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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길상호 吉相鎬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우리의 죄는 야옹』 등이 있음. 482635@hanmail.net
서로의 엄마
언 바람의 난동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황량한 방목지에 아침이 찾아왔다네
창파족 늙은 아낙은 레보* 천막을 걷고 나와
새끼 염소들을 햇볕 위에 나란히 내려놓는다네
고원의 한기를 견디기엔 아직 어린 심장
그녀는 밤새 그것들을 품고 다시 엄마가 되었다네
마니차**를 돌릴 때마다 사라진다던 업보는
절룩절룩 이제 무릎뼈만큼 닳았을까
돌담 우리 안에 웅크려 있던 어미 염소들도
그녀의 헛기침에 하나둘 깨어나고
이제는 엄마를 바꾸어야 할 시간,
유목의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따뜻한 젖
양동이가 출렁거리며 채워지는 동안
그녀와 염소는 몇번이고 흐린 눈을 맞춘다네
--
* 창파족 유목민의 이동식 전통 가옥.
** 티베트 불교의 경전을 새겨 넣은 원통형 도구.
손바닥 성지
시장의 오체투지는 해가 저물고야 끝났다
으슥한 골목, 고무판 아래 접어둔 다리를 꺼내 주무르며
통 속 수입을 헤아리는 그의 낯빛이 어둡다
사람들의 믿음도 이제 유효기간이 지나버렸고
연민을 이끌어낼 다른 방법이 필요하지만
바닥을 기는 것만이 이제껏 익혀온 생활의 기술,
가로등이 밝혀놓은 그의 손바닥에는
타르초처럼 붉고 푸른 상처들만이 나부낀다
운명이라는 비탈을 넘어 다니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문을 손금에 묶어둔 것일까
향불 대신 담배를 피워 문 그의 가슴팍에
끌려온 길들이 겹겹 얼룩으로 쌓여 있다
줄장미가 가시밭길을 몸에 새기며 담을 넘어가
피딱지 같은 꽃잎 하나 바닥에 흘려놓는다
이제는 하루 치 고행을 끝낸 두 다리를 위해
남루한 전생을 벗어놓고 가지런히 누울 시간,
통 속에 구겨진 영혼을 주워 담아 일어서는
그의 손에는 아직도 먼 순례의 지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