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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변경희‧아이다 유엔 웡 엮음 『패션, 근대를 만나다』, 사회평론아카데미 2022

우리는 우리가 입는 옷 속에 살고 있다

 

 

허윤 許允

부경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huhu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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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혼란기에 대부분의 남성과 모든 여성은 자신의 주변 환경을 구성하는 현재의 조건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입는 옷 속에 살고 있다.”(장 아이링 「갱의기」, 1943)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장 아이링은 청삼(치파오)에 관심이 많았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에도 홍콩에 있는 친구에게 디자인을 보내서 맞춰 입을 정도였다. 그에게 청삼은 인종적 정체성이자 자부심이었다. 중국 여성을 상징하는 의복이 된 청삼은 아시아인들이 서양의 근대성과 맞설 때 무기가 되어주었다. 장 제스의 아내인 쑹 메이링은 미국 방문 시 세련된 청삼을 입고 이국적인 아시아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유창한 영어로 연설해 근대화된 아시아를 전시하기도 했으며 국제펜대회나 유엔회의 등에 참석한 한국 여성들도 늘 한복을 갖춰 입었다. 국제사회에 선 여성들이 전통 복식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환유하는 장면을 우리는 자주 접한다.

변경희와 아이다 유엔 웡(Aida Yuen Wong)이 편찬한 『패션, 근대를 만나다』는 패션을 공동체에 소속감을 부여하고, 서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널리 반복적으로 의존해온 다중적인 매체로 간주한다(19면). 패션의 역사에는 몸과 섹슈얼리티, 권력과 통제, 예술과 대중문화 등이 얽혀 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전통 복식과 근대(서양식) 복식의 공존 및 융합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전근대 시기에는 지위, 지역, 계층, 성별에 따라 의복의 형태, 디자인, 색상 등이 세세하게 결정되어 있었다. 이후 민족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국민 개념이 생겨나면서 복식의 의미가 달라진다. 근대성과 함께 들어온 양복은 개성과 자유, 평등을 상징했지만 근대화를 서두른 국가들은 서양식 복식을 강제하는 과정에서 강한 저항과 마주해야 했다. 압도적인 서양의 근대성이 각 나라의 민족 전통을 비합리적이고 불편한 것으로 간주했고, 아시아인들은 이에 맞서 전통 복식을 고집했다. 그야말로 근대성과 정체성의 대결이 의복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책은 이 갈등을 초국가적인 맥락에서 다시 읽을 것을 강조한다. 교복이나 제복의 근대화, 제례복의 효과, 머리장식이나 부채 같은 사치품의 성별 수행성 등을 통해 의복의 문화를 살피는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부터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문화사, 미시사와 관련된 작업들이 활발히 진행된 바 있다. 여성 매체를 분석하여 여성에게 요구되는 스타일이나 신체를 관리하는 방식 등을 분석, 기록한 것이다. 『패션, 근대를 만나다』는 이러한 작업을 서양식 복식이 유입되던 근대 초기 중국, 대만, 홍콩, 일본, 조선 등의 동아시아 국가로 확대해서 세밀하게 추적한다. 일본은 교복, 경찰복, 군복 등 제복을 도입함으로써 서양식 복식을 대중들에게 보급했고, 교복의 대량생산을 통해 근대식 산업을 이식했다. 식민지에서는 이러한 제복이 민족차별과 연결되기도 했다. 한편 전통 복식은 제국의 시선에 의해 성별에 따라 성애화되었다. 펑퍼짐한 만주족의 의상 청삼은 근대화 과정에서 몸에 붙는 의상으로 바뀐다. 건강한 몸을 장려하는 사회개혁에 부합하는 방향의 수정이었지만, 가부장적 시선의 중국 남성들은 이를 문란하다고 보기도 했다. 청삼의 상징이 된 옆트임도 활동하기 편하게 도입된 것이었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후 청삼을 입은 여성이 등장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성공 또한 순수함과 관능적인 유혹이라는, 아시아를 바라보는 서양의 판타지가 얽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변화한 청삼으로 인해 확보된 신체적 자유는 여성들에게 해방구가 되었다.

책은 이처럼 복식의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식민화, 젠더화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경험한 자유에 의미를 둔다. 예를 들어 부채는 원래 남성들의 장신구였는데, 사교계가 생기고 여성들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면서 여성들에게도 부채를 드는 문화가 생겨났다. 사교계는 이전까지 공동체(사회)를 가질 수 없었던 여성들에게 해방구가 되었고, 부채 역시 남성성을 전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비록 사교계가 여성들의 연애와 결혼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한계가 있지만, 이를 통해 여성들이 집 밖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쑨 춘메이의 「시각문화로 읽는 20세기 타이완의 패션」이다. 1920~30년대 타이베이에 거주하는 엘리트 여성들은 남성 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는 문화를 만들었다. 남성의 복식을 따르는 ‘가르송’ ‘톰보이’ 스타일의 패션은 사진 촬영이라는 특별한 사건을 통해 다른 정체성을 시험해보는 자리가 된다. 서양에서도 여성 참정권자들이 ‘바지를 입는 여자들’이라는 비난을 들었던 것을 상기해보면, 여성이 바지를 입는다는 행위 자체가 성별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여성은 패션을 통해 젠더를 횡단할 수도 있었다.

『패션, 근대를 만나다』는 의복의 수행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의복을 변해가는 사회상을 표현하는 동시에 수행성을 가진 매체로 재조명한다. 특히 아시아의 식민지화와 패션의 변화를 겹눈으로 읽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식민지 문화에서 남성은 양복을 입고, 여성은 전통 복식을 한 이미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지배국 남성이 피지배국 여성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나타난 피지배국 여성의 연기(performance)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의 전통 복식은 근대 상류층 여성들이 자존감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수행한 민족주의적인 행동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런 양가성을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게다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근대 복식을 풍성한 이미지 자료를 통해 다루고 있어 독자들의 눈길을 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복식은 대부분 상류층 여성과 남성들을 위한 것이다. 최첨단 유행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지만, 다양한 복식의 실험이 상류층에게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가르송’이 일시적 이벤트가 아니라 삶인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한 여성/남성들이 생계를 위해 성별을 바꿔 여장남자, 남장여자가 되는 경우가 더 흔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수자들의 패션은 책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패션의 의미를 다소 좁게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자체가 수행적 의미를 갖는다면, 그 옷의 계급적 다양성 역시 의복의 수행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