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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용옥 『용담유사』, 통나무 2022
수운의 삶의 혁명, 개벽의 노래
김용휘
金容暉/대구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not-two@hanmail.net
「용담유사(龍潭遺詞)」는 동학을 창건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한글 경전이다.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더불어 수운 선생이 직접 쓴 동학의 양대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수운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당시 여성들, 밑바닥 민중들을 위해 한글 가사체의 경전을 남겼다. 하지만 그동안 「용담유사」는 「동경대전」에 비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글로 쓰였다는 이유로 한문 경전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으로 본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용담유사」는 「동경대전」과 대등한 동학의 경전일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수운의 일상적 체험을 있는 그대로 토로한 노래요, 시요, 가감 없는 실존의 독백”(16면)으로 수운의 인간적 면모와 개인적 삶과 가르침이 훨씬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동학을 민중의 것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용담유사」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도올 김용옥이 작년 『동경대전』(전2권, 통나무)에 이어 올해 『용담유사』를 펴내고, 이 책을 「동경대전」과 동일한 무게감으로 취급한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도올의 『용담유사: 수운이 지은 하느님 노래』는 몇가지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문사철(文史哲)을 통관한 지식으로 심오하고 해박한 고전 출전에 기초하여 수운의 원의를 잘 드러냈다는 점이다. 「용담유사」는 19세기 한글 가사체인데다가 경상도 사투리까지 포함되어 있고, 누구의 말이 어디까지인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헷갈리기 일쑤이다. 또 풍자하는 말인지, 주장하는 말인지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이런 오독을 피하기 위해 따옴표를 붙여 누구의 말인지를 분명히 가렸으며, 글의 집필 시기를 정확하게 분석해냄으로써 발언의 맥락을 짚어 기존의 오역들을 바로잡았다.
기존 「용담유사」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각 편을 시대순으로 정리함으로써 수운의 생애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이로써 집필 당시 수운의 심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됨은 물론, 그의 공생애가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처럼 매우 드라마틱하게 잘 다가온다. 게다가 이 책이 기준으로 삼은 계미중추판(1883.8)이 목활자본이 아닌 목판본이며 따라서 원고의 충실성에서 우위를 점하는 선본(善本)임을 밝힘으로써 그 가치를 제대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4·4조의 운율에 구애되지 않고 그 의미맥락을 자유로운 양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수운이 의도한 오리지널한 의미체계에 접근한 것도 매우 적절한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작업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용담유사」의 영문 번역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도올의 『용담유사』는 수운의 원의와 심정에 다가가서 그의 인간적 면모와 내면을 아주 솔직하고 리얼하게 드러내준다. 도올은 이 책을 통해 ‘수운, 그 사람’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시도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유사』는 수운의 삶의 약동의 순간이자, 그 생명의 전체였다. (…) 그때 그때, 그 당장 그 당장에서 그는 삶의 총체적 느낌을 토로한다. 절망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희노애락의 정서를 표출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용담유사』는 수운이라는 한 인간의 발가벗은 실존의 모습이다. 그것은 투정이요 원망이요 권유요 효유요 꾸짖음이요 천명의 고백이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감정의 기복을 통관하는 것은 대인의 우환이요, 다시개벽에 대한 희망이요, 삶과 죽음의 초월이다.”(47면) 그러한 수운의 진면목이 도올의 고전 지식과 뜨거운 가슴을 통해 고스란히 되살아나고 있다.
궁극적으로 도올은 수운의 사유를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서양의 초월적 신관과 실체론적 사고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사유,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려고 한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독존(獨存)할 수 없다”(11면)로 시작하는 그의 「서언(序言)」 자체가 「용담유사」의 본문에 비견할 하나의 대서사시이자, 서양의 실체론적 사고를 갈가리 찢어발기는 장엄한 칼춤〔劍舞〕이다. 인간의 몸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다이내믹한 생성체이자 이벤트의 과정이듯 “하나님도 나의 몸의 한 현상으로서 설명되어야”(21면) 한다. 도올은 수운의 동학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권위의 부정이요, 모든 제도에 대한 항거였음을 밝힌다. “니체는 신을 살해하려고 하였지만 수운은 신의 본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신과 인간에게 동일한 생명력을 부여했다.”(25면)
수운의 사유에는 항상 초월과 내재, 개체와 전체, 신비와 이성, 인격성과 자연성, 인과성과 초인과성, 아(我)와 무아(無我), 불연과 기연, 인성과 신성, 유위와 무위, 이 모든 대립적 관계가 생성적 관계로 혼융되어 있다. 또 서양의 주관과 객관의 설정이 사라진다. “주관은 나만의 주관일 수 없다. (…) 수억만 개의 주관이 저마다의 세계, 저마다의 시공간을 구성하고 있”(34면)다. 도올은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현재적 사고를 완벽히 전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 언어의 궤도를 일탈하여 신생로를 개척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유용한 문헌이 바로 「용담유사」라는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동학을 철저하게 서양의 신학 및 철학의 폐해를 극복할 새로운 신관과 형이상학을 담보한 철학으로 해석함으로써 실제 개개인의 행동 변화와 실천을 촉구하는 동학의 종교성을 다소 간과한 듯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수운이 누차 강조하는 ‘성경(誠敬)’을 해석하는 데서 엿보이는데, 도올은 성(誠)을 「중용」의 용례를 따라 천지대자연의 모습으로, 경(敬)을 성(誠)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로 해석함으로써 유학적 공부법으로 환원시켜버리고 있다(185면). 하지만 수운의 성경은 그냥 소박하게 ‘정성’ ‘공경’이라고 할 때, 본래 그 실천적 의미가 산다. 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수운의 「용담유사」에 그대로 확인된다. “정성 있는 그 사람은 어진 사람 분명하니 작심하여 본을 받아라! 어찌 그런 사람을 정성과 공경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교훈가’ 172면)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이 지적하듯이 “종교의 핵심은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바꾸는 행동을 하는 것”(『축의 시대』, 정영목 옮김, 교양인 2010, 9면)이다. 수운 역시 당시 각자위심(各自爲心)에 빠진 개개인의 행동의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도올도 언급하고 있듯이, 수운의 대각은 세칭 종교적 대각이 아니요, 세속의 초탈 또한 아니었다. 그의 무극대도는 ‘삶의 개벽’이었다. 수운의 무극대도는 결국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길, 새로운 행동양식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천지를 단지 물리적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부모님처럼 공경하라는 것이고, 하느님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의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나아가 가장 빈천한 사람들의 눈빛에서, 그리고 고통당하고 있는 뭇 생명들에게서 찾으라는 것이다. 따라서 저 초월적인 하느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공경하고, 이웃 사람을 공경하고, 만물을 공경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촉구한 것이다.
도올의 『용담유사』는 수운의 비극적인 삶의 역정이 무극대도 수용을 계기로 환희로 전환되는 감격을 여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자유에서 평화로 이르는 길이며, 평화에서 환희로 이르는 개벽의 길이다. 이 개벽의 대행진이 『용담유사』의 발간에 힘입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으면 한다. 우리 삼천리금수강산에서, 그리고 우리의 농산어촌에서부터 시작되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