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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희영 『경계를 횡단하는 여성들』, 푸른길 2022
남북 여성들의 경계 넘기
김성경
金聖敬/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ksksocio@kyungnam.ac.kr
‘경계’라는 말이 회자된 지 꽤나 된 듯하다. 학술 영역뿐 아니라 문학 장이나 시각예술 전시 등에서도 ‘경계’를 전면에 내세운 기획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는 중심과 주변,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이성과 감정, 몸과 마음 등 사회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비)가시적인 구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목적으로 한다. 당연시되어온 구획과 금기가 사실은 ‘만들어진’ 경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사이를 넘나드는 상상력,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밝혀내는 것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실천과 존재들은 낯설지만 사회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전복적이다. 경계에 대한 논의가 근원적으로 ‘경계 무너뜨리기’를 지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젠더연구자 이희영의 『경계를 횡단하는 여성들: 분단과 이주의 생애사 연구』는 이주 여성들의 삶을 통해 너무나 공고해서 틈새조차 만들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분단과 국가라는 경계가 실은 지속적으로 교란되어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음을 밝힌다.
이 책은 국가를 넘나드는 이주자, 그것도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소외된 집단인 이주여성의 시선에서 분단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에서 일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경계의 문제를 분석한다. 이는 분단, 냉전, 이주, 인간-사물, 더 나아가 사회학의 주류 방법론 등 틀을 구획 짓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1990년대 중반 통일독일에서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분단, 냉전, 통일 전반에 대한 학적 관심을 심화했으며, 생애사 연구와 같은 해석학적 전통에 기반을 둔 방법론도 접하게 되었다. 통일 이전의 동독사회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된 저자의 행보는 한반도라는 맥락으로 확장되어 탈북민의 이동과 정체성 분석 등을 경유해 북한과 분단 연구 전반으로 이어졌다.
이 책은 경계를 넘는 이들 중에서도 특히 ‘여성’에 주목한다. 1960년대 서독으로 이주한 남한 출신 간호여성과 1990년대 북한의 경제난으로 인해 남한과 중국, 유럽으로 이주한 북한 출신 여성이 주인공이다. 가족 부양 등의 책임을 짊어졌던 남한 여성이 경제적 이유와 유럽 문화에 대한 동경 그리고 냉전체제하 서독과 남한의 교류를 배경으로 서독으로 이주했다면,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국경을 넘은 북한의 여성은 분단장치가 만든 경로를 따라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이동하거나 국제 인권 레짐을 활용하여 유럽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들의 이주는 마치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성격과 목적 아래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 분단, 그리고 민족과 계급, 젠더 갈등”이 동일하게 중첩되어 있다(9면). 예를 들어 1960년대 또다른 분단국인 서독에 이주한 남한 여성은 동백림사건 등을 통해 분단장치가 멀리 서독에서까지 작동하고 있음을 경험했고, 남한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면서 교민사회 내 젠더적 소외를 마주하기도 한다. 간호여성뿐 아니라 유학생과 노동자를 포함한 재독 여성들은 ‘재독한국여성모임’을 만들어 주요 정치사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데 적극적이었는데, 그 배경에서는 당시 68혁명의 영향과 더불어 독일 내 한국 간호사 추방에 반대하는 서명운동과 같은 정치적 활동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재독 한인 여성들은 가장 먼저 한반도의 분단 해체를 상상했으며, 탈냉전기 한반도 분단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에도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0년대 이주를 감행한 북한 여성도 한반도를 장악하고 있는 분단장치에 끊임없는 균열을 만들어낸다. 최악의 경제난을 뚫고 남한으로 이주한 북한 여성들은 ‘탈북자’라는 고정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사회정치적 권리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인정투쟁’을 감행하는 적극적인 존재다. 그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급격한 사회변동을 경험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저자가 밝힌 것처럼 북한 여성은 ‘고난의 행군’과 시장화 같은 사회변화에 조응하며 섹슈얼리티, 젠더, 가족 등 북한식 가부장제를 뛰어넘는 전복적인 행위를 일상화하고 있다. 또한 북한 여성들 중 일부는 남한으로 이주했으나 “분단장치의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유럽의 난민 레짐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세계시민”이라는 새로운 꿈을 추구하기도 한다(374~79면). 흥미롭게도 이들이 유럽에서 새로운 삶을 기약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과 분단이 난민 인정에 중요한 자원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처럼 그들의 국가 정체성이 국가와 국민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만큼 탈북 여성의 이주는 국가-분단-세계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며, 이동하는 이들의 경험세계는 민족, 계급, 젠더를 교차하며 확장하고 있다.
저자는 독일로 간 남한 여성, 남한과 유럽으로 향한 북한 여성의 삶을 생애사적 방법을 통해서 ‘두텁게’ 들여다본다. 실증주의적 전통에서 포착되기 어려운 소외된 이들의 미세한 행위주체성과 생활세계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한 전략이다. 이론적으로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을 적극 차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실증적 증거에 집중하는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전통이나 인간중심적 사고에 기반을 둔 사회학 이론체계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로 읽힌다. 다만, 인간 개개인의 생애서사에 집중함으로써 읽히지 않은 채 남겨진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애사 방법론과 비인간 행위자 역할을 강조하는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이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각 장이 담아낸 풍부한 이론과 흥미로운 사례가 책 전반에 걸쳐서 좀더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분단과 이주의 파고에서 무의미한 숫자 혹은 단편적인 증거로 남겨진 남북 여성들의 ‘이름’을 불러준 훌륭한 학술서임에 분명하다. 분단과 국가라는 경계, 그리고 일상에 내재되어 있는 민족과 젠더라는 권력구조를 넘나들었던 그녀들의 용기와 노력이 더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또한 그녀들의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 여전히 굳건한 분단장치와 젠더 규범도 문제시했으면 한다. 군사적 긴장과 경제적 갈등이 더욱 고조되고 있는 지금의 세계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희망의 단초가 그녀들의 작은 이야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