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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제25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주영하 周瑛河
1978년 서울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malaria78@gmail.com
굴과 모래
가장 먼저 굴이 사라진 곳은 노르웨이의 작은 해안 도시였다. 처음에 그 소식은 신문 국제소식란에 아주 작게 실렸다. 원인은 바렌츠해에서 터진 유조선 사고였다. 부서진 배에서 흘러나온 2백만 배럴의 기름이 해안가를 침범했고 수천 톤의 굴들이 한꺼번에 폐사했다.
9개월쯤 뒤에는 프랑스 깡깔르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깡깔르는 세계적인 굴 관광지였고, 굴이 사라지자 도시 전체가 빠르게 붕괴됐다. 굴 양식장 앞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찍은 영상이 뉴스와 SNS를 통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굴의 멸종이 현실화되기 시작했으며 무서운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일종의 예언이었다. 그 영상들은 수백만 조회수를 찍으며 유튜브를 배회했다.
그리고 마치 그 예언들이 모여서 이루어낸 일처럼 몇해 뒤에는 지중해 동부 키프로스섬의 굴들이 사라졌다. 하늘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오렌지주스를 들이부은 것처럼 거대한 적조 띠가 해안선을 따라 섬의 사방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해변에 쌓인 썩은 패각과 물고기 더미 앞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들이 뉴스에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그와 아내도 그 장면을 휴게실 텔레비전으로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날도 이른 아침부터 수산시장을 찾은 차였다. 그들은 이 도시에서 20여년간 굴 요리 전문 식당을 운영해왔고, 그날그날 손님들의 식탁에 올릴 질 좋은 굴을 사들이느라 새벽 수산시장 찾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잠시 후 뉴스는 다른 소식으로 넘어갔다. 누군가 졸음과 싸우느라 긴 하품을 하자 휴게실은 다시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그는 종이컵을 기울여 마지막 믹스커피 한모금을 마시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하루 장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 도시에서는 굴 출하량이 오히려 늘고 있었다. 질 낮은 벙커유처럼 검게 출렁이는, 지저분하다 못해 몰염치해 보이는 저쪽 바다의 일들은 먼 나라의 비극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들의 가게는 몇해 전 블루리본 서베이에도 선정됐다. 두 사람은 가게를 확장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는 그 결정에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눈을 비볐다. 아내에게 어서 집에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는 다 식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멍하니 든 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국제뉴스가 끝나고 축구경기 소식이 들려올 즈음에야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고 작게 중얼거렸다.
“굴을 좀더 얼려야겠어.”
부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걱정이 많은 성격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산발적으로 기억을 잃었다. 사소한 기억들은 물론 두 사람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도 자주 까먹었다. 병원에 가도 딱히 원인을 찾지는 못했다. 치매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기 때문에 그는 아내의 증상이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문제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방금 본 것도 며칠만 지나면 까맣게 잊을지 몰랐다. 다만 나중에 그는 이 시간을 돌이켜보며 한 장면을 기억하게 된다. 그가 차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을 때 아내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죽고, 당신은 살 거야.”
날씨 좋네, 같은 말을 하는 투였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훗날 그는 이때 아무 답도 하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했다. 난 당신을 살릴 거야, 말하지 않았던 것을. 사실은 나도 그 뉴스를 보고 두려웠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하지만 이후 몇년간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마치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유럽과 지중해의 몇몇 도시들이 굴 폐사로 더 파산한 뒤에도, 선 너머 이쪽 굴들은 건재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최상급 상품들은 굴이 사라진 나라들로 높은 가격에 수출됐다. 부부가 살고 있는 해안도시도 유례없는 호황을 맞았다.
그래서 처음 자신의 굴 요리에서 모래가 나왔을 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저지른 장난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문제를 일으킨 이물질의 정체가 기름도 적조도 아닌 모래라서 더 그랬다. 주방으로 되돌아온 접시는 이미 반쯤 먹어치운 뒤라 지저분했지만, 밝은 등 아래 모래알들은 영원히 새것일 것처럼 반짝거렸다. 그걸 본 아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서둘러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았다.
“내가 나가볼게, 안 봐도 뻔해.”
그 무렵 그에게는 검은색을 검은색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자명했다. 가게는 지난 20여년의 고군분투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그가 다루는 굴은 최상품이었고 어떤 의심스러운 점도 없었다. 게다가 그날 새벽에는 경매장에서 상인들이 맛보기로 까주는 굴을 직접 여러개 시식해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의심의 대상으로 남는 건 손님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사람이었다. 정중하게 손님의 식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요리를 다시 내오고 새로 개발한 메뉴도 서비스로 드리겠다고 말했다. 주방으로 돌아온 그는 신중하게 굴을 골라 차가운 물에 담그고, 검게 번들거리는 무쇠 팬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그의 경험으로 볼 때 손님에게 모욕을 주는 건 언제나 바보짓이었다. 다만 그는 오픈 주방 너머로, 어딘지 둔해 보이는 젊은 부부와 아까부터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그들의 어린 아들을, 미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이런 비싼 식당은 일년에 한두번 찾아오는 게 고작일 그들의 행색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남자의 늘어진 갈색 코르덴바지 주머니 한쪽이 불룩했다. 바로 거기에 모래 한움큼이 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사죄의 표시로 새 메뉴를 서빙하겠다고 했을 때 여자와 아이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남자만은 여전히 뻣뻣한 태도로 불만을 쏟아냈는데 여러모로 가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내가 사과의 표시로 그들의 굴튀김 접시 위에 더 푸짐하게 야채를 올렸다. 그는 아내가 등 돌린 사이 그것들을 빼버렸다.
그날 같은 일이 네번 더 벌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는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늘 말했던 성모님의 가호와 같은 깊은 잠을.
그날은 유난히 가게가 붐볐고 부부의 요리를 칭찬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하지만 운 좋았던 시간 뒤에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불행처럼 그들의 오후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가 가장 잘 보이고 싶었던 단골손님들, 단란해 보이는 가족 테이블에서 다시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 또래로 보이는 반짝이는 은발의 남자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를 불렀다. 그가 주방에서 나와 테이블로 다가가자 남자는 조용히 손끝으로 접시를 가리켰다. 남자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모래가 나왔군요. 해감을 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남자의 딸이 웃으며 말했다.
“굴은 조개가 아니잖아요, 아버지. 굴에는 원래 모래가 없어요.”
그에게 그 말은 좀 이상하게 들렸다. 굴이 조개가 아니라면, 굴은 대체 무엇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날 그는 다른 테이블에서 세번의 클레임을 더 받아 새로 요리를 해서 내갔고, 단골손님 가족에게는 음식값을 받지 않는 것으로 사과를 표시했다.
결국 부부는 저녁 장사를 포기했다. 가게 문에 닫힘 명패를 내건 뒤 두 사람은 새벽에 들여온 굴을 서둘러 점검하기 시작했다. 대형 냉장고에서 굴이 담긴 스텐 통 네개를 꺼냈다. 첫번째 통에서 굴을 한움큼 집어 뭉크러뜨리자 치가 떨릴 정도로 상큼한 향이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굴을 으깨고 또 으깼고, 아내는 마치 자신이 으깨지기라도 한 듯이 슬픈 얼굴로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첫번째 통의 굴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것 봐, 굴에는 문제가 없다니까.”
그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소리는 텅 빈 가게 안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두번째 통으로 향하는 그의 손은 벌써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굴들을 휘저으면서도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지그시 바닥을 누르며 천천히 뭉갰다. 부드럽고 연약한 살들이 조각나서 형체가 없어질 때까지. 잠시 후 손바닥이 통의 차가운 바닥에 닿았을 때 그는 거기에 뭔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전엔 느껴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았고, 아내도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본 채로 서 있었다. 세번째, 네번째 통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 순간, 그는 아내의 눈에 담긴 어떤 안도를,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확신을 보았다. 너무 순식간에 떠올랐다 사라졌으므로 그는 자신이 잘못 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이에 대해 질문하고 또 질문하게 된다. 왜 아내의 얼굴은 그토록 평온해 보였을까. 왜 일이 이렇게 돼버려서 슬프거나 안타깝다고 하지 않았을까. 아니,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정적을 깨운 건 전화벨 소리였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굴 양식장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안 그래도 여러번 전화를 걸었지만 양식장은 계속 불통이었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불안감으로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에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헛기침을 해서 목소리를 내보려고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다. 잠시 후 전화기 너머로 양식장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 끝났습니다. 이쪽 일은 이제 완전히 끝이에요.”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지난 며칠간 전국 곳곳으로 배달한 자기 양식장의 굴에서 모조리 모래가 나왔다고 했다. 다른 양식장들도 마찬가지라고,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변명하는 것 같은 그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고, 그는 이상하게도 새벽 경매장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굴을 까던 늙은 여자들이 떠올랐다. 그는 그들을 볼 때마다 자신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생각하곤 했다. 앉은 자리를 편히 하려고 무거운 척추를 간신히 추슬러 몸을 비틀던 여자들. 그들의 삶도 이제 끝나버린 것이다.
작은 주방 의자에 앉아 있던 아내가 식재료 통들로 다가갔다. 아내는 스텐 통 네개를 차례차례 들어 올리더니 쓰레기통에 붓기 시작했다. 굴은 주방 등 아래에서 눈부신 흰빛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통이 텅 비자 아내는 쩔렁 소리를 내며 그걸 개수대로 던졌다. 그다음에는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5킬로그램 석화를 담아놓은 대형 통 두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내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입을 꽉 다물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곧이어 단단한 굴 껍데기가 양철 쓰레기통을 한꺼번에 긁어내리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
오래전 그는 중국집 주방에서 진짜 삶을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기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는 살아가면서 늘 아버지의 말을 기억했다. ‘가난한 사람 중에 한번 망하는 사람은 있어도 두번 망하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아버지는 그 이유가 뭔지 아냐면서 싱긋 웃었다.
“가난한 사람은 두번 망할 돈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아버지도 자신의 말처럼 살지는 못했다. 그는 몇번이고 망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떠났다. 나중에 아버지마저 도망쳤을 때 그는 고작 여덟살이었지만 그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런 태도야말로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이라면 재산이었다.
이후 그는 이 바닷가에서 굴 양식자로 일했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열다섯살 무렵이 되었을 때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소년이 되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한 뒤에도 그는 자주 빈털터리가 되었다. 자신이 큰돈을 벌어들일 만큼 재주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게 어떤 진실을 깨달을 때면 더는 그것을 헤쳐나갈 힘이 낳지 않아 늘 쓰러지고 넘어졌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이 아내였다. 아내는 그를 용서했다. 아버지와 똑같이 망하고 또 망했던 그를.
중국집 주방은 좁고 더웠지만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에게는 다정하고 이해심 깊은 아내가 있었다. 그는 정말로 행운아였다.
사람들은 부부를 샴쌍둥이 같다고 말하곤 했다. 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서로에게 단단하게 붙들린 채 행복한 사람들. 그는 어딜 가나 아내를 주머니처럼 달고 다녔다. 넓고 부드럽고 튼튼한 주머니,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물건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는 주머니처럼. 나중에 식당을 연 뒤에는 열이 펄펄 끓는 아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굴 경매장에 데려간 적도 있었다. 그들은 동전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아껴서 기름때 덕지덕지 앉은 환풍기가 돌아가던 그 후덥지근한 중국집 주방을 벗어났고, 사십대를 코앞에 두고 이 식당을 개업했다. 그에게 이 식당은 역경을 이겨낸 삶 그 자체와 다름없었다. 물론 식당을 운영하는 동안만큼은 두 사람도 각각의 몫을 해내기에 바빠 예전처럼 붙어 지내지는 못했다. 너무 녹초가 된 날이면 두 사람은 함께 자던 침대를 두고 한 사람은 소파에서, 한 사람은 바닥에서 자기도 했다.
그리고, 식당이 문을 닫자 두 사람은 다시 샴쌍둥이가 된 것만 같았다. 이 도시가 천천히 망해가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다. 그들의 도시가 저녁 뉴스에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번에는 먼 나라 사람들이 아닌 진짜 이웃들이 화면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정부와 환경단체에서는 집단적인 굴 폐사에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대고 있었지만 굴이 사라지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그들의 도시에는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양식장들이 있었다. 바닷속에서 통째로 썩어가는 굴이 풍기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냄새가 해안선 근처 부부의 집까지 밀려들었다. 그들은 한동안 창문을 열지 못했다.
그가 굴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게 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일을 그만두자 너무 많은 시간이 사방에서 그를 짓눌러왔다. 낮의 시간은 엿가락 늘어지듯 한없이 길어졌고 밤의 시간은 부조리하고 뒤틀린 것 같았다. 그런 날이면 그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힘겹게 돌아가는 데스크톱 컴퓨터를 열어 굴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나 글귀들을 찾았다. 마음에 드는 것들은 하나하나 유선노트에 적었다.
굴은 여름이 되면 어미 한마리가 수천만개의 알을 낳는다. 알에서 깬 유생은 바닷속을 떠다니다 몇차례 변태를 거쳐 2~3주일이 지나면 서식할 자리를 잡는다. 굴은 바다의 매미다. 노련한 양식업자들은 굴들이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0.3밀리미터의 유생들은 바다의 반딧불, 억센 난민들이다. 굴은 자기 자신을 뚫고 더 크게 자라난다……
굴은 정말이지 너무 많은 의미였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그는 잠시 노트를 덮고 흐느꼈다. 이 짓을 하며 자신이 식당을 잃은 고통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있다고 느꼈지만 그 감정이 진실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긴 이름을 가진 바이러스들이 몇번이나 양식장을 휩쓸어도 다시금 건재하게 되살아나는 굴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는 생각했다. 그랬던 굴들이 완전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쯤 사라질까.
어떤 날은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할아버지는 평생 자기 양식장을 가지지 못했지만 훌륭한 양식기술자였다. 그는 ‘굴이 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었고 완강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할아버지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하나 있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병이었다. 할아버지는 잠 들기 전이면 언제나 묵주를 들고 기도했지만, 그의 잠은 늘 얕고 불안했다. 뒤척이다가 한밤중에 깨어나서는 손자가 듣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오늘도 성모님의 가호가 떠났구나.”
이제는 그도 깊은 잠과는 멀어졌다. 새벽이 되면 바깥의 무수한 소리들이 그의 귓바퀴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그 소리들은 끊임없이 속삭이고 울고 웃었다. 그는 그것이 죽은 굴들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했고 가끔은 환각처럼 신선한 굴 향기를 맡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슬리퍼를 꿰어 신고 여전히 희미하게 썩은 내가 감도는 바다로 나갔다. 굴은 사라졌지만 바다에는 여전히 수많은 것들이 숨 쉬며 살아 있었다.
한번은 그가 축축한 새벽의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작은 바닷게 무리가 밀물처럼 그를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게들은 그의 발치 끝까지 다가왔다가 갑작스러운 장애물에 놀란 듯 잠시 멈추어 섰다. 그는 손을 뻗어 그 작은 갑각류들의 딱딱한 껍질을 더듬었고, 알 수 없는 슬픔과 사랑을 느꼈다. 그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어디에나 삶과 죽음이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있었다.
*
그가 이곳을 떠나자고 아내에게 말한 것은 얼마 뒤였다. 식당을 닫은 지 반년이 지나 계절은 여름을 향하고 있었다. 식당을 하는 동안 부부는 늘 여름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더운 날씨 때문에 주로 냉동 굴을 사용해 끓이거나 튀기는 요리들을 내가야 했으므로 매상은 절반 가까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이제 그들의 삶에 더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빌린 뉴질랜드 여행책을 가방에서 꺼냈다.
“거기 가면 굴 말고도 많은 것들이 있어. 당신이 깜빡깜빡하는 것도 다 스트레스 때문이니까 거기 가서 한동안 쉬자.”
그는 한가로운 양 떼들의 사진이 박힌 페이지를 펼쳐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드디어 아내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가 손끝으로 가리킨 페이지에는 먹음직스러운 굴 요리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아내가 여전히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애도라는 걸 몰라.”
그녀는 책을 덮어 그에게 다시 건넸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그 무렵 시작한 물건 정리로 돌아갔다. 완강하게 등을 보인 채 오래된 이불과 옷들을 무더기로 꺼내서 버렸다. 옻칠한 박달나무 반닫이와 상자들에 담긴 잡동사니들도 한꺼번에 쓰레기봉투에 쏟아 넣었다.
그는 아내가 너무 많이 버린다고 생각했다. 버려진 물건들 중에 쓸 만한 건 다시 주워 가져다놓기도 했지만, 아내가 뭔가에 몰두한다는 게 나쁘지 않아 말리지는 않았다. 다만 아내가 중요한 물건들을 버릴 때면 아내에게 묻고 확인했다.
“당신, 정말 기억 안 나?”
그가 손때와 추억이 고스란히 묻은 물건들을 가리키며 말하면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안 나.”
그러다가 며칠 전 아내가 떡갈나무 탁상시계를 버렸을 때는 그도 아내의 증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아내가 몹시 아끼던 물건이었다. 꼬박꼬박 약을 먹게 하고 더 많은 진료를 예약했는데도 그랬다. 병원에서 찍었던 아내의 뇌 사진이 떠올랐다. 그것은 너무 익어 입을 쩍 벌린 열매 같았다. 간호사들이 길쭉한 원통형 기계에 아내를 통째로 넣고 빼기를 반복하는 동안 아내는 죽은 날다람쥐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머리가 텁수룩한 아내의 주치의는 아내의 사진을 펼쳐놓고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점을 손톱 끝으로 콕 짚었다.
“고작해야 모래알만 해요. 이게 원인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의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어디서 이런 게 들어왔을까요.”
병원을 나서면서 그는 ‘들어왔다’라는 말을 되새겨보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들어온 것, 본래는 없던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가 볼 때 아내는 일을 하지 않아서 문제가 더 커진 것 같았다. 꼭 굴이 아니어도 되니 다른 가게를 열어보는 건 어떨까. 이를테면 게 요리나 자연산 회는?
하지만 그 말을 꺼낼 용기는 없었다. 젊고 어리석던 시절, 그는 습관처럼 말했다. 이거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어, 한번만 더 날 믿어봐.
언젠가 아내는 울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런 게 왜 다 그렇게 중요해?”
그는 아내에게 화를 냈다.
“어떤 사람들은 사과나 손톱깎이에 일생을 걸어. 당신 눈에는 우스운 게 누군가한테는 중요할 수도 있어.”
그는 이제 자기 말을 잘 믿지 않게 되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아내가 벽장문을 열고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헤집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내는 벽장 안 어둠 속으로 손을 넣고 휘저어 언제 이 집으로 스며든 걸까 싶은, 대체로 용도불명인 물건들을 바닥에 꺼내놓았다. 그것들이 격자무늬 장판 위에 작은 산으로 쌓일 무렵 아내가 벽장 밑바닥에서 뭔가를 꺼내 먼지를 털었다. 모서리가 닳은 팥죽색 가죽 장정 앨범이었다. 아내는 바닥에 앉아 그것을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내가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사진 한장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구야? 당신을 닮았어.”
그도 멍하니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아내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누군지 모르겠어?”
“누군데?”
사진 속 노인은 그의 할아버지였다. 그 사진은 할아버지가 죽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찍은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살면서 사진 한장 찍어보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어느날 동네 문방구에서 일회용 코닥 카메라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진 속 노인은 누렇게 찌든 보료 위에 누워 안간힘을 다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이. 아내도 오랫동안 사진 속 노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내려는 듯이.
*
“우리 할아버지는 이상한 분이었어. 외롭고 친구가 없는 분이었는데, 일하지 않는 주말에도 바다로 나갔어. 굴 양식장을 보려고.”
오래전 부부의 결혼식에는 웨딩드레스도 턱시도도 하객도 없었다. 두 사람은 간단하게 혼인신고만 마친 다음 도시 이쪽 끝에서 도시 저쪽 끝으로 신혼여행을 갔고, 바다가 보이는 비교적 깨끗한 해안가 모텔을 찾아서 거기에 묵었다. 아내는 간소한 짐을 풀며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그녀는 결혼식 전에 딱 한번 그의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거동조차 불편해진 할아버지는 자리에 누운 채 그녀를 맞이했지만 그녀는 새처럼 가볍게 할아버지 곁에 치마를 펼치고 앉았다. 마치 그곳이 익숙한 둥지라도 되는 것처럼. 잘 모르는 사람을 큰 이유 없이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걸, 그런 일이 두 사람 사이에 동시에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는 그날 알았다.
두시간 남짓 그녀와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긴 이야기를 나눴다. 살면서 그는 할아버지와 하루에 다섯마디 이상을 나눠본 적이 없었다. 혼자 막걸리를 마시며 일부러 흘려들었던 그날의 이야기도 그는 역시나 잊었다. 그가 기억하는 건 갑자기 후둑 쏟아지기 시작한 한낮의 장대비와 마당에서 피어오르던 흙먼지 냄새, 안주로 먹었던 김치의 묵은 맛뿐이었다.
아니, 그 말고도 조금은 더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녀의 귀에 힘겹게 뭔가를 속삭였을 때 아내의 눈에 분명하게 고이던 눈물 같은 것. 할아버지는 나무뿌리 같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얼마 뒤 할아버지는 죽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안심하고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 사실이 못내 슬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누구에게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마치고 이제 자기 팔에 안겨 있는 이 여자라면, 앞으로 무거운 등짐을 나눠지게 될 이 젊고 건강한 여자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한테 그 병이 찾아온 건 내가 열두살 때였어. 노인네는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일어나 자리에서 뛰쳐나가곤 했어. 허둥지둥 성당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린 채 떨면서 기도를 했어.”
그 말에 그녀는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더니 다시 눈을 떠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랬어?”
“응, 하루는 자다가 속옷 바람으로 할아버지가 뛰쳐나갔어. 추운 겨울이었고 세찬 바닷바람이 불던 날이었어. 난 할아버지한테 큰일이 생길까봐 무서웠지. 담요를 들고 할아버지를 쫓아 전속력으로 달렸는데도 할아버지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고. 간신히 성당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할아버지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뭐라고 중얼대며 울고 있었어. 그건 안 됩니다. 그건 안 돼요…… 하고.”
그렇게 차가운 살갗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의 팔을 잡자 마치 겁에 질린 파충류를 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소스라치고 두려움에 떨면서 그의 팔을 놓아버렸다.
“그날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
“곧 세상이 망한다, 너는 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또 뭐라고 했는데……”
그 말에 그녀는 숨을 죽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지막 말이 기억나지 않아.”
그녀는 약간 김이 빠진 얼굴이었지만 그의 가슴을 다독이며 속삭였다.
“기억하지 않아도 돼, 다 지난 일이니까.”
“왠지 알아야 할 것 같아.”
“알게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그녀가 다시 하품을 했다. 그들은 꽤 먼 길을 여행했다. 피곤할 만도 한 날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에 빠져들었다. 아주 깊고 달콤한 잠이었다.
*
다시 겨울이 시작되었고, 이제 부부는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만 생활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은 추위에 헐벗었고 잿빛 공기가 묵직하게 내려앉은 거리에는 활기가 없었다. 크리스마스였지만 길가 가게 어디에서도 캐럴 한소절 흘러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자신을 덮친 무기력이 변해버린 이 도시 자체에서 온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도시가 아닌 그의 내부로부터 뭔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뉴스를 틀었을 때 두 사람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아내는 눈길을 브라운관에 신중하게 고정한 채 사과 한 알을 조금씩 갉아 먹다가 돌연 동작을 멈추었다. 아내는 고개를 기울이며 생경한 듯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그것은 바다에서 몰려오기 시작한 모래 폭풍이었다. 이웃 나라의 바다였다. 검은 파도가 무섭게 출렁대며 구토하듯 모래를 쏟아내고, 쓰레기들과 검은 물, 모래 더미가 한꺼번에 마을 하나를 집어삼켰다. 아내의 손에서 사과가 툭 하고 떨어졌고, 그것은 구르고 굴러 그의 발치에 닿고서야 멈췄다.
그는 그제야 왜 누구도 굴이 사라져간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는가를 깨달았다. 무덤 같은 바다가 검은 물결을 삼켰다가 한꺼번에 뱉어내는 모습에서, 거대한 모래 더미가 해안가를 삼키며 육지로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에서, 그는 그제야 굴에 굴이라고 이름 붙이고, 모래를 모래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자신들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뭔가를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아내가 앨범에서 찾아낸 할아버지 사진이었다. 잠시 후 그는 이 사진 속에 내내 다른 것이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사진을 찍기 며칠 전 그의 할아버지는 갑작스레 일어나 쓸 걸 가져오라고 소리쳤고, 그는 연필꽂이를 통째로 가져갔다. 할아버지는 밤새 무서운 집중력으로 펜들을 모조리 망가뜨려가며 벽지에 촘촘하게 글씨를 적어 넣었다.
사진 속에서 할아버지는 모든 걸 소진했지만 안도감이 서린 얼굴로 누워 있었다. 아내가 그에게 돋보기를 내밀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돋보기를 받아 들었다. 조심스레 사진 속 벽지를 비춰보았다. 의미 없는 무덤처럼 보이는 빽빽한 글씨들 사이로, 또렷한 문장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굴이사...라지..면 모래....의세상..이... 온다..
*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부부는 얼마 안 되는 전세금마저 잃고 빚을 진 채 도시의 가장 구석진 지하 방에서 죽은 듯이 지냈다. 날마다 독촉 전화들이 걸려왔고 빚쟁이들이 부서뜨릴 듯이 문을 두드렸다. 아내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점차 둥글어지는 아내의 배가 그는 두려웠다.
그는 차근차근 준비하고 싶었다.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다른 건 다 사두었지만 아직 모자란 것이 있었다. 그는 슬리퍼를 끌고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청테이프 두개와 오렌지주스 한병, 소주 한병을 샀다. 집으로 향하던 길에 깜빡 잊은 게 또 하나 생각나서 다시 먼 길을 돌아 가게로 갔다. 그가 집어든 것은 아내가 좋아하는 박하사탕 한봉지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자고 있었다. 그가 깨우자 언제 잠들었냐는 듯이 자리를 걷고 일어났다. 피로에 젖은 아내의 얼굴은 어두운 전등 아래 노랗게 떠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오렌지주스를 내밀었다.
“마셔봐, 그리고 이것도.”
그는 알약 두개도 내밀었다. 아내가 뭐냐고 물었고, 그는 영양제라고 답했다. 아내는 그것을 받아 주스와 함께 삼켰다. 그는 박하사탕 하나를 까서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
몹시 추운 날이어서 꽝꽝 언 창틀에 테이프가 잘 붙지 않았다. 그는 추위에 곱기 시작한 손을 불며 테이프를 찢고 붙였다. 단단히, 절대로 떨어지지 않도록. 다 붙이고 나서는 뒤로 물러나 소주를 병째 마시며 빈 곳이 없는지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문간방에 붙어 있는 컴컴한 부엌으로 가서 두 사람이 함께 비빔밥을 비벼 먹길 좋아했던 커다란 양은그릇을 찾았다. 거기에는 그날 저녁에 먹을 쌀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걸 부엌 바닥 수챗구멍에 쏟아 버리면서 잠시 울었다. 그릇을 방에 가져온 다음 거기에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번개탄을 놓았다. 라이터를 켜 봉지에 불을 붙이자 번개탄은 순식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린 그때 죽었어.”
아내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다 기억하는구나.”
한때는 모든 걸 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고 그는 말하려 했다.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주방으로 나갔고, 냉동고에서 얼린 굴을 꺼낸 뒤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는 헐거운 원피스를 입고 또닥또닥 도마질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근육을 잃은 아내의 가는 종아리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의 다급한 앰뷸런스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는 저 두 종아리 사이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도록 놓아둬버린 생, 그들 인생의 한조각도 떠올렸다.
저녁 식탁은 금세 차려졌다. 냉동 굴로 끓인 국이 식탁 위에 놓였다. 국물에서는 이끼 맛이 났고, 볼썽사나운 덩어리가 국 위를 낡은 천 조각처럼 떠다녔지만 두 사람은 묵묵히 먹어치웠다. 아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는 마지막 쓰레기봉투를 현관 앞에 내놓았다.
그런 뒤 두 사람은 잠시 더 텔레비전을 보았다. 웃음소리가 크게 터져나오는 예능 프로 하단 자막에 태풍 경보가 떠 있었다. 두 사람은 창밖으로 시커멓게 넘실대는 바다를 한번 바라보았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으며, 준비해둔 청테이프로 꼼꼼하게 틈새를 막았다.
두 사람이 눈을 떴을 때 공기는 희박했다. 몇시간, 또는 며칠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창을 통해 황사가 낀 듯 누런 햇살이 희미하게 쏟아졌다. 엄청난 추위가 닥쳐올 계절이었지만 그들의 집은 짐승의 뜨거운 날숨 같은 열기로 꽉 차 있었다. 사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락사락 소리가 들려왔다. 수백마리의 방울뱀이 한꺼번에 달려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여보.”
아내가 속삭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내가 그를 붙잡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미안해.”
갑자기 주변이 깜깜해졌다. 어떤 우악스러운 손길이 빛의 휘장을 거둔 것처럼 침실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장에서 바닥까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내가 속삭였다.
“당신은 살게 될 거야.”
아내가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당신은 살게 될 거야.”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고 굴처럼 연약해졌다. 그는 참을 수 없어졌다. 그는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살고 싶었다고, 나도 무서웠다고. 하지만 그는 아내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자명한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곧 모래의 세상이 올 것이다, 늦다면 다음 달, 빠르다면 오늘이나 내일, 굴이 사라져간 속도로 우리도 사라질 것이다.
그와 아내는 온 힘을 다해 서로를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