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손지연 엮음 『전후 동아시아 여성서사는 어떻게 만날까』, 소명출판 2022
동아시아 여성문학의 공통성과 교차하는 목소리(들)
김양선 金良宣
한림대 일송자유교양대학 교수 kysun@hallym.ac.kr
『전후 동아시아 여성서사는 어떻게 만날까』는 제목에서부터 몇가지 핵심적인 의제를 함축하고 있다. ‘전후(戰後)’란 언제를 가리키는가, ‘여성서사’란 무엇인가, ‘동아시아’라는 권역은 어떤 지역적 시각과 의미를 지니는가이다. 동아시아 지역 10인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이 책의 목차에서 우선 ‘동아시아의 눈’ ‘동아시아의 시선’ ‘동아시아라는 창’과 같은 키워드가 눈에 들어온다. 필자들은 하나같이 서구와 구별되고, 일국 국가주의와도 구별되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역사, 경험, 목소리, 연대를 강조한다. 여기서 동아시아는 남한과 북한, 중국, 일본, 그리고 오끼나와와 대만까지 포괄하며, 이들이 말하는 공동체의 경험은 ‘전쟁’ 그리고 ‘전후’라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전후’는 남한과 북한의 경우 한국전쟁과 이후의 분단체제를, 중국과 대만의 경우 국공내전 후를, 일본의 경우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그후를 지칭한다. 국가마다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 국가/민족의 재건이 요구되는 상황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필자들은 ‘전후’라는 시기, ‘동아시아’라는 공간에서 여성 그리고 여성문학이 어떻게 남성 중심 국가주의 지배체제와 경합하면서 “주체적 선택과 자율적 의지를 표출”(5면)하는 표현의 역사를 만들어왔는지에 주목한다.
또한 이 책은 동아시아 각국의 근현대 여성문학사를 개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대 여성서사의 향방이나 의제를 톺아보고 있다. 최근 한국문학과 문화 장에서 부상하는 여성서사는 범박하게 정의하면 ‘여성이 서사의 주체가 되는 이야기’, 여성 주체의 정체성에 대한 자의식이 뚜렷이 나타나면서 여성들의 성장과 연대를 그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서사들은 공통적으로 근대 전환기나 전후 현실에서 여성작가들이 자신의 삶을 다른 여성들이나 인종적·지역적으로 배제된 소수자들과 연결 지으며 식민 상황을 뚫고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모던걸’의 자기실현과 자기표현 의지부터 전후 식민/탈식민의 구도 아래 국가(주의), 민족(주의), 계급, 지역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균열과 전복을 시도했던 여성들의 언어와 실천까지 적극적으로 살피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인 것이다. 덕분에 독자들은 동아시아 여성들이 젠더, 국가, 지역 간 위계를 ‘월경’하며 ‘마이너리티’의 서사를 쓰고, 독자적인 ‘여성(주의) 전통’을 만들어가는 다채로운 양상을 흥미롭게 목도할 수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권역의 다양한 여성서사의 과거와 현재를 종과 횡으로 가로지르면서 여러 문제의식을 촉발하는 이 책에서 평자가 주목한 것은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동아시아 여성의 근대(성)과 근대여성문학(사)가 지닌 공통점이다. 중국의 5·4신문화운동 이후 신여성 담론의 향방, 중국 및 북한의 사회주의체제에서 여성문학이 국가주의에 전유되는 양상과 이후 여성문학이 그 국가주의와 교섭하면서 성차화된 자기만의 목소리를 쓰는 상황, 국민문학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여성작가와 여성문학의 이면을 분석한 1부의 여러 글들을 통해 동아시아 여성의 근대, 그리고 여성문학이 지닌 공통의 역사를 추출할 수 있다.
두번째로 전쟁과 폭력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여성주의적 글쓰기 방식의 동아시아적 공통성이다. “공식화되고 기록화된 증언들 사이를 미끄러져 흘러가는 충분히 ‘재현되지 못한 목소리’에 대한 고민”(34면)은 남성 중심의 질서정연한 언어체계를 파괴하고,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러 언어들을 겹쳐 쓰거나 한 텍스트 안에 이질적인 언어들을 산포시키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가령 손지연은 오끼나와의 지리적·역사적 특수성이 여성문학에서는 표준일본어 대신 오끼나와의 지방어인 시마꾸또오바와 조선어를 함께 사용하는 글쓰기 전략으로 발현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한다. 이다 유꼬는 유미리의 『8월의 저편』에서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형태로 쓰여 있는 점에 주목하여 언어의 자명성, 투명성을 의도적으로 깨는 시도가 재일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밝힌다. 이러한 글들을 통해 지역과 젠더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소수자들의 글쓰기가 여성주의적 글쓰기 전략과 이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세번째, 이 책의 문제의식이나 필자들의 작품 분석에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이나 최근 부상하는 교차성 페미니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 여성 공통의 역사와 경험을 다면적이고 다층적으로 읽어내는 시도”라든가 “차이와 균열 속에서 역설적으로 다양성과 공통성이 병존하는 동아시아”(122면)를 상상하는 일이 필요한 이유는 백지연이 적절하게 문제제기하듯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작동하는 식민성과 서구중심주의”(18면)가 지금도 지속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들의 문제의식은 탈식민주의와 이어진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필자들은 한결같이 “국가주의를 넘어선 동아시아의 연대”(122면)를 강조한다. 이 연대는 민족, 성, 계급, 인종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근대와 전후 동아시아 여성의 삶을 사유함으로써 가능할 터이다. 때문에 필자들은 동아시아 여성(서사)의 공통성을 주장하면서도 그 안에서 작동하는 차이‘들’을 섬세하게 분석하는데, 이런 접근법은 예의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과 같은 억압체계들이 서로 맞물리며 그 억압을 서로 강화하는 작동방식에 주목하면서 소수자들의 존재와 경험을 가시화하는 교차성 페미니즘의 인식론과 맞닿아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동아시아 여성서사의 공통성이 단일한 민족국가로 회수되지 않는, 그리고 회수할 수도 없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해 있다 하더라도 필자들이 제안하는 ‘동아시아적 연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동아시아 국가들끼리도 제국과 식민의 위계, 국가주의의 영향력의 정도가 다르고, 무엇보다도 소수자들의 역사적 경험이라든가 억압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차이와 균열, 혼종성에서 전복의 가능성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했던 식민과 피식민의 문제, 동화와 협력의 역사를 여성의 시각에서 성찰하는 것은 연대를 위한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여성문학장의 외연을 넓힘으로써 연대의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마지막 글은 앞으로 동아시아 여성(문학)이 지향해야 할 연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김미정은 ‘페미니즘 대중화의 정동’을 분석하면서 견고한 정체성 정치나 재현체계로 포섭되지 않는 독자 대중과 새로운 미디어의 부상에 주목하고, 여기서 새로운 관계성을 모색한다. 페미니즘 리부트로 촉발된 대중 페미니즘의 시대에 동아시아 여성(문학)은 아카데믹한 문학비평장뿐 아니라 독자의 정동과 공명하면서 연대의 자리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 방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