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돌봄의 상상력과 평등의 꼬뮌

강지혜 이근화 김선우 시를 중심으로

 

 

장은영 長恩暎

1975년 서울 출생.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 『슬픔의 연대와 비평의 몫』 등이 있음.

pome01@hanmail.net

 

 

돌봄위기와 문학

 

통계와 수치로 고조되었던 코로나 시대의 수사학은 일순 달아올랐다가 급격히 힘이 빠진 듯하다. 팬데믹의 종식이 모든 위기를 해소하리라 단정 짓거나 팬데믹에 따른 위험을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상적 재난으로 떠넘기는 무책임을 경계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무엇보다 한 의료인류학자의 말처럼 “코로나19라고 명명된 존재의 고유한 특성에 의해 현재의 위기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앎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새로운 존재의 도래를 (…) 어떻게 언어화하는지, 또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서 이것이 무엇인지가 달라지며, 그에 따른 대응 역시 달라”1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시대의 고통을, 다시 말해 누가 어떤 고통에 처했는가에 주목하는 일군의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지금 드러난 삶의 위기를 기존의 시스템을 전환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확산되고 있는 돌봄, 기후정의, 생태, 탈성장론 같은 키워드의 부상 역시 팬데믹에 대한 성찰이 자본주의체제의 위기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대안 모색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문학도 돌봄위기나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문학적 상상력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사회 담론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역할이 예술 장르로서의 문학에 요청되는 바는 아니기에 문학은 문학 나름의 고민을 넓히며 돌파구를 찾아나가는 중이다. 그런데 돌봄을 다루는 문학은 돌봄위기에 대한 사회정치학적 대응과 대안이 문학에 그대로 기입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한편, 문학이 “사회적인 유용성이나 실천적 가치를 자신의 내부에서 배제함으로써 자기를 다른 기술과 구별하고, 그 자체로 존립하는 영역으로 자율화한”2 근대적 예술의 소산으로 남는 것 역시 지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돌봄의 가치와 문학의 연결 지점을 탐색한 한 비평가는 현실과 예술의 접점을 조심스럽게 짚으면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시가 지향할 마음가짐이란 미래의 존재와 연결된 삶의 자세여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3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삶의 연결망을 상상하고 돌봄의 가치를 확장하는 것이라는 비평적 발언 이면에는 돌봄이라는 화두가 정형화된 주제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우려도 있지만, 돌봄의 상상력이 필요한 근본적 이유는 돌봄이 지속될 수 있는 대안적 관계성을 발견하고 다양한 형태의 연결망을 사유해보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돌봄위기에 대한 대안을 찾는 단체 ‘더 케어 컬렉티브’는 돌봄이 혈연적 가족을 넘어서서 우리와 타자를 구분 짓는 배타적인 경계를 해체할 때, 서로 돌보는 관계의 연결망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마저도 넘어서려는 운동성을 지니게 된다는 가능성을 시사했다.4 문학의 영역에서 돌봄을 화두로 삼을 때 필요한 전제도 돌봄의 확장성과 운동성에 관한 상상력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강지혜 이근화 김선우의 시를 중심으로 돌봄위기를 포착하고 서로 돌보는 관계의 연결망을 넓히려는 상상력을 살펴보려고 한다. 세 시인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층위의 발화와 상상력을 관통하는 것은, 생명의 취약성을 직접 목격하며 말 그대로 “운 좋게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을 요행으로 여겨야 하는 팬데믹 시대 삶과 생명의 취약성이다. “아주 조금씩 움직인다”(강지혜 「민달팽이」,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지?』, 민음사 2022)는 믿음을 잃지 않는 동시에, 자멸하지 않는 생명의 품위를 소중히 지키면서 돌봄위기를 견디는 시적 상상력은 삶을 지지하는 사유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서로의 삶을 지지하는 존재라는 믿음이 필요하다면 바로 그곳이 돌봄의 상상력이 요청되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마더링을 전유하기

 

강지혜는 두번째 시집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지?』에서 출산·육아·가사와 같은 재생산노동에 주목한다. 가정에서 재생산노동을 담당하는 여성 주체의 경험을 드러내는 시적 발화는 근대 핵가족에 기반한 가족제도가 직면한 재생산노동의 모순과 위기를 긴장감 있게 그려낸다. 특히 불안과 긴장이 고조되는 지점은 육아의 경험을 다룬 마더링(mothering)의 영역이다. 근대 이후 가족이데올로기는 마더링을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여성의 의무로 간주하며 모성을 제도화해왔다. 제도로서의 모성을 비판하는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는 가정과 공적 영역은 분리되어 있으며 여성은 어머니 역할에 전념해야 한다는 식의 19세기, 20세기의 이상이 가정을 고립시키고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배제했다고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여성이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에는 여성으로서의 지위 자체를 위협하며 여성을 통제해왔다.5 이와 같은 제2세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은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유효하다. 경제활동 등의 이유로 출산한 여성이 직접 육아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마더링의 총책임은 어머니에게 맡겨지고 가정은 외부와 단절된 돌봄의 유일한 장소로 여겨진다. 마더링에 대한 강지혜의 시적 발화가 강렬한 파열음을 내는 이유는 가부장적 질서 아래 제도화된 모성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데서 비롯하지만, 여기서 한걸음 더 내딛는 강지혜의 시는 육아의 경험을 드러내며 마더링의 관습적 의미를 해체하고 돌봄의 장소인 가정을 균열시키는 데 집중한다. 집이 “매 시 매 분 매 초마다 좌절”(「신혼」)을 맛보는 장소이자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끓고 있”(「행주를 삶는다」)는 곳이며 “극악무도”하고 “자비가 없는” “가장 위험한 곳”(「가정」)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집이 돌봄을 위해 고립된 가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육아 일지」 연작에서 나타나듯이 출산 후 화자는 “사랑의 시작이며 저주의 처음인/육아”(「육아 일지—소금밭」)를 수행하는 육체의 감각에 집중한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환희에 가려진 출산의 고통을 흔쾌히 삼키지 못하는 화자가 포착하는 것은 자신의 육체로 감각되고 그후엔 마음으로 이어지는 마더링의 고통이다.

 

생살을 찢고 나왔으니

나와 너

우리의 고향은 차가운 칼이다

 

(…)

 

외로운 수술대 위에서

하나였던 인간이 둘이 되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너는 형벌처럼 나타났다

 

떨림을 멈출 수 없었다

 

너를 살리는 것은 나의 벌

 

나를 살리는 것은 너의 죄

—「제왕절개」 부분

 

오열하는 오른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왼 가슴으로 너에게 젖을 물리는

달빛조차 없는 밤

 

너의 목덜미에

잔인하고 거룩한 송곳니를 내리꽂지

 

나는 뱀파이어야

네 피를 마시며

이 고통을 견뎌 낼 거야

 

나는 갈증으로 죽고

네 피로 되살아난다

너는 허기로 나를 먹고

나에게 네 피를 준다

 

(…)

 

너를 죽이고 너를 살리며

너를 먹이고 너를 죽이며

나의 어머니와 나에게서 나와 내 딸에게로 전해지는

저주받은 영생

—「뱀파이어」 부분

 

출산이 몸에 일으키는 변화들이 모성의 증거로 연결될 때 출산은 여성을 어머니로 규정하는 계기가 되고, 출산과 함께 출현하는 모성은 생명의 경이로 신비화된다. 하지만 「제왕절개」에서 화자는 출산의 경험을 “칼” “형벌” “죄”와 같은 시어로 표현함으로써 출산에 대한 신비화된 관념을 제거해버린다. 화자에게 출산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는 육체적·심리적 고통이 넘치고 자신과 분리된 취약한 생명을 돌보아야 하는 불안과 책임에 직면하는 사건이다. 생각해보면 출산은 죽음을 환기할 만큼 어머니와 자녀 모두의 취약성이 극대화되는 시간이고,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생명의 취약성에서 오는 불안까지 동반하는 복합적 노동일 수밖에 없다. 「뱀파이어」에서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화자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경험에서 죽음에 대한 불안을 포착하고 그 순간의 육체적 감각을 가감 없이 표출한다. 아이의 “목덜미”에 내리꽂는 “잔인하고 거룩한 송곳니”를 통해 화자가 드러내는 폭력성은 아기가 젖을 물 때 엄마가 느끼는 고통과 같이 마더링에 동반되는 부정적인 경험들을 상징적으로 표출한다. 여기서 좀더 주목할 문제는 살에 파고드는 “송곳니”가 전달하는 육체적 감각인데, 살이 찢어지는 감각은 육체적 파동으로 이어지고 감정과 사유를 촉발시키며 온화한 표정으로 젖을 먹이는 전형적 어머니의 형상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른다. “송곳니”는 제도로서의 모성이 은폐했던 돌봄의 부정적 측면을 폭로하는 장치인 것이다.

취약한 생명을 돌보는 일은 대상에게 삶의 활기를 불어넣는 가치를 지니지만 동시에 배설물을 치우고 씻기는 등 비천한 육체를 마주해야 하는 양면성을 지닌다.6 그러나 마더링에서 후자는 누락되어왔고, 제도로서의 모성은 아기의 배설물마저도 사랑스럽다고 여기도록 어머니의 사랑을 미화해왔다. 어머니가 돌봄노동의 육체적 고통과 함께 심리적 부담을 그리고 돌봄의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느끼더라도 돌봄의 양면성을 드러내고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도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모성의 윤리와 상충하기 때문이다. 결국 마더링에 동반되는 부정적 감정은 어머니 개인의 몫이나 가정의 책임으로 남겨지고 사회는 이를 방관하며 마더링을 사적인 것으로 영역화해왔다. 재클린 로즈(Jacqueline Rose)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어머니는 보호와 위로와 지지를 필요로” 하지만 오히려 사회는 엄마가 된 여성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한다.7 ‘노키즈 존’이나 ‘키즈까페’ 같은 장소들이 말해주듯이 어머니와 아이들을 공적 영역에서 격리시키는 사회에서 마더링은 게토화된 노동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뱀파이어야”라는 자기선언적 진술은 모성을 공적 영역과 분리시키고 게토화하며 심지어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사회의 무지와 잔인함에 응답하는 시적 전략으로 읽히기도 한다.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뱀파이어’는 “너를 죽이고 너를 살리며/너를 먹이고 너를 죽이”는 모순적 행위를 보여주는데, 이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끌어안아야 하는 돌봄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데서 나아가 돌봄 주체의 능동성을 발산한다. 사랑과 희생의 현신(現身)인 어머니 대신 힘껏 젖을 빠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강렬하게 욕망하는 주체인 ‘뱀파이어’는, 마더링을 돌봄 주체와 대상의 욕망이 부딪치고 길항하는 과정으로 전유하는 존재이다.

제도화된 모성에 대한 비판의 맥락에서 강지혜의 시가 들려주는 육체적 감각에 대한 시적 형상과 파열음적 발화는 마더링을 능동적으로 전유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강지혜는 이 시집을 통해 마더링을 대체하는 ‘엄마 됨’(motherhood)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엄마 됨’은 능동적인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가능한 것이고, 사랑스러운 생명이 “괴물”(「육아 일지—불타는 일가」)처럼 ‘나’를 위협하고 ‘나’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타자적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발생하는 상충적 감정이 돌봄의 필연적인 양면성임을 받아들이는 돌봄 관계의 한 과정이다. ‘엄마 됨’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 시집의 마지막 시 「너를 기다리며」는 ‘엄마 됨’이 가정 아닌 공적 영역으로 돌봄을 넓히기 위한 시도이자 ‘잠재적 관계로서의 모성’8에 대한 가능성임을 엿보게 한다. ‘너’는 부재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고 네가 올 미래를 준비한다. 하지만 이 시는 ‘너’를 만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는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마음”으로 ‘너’를 기다리는 중이고, 손을 잡고 함께 밥을 나누어 먹고 감각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우리’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연기된다. ‘엄마 됨’도 우리가 연결된 존재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반드시 모성적 관계일 필요는 없다. 미래로 연기된 ‘우리’는 혈연적 가족관계를 넘어서서 ‘인간 공동의 것’으로 확대되는 돌봄의 연대라고 기대해볼 수도 있다.

 

 

불평등을 넘어서서

 

어머니의 입장에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와 불안은 이근화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여섯번째 시집 『나의 차가운 발을 덮어줘』(현대문학 2022)에 실린 「딸의 꿈속에서 나는 죽고」는 아이들을 향한 엄마의 발화로 서술된다. 보통의 가정에서 있을 법한 상황이지만 눈여겨볼 점은 이근화의 시에서 종종 사용되는 괄호가 만드는 효과이다. 괄호 안과 밖에서 화자의 목소리는 두 겹으로 발화된다.

 

한밤중에 깨어난 딸아 울지 마라(울고 싶은 건 나인데)

큰 눈에서 주르륵 흐르는 눈물아(맑은 콧물아)

한밤중 세차게 들리는 빗소리

목련 큰 꽃잎 다 떨어지겠다(도망가는 봄이여)

 

엄마 아직 안 죽었다(정말 살아 있나)

진짜인 줄 알고 깜짝 놀란 딸아(놀랄 일들은 따로 있지)

살아 있는 엄마를 깨우는 딸아(건성으로 달래본다)

가능하면 봄 말고 한겨울에 죽었으면(그게 소원이니)

—「딸의 꿈속에서 나는 죽고」 부분

 

표면적인 내용을 따라가면 이 시의 화자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자신의 고통은 “나 몰라라 살아가”는 전형적인 어머니의 표상과 닮아 있다. 화자의 고통을 증명하는 것은 “녹고” “구부러지고” “하염없이 죽어가”는 몸이다. 이 몸은 돌봄이 무엇보다 육체를 고갈시키는 노동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런데 괄호에 주목할 때 우리는 화자의 목소리에 좀더 집중해볼 수 있다. 둘 다 화자의 진심을 담은 말이지만 괄호 밖이 어머니로서의 발화라면 괄호 안은 ‘나’로서의 발화이다. 방백과도 같은 괄호 안의 말은 화자가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걸어오는 듯한 효과를 지닌다. 괄호는 표면적으로 돌봄의 수행에 길들지 않은 ‘나’의 말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책이지만, 괄호의 효과는 육아에 지친 어머니의 발화를 풍자적인 모노드라마로 만들며 숨겨진 화자의 진짜 속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데 있다. 이때 독자가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은, 괄호가 화자로 하여금 돌봄의 주체로서 감당해야 하는 요구들에 매몰되지 않고 일상을 견디게 하는 발화의 공간이자 사유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주말 목장 체험을 떠난 평화로운 가족들 가운데 “조용히 해 미친 양아”라고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리는 아내/엄마의 자리를 나는 안다. 가장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의심과 회의가 고개를 들고, 침묵과 고요의 시간 위에 불안과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삶 말이다. 주인공으로 살 수 없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살지 못하는 나를, 평화롭고 안정되게 꾸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9

 

“조용히 해 미친 양아”를 중얼거리는 여성의 발화를 정신분석학에 기대 히스테리 증상으로 읽어내는 독법은 20세기 중반 이래 계속되어왔다. 이러한 진단을 가능하게 한 가부장제는 한 주체로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대신 여성을 모성으로 규정했고 그것을 거부하는 여성들을 비정상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아내/엄마의 자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주체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진단하는 시선은 재생산노동을 여성에게 부과하기 위해 가내 여성성을 이상형으로 신비화하며 여성을 종속화한 근대적 질서의 산물에 불과하다.10 이 글에서 이근화는 이상화된 가내 여성성에 수긍할 수 없는 자아의 괴로움을 내비치지만 이근화의 고민이 “가장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의심과 회의가 고개”를 들 때 평화로운 풍경에 자신을 맡길 것인가,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찬 마음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에 있지는 않다. “아내/엄마의 자리”에 대한 이근화의 고민은 후자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아내/엄마’로서의 자신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가족 구성원들과 ‘나’ 각자가 자유로워지는 관계를 만드는 일에 있다.

돌봄의 가치와 중요성은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을 누가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마더링을 비롯한 돌봄노동과 가사 등 재생산노동이 ‘아내/엄마’에게 집중될 때 돌봄은 상호의존적 관계성을 상실하고, 돌봄노동을 담당하는 여성을 전적인 책임자이자 수행자로 지목할 뿐 아니라 돌보는 자로서의 역할을 유일하거나 우선적인 정체성으로 삼게 한다. 결과적으로 ‘아내’이거나 ‘엄마’인 ‘나’는 제도화된 모성적 주체에 수렴되거나 스스로 통합할 수 없는 분열된 상태에 빠지고 만다. ‘아내/엄마’로서의 주체가 자기 삶에 대한 선택과 통제권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이근화의 시는 그 위기에 대응하는 사유의 힘을 상상적 이미지로 펼쳐낸다. 이근화는 시를 빌려 독립된 주체로서 ‘나’는 무엇인지 상기시킨다. “말하지 못했어//내 목구멍 속에는 귀신과 아이와 요정이 살거든/어젯밤에는 싸웠는데/오늘은 고요하게 낮잠을 자네//(…)//다 어디로 갔니?”(「입안에 쌀 한 톨을 물고」) ‘나’는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육체가 곧 ‘나’ 자신임을 받아들이면서 “나라는 무한한 형식으로”(「투명한 목구멍」) 타인과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자유로운 존재여야 하지 않는가. 이 평범한 사실이 ‘아내/엄마’에게는 왜 불가능한가?

아버지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스낵」에는 돌봄노동의 고통과 부담을 경험하는 어머니와 달리 “명랑한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내게 과자를 사준 적이 없”는 아버지, “나를 안아준 적이 없”는 아버지는 ‘스낵’처럼 경쾌하고 명랑한 존재다. “주머니”에 넣어둔 것처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아버지의 “사랑”은 스낵 봉지를 빵빵하게 부풀린 “질소”와도 같아서 봉지를 뜯자마자 사라지고 만다. 스낵처럼 가볍고 경쾌한 문체로 부성을 풍자하는 이 시는 아버지들이 누려온 ‘특권적 무책임’11을 지적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을 수행하느라 스스로 돌봄 책임에서 면제되었던 아버지들의 사랑이 부풀려진 스낵 봉지 같다는 비유는 통쾌하지만 슬프기도 하다. 생계를 부양하는 일이 곧 가족에 대한 돌봄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들. 그들의 사랑은 주머니 속 귀중품처럼 아버지 혼자만 간직한, 아버지 자신도 잘 모르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들은 정말 몰랐던 것일까? “명랑한 아버지들”은 “주머니 같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부정 불량한 감정을 지우고” 자신을 위해 과자 봉지를 뜯는다. 아버지들이 간과한 점은 성별분업사회에서 위계적 우위에 있던 자신들의 특권이 결국 자신의 허기조차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무능력함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과 자신의 위대한 사랑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내/엄마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돌봄의 책임을 떠맡은 어머니도, 돌봄의 책임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아버지도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의 주체로서 가족들과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가족이라는 질서 안에서 각자가 자유로운 존재로서 상호적인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의 삶을 지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불평등을 간과하지 않으며 평등한 관계를 사유하는 일이다. 이근화는 「자기소개서」나 「성숙이」 같은 시에서 젠더적 위계와 차별에 대한 비판을 자조적, 풍자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젠더적 불평등이 돌봄노동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환기한다. 시인이 지금 이곳의 삶에서 “언제 깨질지 모르는 컵으로 물을 마”(「화해와 불평등」)시는 것 같은 불안과 위태로움을 감지하는 이유도 정체성과 관련한 차별이 돌봄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근화의 자세는 좀처럼 흐트러지지도 파열음을 내지도 않는다. “돋아날 것 없는 희망에 베이는 날들”이 계속되더라도 “크고 환한 별이 뜬다면 내 머리 위의 일은 아닐 것이지만/어떤 기다림 위에 명랑할 것, 지치지 말 것”이라며 “지키지 못할 약속을 중얼거”(「물방울처럼」,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창비 2021)렸던 화자의 모습처럼 이근화의 시는 우리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여야 한다는 ‘희망’을 ‘계속’ 이야기한다. 돌봄위기를 실감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말하는 희망은 돌봄 주체의 지위와 정체성과 관련한 돌봄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이다. ‘나’와 타인이 서로 돌보는 주체로서 만나기 위해서 우리는 제각기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임을 인정받아야 하고, 선택의 자율성과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평등의 성취는 선택의 자유 그 이상을 요구한다. 트론토(J. C. Tronto)가 주장하는 바처럼 돌봄의 평등은 성(性)과 계급, 계층만이 아니라 연령, 장애 등의 차이를 고려한 동등한 지위가 충족되어야 가능하다. 예컨대 아이와 어른의 의존성이 다르고 노인과 장애인의 참여와 발언을 위해 필요한 배려와 환경이 다르듯12 동등한 지위를 나눠 갖는 평등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하나의 기준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평등은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문제이다. 상호적인 돌봄이 가능한 평등한 관계란 “인생과 인삼과 인성을 한꺼번에 사유”하며 차이를 발견하는 과정처럼 사유와 토론을 거쳐서 조금씩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근화는 이번 시집에서도 “파다 보면 나오겠지 중얼거렸어요”(「파다 보면」)라고 고백한다. 희망을 중얼거리는 시간, 지금은 조급해하지 않고 거듭 사유의 폭을 넓혀가면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평등한 세계”(「화해와 불평등」)에 대한 지평을 펼쳐보아야 하는 시간이다.

 

 

‘유령’과 함께

 

돌봄이라는 따뜻하고 온화한 말 이면에는 자본의 교환체제에서 배제된 재생산노동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있다. 그리고 재생산노동이 여성의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질 수 있었던 통념의 배경에는 성별화된 노동을 이상화한 자본의 기획이 있다. 팬데믹 이후 대두된 삶의 위기란 결국 자본주의화된 삶의 증상이자 자본에 의해 물화된 관계의 위기임을 부인할 수 없다. 김선우의 여섯번째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창비 2021)은 인류가 처한 생명의 위기와 훼손된 삶의 연결망 그리고 탈인간화를 통한 인간성의 전환이라는 포괄적 상상력을 분출하는 동시에 서정과 리얼리티를 넘나들며 자본의 무한증식이 불러온 과도한 욕망과 그것이 야기하는 파국을 경고하고 있다. 팬데믹 시대의 암울한 풍경과 인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14편의 「마스크에 쓴 시」 연작시가 그렇듯이 김선우의 이번 시집은 역사적 맥락에 위치한 텍스트로서 시의 자리를 분명히 표명하고 있다. 리치의 말을 빌리자면 김선우의 시는 “시 텍스트가 세계를 살아가는 시인의 일상과 분리된 채 읽혀야 한다는 지배적인 비평의 생각을 거부하는 행위이자 시를 역사적인 연속체 안에 위치시킨 일종의 선언”13처럼 들린다.

 

어쩌자고 인간은 이토록 악착같이 지구를 착취해 얻은 것들을 풍요라 부르게 되었나?

—「마스크에 쓴 시 2」 부분

 

더 오래 멈춰야 해.

그래야 살아.

너희만 빼고 다 아는 사실이야.

 

(…)

 

너희는 스스로 감금되었어.

속도에,

자본에,

자본의 속도에.

—「마스크에 쓴 시 7」 부분

 

지구 거주민 인류가 다다른 최상급 진보;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마스크에 쓴 시 10」 부분

 

아니, 내가 화를 내는 건 바이러스가 아니에요. 그때의 독감과 COVID-19 사이 백년이 흐르는 동안 누적된 감염의 실타래가 끔찍한 겁니다. 자본, 자본, 자본을 움직이는 그들, 자본, 자본 자본이 움직이는 세상,

—「마스크에 쓴 시 11」 부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입을 가로막은 마스크에 시를 쓰는 행위는 말하기와 쓰기의 차이를 드러내는데, 말하기가 멈출 수 없는 욕망의 언어라면 쓰기는 욕망을 제어하고 성찰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반성적 언어에 가깝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반성적 메시지로서 ‘마스크에 쓴’이 시들이 전달하는 바는 말 그대로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14의 재앙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깨운 것은 인간이 성장시킨 자본이 삶의 모든 영역에 침범하여 인간의 생존 조건을 파괴하고, 마침내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는 핵심 장기까지 스스로 먹어치우는 자멸의 시스템이라는 것이었다. 김선우가 묘사한 “자본이 움직이는 세상”에서 이윤을 향한 욕망에 감염되어버린 “구십구 퍼센트 중에서도 딱 평균인 나 같은 인간”(「마스크에 쓴 시 11」) 또는 “다른 존재들을 멸종시키면서 스스로 멸종위기종이 되어가는”(「마스크에 쓴 시 12」) 인간은 인류의 출현 이래 가장 진보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김선우는 이를 마주하며 인간에 대한 회의를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를 매개로 한 회의는 인간의 본성을 묻는 철학의 전통과는 다른 층위에 있다.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회의는 탈인간중심적 사유로 나아가기도 한다. “국가니 국민이니 인종이니 민족이니 난민이니” 하는 “인간 내부의 경계”를 넘어서야 “공멸”에서 살아남을 수 있듯이(「지구주민평의회가 만들어진다면」) 근대 이래 구분된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로서의 경계마저도 넘어설 때 자본의 재앙으로 황폐해진 인간의 삶과 ‘생물학적 전멸’15에 임박한 생태계의 위기를 조금이라도 지연시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시인의 실험적 사유가 엿보이기도 한다.

김선우가 ‘유령’이라는 존재를 불러들이는 이유 역시 인류의 파멸과 생태계 위기를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다. 이 시집에서 ‘유령’은 인간이 아닌 자연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가능성이자 비인간을 대표하는 (비)존재이다.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경계 한쪽에 ‘자본에 감염된 인간’ 형상이 있고 다른 쪽에는 비인간인 ‘유령’의 형상이 있다. “지금의 몸을 고집하지 않”고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스미는 일에/머뭇거림이 없”(「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구름에게 배운 것」)는 ‘유령’은 고정된 자아가 없으며 무엇이 되고자 하는 목적과 지향도 갖지 않는다. 짐작하듯 유령은 실체를 파악할 수 없지만 감각적으로 포착되는 존재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선우의 ‘유령’은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하게 출몰한다는 것이다.

 

아주 많은 찰나에 사는 따스한 유령들을 지금부터 하나하나 말해보려 합니다 차고 습한 유령만 기억하면 다른 유령들이 외로울 테니까요 몸으로부터 왔으니 몸이 아니랄 수도 딱히 몸이라고 할 수도 없는 (…) (염려 말아요 오늘은 비…… 비 냄새 냠냠냠……) 비 묻은 몸을 터는 강아지들 코끝에서 따스한 유령들이 강아지 따라 통통통 몸을 턴다

—「내 따스한 유령들」 부분

 

‘유령’이 자유롭게 이것이 되었다가 저것이 되는 존재라고 해도 인간을 규정하는 인식의 틀이었던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마저 넘어설 수 있을까? 이 경계 앞에 선 김선우가 ‘몸’을 경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세계와 분리된 인간의 정신과 달리 물질적 환경 속에서 숨 쉬고, 먹고, 움직이는 몸은 세계를 감각하는 접촉면으로서 세계와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몸은 우리가 대상을 판단하거나 인식하기 전에 타인을 감지하고 접촉하는 관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세계와 접촉하는 몸의 감각을 중심에 두면, 바람이 불고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는 몸이야말로 세계가 거쳐가는 통로이자 세계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 “고통도 허기도 늘 새롭게 당도”하는 장소이자 “아직도 새로 도착하는 낯선 것들이 여전히 있”어 “궁금”한 장소인(「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몸은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물질이나 신이 만든 기계가 아니라, 외부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능동적인 물질로서의 자기 자신인 것이다. 김선우가 초기 시에서부터 줄곧 몸에 관심을 기울이며 몸-자연-세계와의 연결성을 중요하게 여겼던 이유 역시 감각의 언어인 시가 사실상 몸의 언어임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김선우의 경우처럼 몸을 사고와 언어에 선행하는 자리에 두면, 지금껏 우리가 믿었던 앎과 인식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사고의 주체와 대상의 위계적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이성적 사고의 우위가 인정되지 않을 때 비로소 각 존재들을 연결하는 원리는 지배와 피지배가 아닌 상호의존성이라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김선우가 시를 통해 말하는 몸으로의 관점 이동과 인간과 세계 간 관계의 전환은 단지 시적 상상의 소산만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존재들을 발견하는 과학계에서 일어나는 관점의 변화이기도 하다.16

다시 「내 따스한 유령들」로 돌아가보자. “몸이 아니랄 수도 딱히 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에 관심을 기울여보면, ‘유령’은 “강아지 따라 통통통 몸을” 털 때는 강아지일 수도 있고 또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면 그것이 되기도 하며 비나 바람처럼 자연현상일 수도 있다. 비인간 존재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유령’은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환유로서 몸의 감각으로 경험되는 세계를 환기한다. 그런데 ‘나’는 ‘유령’이 “미래에서 온 키스를 나눠 가”진 존재이며 시종일관 ‘나’의 주변에서 “숨결”이나 “온기”로 포착되는 연인 같은 존재라고 진술한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를 삶에 대한 능동성을 가진 행위자로 인정할 경우, ‘나’와 세계가 맺는 관계는 지금과 달리 상호적인 관계성의 측면에서 다시 서술될 수 있다. ‘나’와 ‘유령’의 관계를 빌려 김선우가 말하는 것은, 몸을 통해 감각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의 상호적인 연결망이야말로 삶이 펼쳐지는 실제의 장소라는 사실이다.

초기의 시집에서 에코페미니즘적 정동을 보여주었던 김선우의 시가 이번 시집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은 ‘유령’의 등장이 환기하는 비인간 영역의 확장이다. 생태 그물망이나 생명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자연을 수동적 대상으로 보는 인간중심적 시각에 있었다면, ‘유령’은 인간중심성을 극복하는 매개로 등장한다. ‘유령’은 비가시적 존재이지만 적극적인 행위자의 역할을 하며 인간인 ‘나’의 주체성을 나누어 가진다. 주체인 자신을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하는 풍경 속에 나란히 기입해 넣으며 “내가 돌본 줄 알았는데/나를 돌본 게 당신들”(「개와 고양이와 화분과 인간이 있는 풍경」)이라고 말하는 시인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얽혀 있는 상호의존적인 연결망을 감각적으로 이미지화하는 데서 한걸음 더 전진하여 그것이 포스트 자본주의 시대의 정치적 원리이자 혁명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고 있다. “들판의 정치가 시작될 때까지/나는 꽃에게 투표할래요”(「투표 인증 숏을 보내온 벗에게」)라는 시인의 말은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풍기지만, 시인으로서 김선우가 자본의 독재를 거부하는 꼬뮌주의자였음을 기억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이제껏 배제당했던 비인간 행위자들과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나누는, 평등한 공동체로서의 꼬뮌을 희망하는 정치적 상상력이라는 데 귀를 기울여야 한다.

 

 

시와 꼬뮌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현재의 투쟁에서 돌봄은 핵심적인 쟁점이며, 돌봄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결국 생태환경 및 자연자원의 관리 문제와도 만나게”17 된다는 문제 설정은 비단 사회학자들만의 입장일 수 없다. 문학 역시 돌봄위기가 인간과 인간 주변의 환경을 넘어서서 지구생물권 전체로 확장되고 있음을 감지하며, 돌봄의 상상력을 인간의 경계 너머로 확장하고 있다. 돌봄을 공적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평등의 문제를 사유하며, 정치적 권력을 나누는 꼬뮌을 이야기하는 세 시인이 보여준 것처럼 실제로 돌봄의 위기 속에서 쓰인 시가 희망하는 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의 회복이다. 가족과 이웃, 인간을 넘어서 비인간 존재들까지 포괄하는 혼종적 삶의 연결망으로서 이 공동체가 발산하는 아름다움은 정체성을 차별의 근거로 삼는 지금의 현실을 비판하게 하고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찾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돌봄과 연대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상주의적인 출구가 아니라 ‘시작하는 상상력’ ‘이루어지는 움직임’이 되어야 한다는18 비평의 제언을 되새길 때, 인간과 비인간 모두 동등한 정치적 주체가 되는 꼬뮌처럼 이상적인 공동체에 대한 시적 상상력이 돌봄위기에 대한 직접적 대안이라고 믿는 것은 오히려 시의 역할을 후퇴시킬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빠리 꼬뮌이 수많은 죽음 위에서 등장했고, 죽음과 함께 끝났듯이 꼬뮌은 완성태로 실현되는 것이라기보다 “아주 잠시 경험했으나 곧 사라져버”리는 “아름다움”(김선우 「오늘 만난 시집의 가제를 「평의회의 아름다움」이라고 적어두었다」)으로 남는, 공동체 아닌 공동체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시와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시의 역할은 돌봄이 실현되는 다양한 방식의 공동체와 삶의 연결망을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하면서 돌봄의 상상력을 더없이 증폭시켜보는 데 있다. 시민들의 삶을 연결시키고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돌봄의 공동체를 실현해나가는 것은 사회적 영역의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위한 실천은 꼬뮌의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

  1. 서보경 「서둘러 떠나지 않는다면: 코로나19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돌봄의 생명정치」,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0년 가을호 25면.
  2. 오타베 다네히사 『예술의 조건』, 신나경 옮김, 돌베개 2012, 41면.
  3. 송종원 「돌봄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창작과비평』 2022년 여름호 17~38면 참조.
  4.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79~80면 참조.
  5. 에이드리언 리치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김인성 옮김, 평민사 1995 참조.
  6. 같은 책 57~58면 참조.
  7. 재클린 로즈 『숭배와 혐오』, 김영아 옮김, 창비 2020, 38면 참조.
  8. 에이드리언 리치는 가부장적 사회질서에서 규범화된 모성에 대한 인식과 지식 등 여성의 육체를 통제하는 장치가 제도로서의 모성이라면, 이와 달리 잠재적 관계로서의 모성은 어머니가 지닌 “부드러움, 열정, 본능에 대한 신뢰, 있는 줄도 몰랐던 용기를 불러내는 것, 타인에 대한 세심한 배려, 인생의 대가와 변덕스러움에 대한 명료한 깨달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위하여 벌이는 가난·질병·전쟁 등 모든 착취에 대한 투쟁은 인간 공동의 것이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모성이라는 제도가 사라져야 한다는 리치의 주장은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돌봄의 연대를 상상하게 한다. 에이드리언 리치, 앞의 책 352면 참조.
  9. “조용히 해 미친 양아”는 정다운의 시 「평화공작소」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이근화 「이제 돌아가는 건 글렀지만」,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 마음산책 2020, 64면.
  10. 낸시 프레이저 「자본과 돌봄의 모순」, 문현아 옮김,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333~34면 참조.
  11. ‘특권적 무책임’(privileged irresponsibility)은 노동 분업과 기존의 사회적 가치가 생계부양자의 역할을 하는 일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좀더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돌봄 책임에서 자신을 면제하게 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조안 C. 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옮김, 아포리아 2014, 206~207면 참조.
  12. 돌봄의 불평등과 평등에 대해서는 조안 C. 트론토의 앞의 책 210~14면 참조.
  13. 에이드리언 리치 「피, 빵, 그리고 시」,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 347~48면.
  14. 낸시 프레이저·마르띤 모스께라 대담 「‘식인 자본주의’의 부상」, 이정진 옮김,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367~ 69면.
  15. 제이슨 히켈에 따르면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실린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멸종위기를 ‘생물학적 전멸(biological annihilation)’이라고 표현하면서 멸종위기가 ‘인류 문명의 기반을 위협하는 공격’이라고 결론지었”다. 제이슨 히켈 『적을수록 풍요롭다』, 김현우·민정희 옮김, 창비 2021, 32면.
  16. 미생물이나 박테리아에 관한 과학계의 연구는 상호의존의 원리가 전체 지구시스템 과정에서 행성적 수준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들을 밝혀내고 있다. 제이슨 히켈, 앞의 책 358~69면 참조.
  17. 백영경 「커먼즈와 복지: 사회재생산 위기에 대한 통합적 접근을 위한 시론」, 『ECO』 제21권 1호, 한국환경사회학회 2017, 117면.
  18. 백지연 「삶의 전환을 꿈꾸는 돌봄의 상상력」,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3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