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산문 | 내가 사는 곳 ②

 

고향을 떠나기 전

 

 

천현우 千鉉宇

『얼룩소』(alookso) 에디터, 용접공, 칼럼니스트. 국무총리실 산하 청년정책조정위원회 위원.

serinblade@naver.com

 

 

용접작업 전엔 반드시 방독마스크를 쓴다. 밴드를 당겨 뒤통수에 고정하고 입마개를 올리면 숨이 턱 막혀온다. 마치 공기가 한껏 덩어리져서 콧구멍에 넣고 빼기조차 벅찬 느낌. 오래간만에 그 불편함을 집 안에서 체험하게 되었다. 어머니 심여사와 마주한 방 안의 분위기는 묵직했다. 꼭 서울로 올라가야 하겠냐는 물음에 죄라도 지은 듯 대답했다. 새 언론사에서 채용 제안이 왔다. 봉급도 봉급이지만 내가 성장할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집도 이미 알아봤고 근로계약서에 싸인도 했다. 곧 칠순인 심여사께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떨결에 불효자가 된 죄책감에 목구멍이 마르는 한편 주절주절 상경의 이유를 늘어놓는 내 신세가 참 얄궂다고 생각했다. 줄곧 경남권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던 내가 느닷없이 서울이라니. 대화를 마치고 방에서 나오니 절로 꼬리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일자리가 없어서 혹은 공부가 하고 싶어서 일찌감치 고향을 떠났던 친구들은 감정의 살덩이가 마구 꼬집히는 이 느낌을 어찌 참아냈을까.

의기소침해져 방 안에서 한참을 웅크려 있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고 싶단 충동이 끓었다. 창원처럼 번잡하진 않되 진해처럼 고즈넉하지도 않은 인구 36만명대의 중소도시. 행정구역상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창원시에 편입된 지 벌써 12년이 다 되어가지만 내겐 아직도 ‘마산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장소. 줄곧 짝사랑해온 내 고향을 직접 두 발로 느끼고 싶었다. 새벽 한시, 발이 제일 편한 운동화를 골라 신발끈 꽉 죄고 현관을 나섰다.

 

우리 집은 경남대학교 위쪽 밤밭고개 꼭대기에 있다. 경사는 높고 버스도 잘 안 오며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 10분 거리에 있는 최악의 입지. 굳이 여기에 자리 잡은 이유는 침수 트라우마 탓이다. 마산만을 끼고 있는 해안대로 인근은 수해에 무척 취약했다. 장마철만 됐다 하면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기 일쑤였다. 버스정거장에 놓인 벤치가 안 보일 정도로 침수가 심한 날이면, 행인들의 당혹 섞인 비명과 불법 주차했던 차주들의 곡소리가 섞여 물지옥을 연출했다. 지친 몸으로 퇴근해서 문지방을 넘으려는 빗물의 파도를 바가지 하나로 세시간 넘게 막아내다보면 힘듦에 앞서 서러움이 복받쳤다.

그 무력함이 싫어 이 집을 택한 결과, 집 나설 땐 어디로 떠나든 처음엔 긴긴 내리막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월영마을 아파트단지를 죽 내려와 커다란 언덕 하나 넘으면, 한껏 각진 건물 세채가 서로 찰싹 붙어 있는 국립마산병원이 나타난다. 새벽녘에도 환히 불 켜진 병원 모습을 보니 속이 쓰렸다. 야간일 하는 설비노동자들의 노고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남들 잘 시간에 일한다는 것은 평범한 이들과 함께 섞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야간노동은 대체로 고독하고 음울하다. 그 씁쓸한 사정은 몇푼 안 되는 야근수당에 막혀 공론화의 장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가포고등학교까지 이어진 굽이길 따라 걸어서 사방팔방에 널린 장엇집과 요란한 불빛의 모텔촌을 지나면 가포신항공단에 도달한다. 들어선 공장의 수가 열 손가락 겨우 넘기는 아담한 공단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살풍경하다. 모든 회사가 불 꺼진 와중에 현대차 계기판 만드는 공장 한곳만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좀더 걸어 마침내 첫 목적지에 도달했다. 나의 안식처 가포해안변공원이었다. 20대 절반을 고통과의 전면전으로 보냈다. 아버지를 잃고 빚더미에 짓눌려 진로조차 포기해야 했던 시기, 술로 다 씻기지 않는 아픔의 고비마다 이곳을 찾곤 했다. 물결 따라 주름진 바다가 저조차 갈 길 모른 채 한없이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면 어느덧 마음속에 몰아치던 파도가 잔잔해졌다. 저 거대한 물길조차 자기 몸뚱이 하나 맘대로 가누지 못하는데, 나처럼 작은 존재가 삶의 흐름 앞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찌든 때처럼 눌어붙은 가슴 속 절망을 하나씩 떼어내 수장하다보면 어느덧 다시금 살아 견뎌보리란 의지가 샘솟았다.

다시 찾은 공원의 풍경은 약간 달라져 있었다. 은은한 가로등 빛이 줄지어 있던 마창대교의 경관엔 LED가 추가되어 화려하되 요란해졌다. 공원 맞은바라기에 놓인 귀산동은 바다 전망과 야경을 즐기는 까페거리로 관광명소가 되어 밤잠도 없이 허연 안광을 번뜩여댔다. 인근에 자리한 푸드트럭과 까페도 어설프게나마 관광지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던 공간이 이젠 수많은 이들의 안식처가 되어 있구나. 누구보다 먼저 이곳을 찾아낸 내 안목에 으쓱했다. 동시에 더는 이 공간을 독차지할 수 없음에 아쉬웠다.

 

복잡 미묘한 감정 속에서 벤치 위에 붙였던 엉덩이를 튕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러야 할 곳은 많고, 내 걸음은 느렸으며, 주어진 시간은 촉박했다.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가 오르막길을 통해 가포신항터널 내부로 진입했다.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통 새하얀 인공통로 안에선 발걸음 소리만 뚜벅뚜벅 울려왔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곧바로 소방정대 건물과 마주친다. 그 앞엔 개장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해양공원이 파릇파릇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서항지구 친수공원’이라는 다소 난해한 이름을 한 이 공간의 족보를 펴보자면 일제강점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1930년대 마산항 제2부두 매립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진 월포해수욕장이라는 유명한 피서지였다. 그러다 1970년대엔 쌍용양회의 시멘트공장이 들어섰다. 주변엔 모래를 취급하는 군소 골재업체들이 입주했다. 그래서 오래 산 주민들은 이곳을 ‘쌍용·모래부두’라 부른다. 이 시기가 마산의 전성기였다. 마산 수출자유지역부터 한일합섬까지 이어진 경공업 산업이 중흥기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섬유산업의 수익성 악화로 한일합섬이 해외 이전한데다 무엇보다 중공업 기획도시 창원의 대두로 마산은 점차 위상을 잃어갔다. 무역 또한 대부분 부산항에 빼앗겨 2004년 제1부두의 운영을 폐쇄했다.

무리한 매립의 부작용으로 서항지구 앞 마산만은 똥물의 대명사로 꼽혔다. 나 역시 어릴 적 보았던 그 흉흉한 회색 물빛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이후 10년 가까이 무주공산이었던 서항부두, 1부두, 중앙부두 자리에 복원사업이 시작됐고, 마침내 근사한 해양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새벽 두시임에도 배회하는 이가 적지 않은 공원 초입엔 잔디밭과 놀이터가 이어져 있다. 매끈한 포장길을 걷다보니 이윽고 인공섬과 이어진 다리가 보였다. 미니카 트랙처럼 8자로 꼬인 독특한 형태의 다리다. 섬 위는 아직 허허벌판이었다. 아파트를 짓자니 생태환경이 어그러지고 문화 관광지를 만들자니 수익이 안 나오는 딜레마 속, 아직도 섬 위를 채울 사업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일 킬로미터쯤 더 걸어 널찍한 공원 중앙에 도달했다. 이곳은 주말만 되면 버스킹 나온 노신사들로 가득 찬다. 공원 끝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지와 맞닿아 있는데, 2021년에 김주열 열사 동상 건립을 가지고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마산에서 자주 발생하는 용어의 섞갈림 탓이었다. 추모판의 ‘4·11민주항쟁’ 표기를 두고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문제제기를 했다.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는 표기의 타당성을 주장하며 맞받아쳤다. 3·15는 김주열 열사가 이승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다가 실종된 날이었고, 4·11은 눈에 최루탄이 박힌 그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날이었다. 이 사건은 4·19 혁명으로 가는 도화선이 되었다. 결국 4·11이라는 명칭으로 합의가 끝났지만, 두 단체가 기싸움을 벌이는 동안 동상은 석달 가까이 푸른 테이프에 꽁꽁 싸인 채 방치되었다. 흉한 푸른 붕대를 푼 소년 김주열은 결의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교복 차림으로 최루탄을 감싸 안은 채 고개 치켜든 그 자태에 괜스레 코가 시큰해졌다.

 

서항지구 친수공원 전경(사진 제공: 창원시)

서항지구 친수공원 전경(사진 제공: 창원시)

 

공원을 벗어나 이마트와 맥도날드가 상견례 보듯 마주한 사거리 앞. 어시장으로 향하다가 문득 샛길로 빠졌다. 열아홉살 당시 잠깐 살았던 부림시장 근처 신포동의 근황이 궁금했다. 당시엔 정말 어수선한 동네였다. 만취한 노인들의 고성방가, 방음이 전혀 안 되는 노래방, 인도를 가볍게 오가는 차와 오토바이, 까만 쓰레기 봉다리를 과자 봉지처럼 뜯어대는 길고양이들. 몰락한 산업도시의 번잡스러움을 고스란히 전시해둔 풍경 속 화룡점정은 민주화운동 의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거탑 맞은편에 있는 홍등가였다. 입구에 현금인출기 하나만 덜렁 놓인 그곳을 지나칠 때면 고개 푹 숙인 채 바삐 걷곤 했더랬지.

14년이 지난 지금, 불법업소들은 전부 폐쇄됐지만 동네 분위기는 여전히 어둑어둑하고 휘휘했다. 밤바다 등대처럼 편의점과 경찰서만 홀로 빛나는 모습에 괜히 기분이 언짢아져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 장이 들어서지 않은 어시장 안을 가로지른 뒤 계속 길을 가 제3부두가 있는 자유지역 외곽을 걸었다.

출퇴근 시간만 되면 복닥복닥한 6차선 도로, 바다를 접한 이 근사한 광경 속엔 사실 노동자의 통곡이 파묻혀 있다. 한국산연 폐공장 주변 울타리엔 저마다 처절한 글귀가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50년 가까이 마산과 함께해온 한국산연은 노동자는 물론 대표이사에게마저도 비극만 안겨준 채 폐업했다. 모기업인 일본 산켄전기의 자회사 한국산연은 1973년 설립됐다. 마산의 황금기 동안 함께했던 산켄전기는 1997년 인건비를 이유로 생산공장을 인도네시아로 이전하려다 저지당했다. 이때부터 단물 다 빼먹은 회사를 폐업하려는 사측과 생존이 걸린 노동자 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2016년 사측은 만성 적자라는 이유로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를 예고했고, 절박해진 노동자들은 일본까지 원정을 가 한일 연대 복직투쟁을 했다. 2017년 5월 간신히 복직에 성공했지만 불과 한달 뒤 대표이사가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동안 회사는 폐업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2020년 7월 법인 청산을 한 산켄전기는 한국을 떠났다. 길을 걸어 도착한 한국산연의 폐공장 앞엔 자본의 논리가 지르밟고 간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해안로를 타고 내려가면 2013년 경매에 넘겨지기 전까지 성동조선소가 있던 부지가 나타난다. 공단 전체를 내려다보던 골리앗 크레인은 이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중고차 매매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2007년 기세등등하게 한진중공업 마산조선소를 인수했던 성동조선은 조선업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쓰러졌다. 고등학생 때 몇번 보고 지나쳤던 성동조선은 눈보단 귀로 기억하고 있다. 사람 목소리, 망치질 소리, 용접 불꽃 튀는 소리, 중장비가 땅바닥 갈아대는 소리, 거대한 크레인이 육중한 쇳덩이를 옮기는 소리가 달팽이관을 두들기곤 했더랬지. 어릴 적 로봇 만화영화에 환장했던 남학생은 거대한 기계가 풍기는 웅장함에 홀려, 잿빛 공장들 사이를 한참 누비곤 했다.

추억은 발걸음을 봉암공단으로 밀어넣었다. 내 첫 직장인 노키아가 있었고, 첫사랑 은주와 함께 일했던 곳. 일한 기간은 두달뿐이지만 10년 넘게 일한 창원보다 더 친숙한 장소. 스무살에 마주한 일터는 그야말로 무너지기 직전 같은 꼴이었다. 금이 안 간 건물 찾기가 어려웠고, 폐공장이 허물어진 터는 방치된 채였다. 아스팔트는 피딱지를 떼어낸 듯한 상처로 가득했다. 잦은 침수에 시달린 가로등 밑동은 녹슬어 썩은 귤색을 띠었다. 비라도 한바탕 쏟아져 내리면 벤치 앞 재떨이에선 기름때 같은 잿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고 담배 전 내와 쿰쿰한 절삭유 냄새가 섞여 코의 주리를 틀곤 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던 내 첫 일은 박스 포장이었다. 함께 일하던 누님들은 종이접기 달인 김영만 교수님처럼 종이박스를 착착 조립해 마트 계산대처럼 생긴 라인 위에 올려놓았다. 마술 같은 그 손놀림을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어 진땀만 흘렸다. 바로 옆 공정엔 초등학교 동창인 은주가 있었다. 주야 교대도 맞아서 늘 같이 어울려 다니곤 했다. 별다른 재미가 없어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공장에 스무살짜리 남녀가 어울려 다니는 모습은 금세 화제가 됐다. 이윽고 소문은 뱅뱅 돌다 내 귀에까지 들어왔지만, 그냥 친한 동창이라 둘러대고 말았다. 그때 만약 사랑을 고백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하는 사이 노키아가 있던 장소에 도달했다.

하늘색 외벽의 노키아 공장은 허물어지고 자동차 부품사인 중견기업 센트랄의 공장이 우뚝 서 있었다. 잿빛과 당근색이 뒤섞인 5층 공장 부근엔 예전의 어수선함이 사라져 있었다.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재건축사업의 결과였다. 삭아서 가루가 될 듯했던 건물들은 제각각 자기 색을 뽐내며 우뚝 서 있었다. 담배꽁초 나뒹굴던 인도는 반반했고 갈라진 틈새로 잡초와 이끼가 무성했던 아스팔트 역시 멀끔했다. 흡사 패전국 수도 같던 봉암공단은 철 지난 사업을 점차 정리해나가며 조금씩 되살아나는 중이었다.

 

공단 정문에 도달했을 땐 조금씩 하늘이 밝아가고 있었다. 마지막 행선지는 산호동 인근으로 정했다. 잠시 서울에 살다가 빚에 쫓겨 가족이 함께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야 했던 아픔과 가난의 설움이 뼈에 사무쳤던 시기. 가난 때문에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소년 시절과 함께했던 장소였다.

공단 앞 삼각지공원에서 신세계백화점을 지나면 곧바로 창원NC파크가 나타난다. 세련미 가득한 조형의 새 야구장 뒤엔 마산 최대의 부촌인 메트로시티의 고층 아파트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었다. 마치 서울의 도심 일부를 떼어 놓은 듯한 웅장함 속에 멋은 살아 있되 친숙함은 죽어 있었다. 새 야구장이 들어서기 전 공설운동장은 분명 후줄근하고 낡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다. 여름방학 땐 친구들끼리 드넓은 운동장을 무대로 술래잡기도 하고, 수영장에 가서 놀기도 하며, 단거리 트랙에서 달리기 경주도 했다. 이젠 누구도 그런 소소한 즐거움은 누릴 수 없겠지. 도시 마산엔 자부심인 야구장의 풍경이, 어린 시절 추억에 젖은 천현우에겐 마냥 씁쓸하게만 보였다.

NC파크에서 5분만 걷다보면 30년 가까이 변치 않은 풍경이 수두룩하게 나타난다. 마산으로 돌아온 직후 빚쟁이를 피해 투숙했던 국제여관과 두산탕여관은 아직도 그 간판 그 건물 그대로 영업 중이었다. 육호광장 네거리 안 문창교회 또한 나 어릴 적 모습 그대로였다. 꼬질꼬질한 몰골인 여덟살 아이가 불쑥 들어와 배고프다 칭얼대자 빙긋 웃으며 간식을 나누어주었던 목사님의 인자한 얼굴이 언뜻 떠올랐다.

교회를 마주하고 왼쪽 샛길로 빠지면 산이라기보다 언덕에 가까운 야트막한 노비산이 나온다. 몇발자국 찍다보면 금세 도달하는 꼭대기엔 멋스러운 저택의 마산문학관이 서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마냥 서로 좋기만 했던 여자친구와 문학관 앞 벤치에 앉아 놀곤 했다. 차 한대가 간신히 지나갈 굽이진 언덕에서 내려오면 버스정거장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이 보이고, 길목 끝자락엔 연식이 반백년은 될 법한 낡은 4층짜리 건물이 서 있다. 당장 내일 포클레인 크러셔로 얻어맞아도 이상하지 않은 이 건물엔 이젠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PC방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과자와 게임잡지가 한가득했던 장소는, 다섯번째 전학을 와 친구를 거의 사귀지 못했던 초등학생에게 학교보다 평온한 세상이었다. 방과 후 책가방 멘 채로 계단을 오르면 아르바이트 누나와 담배 뻑뻑 피우며 리니지 하던 아저씨들이 반겨주었었다.

 

창동예술촌 부근 150여 미터 거리로 조성된 ‘상상길’의 모습(사진: 천현우).

창동예술촌 부근 150여 미터 거리로 조성된 ‘상상길’의 모습(사진: 천현우).

 

어느덧 시침은 여덟시를 향해 꾸역꾸역 고개 들고 있었다. 북마산 가구거리를 지나 도달한 창동예술촌 입구는 아직 한산했다. 앞으로 두어시간 뒤엔 가게들이 하나둘 셔터를 올리며 일상의 시작을 알리겠지. 본래 창동은 마산 대표 번화가였다. 특히 인근 남고와 여고 사이 오작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교복 차림으로 코아양과에서 소개팅하다 눈 맞으면 근처 연흥극장에서 영화 한편 보며 사랑을 싹 틔웠다. 당시의 낭만은 새로운 시대에 맞춰 도태당했다. 계획도시 창원에 대기업과 공공기관이 들어서면서 유행지의 지위는 창원과 가까운 합성동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은 구태여 창동을 찾지 않았고, 수십년 장사해오던 가게들과 독립극장들은 하나둘 퇴장했다.

텅 비어버린 거리는 한때 창원시의 도심재생사업을 맞아 조금씩 부활하는 듯했다. 하지만 몇년 동안 슬며시 타올랐던 창동의 불꽃은 코로나 태풍을 맞아 단번에 꺼져버렸다. 부활의 희망마저 좌초당한 모습은 마산, 나아가 대부분 지방이 처할 미래 같아 두려웠다. 내 고향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얼마 못 가 역사라는 앨범에 고이 간직당할 운명인 걸까?

안타까움에 잠깐 멈춰 섰을 무렵, 부림시장의 희미한 불길이 눈에 밟혔다. 아치형 가림막을 인 통로 좌우의 가게들 사이로 인파들이 복닥복닥 붐볐다. 풀빵가게 주인장은 반죽이 구워지자마자 누런 봉투에 담기 바빴다. 장보러 온 어머님들과 상인 사이에선 단돈 천원을 두고 각축전이 오갔다. 부직포 장바구니에 낡은 프라이팬을 한가득 담아온 영감님은 새걸로 바꿔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그렇지, 오늘은 토요일이구나. 조금씩 활기가 살을 불려나가는 시장 모습에 좌절감의 안개가 걷히고 또렷한 현실이 보였다.

그래. 이제 과거 같은 번영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나의 친구들, 고마운 어른들과 치열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이 있다. 지금은 비록 돈을 벌러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들의 품속으로 다시 돌아오고야 말리라. 돌아와서 고향을 위해 내 나름의 역할에 충실하리라. 주머니에 실패한 연애편지처럼 구겨져 있던 천원짜리 석장을 꺼냈다. 고향을 떠나기 전, 풀빵이 먹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