금해줄 테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말어.

집 상태는요? 험한 집은 아니죠?

험한 집이면 부탁도 안 하지. 아니야, 아니래. 젊은 여자 혼자 살다가 나간 집이라 치울 것도 없대. 확실히 물어봤어.

오후에 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었고, 하루쯤 쉬고 싶은 마음도 컸다. 멋모르는 신입과 일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인선은 그러겠다고 했다. 충동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꾸준하게 일이 있는 편이 아니었고 대목이라고 할 만한 2월도 끝나가는 중이었다. 3월에 접어들면 이사하는 집들이 줄고 벌이도 자연스레 줄어들 게 뻔했다.

지난밤, 어깨와 팔목에 붙여둔 파스 귀퉁이가 너덜너덜했다. 인선은 주방 쓰레기통에서 파스 포장지를 찾아 상표와 제조업체를 메모해두었다. 똑같은 제품을 다시 사는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 후엔 청소 도구가 담긴 가방을 꼼꼼하게 살핀 뒤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신입은 10분 늦게 왔다.

인선이 101호 원룸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무슨 예고처럼 쿰쿰한 냄새가 흘러나왔는데 내부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저, 청소하러 왔는데요. 여기 맞죠?

현관 앞에 체구가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신입이라고 해도 젊은 사람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여자는 지금껏 인선이 본 사람 중 가장 어렸다.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사이. 어쨌든 인선보다 열살은 어린 것 같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여자는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한마디 더 했다.

아, 근데 이 아저씨 거짓말했네.

인선과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후드를 벗으며 투덜거렸다.

양사장님이요. 한두시간이면 금방 끝날 집이라더니 딱 봐도 아닌데요? 자기가 가려니 멀고 돈은 별로 안 되고. 그래서 넘긴 거 아니에요?

그런 후엔 어제부터 목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고개를 쳐들거나 숙인 채 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양사장에게 네시 전에 일이 끝난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시에는 가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이고 나서야 점퍼를 벗고 소매를 걷었다.

제멋대로인 사람이네.

인선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각을 확인했고,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이름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이름과 나이 같은 신상은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었다. 다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불편한 티를 내고 싶었다. 적어도 인선이 아는 양사장은 일부러 직원(엄밀히 말하면 직원이 아니고 인부였다)을 속이거나 골탕 먹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쁜 사람도 아닌, 어쨌든 인선에게 일할 기회를 준 고마운 사람이긴 했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가능한 한 부드럽게 꺼내려면 이름을 알 필요가 있었다.

경옥이요. 임경옥.

여자는 현관 앞에 쌓여 있는 신문과 광고지, 각종 고지서와 영수증 같은 것들을 우두커니 내려다보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래요, 경옥씨.

인선은 다음 말을 쏟아낼 작정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옥의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귀밑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는 정전기 탓에 사방으로 뻗쳐 있었는데 군데군데 희끗희끗한 얼룩이 보였다. 그게 주로 욕실에서 쓰는 세정제 때문이라는 것을 인선이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손등에는 스팀 청소기에 덴 것이 분명한 붉은 화상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 맥이 풀리면서 움켜쥐고 있던 말들이 흩어져버렸다.

그래요, 그럼. 오늘 뭘 할 수 있겠어요?

이 일을 하기 전까지, 아니 이 일을 시작하고 한달이 지날 무렵까지도 인선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고 배려하는 사람.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 사람.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사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을 잃지 않는 사람.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선은 몸으로 배웠다.

밤에는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손발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고, 가려움증이 넘실거리며 피부 전체를 덮쳐올 때도 있었다. 눈가에 붉은 반점이 올라오고, 후각이 마비된 듯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증상은 그나마 경미한 경우였는데 계속 좋은 사람이려면 그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

이것 봐요. 나도 좀 삽시다. 두번 세번 다시 하게 만들지 말고 오늘은 제발 제시간에 끝내자고요. 내 말 알아들어요?

이 일을 시작할 무렵 만났던 한 여자는 인선이 잠깐 숨을 돌릴 때마다 보란 듯 핀잔을 주곤 했다. 겨우 한두마디였지만 여자의 눈빛과 말투 같은 것들은 오래 남았다. 그것들은 인선과 함께 출근하고 퇴근했다. 잠이 드는 순간까지도 인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웠다.

한동안 인선은 그런 감정과 싸웠다. 싸움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서면 다시 싸움이 시작됐고 또 새로운 싸움이, 그보다 더한 싸움이 인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선은 싸우기를 포기해버렸다. 모욕과 수치가 오가지 않는 평화로운 현장이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난 뒤였다.

모두가 좋은 사람이어서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제시간에 퇴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이곳에서 좋은 사람은 자신이 알던 좋은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거였다.

적어도 인선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몸을 축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경옥은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고무장갑과 실내화 같은 개인 소모품을 준비해오지 않은 건 괜찮았다. 뭘 시키면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는 것도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동작이 굼뜨고, 요령이 없는 것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작업을 끝냈다고 해서 가보면 매번 어딘가 문제가 있었다.

인선이 싱크대 안쪽에 붙은 스티커를 가리켰을 때도, 콘센트 안쪽의 묵은 때를 지적했을 때도, 손바닥으로 현관문 위쪽의 먼지를 쓸어 보였을 때도 경옥은 몰랐다고 대답했다. 다시 하겠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전 몰랐는데요.

모르면 물어봐야죠.

물어봐도 돼요?

모르면 물어야지, 방법이 있어요?

뭐 물어보면 다들 알아서 눈치껏 배우라는 말만 하고 가르쳐주지는 않던데요? 가르쳐주면 저도 하죠. 진짜 잘 배울 수 있거든요.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려줘야 하는 타입이었다. 인선은 걸레질하는 순서와 방향, 먼지를 제거하는 요령, 세정제의 종류와 용도까지 꼼꼼하게 일러주었다. 경옥은 잠자코 들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제대로 듣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인선은 그러지 않았다. 신입과 옥신각신하며 감정을 상하고 싶지 않았고 그럴 시간도 없어서였다.

인선은 양사장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앞으로 급한 일을 맡길 땐 신입은 보내지 말라고, 집 상태를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그러다 분위기가 괜찮으면 일머리 없는 신입을 보낸데다 험한 집을 맡겼으니 일당을 더 줘야 한다고 넌지시 떠볼 수도 있을 거였다.

경옥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얼마 뒤, 인선은 경옥을 다시 만났다.

네 사람이 투입되어 42평 아파트를 청소하는 날이었다.

아파트단지 정문을 찾느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던 인선은 환한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앉은 누군가를 보았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은 시각이었다. 거리는 적막했고 눈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러니까 우연히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 캔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컵라면과 맥주를 먹고 있는 사람이 경옥이라는 걸 알아채지도 못했을 거였다.

인선은 멀찌감치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컵라면에서 가느다랗게 김이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라면을 먹느라 잠깐씩 고개를 숙이는 경옥의 뒷모습은 허기져 보이지도, 지쳐 보이지도, 추워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해졌다.

인선은 자신이 하는 이 일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었다. 일할 때는 눈앞의 얼룩을 제거하는 데 몰두했고, 일이 끝나면 일에 관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이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던 어떤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이 일을 하는 자신의 처지와 형편 같은, 당장은 대안이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현실적 고민이 되살아났다.

인선은 돌아서서 빠르게 걸었다. 편의점을 지나치지 않으려면 후문이 있는 뒷길 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이 어디예요?

그날 인선은 경옥에게 물었다.

양사장은 붙박이장의 선반을 순서대로 분리하는 중이었고, 양사장의 아내는 기름때로 뒤덮인 주방 후드와 가스레인지에 약품을 바르는 중이었다.

욕실에는 인선과 경옥 둘뿐이었다.

집이 멀어요? 멀리서 와요?

경옥이 대답이 없어서 인선은 한번 더 물었다. 멀리 사는지, 오는 시간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는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건지, 어쩌다 이가 덜덜 떨리는 그 새벽에 야외에서 맥주와 컵라면을 먹고 있었던 건지 의아해서였다.

전 돈만 많이 주면 어디든 가는데요.

경옥은 바스켓 앞에 쪼그리고 앉아 거품 물을 만들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인선을 올려다보며 몇마디 더 했다.

근데 이 일에 정말 소질 있으신 거 같아요. 지난번에 저 완전 깜짝 놀랐잖아요. 돈만 많으면 저희 집 청소도 맡기고 싶었다니까요. 그 집 주인은 진짜 절이라도 해야 해요. 그렇게 청소해주는 사람이 어딨어요. 전문가라는 사람들 저도 많이 봤거든요? 근데 그렇게 청소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진짜 처음 봤어요.

다들 그렇게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가 일을 주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려 했지만 인선은 잠자코 거품 물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당혹스러웠고, 민망하기도 했는데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이봐, 인선씨, 매직블록 남은 거 좀 있지?

때마침 양사장이 큰 소리로 호출한 탓에 인선은 경옥에게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양사장이 곰팡이가 낀 실리콘을 모두 긁어내라고 했을 때도, 베란다 천장을 물걸레로 닦으라고 했을 때도, 비좁은 세탁실의 줄눈을 솔질하라고 했을 때도 이상하게 짜증이 나지 않았다. 양사장의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탓에 인선이 주방 후드와 가스레인지 작업까지 마무리해야 했지만, 여느 때처럼 울분이 치밀지도 않았다.

그것이 경옥이 건넨 말 때문이라는 것을 인선은 나중에 알았다. 지금껏 들어본 적 없고, 듣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 말을 자신이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한번쯤 그런 말을 해주길 몹시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누구도 그런 다정한 말을 건넨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거였다.

두번째 집으로 이동하기 전, 네 사람은 근처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양사장은 메뉴 세개를 시키고 공깃밥 하나를 추가했다.

네 사람인데, 하나 더 시켜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질문한 건 경옥이었다.

아, 우리 집사람이 많이 안 먹잖아. 인선씨도 그렇고. 세개만 시켜도 충분하지 뭐. 우린 늘 이렇게 먹어. 괜히 많이 시켜서 남는 거보다야 훨씬 낫잖아.

남기는 건 각자 마음이죠. 처음부터 모자라게 시키면 먹고 싶어도 다 먹을 수가 없잖아요. 눈치도 봐야 하고. 돈까스 하나 더 시킬게요. 제가 다 먹을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래도 되죠? 여기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양사장이 타일 시트지를 제거하라거나 베란다 외부 유리창을 닦으라고 지시하면 경옥은 명랑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원래 이런 건 그냥 안 해주잖아요. 다 따로 추가비용 받으시는 거죠? 그럼 저도 추가로 수당 주셔야 해요. 그게 맞잖아요.

그런 말을 할 땐 항상 큰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멀리 있는 인선의 귀에도 또렷하게 들렸다. 인선은 경옥이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지나치게 따지고 든다는 생각,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면 경옥이 했던 말들을 곰곰이 되짚어보게 됐다. 식사비와 교통비, 추가비용과 추가수당 같은 경옥이 스치듯 양사장에게 했던 질문의 의미를 찾아보는 거였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지하철에서 잠깐씩 졸음에 빠지다가, 마트에서 계란과 커피 같은 식료품을 고르다가 인선은 경옥의 질문을 떠올릴 때가 많았고, 그러면 지금껏 자신이 당연하게 해왔던 일의 수고와 비용을 따져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동안 인선은 경옥을 만나지 못했다.

네 사람이 투입되는 현장에도, 다섯 사람이 투입되는 현장에도 늘 처음 보는 신입들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일을 배우겠다던 중년 여자도, 대화를 하기 전까진 한국인처럼 보이던 몽골 남자도, 청소업체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던 청년들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수습기간인 일주일 동안엔 식비와 교통비만 제공되고, 일주일이 지나야 정식으로 일당을 받을 수 있는데도 그랬다.

요즘 사람들이 뭐 이런 일 하려고 해? 조금만 힘들면 금방 그만둬버리지. 일은 많지, 사람은 없지. 말도 마. 나도 골치가 아파 죽겠어.

인선이 물으면 양사장은 늘 앓는 소리를 했다.

기껏 일을 가르쳐놓으면 새로운 신입이 오고, 또 새로운 신입이 왔으므로 인선은 맥이 빠졌다. 일이 서툰 신입들을 대신해 인선이 해야 하는 일은 점점 늘었다. 일을 가르치고, 감독하고, 확인까지 하기엔 항상 시간이 빠듯해서였다. 제시간에 일을 마치려면 누구라도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양사장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계속 신입을 데려온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매일 두 집씩, 주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장 부부가 벌어들이는 돈이 결코 적지 않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든 건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인선씨, 집에 있어? 아이, 휴일인데 미안하네. 아침부터 내가 일정이 꼬여서 말이야. 혹시 오늘 오후에 한 집 할 수 있어?

얼마 후, 인선은 다시 양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20평 아파트라고 해도 내부는 아담하다고, 아주 기본적인 작업만 하면 된다고, 두명이 쉬엄쉬엄해도 서너시간 안에는 충분히 끝낼 수 있다며 양사장은 사정했다. 내일 아침 이사가 예정된 집이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까지는 청소를 완료해야 한다는 거였다.

인선은 경옥을 불러달라고 말했다.

누구? 경옥? 임경옥? 그게 누군데?

양사장은 인선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한참 만에야 경옥을 겨우 기억해냈다.

아, 그 젊은 여자애? 계속 땍땍거리던 애 아냐, 맞지? 에이, 뭐 하러 그런 애를 불러. 점잖은 사람도 얼마든지 많은데. 있어봐. 내가 전화 한번 돌려볼 테니까.

경옥씨가 일은 잘해요. 말귀도 잘 알아듣고. 다 가르쳐놔서 이제 웬만한 작업은 알아서 다 한다니까요.

작업 일정을 관리하고 사람을 쓰는 건 양사장의 권한이었고 인선이 관여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걸 알면서도 인선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그래도 일을 좀 하는 사람을 데려가는 게 나도 편하잖아요.

걔가 일을 잘한다고? 에이, 쓸데없이 말만 많고 일은 제대로 안 하던데? 인선씨도 봤잖아. 까탈스러운 거.

양사장은 만류하듯 몇마디를 더 보태다가 결국 경옥에게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진지한 목소리로 불필요한 대화는 가급적 길게 하지 말라는 당부를 덧붙이고 나서였다.

경옥은 이번에도 조금 늦게 왔다. 인선이 주차된 차에서 청소 도구와 용품을 차례로 꺼내고 있을 때였다.

어? 차가 있으시네요.

경옥이 다가와 알은체를 했다.

지난번에도 가져왔는데 못 봤어요?

인선은 트렁크에서 청소기를 꺼내고, 날카로운 연장이 담긴 작은 가방을 멨다. 그런 후엔 스크래퍼와 헤라, 걸레와 밀대 따위가 담긴 커다란 바스켓을 경옥 쪽으로 밀어주었다.

차 없으면 무슨 수로 이걸 가져와요. 팀으로 갈 땐 사장님이 가져오지만 오늘은 둘뿐이잖아요. 이거 들 수 있죠?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아파트단지 안은 한산했다. 고개를 들면 앙상한 겨울 산의 풍경이 바로 보였다. 산 아래 위치한 탓에 바람은 더 차갑게 느껴졌고, 몽땅하게 가지치기를 한 가로수들은 볼품없었다. 여기저기 깨진 보도블록 탓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몹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인선은 띄엄띄엄 늘어선 건물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3동, 5동, 7동. 11동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또 엉뚱한 곳에 주차를 한 모양이었다.

근데요, 양사장님요. 진짜 연락 안 올 줄 알았거든요. 갑자기 전화 와서 엄청 놀랐잖아요. 꼭 좀 와달라고 그러던데요?

경옥은 바스켓을 들고 인선을 뒤따라오며 말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했다. 인선은 앞만 보고 걸었다. 마음이 급했다.

실은 사장님한테 일 없냐고 몇번 문자 했었거든요. 답도 없더라고요. 전화도 안 받고. 아예 대놓고 무시하나 싶었죠.

경옥은 계속 말했다.

근데 알고 보니까 다른 업체 팀장한테 제가 유별나다고 욕한 거 있죠? 사장들만 있는 채팅방에 그런 글을 올렸다고 하더라고요. 어이가 없어서. 자기가 치사하게 군 건 하나도 말 안 하고. 그때 메뉴 세개만 시키는 거 보셨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진짜 아니잖아요.

멀리 단지 안쪽에 11동 건물이 보였다. 5층 건물이었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계단으로 직접 짐을 날라야 할 것 같았다.

다섯시까지는 끝내야 하니까 오늘은 좀 빨리 움직이죠.

인선은 놀이터를 가로지르며 그렇게 대꾸했고 서둘러 걸었다. 달라지지도 않고, 달라질 수도 없는 문제들을 일일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고, 사장 부부의 결점을 들먹이며 열을 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불만과 원망이 없는 일터가 어디 있느냐는 식의 훈계를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인선은 뭔가를 더 알게 되는 게 불편했다. 이제껏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고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 일의 실체와 정체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뭔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인선이 돌아보았을 땐 경옥이 바닥에 엎어진 바스켓을 바로 세우는 중이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인선이 물었는데 경옥의 몸이 휘청하더니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시소 옆 벤치. 그 주변만 시멘트를 새로 바른 모양이었다. 덜 마른 시멘트 위에 청소솔과 스퀴지, 장갑과 마른걸레 같은 것들이 쏟아져 있었다.

아, 진짜. 공사했으면 뭐 표시라도 해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두는 데가 어딨어요? 아, 진짜!

경옥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신발을 털어냈다. 탁탁,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다친 데는 없어요?

인선은 경옥 대신 쏟아진 물건들을 챙겼다. 물건을 주우려면 어쩔 수 없이 덜 마른 시멘트를 밟아야 했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시멘트 위에 신발 자국 몇개가 남았다. 시멘트에 발자국을 남긴 것도, 신발이 더러워진 것도 문제였지만, 작업 도구가 오염된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무엇보다 걸레를 모두 빨아야 해서 마른걸레를 전혀 사용할 수가 없을 듯했다.

인선은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소질이니 전문가니 하는 칭찬에 마음이 물러지고, 추가비용이니 수당이니 하는 요구에 귀가 솔깃해져서 경옥을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이라고 믿은 자신이 바보 같았다. 경옥에게 이것저것 알아보려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일은 일곱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양사장 말대로 실내는 아담했고 깔끔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집 안은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로 머리가 아플 정도였고, 녹이 슨 베란다 섀시는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시멘트가 묻은 청소 도구를 세척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수압이 세지 않은데다 온수를 전혀 사용할 수가 없어서 나중엔 손이 곱는 것 같았다.

인선은 청소가 끝난 실내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은 뒤 밖으로 나왔다. 주변은 이미 캄캄했다. 땀에 젖은 옷 사이로 찬바람이 새어들었다. 잠잠했던 한파가 다시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진짜 이렇게 일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녹슨 건 원래 제거 안 해주는 건데. 블라인드도 안 닦아주고요. 딴 데는 그런 거 다 추가로 비용 받는 거 아시죠?

경옥은 바스켓을 들고 인선을 뒤따라왔다. 손이 언 모양인지 경옥은 자주 바스켓을 놓쳤고, 그때마다 바스켓이 바닥을 때리며 요란한 소음을 냈다.

근데요, 이렇게 늦게 끝나면 돈 더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요즘은 저녁 먹으라고 만원씩 더 주는 데도 있다던데, 양사장님은 그런 적 없죠? 하긴 절대 안 그러겠지.

경옥은 계속 말했다.

대우니 처우니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인선은 많이 봐왔다. 원칙과 권리를 들먹이던 이들은 대부분 보름을 못 넘기고 일을 그만두었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구했을 거라고 인선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이 일의 좋은 면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다른 어떤 일을 해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경옥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뭔가 잘못됐나 하는 의심이 생겼고, 아무런 계산 없이, 요령도 없이, 형편없는 조건 속에 자신을 방치한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배고파요? 뭘 좀 먹고 갈래요?

주차된 차 앞에 이르렀을 때 인선은 그렇게 물었고, 트렁크에 대충 짐을 실은 뒤 시동을 걸었다. 경옥은 조수석에 타자마자 창을 열며 중얼거렸다.

근데 차에서 락스 냄새 나는 거 아세요? 아니다, 나한테서 나는 건가? 저한테서 나죠? 그죠?

세제가 독해서 그래요. 한두시간 있으면 괜찮아져요.

시동은 두번 만에 걸렸다. 산 아래 위치한 아파트단지에는 상가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도로변에 위치한 조그마한 시장도 문을 닫는 분위기였다. 큰길까지 내려오자 주차할 만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인선이 근처 분식점에서 김밥을 포장해 왔고, 차 안에서 김밥을 나눠 먹었다. 웅웅거리는 히터 소리와 나지막한 라디오 소리 사이로 음식을 씹고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경옥은 얼마 전 신축 아파트 입주 청소를 나갔을 때, 집 안이 너무 깨끗해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청소를 하는 게 아니고, 누군가 꼭꼭 숨겨둔 먼지와 얼룩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니는 기분이었다고. 인선은 그래서 깔끔한 집보다는 더러운 집이 차라리 낫다고 했고, 깨끗한 집일수록 주인이 까다롭다고 이야기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두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집과 집주인에 대한 토로로 이어졌다. 수수료니 소개비니 하며 일당을 깎는 사장들, 힘든 일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얌체 같은 팀원들, 매번 다른 강도와 증상으로 찾아오는 통증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최악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껏 아물지 않았고, 언제 아물지 모를 기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진짜 너무 화나지 않으세요?

이따금 경옥은 못 참겠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인선은 잠자코 들었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면서. 그리고 경옥의 말이 끝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경옥씨.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식사를 끝낸 뒤, 경옥을 지하철역까지 태워다주는 길이었다. 신호가 바뀌었고, 차가 사거리에 잠시 멈췄다. 인선은 일렬로 늘어선 붉은 미등을 주시하며 다음 말을 꺼내려고 했다. 무슨 일이든 포기하고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매사 하나하나 다 따져가며 일할 수 없다고, 그러면 어떤 일도 지속할 수 없다고 충고할 작정이었다.

아, 맞다. 저 사실 경옥 아니에요.

그 순간 경옥이 불쑥 말했다. 인선은 그 말을 한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자 경옥이 조금 더 큰 목소리를 냈다.

그 이름, 제 이름 아니에요.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요.

경옥이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요?

네. 그때, 고지서에서 본 이름이에요. 왜 처음 갔었던 원룸 있잖아요. 기억하시죠? 현관에 고지서 엄청 쌓여 있던 집. 거기서 봤어요. 임경옥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신호가 바뀌었고 인선은 속도를 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왜 지금 느닷없이 그 사실을 털어놓는 건지 의아했지만 묻지 않았다. 다만 경옥이 차에서 내리기 직전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 뭐라고 불러요? 경옥씨라고 계속 부르면 돼요?

아, 제 이름 소현이에요. 이소현. 근데 그냥 좋을 대로 부르시면 돼요. 상관없어요.

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려던 말은 하지 못했다. 덜 마른 시멘트에 남긴 신발 자국도 까맣게 잊고 말았다.

인선씨, 어제 갔던 집 말이야. 거기 시멘트 밟아서 엉망으로 해놨다며? 아침부터 전화 오고 난리도 아니네.

다음 날 오전, 양사장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인선은 어제 일을 기억해냈다.

아, 양사장님. 그거, 그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요. 놀이터에.

인선이 해명하려 했지만 양사장은 들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운전 중인 모양인지 신경질적인 경적이 계속 끼어들었다.

그 사람들이 뭐 우리 이야기를 듣기나 해? 하여간 골치 아프게 됐어. 관리사무소에서 그 집 사람한테 원상복구 해내라고 난리라네. 청소비는커녕 돈만 더 물어주게 생겼어. 듣고 있어?

거기 아무 표시가 없어서 사람이 다칠 뻔했어요. 무슨 표시라도 해둬야 하잖아요. 애들 노는 놀이터인데.

인선씨가 그런 거야? 아이, 실수 안 하는 사람이 왜 그랬대? 인선씨, 하여간 이건 인선씨가 책임져야 해. 우리 업체 이미지도 있고. 그렇잖아.

미안한 일이었지만 다짜고짜 몰아붙이는 양사장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고, 청소비를 주니 마니 하는 의뢰인의 태도가 말할 수 없이 야속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단 얼마라도 깎아보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돈을 주는 사람이 억지를 부리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돈을 못 주겠대요? 집을 그렇게 깨끗하게 해놨는데도요?

일단은 잘 달래봐야지. 젊은 사람 같던데. 괜히 인터넷에 글이라도 올리면 더 큰일이잖아. 아무튼 인선씨도 그렇게 알고 있어. 내가 다시.

인선은 양사장의 말을 끊고 물었다.

그럼 제가 가서 한번 이야기해볼까요? 오늘 이사한다고 했죠, 그 집?

양사장은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처음엔 그냥 기다리라고 했다가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인선은 경옥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어쨌든 사태의 경위를 직접 설명하고 싶었고,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뜸을 들이던 양사장은 한참 만에 경옥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돈을 못 준대요?

전화로 짤막한 설명을 듣자마자 경옥은 대번에 그렇게 물었다.

일단은 사장님이 해결하겠다니까 기다려봐야죠.

겨우 몇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서운함도 야속함도 잦아들고 인선은 잠자코 양사장의 연락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해결할 생각이 있었으면 전화하기 전에 해결했겠죠. 아, 열받아. 시멘트는 시멘트고 청소는 청소잖아요. 일을 시켰으면 돈을 줘야죠. 전 못 참아요. 진짜 못 참겠어요.

경옥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고, 일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도 저도 안 되면 그 집을 청소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고 말겠다고 큰소리쳤다.

인선은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대꾸했지만 경옥과 함께 진짜 그 집을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다. 언성을 높이지 않고, 악다구니를 쓰지도 않고 그토록 쉽게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네? 누구시라고요?

11동 402호 남자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쉴 새 없이 이삿짐이 올라오는 탓에 계속 주변을 기웃거리면서였다.

사장님한테 돈 못 준다고 하셨다면서요? 어제 저희 일곱시 넘도록 청소했거든요. 진짜 안 해도 되는 데까지 다 하고 갔다고요. 저기 베란다 창문 녹슨 거하고, 블라인드. 저런 건 원래 닦아주지도 않아요.

경옥이 목소리를 높이자 남자가 되물었다.

돈을 못 준다고 했다고요?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요?

돈 못 주겠다고 했다면서요. 사장님한테 들었어요.

글쎄, 전 그런 말 한 적이 없다니까요. 시멘트 그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은 게 다라고요. 여기 청소하신 분이세요? 저한테는 사장님이 직접 청소한다고 하더니, 다른 사람을 보냈나보죠?

인선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경옥을 만류하며 이렇게 답했다.

청소는 우리가 훨씬 더 잘해요. 그래서 우리가 왔던 거예요.

남자는 관리사무소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고, 문제가 해결되면 청소비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청소 상태가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관리사무소로 가 신발 자국을 남긴 것에 대해 해명했다. 외부인, 무단침입, 훼손 운운하며 대뜸 두 사람을 하대하던 관리과장은 놀이터, 아이들, 안전, 맘카페 등을 언급하는 경옥의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서류 한장을 내밀었다.

알았어요. 그만합시다. 여기 이름 적고 서명해요. 우리도 기록으로 남기긴 해야 하니까.

402호 남자는 더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관리사무소의 전화를 받은 뒤 양사장에게 바로 돈을 보냈다. 양사장이 수수료를 제하고 두 사람에게 일당을 지급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거였다.

그게 끝이었다.

당시엔 예상하지 못했지만 인선과 양사장의 관계도 그렇게 끝이 났다. 양사장이 인선을 탓하거나 인선이 양사장에게 항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인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양사장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선은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양사장의 태도가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웠다. 아니, 모든 걸 당연한 줄 알고 성실하게 일해왔던 스스로가 너무나 바보 같았다.

양사장님, 그동안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이후 몇차례 양사장의 호출이 있었지만 인선은 그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뻔뻔하게 자신을 속여온 사장에게 당하면서 배운 게 많긴 했으니까. 진심과 원망이 공평하게 담긴 말이었다.

인선은 청소업체 몇군데에 새로 지원서를 넣고, 인터넷 구인공고에 연락처를 남겼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사철이 지난 탓인지, 양사장이 채팅방에서 비밀스러운 복수를 감행하고 있는 탓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인선은 뭐든 오래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일이 들어온 건 3월 중순이 지나서였다.

오가는 데만 세시간이 넘게 걸리는데다 일당도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인선은 하겠다고 했다. 이른 새벽, 인선은 경옥과 함께 출발했다. 거리는 고요했고 도심을 빠져나오자 풍경이라 할 만한 것들이 빠르게 멀어졌다. 나중엔 황량한 들판과 군데군데 선 창고 몇개가 전부였다.

인선은 라디오를 켜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아예 그냥 창업을 하시면 어때요? 아시죠? 청소업체 엄청 많은 거. 창업하는 데 돈이 많이 안 들어서 그렇대요. 이백 갖고 창업한 사람도 있다던데요? 어차피 기본적인 건 다 갖고 계시잖아요.

경옥은 휴대폰으로 창 너머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찍다가 그렇게 말했다.

돈만 있다고 뭐 창업을 할 수 있나요.

아뇨. 창업하면 완전 대박 나실걸요? 그건 제가 장담해요. 백 프로!

백 프로씩이나?

실력이 있으니까요.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선은 웃었다. 어떤 기분 좋은 상상들이 신기루처럼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경옥씨는, 아니다. 소현씨는 이 일 계속할 마음 있어요?

아뇨. 전 이 일 너무 싫어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은데 또 모르죠. 하다보면 잘 풀릴지도요. 근데 창업하시면 저 직원으로 써주시면 안 돼요? 저 진짜 잘할 수 있거든요.

라디오에서 경쾌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그 멜로디가 마음속에 드리운 불안을 조금씩 걷어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남의 이름을 알려준 거예요? 소현이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리는데.

아, 그거요. 그날까지만 하고 진짜 그만둘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소현보다는 경옥이 청소를 훨씬 더 잘할 것 같지 않아요? 경옥. 임경옥. 뭔가 베테랑 같잖아요.

인선은 라디오 볼륨을 조금 낮추며 물었다.

이 일 하기 전엔 무슨 일 했어요?

저요? 편의점 알바도 하고, 베이커리에서 빵도 굽고, 커피도 만들고 그랬죠. 아, 우체국에서 사무보조로 일한 적도 있고요.

그런데 왜 청소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인선은 묻지 않았다. 그런 질문에 관해서라면 자신도 제대로 된 답을 갖고 있지 못했으니까. 이 일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공백으로 가득했으니까.

저도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인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옥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집을 청소할 땐 마음이 너무 불행해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받는 돈은 똑같은데 몇배나 더 일해야 하는 상황이 억울하지 않으냐는 거였다.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뭐.

인선이 답했고 경옥이 물었다.

축복요? 무슨 축복요?

깨끗하게 청소해드리는 만큼 좋은 일 많이 생기시라고 빌어주는 거죠.

경옥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인선을 돌아보았다. 인선의 얼굴에 엷게 웃음이 떠오르는 걸 확인하고 난 뒤에야 경옥이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진짜 아니죠?

왜 아니에요? 진짜지. 진짜예요.

진짜요? 진심으로요? 축복을요?

진짜라니. 축복을 비는 마음이라니. 인선은 대답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때마침 경쾌한 팝송이 끝나고 다른 곡이 흘러나왔다. 나의 꿈, 나의 모든 것, 모진 바람 불어와서 내 꿈을 데려갔네,로 시작되는, 인선이 좋아하는 노래였다. 인선은 창을 내리고 라디오 볼륨을 더 높였다. 창틈으로 신선한 바람이 새어들었다. 더는 한기가 느껴지지 않고, 이가 덜덜 떨리지도 않는, 정말 봄이라고 할 만한 공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