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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남희 金南希
다다서재 편집장.
book@dadalibro.com
신용목 愼鏞穆
시인.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나의 끝 거창』 『비에 도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시간에 온다』 등이 있음.
97889788@daum.net
최진석 崔眞碩
문학평론가. 저서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 『감응의 정치학』 『불가능성의 인문학』 『사건의 시학』 『사건과 형식』 등이 있음.
vizario@gmail.com
신용목(사회) 안녕하세요. 저는 시인 신용목입니다. 가을호 문학초점 자리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는 책들이 서로 비슷한 구석 없이 다채로워서 시너지를 느끼며 읽었습니다. 오늘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신 평론가 최진석 선생님, 편집자 김남희 선생님과 같이 이야기 나누면 그로부터 생기는 시너지도 크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간단히 인사말씀 해주시겠어요.
최진석 반갑습니다. 평론 쓰는 최진석입니다. 두분과 만난다는 즐거운 기대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는 독서를 했지만 그만큼 다양한 작품들을 망라해 이야기 나누어야 하는지라 걱정도 되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김남희 저는 다다서재에서 책을 만들고 있는 김남희라고 합니다. 『창작과비평』이나 문학을 이제 막 읽기 시작한 독자분들도 계실 테니 두분께서 깊이있는 말씀 해주시면 저는 편집자의 눈으로 짚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보태고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조정 『그라시재라』(이소노미아)
신용목 그럼 조정 시집 『그라시재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1960년대 전남 영암에 살던 여성들의 실화를 담은 시집입니다. 저는 경상도에서 태어나 2년 전부터 시집의 배경이 되는 도시 근처에 살고 있는데, 걸쭉한 전라도 말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쭉 따라 읽기가 마냥 쉽지는 않았어요. 또 식민지시대, 한국전쟁 등 현대사를 거치면서 참혹한 삶을 살아왔던 여성들의 모습이 생생한 증언처럼 전해져서 숙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단지 고난을 통과하는 삶을 보는 데서 오는 숙연함이 아니라, 이념이 남긴 참혹을 사람으로 이겨내는 ‘말하기’ 혹은 ‘이야기의 순간’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김남희 시집의 마지막 문장 “오메 내가 야그 듣니라 넋 빠졌네”(「엄마, 왜 이렇게 날이 안 밝아요」)가 딱 제 감상이었어요. 지역 언어로 쓴 여성서사라는 점이 특히 좋았습니다. 소수자의 소수자, 변방의 변방이죠. 이 시집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이름이 없어요. 누구 어매, 누구 각시 이렇게 불리고 있죠. 출신지를 뜻하는 ‘어디 댁’이라는 말도 보통 아버지의 고향이잖아요. 이렇게 아버지, 남편, 자식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들이 모여서 옆집 뒷집 흉도 보고 속상한 일 털어놓으며 속풀이도 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그 안에 양민학살, 한국전쟁, 영아살해 등 비극적인 경험들이 녹아 있어요. 이처럼 이름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 또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며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워 쓴 그림일기를 묶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봄날 2019)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뒤에 나오는 ‘편집후기’를 보면 “이런 시집은 시를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대형 출판사에서 펴내야”(200면) 한다는 마음에 시인에게 조언을 했는데, 대형 출판사에서 원고를 알아보지 못해 다시 돌아왔다고 하죠.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원고가 좋은 만큼 더 큰 출판사를 통해 주목받길 바라는 마음에 반려를 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되거든요. 그런 원고가 다시 돌아왔을 때 얼마나 속상했을까, 또 얼마나 기뻤을까 싶었습니다.
신용목 시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다소 협소하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들도 있어 보여요. 보통 ‘시’라고 하면 서정성이 작동하는 것들을 떠올리고, 노동시나 서사시는 그 하위 장르처럼 느끼잖아요. 그래서 이런 시편들에 별도의 장르적 지위를 부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시의 주변이 아니라 스스로 독자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는 어떤 장치 말이지요. 저도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고민을 통해서라도 이런 시를 더 자주 접하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여성서사에 대한 말씀도 해주셨는데 최진석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어요.
최진석 김남희 선생님 말씀에 십분 동의합니다. 여성의 몫이라는 것 자체가 따져지지 않던 시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들의 언어가, 문학이라는 근대적 제도 안에서 미학적·예술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지 않나 싶어요. 흥미로운 점은 앞부분에서는 일제강점기 이래 한국의 비극적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지만, 60년대를 지나 후반부로 갈수록 지역사회나 그 속의 소소한 일상들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한국현대사의 통념은, 특히 전라도에 관해 떠올릴 때는 억압받고 탄압받아왔던 역사를 환기하며 저도 모르게 엄숙해지고 숙연해지곤 하는데, 이 시집에 나타난 할머니들의 모습에서는 역사의 어두운 그늘에 장악되지 않는 천진성이랄까, 낙천성 같은 게 보였거든요. 만일 민중적 낙관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역사관이 주로 중앙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던 것이라면, 그 바깥에서 여성들이 살아가던 쾌활하고 꿋꿋한 일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이 시집의 힘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민중에 대한 추상적 관념, 역사에 대한 섣부른 단언 이상으로 삶이 얼마나 풍요롭게 펼쳐질 수 있는지 정확히 예시해준 셈이죠.
신용목 이분들의 이야기 속에는 희극과 비극, 삶과 죽음 혹은 가족과 가족 아닌 것에 대한 구분 자체가 거의 없어 보여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역사적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를 다루더라도 그것을 삶의 영속성 속에서, 말하자면 삶과 죽음이 연결된 어떤 테두리 안에서 발화한다고 할까요. 말씀하셨듯 시대적 비극을 보던 관점을, 삶의 저변에 깃든 어떤 순간을 통해 오히려 폭넓게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이 이 언어 속에 있습니다. “나가 먼저 가먼 자네가 내 생에다가 연꽃 한 송이 곱게 달어줄랑가? 냇갈 앞이서 생엣꾼들 다리 쉴 때 나 듣게 잔 울어줄랑가?/그라재 꽃도 달어주고 울기도 울어주재”(「혼불」) 같은 대목에서는, 이 세계에 저 ‘꽃’과 ‘울음’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없다는 느낌마저 주더라고요.
김남희 저 역시 시집이 초반에 해학을 보여주다 서서히 비극으로 안내하는 흔한 스토리텔링 공식을 따르지 않는 점에 주목했어요. 5부로 이루어진 시집에서 비극은 2부에 가장 많이 몰려 있거든요. 그러다가 “일찍 죽은 사램이 더 박복허다고 보네 죽어불면 앙꿋도 아니여 (…) 그래도 나는 사는 것이 좋네”(「누가 더 박복한고」)라는 구절을 읽고, 시집의 구성도 시인의 의도를 담은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일상은 슬픔을 이기고, 살아간다는 것은 비극을 넘어서는 것이구나 하는.
최진석 표지에 ‘서남 전라도 서사시’라고 적혀 있는 게 이채롭더군요. 문학사에서 서사시는 대개 국가나 민족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로 정의되잖아요. 위대한 개인에게 바쳐지는 역사적 비극이라는 식으로요. 이름 없는 민중의 삶이 끼어들 틈이 없는 거죠. 물론 60년대 신동엽의 「금강」 같은 작품은 하층 민중의 이야기가 역사와 겹쳐지는 순간들을 잘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 역시 엄숙하고 비극적으로 채색되었다는 점에서 낙관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그라시재라』는 한권의 재미있는 이야기책 같은 모습으로 짜인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특히 서사시에 관한 서구 중심적인 정의를 넘어서는 작품을, 한국어로 쓰인 실물로 만나게 됐다는 점에서 반가웠습니다. “우리 함마니 이야기를 풀어노먼 소설이여”(「흰 가마 타고 시집 온 배녕 아씨」)라는 대목은 학교에서 배웠던 장르의 구분 같은 걸 넘어, 그 규정성 바깥으로 이탈하고 있는 삶의 힘, 활달한 문학적 활력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신용목 시집의 주인공을 뽑자면 사투리, 지역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말들이 역사를 포착하는 방식, 어떤 동력이나 바탕 등을 애초에 간직하고 있던 것이라고 보여요. 그만큼 표준어 정책이 어리석고 폭력적이란 생각도 들고요. 요새는 지역어 정책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죠? 제가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오래 일했는데요, 시집에 친절하게 지역어 색인이 달려 있으니 이 책을 가져가서 낱말 좀 추려야 할 것 같아요.(웃음) ‘시난고난하다’(병이 심하지는 않으나 오래 앓다)처럼 표준어지만 생소한 단어들이나 “무르막음날 소리 하지 마야”(「홋집 남자」)에서처럼 문맥 안에서 유추해 뜻을 알 수 있는 단어들도 풍성하고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이런 책의 편집은 역시 힘들겠죠?
김남희 모든 말을 표준어 규정에 따라 ‘바로잡는’ 편집자로서 이런 원고를 받으면 일단 막막하겠죠. 표준어가 아니니까요. ‘편집후기’에도 나오지만 이 원고의 어떤 글자는 편집 프로그램의 서체가 인식하지도 못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나 자유로운 서남 전라도 말에 표준말이 함부로 개입하면 쓸데없는 중력이 생길 것 같았”(202면)다는 말에서, 정답을 찾으셨구나 싶었습니다.
신용목 우리의 생활뿐 아니라 정서 자체도 어떤 규범이나 제도 속에 묶여 있었던 듯합니다. 저도 읽으면서 자꾸 내가 알고 있는 시적 규율 속에서 시편들을 포착하려고 애쓰고 있더라고요.
최진석 「옹기 째 떨이해서 동네잔치」라는 시는 동네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모여 함께 나누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그리는데요, “상다리 잔 받쳐라 까딱허먼 뿌서지겄다야”라며 잔치에 음식이 잔뜩이라는 말에 한 여성이 “송쿨네 아짐이 사불것 이고” 와서 그렇다는 대답을 하죠. ‘사불것’이 무엇인지 이 시 안에서만도 세가지 뜻이 나오잖아요. 첫째는 그냥 시어머니가 쓰던 말이다. 두번째는 갖가지가 다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세번째는 그물에 걸린 해산물 따위를 한사발씩 퍼서 판 데서 나온 말이다. 규범 언어가 이 셋 중에서 하나를 뽑아내 추리거나 각각의 의미로 개별화하는 작업의 산물이라면, 지역어를 그대로 가져온 이 시집은 말이 갖는 다양한 의미의 편차들을 다 보여주고 담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 크게 다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신용목 그러한 시선 덕분에 삶 또한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펼쳐 보여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녹취 구술 같고, 어떨 땐 마당극 같기도 한데, 여성서사를 다루면서도 그 억압을 개선해야 한다는 외부자적 시선을 앞세우기보다 화자들의 삶을 그냥 툭툭 던지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역사적 고난을 다루는 우리의 관점을 좀더 폭넓게 하는, 또 삶의 깊숙한 곳까지 다가가게 하는 힘이 이 시집의 언어들 속에 녹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재율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민음사)
신용목 다음으로 넘어가볼까요. 정재율 시집입니다. 2019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이에요. 비슷한 시기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다른 젊은 시인들에 비해서 쉽고 단정한 시어를 구사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의도적으로 문장을 뒤튼다거나 시어를 모호하게 만들기보다는 다양한 문양의 블록을 쌓듯 장면을 배치해 시적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그렇지만 오늘 다루는 두권의 시집과 비교했을 때는 가장 모호한 편인 것 같아요. 일단 독후감부터 간단하게 나눌까요.
김남희 이 시집을 읽다보면 자꾸 죽음이 어른거리면서 뭔가가 끊임없이 깨지고 부서지고 상하는데 그럼에도 시가 무척 깨끗하고 맑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정갈하다고 해야 할까요. 다듬고 다듬고 다듬어서 정말 딱 필요한 말만 남긴 시 같았어요.
최진석 저는 오늘 이야기 나누기로 한 책 중 이 시집을 마지막으로 읽었습니다. 일단 두껍기도 했고, 시인의 첫 시집이라 세상에 대한 기대나 근본적인 문제의식 같은 것이 담겨 있을 거라 짐작해 대면하기가 버겁게 느껴져서 그랬나봅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런 부분을 굉장히 유려하게 잘 풀어냈어요. 앞서 말씀하신 정갈한 언어 감각이 두드러지고, 그것이 “더 청렴해진 마음”(「사랑만 남은 사랑 시」), “더 깨끗한 마음”(「부표」), 그리고 그에 관한 ‘믿음’(「축복받은 집」) 등의 의미적 중핵과 잘 연결되어 있더군요. 세계와 인간, 자신에 대해 미리 준비해둔 언어를 꺼낸다기보다,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강한 시집이라 생각했습니다.
신용목 「종합병원」은 시인의 그런 언어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윤동주의 「병원」이 함께 떠오르더라고요. 윤동주의 시에서 병원 사람들은 모두 아픈 채 모여 있고 그 고통 속에서 서로 자리를 내어주는 모습이라면, 정재율의 시에서는 모두 아픈 사람들인 것은 같지만 서로 괜찮은 척, 안 아픈 척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최근 청년들이 겪는 좌절 그리고 그것을 소화하는 방식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인지 청년 세대가 감각하는 노동도 몇몇 시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노동시라고 하면 여전히 자본과의 대결구도에 익숙한데요, “네가 사라진 자리엔 안전모를 쓴 인부가 어느새 바닥을 두드리고 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매미 소리와 빗소리와 망치 소리가 들리는 여름」)에서 ‘인부’로 환기되는 노동은 자본의 지속적인 장악이자 인간을 대체하는 과정 자체인 듯합니다. 「줄눈」에서 “빈 곳을 메”워가는 과정으로서의 ‘줄눈 시공’도 저에게는 비슷한 의미로 읽혔어요. 다음 시인 「물고기의 마음」의 “살아 있는 것”에 “함부로 장난치는 것”과도 묘하게 이어져서, 노동과 자본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본의 실존과 인간의 실존이 이미 화학적으로 결합되었음을 보여주는, 다른 방식의 비판처럼 보였습니다.
김남희 ‘갇혀 있다’는 표현의 반복도 흥미로워요. 첫 시 「물탱크」부터 물탱크 안에 갇힌 사람이 나오죠. 그리고 시집 전반에 ‘집’ ‘물속’ ‘옷장’ 등 어딘가에 갇히는 이미지가 자주 등장해요. 이걸 반드시 공간으로 이해하기보다 어느 한 순간이나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죽거나 상처를 받은 어떤 순간을 통과하지 못하고 통과하려 하지도 않고 그 안에 머무른 채로 계속 죽음을, 상처를 기억하는 모습이 보여요. 그러면서도 아파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의 언어를 가다듬는 거죠.
최진석 최근 시의 주조음은 세상을 이미 교정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고, 세상의 문제나 결여를 고칠 생각도 없이 그렇다고 비관하지도 않은 채 그냥 ‘쿨하게’ 받아들이자는 데 있지 않나 생각해요. 그런데 정재율 시인은 비록 출발점은 비슷할지 몰라도 ‘원래 세상이 이렇지’라는 위악적인 포즈를 취한다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주는 것을 멈”(「최후의 빛」)추지 않고 “더 많은 사랑을 위해/창문을 그”(「사랑만 남은 사랑 시」)리며 빈곳을 채워나가겠다고 말한다는 점이 남다르더군요. 계속 반복해서 변주되는 표현 중 하나가 ‘더 깨끗한 곳’이에요. ‘더’라는 부사를 통해 계속해서 노력해가야 할 곳을 소망하고 있다는 작지만 단단한 의지가 엿보여요. 이런 낙관을 품은 슬픔이 무척 소중해 보입니다.
신용목 첫 시 「물탱크」처럼 시집 초반에는 죽음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다 「최후의 빛」의 물을 주는 행위를 지나 계속 나아가면서 생명의 이미지로 바뀌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가지는 착하다」에 다다르면 상함이나 깨짐, 버려짐을 말하면서도 거기서부터 ‘쓸모’를 환기하는 힘이 생겨요.
최진석 「여름은 온통 내가 사랑한 바깥이었다」에서 시인은 “죽은 나무에서 사과가 열렸다”고 말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아주 차분한 어조로, 불가능한 걸 알지만 기꺼이 바라겠노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요. 사실로서의 현실과 소망으로서의 실재는 아주 다른 것이지요. 전자는 우리를 체념하게 만들지만 후자는 욕망과 의지를 불어넣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신에게도 높이가 필요”하지 않을까 묻는 듯합니다. 높이는 어떤 지향을 말하고, 신에게는 그런 게 필요할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시인은 모든 존재는 자기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메우기 위해 뭔가 바라볼 만한 것이 필요하고, 또 그런 것이 없다면 삶이라 할 수조차 없으리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런 태도가 이 시에 수직의 비유들, “절벽 아래로 사과 씨를 떨어뜨”리면 “깊은 바닷속에 심어도 무럭무럭 자라날 거”라는 대조적 이미지들을 통해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
김남희 「생활」이라는 시를 보면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건물이 무너졌다고” 알리는 속보가 이어져요. “아파트 복도에서 길게 울음소리가” 들리고요. 삶을 둘러싼 공기는 이토록 위태롭고 불안한데 친구가 전화를 걸어오고 나는 “점심을 챙겨 먹으려고/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고 해요. 외부 세계는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자신과 타인이 속한 세계를 어떻게든 지키려는 안온함, 건강함 같은 게 느껴집니다.
최진석 “오늘만은 서로를 너무 믿지 말자”(「가정 예배」)에서 느껴지듯 맹목적으로 남을 따르는 믿음을 경계하고 스스로 지향해야 할 것을 구축하자는 자세도 엿보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지나치면 자기에 대한 맹목이 되니 삼가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태도도 같이 나타나는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일종의 시적 배려가 아닐까 싶어요. 짐짓 전능한 자아의 자기서사로 함몰될 수 있는 서정성이 스스로와 세계 사이를 중재하는 건강한 거리감으로 보충되는 것이죠.
신용목 덧붙이자면 최근 시집들을 읽으면서 시 한편의 완결성이랄까요, 자신이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와 이미지를 편편마다 구현하는 데 몰두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한 적 있어요. 오히려 자신이 접속된 한 장면 한 순간들이 단편적으로 시 속에 들어 있고, 그 전체상은 다른 시편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확인되죠. 정재율 시인의 작품도 따로따로 읽을 때보다 시집 전체에서 이런저런 연결을 시키면서 읽을 때 감상이 더욱 커지고요. 문득 시를 집어든 사람들한테는 어렵게 다가갈 수 있는 요소이겠다 싶기도 합니다.
최진석 어느정도 공감합니다. 저 역시 문예지에 실린 한두편만으로는 아리송해하다가 시집으로 묶여 나왔을 때 비로소 전체 맥락을 이해하게 된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시집은 시인이 자기 세계를 집약하고 일단락 지은 결과물이기 때문에 한권의 책으로 묶일 때에만 파악 가능한 세계상을 확인할 수 있는 거죠. 때문에 시인의 자취를 좇아가며 부지런히 읽고 그와 만난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음미하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이건 비평가에게나 일반 독자에게나 마찬가지의 독서 과정일 겁니다.
신철규 『심장보다 높이』(창비)
신용목 신철규 시집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까요. 첫번째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문학동네 2018)는 당시 보수정권과 세월호 등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시인만의 정서로 차분히 밀고 나간 점이 독자들과 크게 공명했죠. 두번째 시집 『심장보다 높이』는 조금 달라진 느낌도 들어요. 자기 주변과 내면으로 훨씬 더 많이 들어온 듯한데, 두분 어떻게 읽으셨나요?
최진석 시인의 팬으로서 두번째 시집도 잘 읽었습니다. 저는 특히 시집의 무거움 때문에 혼이 났어요. 그냥 ‘슬프다’고만은 얘기할 수 없는 이 무거운 정조의 원인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경계’에 관한 남승원 평론가의 해설이 그 가닥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제 생각을 약간 덧붙이자면, 단지 경계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을지 모르는 부재와 결여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해요. 시인은 경계 ‘너머’까지 자신을 밀어붙이고자 합니다. 육체와 감각의 존재자로서 부재와 결여를 말로만 되뇌고 몸으로 직접 맞부딪히지 않는다면 결코 경계에 이른 게 아니기 때문일 거예요. 가령, 첫 시 「세화」를 읽으면 “우리는 끝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끝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끝까지 왔는지,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질문하기를 그치지 않아요. 마침내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우리는 난민이 될 수 있을까”라고 재차 묻지요. 난민이란 소속의 끄트머리이자 바깥에 있는 존재, 경계 너머를 가본 사람입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경계를 넘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너머’를 지속적으로 질문하지 않는다면, 결국 경계 안쪽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시집의 무거움은 바로 이 자가당착적인 질문, 오직 문학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물음에 대해 시로써 답하려는 고투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김남희 말씀을 들으니 ‘해변’(「해변의 눈사람」)이나 ‘날짜변경선’(「날짜변경선」)도 일종의 경계로 읽을 수 있겠네요. 저는 무엇보다 표제작 「심장보다 높이」가 좋았습니다. 시집의 무거움과 슬픔을 말씀해주셨는데 이 시는 그런 정조를 ‘무서움’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욕조에 있는데 전기는 나갔고, 고양이는 문을 긁고 있고 밖에는 비가 내리고 “바깥에 아무도 없어요?” 말해도 목소리는 울리기만 하고. 왜 무서울까 보니까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무너지고 가라앉으면 안 되는 것들이 가라앉았다”라고 해요. 이 공포의 근원은 현실의 재난이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현실을 밖에 두고 물속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시인은 또 “무섭기 때문에 외로웠고/외롭기 때문에 무서웠다”라고도 진술하는데요,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세화」)이 밖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신용목 시집 전체를 흐르는 어두움, 공포가 처음에는 절망의 형태로 드러나다가 나중에 전환되는 장면들도 주목할 만합니다. 「병원 정문에서」를 보면 걸인과 성자를 또 비루와 구원을 이상한 방식으로 역설시키고 전복하는 과정이 있고, 또 시집 중후반에 고향과 관련된 시편들을 배치하면서 그로부터 어떤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이렇게 ‘욕조에서 울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서 기어이 나오고 마는 한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문장은 무척 산문적이에요. 보통 시가 간격이나 여백으로 긴장감을 실어 나르는데 이 시집은 산문적인 문장을 통해 순간의 세부를 다 채워버리는 식으로, 시어가 가진 긴장감보다는 한 사람의 내면에 서린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남희 산문적 문장으로 쓰여 있어 잘 읽히기도 하고, 말씀처럼 여백이 없기 때문에 보통 시를 읽듯 관조하며 감상이나 해석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시인의 시점으로 바로 휘감겨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한두편 빼고는 시집 전체적으로 물에 관련된 이미지들이 나오는데요. 우리는 이제 물에 대해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잖아요. 이 시집에서도 물이 어떨 때는 슬픔이었다가 어떨 때는 절망이고 어떨 때는 약간 허상 같은 느낌도 주더라고요.
최진석 어둡고 검은 표지도 깊은 물을 연상시켜요. 물은 더 깊은 바닥을 갖는 바닥이랄까요, 가늠되지 않는 비가시적 실재를 상징하곤 하죠. 여기서는 화자가 모르거나 갖고 있지 않은 것들, 또 순전히 영(0)으로 환원되지 않는 결여 같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가 아닐까요.
신용목 그 자체로 화자의 내적 상태가 출렁이는 듯한 느낌도 들고요.
최진석 「흐르는 말」에서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 나아가 시를 쓰는 것 자체에 대한 반성적인 사유를 찾아볼 수 있더군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위로할 때/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비난하게 된다/없는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없기 때문에 생각한다”고 하는데 언어의 속성이 사실 그렇죠. 사물 자체를 대체하기 위해 사용되는 보충물. 그런데 여기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평가가 추가되기 때문에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칭찬이나 비난이 될 수 있어요. 시를 쓰는 것도 다르지 않겠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망가뜨릴 가능성이 실려 있다는 말이니까요. 시인은 아마도 그런 데서 죄의식 같은 것을 느끼는 듯해요. 동시에 시인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성찰과 반성적 태도를 같이 가져갈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신용목 말씀대로 시인과 화자가 거의 구분되지 않는 어떤 지점에서 발화되는 자기반성이나 성찰의 힘으로 시집이 꽉 채워져 있는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세계에 대한 신뢰나 희망의 가능성을 놓지 않아요. 「검은 산책」 정도가 유일한 예외고, 나머지 시편들은 내면의 풍경이 진창일지언정 세계 자체를 묵시록적 풍경으로 덧씌우지 않죠. “물속에 손을 넣으려고 하면/손을 잡기 위해 떠오르는 손이 하나 보인다”(「불투명한 영원」)며 끝내 세계를 향한 믿음 같은 미덕을 보입니다.
김남희 총 세편으로 된 「슬픔의 바깥」 연작시에서는 화자가 슬픔을 느끼는 대상으로 어머니, 장애를 가진 여성, 다방에서 차 배달을 하는 여성이 나와요. 저 역시 그 풍경을 마주하면 묘한 서글픔이나 슬픔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섬뜩해지더라고요. 왜 장애나 가난에 슬픔을 느낄까. 사람들은 가족이 해체돼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접하면 불쌍해하거나 분노하고, 드라마에 나온 장애인에게 감동받기도 해요. 장애나 가난을 대할 때 철저하게 감정의 영역에 머무를 때가 많은데, ‘그 너머’의 논의로 나아가려면 이런 식의 대상화는 멈춰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용목 재현의 윤리에 관한 질문을 해주신 것 같아요. 말씀하셨듯 이미 주어진 감정으로 대상을 포착하는 것이 가진 문제에 대해서는 늘 예민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좀더 넓게 보자면, 창작자로서 ‘저 풍경을 내가 그려도 될까’ 하는 질문에 항상 부딪쳐요.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 의해 각색되고 대상화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타자의 현실도 말해져야 할 엄연한 세계이고 이 문제를 피해가는 것 역시 답이 아니란 생각도 들고요. 이 시집 전체를 지배한다 할 ‘슬픔’이 이 연작시에서는 다소 손쉽게 타자에게 전이된 측면이 있지는 않을까 합니다. 복잡하고 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문제지만 이 질문을 창작자가 매순간 지니고 있는 것 자체가 중요하겠지요.
최진석 어떤 장면을 보고 ‘불쌍하다’ ‘가엾다’고 발화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특정한 정서적 태도와 판단을 취하는 셈이죠. 하지만 그런 발화와 판단은 동시에 또다른 정서와 판단을 배제하기도 합니다. 애석하게도 언어적으로 잘 훈련되어 있을수록 상황에 대한 다양한 감각과 반응이 불가능해지는, 단조로운 의사소통의 구조에 매몰될 수 있는 것이지요. 언급하신 연작시의 세 상황에 나오는 ‘슬픔’이 모두 동일한 감정 상태일 리 없어요. 어머니와의 추억, 여성 장애인을 보았을 때의 낯섦, 차 배달하는 여성에 대한 거리감, 이 모두를 ‘슬픔’이라는 단어로 길어낸다 해도 감응의 스펙트럼이 제각각 다르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자신의 경험 속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시인은 통상의 기준으로는 분류되지 않는 이 스펙트럼으로부터 기이하도록 낯선 감응을 포착해 언어화하는 사람이고, 배제되었던 감정과 표현을 찾아내 가시화할 수 있는 말을 직조해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겠습니다.
정찬 『발 없는 새』(창비)
신용목 시를 읽으며 생긴 고민거리를 깊이 간직하고 계속 들여다보기로 하고요, 이제 소설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먼저 정찬 장편소설 『발 없는 새』를 읽어볼까요. 정찬 작가는 권력과 폭력, 그 속의 인간과 같이 묵직한 주제에 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온 소설가입니다. 이번 책 역시 한국 주변의 여러 나라를 배경으로 20세기 동아시아의 역사적 사건을 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최진석 ‘말 〔言〕’은 정찬이 등단작 「말의 탑」에서부터 줄곧 탐구해온 주제입니다. 말이란 인간이 세계와 타인을 만나기 위한 도구이지만 진실과 허위의 양면성을 갖고, 또 권력과도 위험스레 연결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 보입니다. 이번 소설도 큰 틀에서는 그 흐름을 공유하는 듯해요. 일단 서사를 끌어가는 수수께끼의 인물 워이커씽이 그런 양면을 지닌 인물이죠. 사물의 진실은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을 모두 갖는다는 점을 체화해서 보여주니까요. 그를 통해 이어지는 여러 사건들, 장국영의 죽음, 난징대학살과 문화대혁명 그리고 ‘위안부’ 문제로 이어지는 서사들 또한 양면성이라는 문제에 닿아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과 허구적 인물의 개인사를 한번에 엮는 필력이 참 대단하게 여겨졌는데요, 중간 정도 읽었을 때는 과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서사 속에서 잘 버무려질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김남희 실존 인물들이 나오고 실제 사건을 다루는 책인데도 전체적인 인상이 선명하지 않더라고요. 꿈결 같은 모호한 분위기로 이야기가 조성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요? 화자와 워이커씽 그리고 고모할머니 같은 가공의 인물은 마치 실존인물을 등장시키기 위한 연결고리로만 존재하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그중 고모할머니는 가공인물 중 중요한 서사의 한 축으로 존재하는 사람이라 관심있게 읽었는데 너무 전형적으로 그려져 있었어요.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가 겪은 고초를 ‘나’에게 전달하는 인물인데, 사회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상상하는 틀, 한국 남성의 시각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게 짓밟힌 내 누이’라는 전형성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계속 작은오빠를 그리워하고,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몸이 깨끗하게 보였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는 인물로 나오죠. 그런데 소설을 끝까지 읽다 생각해보니 실제든 가상이든 여기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실은 희미한 유령이 아닐까 싶더라고요. 결국 역사와 예술 앞에 인간은 도구일 뿐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용목 고모할머니를 표현하는 방식과 관련해, 운동권 후일담을 다뤘던 『길, 저쪽』(창비 2015)에도 비슷한 지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운동권 청년들이 신념을 위해서 주변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데 대한 질문이었죠. 그래서 김남희 선생님 지적에 동의하면서 한편으로 작가가 시대상황과 스테레오타입에 부합하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가졌던 막연한 환상에 대한 리얼리티를 구현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발 없는 새』는 사건이나 갈등이 ‘발생’하기보다,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발화’되는 소설적 형식이 중요한 특징입니다. 최근 소설들과 견주자면, 낯설고 거칠다는 느낌까지 주는데, 이 형식은 개개인의 사건만으로는 보여줄 수 없어서 인물들의 대화 속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는, 더 큰 전체를 그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도 보여요. 난징대학살이나 원폭피해, 예술에 대한 사유는 일상 속에서 그 전모를 드러내기란 거의 불가능할 테니까요. 조금은 낯설고 갸웃거리기도 했지만 인물들이 자신의 사유와 인식을 자유롭게 펼치는 대화의 장구함에서 독특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의 관념적 세계 역시 현실로부터 길어올린, 작가의 내면에 실재하는 세계라는 점에서 리얼리티와 아예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도 같고요. 이 큰 주제들이 약간씩 어긋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는데, 우리의 삶이나 생각이 실제 그러하지 않나요. 말하자면 불협화음처럼 느껴지는 이 엇갈림 자체로 총체성을 구현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싶어요.
최진석 모호함, 유령 같음, 몽환적 분위기가 감돈다는 말씀에 동감해요. 그런데 작가의 세계관 자체가 진실과 허위, 혹은 빛과 그림자는 구분되기 어렵다는 지점에 세워져 있는 듯합니다. 모호함을 떨치고 명확한 주제로 나아가기보다, 그런 모호함만이 이 세계의 본래적인 진실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잘 짜인 구조적 총체성을 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기자 ‘나’를 화자로 내세워 객관적 관찰자 시점을 취하지만 실제 서술을 보면 전지적 작가 시점이거든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서로 교차하지 않는 여러 인물 각각의 이야기가 정합적으로 모아질 수 없었을 거예요. 다시 말해, 화자를 포함한 모든 인물들이 이야기의 필연의 사슬 속에 한데 엮여 있다는 전제가 없이는 소설이 탄생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세계를 하나로 연결 짓고자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소설가의 과제라고 믿는 의지 같은 게 엿보입니다.
신용목 거대한 주제가 너무 많은 역사적 사건에 얽혀 있어서 읽기 버거운 면은 있습니다. 이를테면 난징대학살을 통해서는 신적 존재(천황)에 대한 일본인들의 맹신에 대해 묻고, 또 문화대혁명을 소환해서 신념에 대해 묻고, 마지막에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진정한 화해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묻죠. 독자로서 제 깜냥이 이 전부를 통으로 바라볼 수 없는 처지인데, 그런 저를 전혀 배려해주지 않더라고요.(웃음) 한권의 소설에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았나, 여러권짜리 대하소설 분량으로 펼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물 간의 서사는 약해진 채 발화를 통해서만 소설이 진행되니 그 정보량 때문에 나중에는 사회과학 서적을 대화의 방식으로 바꾼 것 같기도 했으니까요.
김남희 후반부에 워이커씽은 난징대학살의 일본군을 “희생자의 공간으로 끌어올려” “그들을 구원”(163면)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액트 오브 킬링」(2012)이라는 영화 생각이 났습니다. 인도네시아 쿠데타 때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대학살을 저지른 가해자들과 당시를 재현하는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그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예요. 국민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잘살고 있던 가해자들은 스스로 감독과 배우가 되어서 과거의 학살을 자랑스럽게 영화로 만들기 시작해요. 그런데 학살의 주범인 한 사람이 고문 장면을 찍다가 갑자기 괴로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제야 관객은 그도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저는 이 소설에서도 서사를 통해 그 정도의 거리감을 구현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악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별개로 악의 주체는 영원한 타인으로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요.
최진석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죄에 대한 명확한 단죄 없이 그것을 사면하고 ‘구원’해준다는 것은 불가능하죠. 또다른 가해의 일환이 될 테니까요. 법과 처벌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거기 있을 겁니다. 다른 한편, 예술로서의 문학이 지향하는 점은 조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응분의 대가 없이도 용서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어떤 죄악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용서, 즉 데리다(J. Derrida)가 말하는 환대가 전제되어야만 모든 용서가 가능하다는 말이죠. 만일 상대적인 용서, 그러니까 어떤 죄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용서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늘 이 상대성의 현실에 갇힐 수도 있을 거예요. 용서의 무한성, 타인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환대를 근본적으로 갖고 있어야, 타인에 대한 받아들임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죠. 법학이나 사회학과는 다른, 예술로서의 문학은 궁극적인 무한한 용서를 그릴 수 있고 또 그래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용목 동감해요. 아이리스 장의 “악을 이해하는 행위를 포기할 수 없”(162면)다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다만 소설 속에서 인물의 상황이나 정서가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어야만 독자들이 그 맥락에 함께 도착하고 마침내 수긍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아마도 소설 바깥에서 아이리스 장은 악을 이해하는 과정, 내적 고투의 지난함을 견뎠을 텐데 소설 안에서도 그 과정이 형상화되어 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그렇지만 간만에 만난 선 굵은 소설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저뿐 아니라 독자들 모두 각자 다른 상념들을 안고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무게감이라고 할까요. 우리가 네트워크니 세계화니 하는 말처럼 엄청나게 넓은 횡적 단면 위에서 살고 있잖아요. 우끄라이나전쟁같이 지구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리는 수평적으로 확장된 이 세계가 사실은 수직적으로도 엄청난 하중 속에 있다는 것을 종종 잊곤 하는데요. 정찬의 이번 소설은 우리에게 날카로운 종적 단면을 보여주면서 고통과 비극과 심연의 무게를 실체로서 증명하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난징, 원폭 등 역사적 비극에 대한 한두 세대 위의 기억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으니까요.
성해나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신용목 다음으로는 성해나 작가의 첫 소설집입니다. 등단작 「오즈」가 중편이더군요. 「오즈」를 포함해 역사적 소재를 다루기도 하고, 현실 속 농촌 공동체를 다루는 한편 세대나 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어요. 어떤 작품은 이문구나 전성태를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첫 책에서 이런 모습이 보이다니 연신 놀랐습니다.
김남희 ‘아 이게 소설을 읽는 맛이었지’ 하며 저도 즐겁게 읽었습니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좋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시도하는 것도 좋았어요. 특히 세대가 다른 인물들이 교감하는 「화양극장」 「오즈」가 좋았고, 농촌을 배경으로 세대 문제를 다룬 「당춘」도 잘 읽었습니다. 사실 세대 문제는 보통 기성세대 쪽에서 많이 고민하는데 「당춘」은 젊은 세대의 입장을 들을 수 있어서 신선했어요. 소위 ‘힙’한 주제는 아닌데 말이에요. 작가는 90년대생이고 소설 속 인물인 영식 삼촌은 70년대생, 독자인 저는 딱 중간의 80년대생이에요. 할머니들에게 영상 편집을 가르치는 일을 두고 이상주의적으로 사고하는 70년대생 고학력 귀농생활자와 현실주의적인 90년대생 백수 청년 사이에서, 제3자의 관점으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갈등을 굳이 해결하거나 억지로 소통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한 프레임 안에 각자 다른 모습을 한 채 한장의 사진으로 남는 결말도 오히려 좋았어요.
최진석 소설가가 자기 본래의 성별이나 세대, 직업 등을 벗어나서 작품을 쓸 때 비현실적이거나 어색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죠. 그런데 성해나 소설가는 러시아 동포가 제주도에 와서 겪는 이질감을 지방어의 토속성과 절묘하게 버무려낸다거나(「괸당」), 청년문화와 위화감 없이 만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중년 교사가 MZ세대와 실제로 부딪혔을 때 생겨나는 감정의 동요를 섬세하게 포착하는(「OK, Boomer」) 등 복화술적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신용목 세대, 친일, 노동운동, 농촌 현실, 디아스포라 등 만만치 않은 사회적 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굉장히 큰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세부적으로 쉽게 처리한 부분이나 예상 가능한 지점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적·사회적 채무가 없는 젊은 세대의 작가가 부담감 없이 정면으로 돌파해나가는 힘이 있어, 읽으며 기분이 무척 상쾌했습니다. 「언두」는 주인공 유수가 청각장애인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도호를 만나는 이야기를 통해 상대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에요. 수어로 통역을 해줄 수 있는 도호가 있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는데, 도호가 취직을 하고 바빠지면서 유수가 도호 대신 할머니를 돌보다가 한계에 부딪힙니다. 마지막에 청각장애인인 할머니가 뽕짝을 크게 틀어놓고 진동을 느끼면서 춤을 추는 장면이 관계 속에서 칼로 딱 자를 수 없는 것들, 어찌할 수 없는 난감함이 모두 뒤섞인 어떤 순간처럼 느껴졌어요. 그 춤을 보고 유수가 도호를 떠나기로 마음을 굳히는데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유수가 모든 내적·외적 상황을 확인하고 난 뒤에 결심을 했구나 싶었죠.
김남희 도호가 유수에게 할머니 돌봄을 자연스럽게 계속 전가하면서 유수는 이미 견디기 힘든 상태에 있었어요. 거기에 아빠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던 자신의 가정사를 동정하는 친구들의 시선에 질려서, 자신만큼은 도호의 환경을 그렇게 대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애초 관계의 시작에 있었고요. 그런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견뎌야 하는’ 관계가 되어가다가 자유롭게 몸을 흔드는 할머니를 목격한 순간 자신도 실은 도호와 할머니를 동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친 게 아닐까 싶어요.
최진석 도호는 “너도 내가 돼봐”(25면 외)라고 유수에게 반복해서 말하고, 유수의 “난 네가 될 수 없어”(52면)라는 보내지 못한 메시지로 결말에 이릅니다. 서로 “말이 잘 통”하고 “닮은 점도 많”(24면)다는 환상에 젖기도 하지만, 결국 각자의 삶은 각자의 것이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없다는 필연적인 결론에 이르지요. 이 안타깝지만 도저한 현실감을 가감없이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핵심은 타인의 삶을 전부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해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어요. 억지로 죄악감을 느끼고 윤리적 명제로 포장하기보다, 차라리 그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솔직하고도 충실한 모습이라는 게 아닐까요.
신용목 맞아요. 작품 속 화자들이 모두 자기를 선한 자리에 위치시키지 않아요. 변명하지도 않고 ‘이건 내게 너무 무거워’ 해버리죠. 그런 태도를 가시화하는 순간 소설의 매력이 오히려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저도 받았습니다. 화자들이 미묘한 갈등이나 흔들림 속에서 쿨하거나 올바르지만도 않고 때로 비굴하거나 비겁한 모습까지 순순히 드러내는 것도 요즘 소설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라 좋았어요.
김남희 사실 “너도 내가 돼봐” “난 네가 될 수 없어”는 이전 세대의 관계 맺기 법이라는 생각을 해요. 요즘 젊은 세대는 그냥 ‘추앙’을 합니다.(웃음) 서로 바꾸려고도, 바뀌려고도 하지 않죠. 한가지 더 흥미로웠던 점은, 거의 모든 작품에서 가족은 피상적이고 서로를 버거워하고 나쁜 기억을 공유하는 관계로 그려져요. 오히려 가족 아닌,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타인과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데 그런 관계가 서로를 구원하죠. 「오즈」나 「화양극장」처럼요. 「김일성이 죽던 해」에 이르러 비로소 가족과 어렵사리 소통의 실마리를 찾고 이해를 시도하는데, 그 소설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도 의미심장해요. 가족과의 화해를 넘어 기성세대와의 오해를 풀려는 결말처럼도 느껴집니다.
신용목 가족과 돌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들이었어요. 「괸당」은 읽으면서 고려인이라는, 한국 역사가 만들어낸 난민을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도 생각하게 하더라고요. 우리가 사적 돌봄과 사회적 돌봄을 많이 이야기한 만큼, 디아스포라에 의해 발생한 역사적 문제 역시 돌봄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젊은 작가의 새로운 재현이 익숙한 질문을 사회적으로 새롭게 환기한 셈이죠. 공동체의 자산을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에 대해 돌봄이나 난민 같은 사회적 의제와 결부해 새로운 준거점을 고민하게 만드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최진석 「괸당」은 가족을 소재로 포용과 배제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굉장히 잘 포착했어요. 집성촌이 발달한 제주도를 배경으로 가문 안에서 촌수나 위계로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 높고 낮은지 끊임없이 따지는 인물들이 등장하죠. 어느날 먼 친척뻘인 고려인 부부가 찾아오며 긴장감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전통이나 가족이라는 동일성의 범주에서는 옳다고 여겨져도,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는 민망하고도 폭력적인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희한하네이. 우리 괸당에 외국 씨는 없는디”(159면)라는 말을 대놓고 하거나 한국인처럼 먹는 게 제맛이라며 매운 것을 못 먹는 이의 국밥에 깍두기 국물을 들이붓는 대목에서는 씁쓸하다 못해 화가 치솟더라고요. 고려인 부부가 거주비자를 받기 위해 온 것임이 밝혀지자 순식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배타성은 누구도 부인 못할 우리의 현재이기도 합니다.
김남희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은 대학 친구 ‘오수’의 조부 상수연(上壽宴)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 한국 역사 속에서 친일파와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결탁하게 되었는지 암시하는 소설이에요. 오수의 집에 대대로 내려온 도검이 고종의 하사품이 아니라 친일의 유산이라는 반전이 묘미인데, 자신과 가문에 대한 믿음이 아집이 된 조부와, 끊임없이 진위를 판단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감별사가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죠. 믿는 것은 강하지만 의심하는 것은 약한 일이에요. 사람을 괴롭게 하고요. 작가는 그럼에도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자신이 속한 세계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모른 척 끝까지 남아 디저트를 먹는 ‘나’가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 연회에서 쫓겨난 감별사의 위치에 서야 한다고요. 소설은 ‘나’가 기업 인사담당자가 되어 노조원들에 대해 ‘경제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으로 끝나는데요. 「오즈」와 묘하게 이어집니다. 「오즈」의 주인집 할머니는 몸에 있는 일본어 욕설 문신을 지우고 싶어하죠. 인간을 폭력의 도구로 삼느냐 효율성의 도구로 삼느냐, 결국 둘 다 인간성에 대한 멸시거든요. 앞서 세대 문제도 그렇고 이런 주제들은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용목 동감합니다. 큰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놓지 않고 이야기함으로써 오래된 문제를 우리 앞에 다시 등장시키는 것이 성해나 소설의 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다양한 소재에 접근하는 과정에 신뢰를 보내면서도, 그 문제제기가 소설 안에서 대결의 양상으로도 드러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는 않아요. 새로운 세대만이 시도할 수 있는 전환이나 도전으로 전복하거나 뒤트는 이야기를 읽고 싶기도 하거든요.
진연주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문학과지성사)
신용목 진연주 소설집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은 먼저 다룬 『발 없는 새』와 나란히 두고 보면 퍽 대조적인 작품이죠.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이야기가 전달되는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한 소설입니다. 소설을 쓰는,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통해 현대인의 내면을 알레고리화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어떻게 읽으셨어요?
김남희 저는 진연주의 소설을 처음 접했는데 한 호흡으로 계속 이어지는 문장이 신선했어요. 서사에 중심을 두기보다 문장을 읊조리고 되새기면서 말로 음악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뒤표지에 ‘나는 무언가를 상실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카피로 사용되었던데, 이렇게 책 주제를 관통하는 명료한 문장이 표제작에 등장하니 편집자가 무척 좋았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웃음) 카피처럼 상실과 상실을 기억하는 것에 대한 책으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최진석 작가의 고유한 글쓰기 스타일이 잘 발휘된 작품입니다. 가령 정찬 소설을 인생의 진실과 삶, 역사를 한데 꿰고자 시도하는 리얼리즘 작품이라 보면, 진연주의 소설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작품이라 볼 만합니다. 저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명제를 떠올리며 책을 읽었어요. 문학을 문학으로 만들어주는 것, 즉 문학성이란 ‘낯설게 하기’라는 방법을 통해 나오는 것이지 그 안에 담긴 사상이나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죠. 언어가 곧 방법입니다. 명쾌한 서사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언어의 의미를 계속해서 곱씹게 만드는 것이에요. 진연주의 작품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듯해요. “난 걷는 데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난 걷는 데 재능이 없다. 없는 재능으로 무언가를 할 때는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다. 창백해진다는 말이다. 걸을 때마다 그랬다”(「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33면). 이런 문장들을 마주치면 독자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죠. 의사소통이라는 측면에서는 불필요한 반복을 걷어내 의미를 명료하게 만드는 게 우선인데, 이 문장은 하나의 상황을 여러 말들로 계속 변주하고 지연시키잖아요. ‘나는 (못) 걷는다’는 진술을 자꾸 달리 표명함으로써 읽는 이가 문장과 언어 속에 계속 머무르게 강요하는 셈이지요. 여기서 서사의 주제를 찾거나 인물의 감정적 선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부차적입니다. 거꾸로 이 문장들에 들어간 언어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이 변주되는 가운데 어떤 특이하고도 새로운 상황이 길어내어질 수 있는지 음미하는 게 필요합니다.
김남희 말은 한번 하고 나면 끝이고 그때부터 선언처럼 되어버리잖아요. 진연주 소설은 그러한 말의 무서움 때문에 발화가 두려워서 반복과 지연을 거듭하는 것 같아요. 말로 가득 찬 수다스러운 소설인데 작가가 말을 대하는 태도는 사실 굉장히 신중해요.
최진석 언어에 대한 천착은 곧 언어가 빚어내는 효과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죠. 가령 정말 걷는 재능의 ‘상실’이 두렵게 느껴지려면, 상실이라는 단어에 좀더 느리고 어렵게 다가가 사전적인 뜻에서의 자동적인 연상이 지연될 필요가 있어요. 이 에둘러 가는 과정이야말로 일상의 화법에서는 나올 수 없는, 문학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적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김남희 그런데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아무」를 보면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데 말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중요하다고 계속 생각해서 중요해진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129면)라고 말하기도 해요.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제가 지금 편집하고 있는 책(『물속의 철학자들』, 다다서재, 근간)에 주변 사람들의 힘듦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어느날 고백해요. 사실은 하나도 모른다고,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건 말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모른다는 걸 받아들이는 태도죠. 서로를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는 사유까지 읽어낼 수 있는 듯합니다.
신용목 서사나 내용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구름」 같은 작품을 보면 특별한 소설적 장치를 활용해 독자들이 그 의미를 추적하게 만드는 모습도 보입니다. 서울 하늘에 느닷없이 낯선 형태의 “불길하면서도 (…) 성스러워 보이는 구름”(203면)이 나타나고 인물들이 동요를 일으키면서 소설이 시작되는데요, 결말에 가면 그 구름에서 빛이 쏟아지고 갑자기 사람들이 빛을 향해 몸을 날리는 식의 장치를 툭 던져요. 그것이 불쾌하고 기이한 효과를 자아내지만 소설은 끝내 그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운데가 뚫려 빛이 쏟아지는 구름을, 텅 빈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 나아가 우리의 삶과 연결시킬 수밖에 없죠.
최진석 정찬 소설이 찾을 수 없는 삶의 의미를 계속 추구하는 데 방점을 둔다면, 진연주는 추구하는 과정 자체를 계속 연장하고 지연시키는 데 의미를 두는 듯해요. 앞서 언급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아무」에는 ‘아무’라는 인물과 사귀는 화자가 등장하잖아요. 그런데 아무와 했던 대화, 함께 한 일을 적어놓고 보면 말장난처럼 보여요. “나는 아무와 만난다. 아무에게 가거나 아무가 와서 우리 둘은 얼굴을 마주 본다”(110면) 같은 진술을 보면 아무는 노바디(nobody)니까, 정작 화자는 그 누구와도 만나거나 마주 보거나 한 적이 없다는 듯이 여겨져요. ‘아무’라는 단어가 가진 부재와 부정의 함축을 작품 속에 도입하고 싶었던 듯해요. ‘아무’는 부재의 기호이지만 언어로서 실존하며, 영향을 미치는 실재이기도 하거든요. “나는 아무와 만난다”는 말은 언어학적 구조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자리를 전제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무엇인가가 우리 곁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작가는 이 부재하지만 작동하는 실재로서의 언어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탐색하는 모험가이자 실험가라고 생각해요.
신용목 그런 작용을 통해 작가는 상실감이든 알 수 없는 사랑이든, 우리는 그런 것들에 기어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주변을 맴도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이야말로 마음의 실제고 사실은 세계 자체라는 것처럼 들려요.
김남희 같은 맥락에서 표제작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의 결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화자는 엄마의 죽음을 겪고 늙어가는 개를 돌보며 개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어요. “무언가를 상실할 것”이라는 감각과 “나를 겁먹게”(38면) 하는 무수히 예정된 상실 앞에서 자기 방식대로 말을 늘어놓으며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상실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가 변하게 됩니다. “나도 나의 개들도 다소 외롭고 슬픈 상태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하는 한편 “예정된 상실을 조금씩 미루면서, 나는 길을 간다”(55~56면)며 상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요. 사실 우리는 모두 다 뭔가를 상실할 예정에 있잖아요. 오늘도 젊음도, 일도 사랑도 사람도 모두 상실의 대상이고요. 개를 잃게 될 결말을 알면서도 상실을 지연시키면서 살아가겠다는 화자의 독백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라기보다는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나 감내로 읽히죠. 저희가 장애 질병 돌봄과 관련한 책을 많이 내는데, 저희는 투병기를 기획하지 않아요. 당사자나 돌봄 주체가 맞서야 할 대상은 병이 아니라 병을 차별하는 사회라고 생각하거든요. 저희의 세계관에서 병이나 장애는 육체의 일시적이거나 영구적인 오작동이고, 극복이 아닌 반려의 대상이에요. 이겨내겠다, 해내겠다가 아니라 그냥 나는(그리고 너는) 이렇게 약하고 아프지만 그래도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가야지 하는 정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그 정도의 ‘약한’ 의지면 충분하거든요. 그래서 제겐 굉장히 익숙하고 해피엔딩으로까지 느껴지는 결말이었어요.
신용목 소설집 전반에서 보여주기가 아닌, 말하기가 가진 특유의 서사적 양식이 어떤 면에선 삶의 구체성을 우울이나 슬픔 같은 특정한 감정으로 희석시키고 있는 모습도 보여요. 거대한 독백체의 중얼거림으로 아는 것을 반복해서 말하고, 또 반복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고민으로 남았습니다. 어쩌면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쳐 있었던 우리를 포기했다”(「우리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85면)라는 식의 진술처럼, 반복적으로 주문을 걸듯 자신의 상태나 처지를 확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도 싶고요. 자기최면이나 주술을 거는 듯한 이러한 문장을 어떻게 볼지 독자들에게도 질문이 될 것 같아요.
무척 즐거운 대화를 나누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제 각자의 삶을 반복하러 갈 시간인 듯합니다. 오늘 어떠셨는지요.
김남희 저는 지금 백일 된 아기를 키우면서 책을 만들고 있어서 정말 숨 쉴 틈도 없이 바쁘다는 말이 딱 맞는데, 그 와중에 책을 여섯권이나 읽고 이 자리에 참석하는 걸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쁩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집 밖에 나온 게 참 좋네요. 두분께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안고 돌아갈 수 있어서 뜻깊었습니다.
최진석 처음 시작할 때는 혹시 할 말이 없으면 어쩌지 걱정이었는데, 서로의 감상과 해석을 나누는 과정에서 온갖 이야깃거리가 생겨났네요. 문학에 대해 열띠게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소중하고 짧아서 아쉽습니다. 또다른 기회에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2022.7.20.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