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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민규 朴玟奎

1968년생. 2003년 문학동네작가상으로 등단.

소설집 『카스테라』 『더블』, 장편소설 『지구영웅전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핑퐁』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등이 있음.

kazuyajun@hanmail.net

 

 

 

팅커벨

 

 

왼팔을 잃은 그리스도1

사막을 지나

광활한 황무지로 접어들었다.

세분화된 행정코드명이 존재하지만

나는 이곳을 브라질이라 부른다.

 

과거의 언어는 아름답다.

그런 이유다.

 

전혀

내 관할이 아닌데 농담처럼 이곳을 날고 있다.

대표적인 위험지역이다.

기상 상태를 보여주는 여러 수치들이

이를 증명하듯 불안하게 깜박이고

요동치는 그래프와 경고음...

본청과의 교신이 끊어진다.

나도 한동안

 

눈을 깜박인다.

예기치 못한 먼지 폭풍이다.

셔틀을 급히 감속하고

겸허히, 나는 셔틀의 고도를 낮춘다.

한껏 낮춘다.

크랙(crack)2이 발생한 현장까지

한참의 거리가 남아 있지만

먼지에는 장사가 없다.

 

장사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정말이지

 

농담인 줄 알았다. 쑨으로부터 크랙 얘기를 듣는 순간 절로 든 생각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적어도 내 관할에서는 지난 백여년간 한번도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체감상 고대의 전염병이 다시 돈다는 말을 들은 것과 진배없었다. 하기야 쑨이 농담을 할 리 없다. 파충류의 이마에서 털이 자라면 자랐지 쑨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 본청엔 주로 그런 인간들이 모여 있는데 쑨은 특히나 그런 인간이다. 업무 조율을 요청할 새도 없이 이미 발생 지점의 좌표와 자료들이 내게로 넘어온 상태였다. 긴급동원령이 하달된 셈인데 전송된 자료마다 최고 레벨의 중요도가 표시되어 있다. 처음 겪는 일이다. 퓨어3... 인명이 걸린 사안이니 당연하다 여길 수 있겠으나, 나는 생각한다. 지금 이 상황이 농담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농담이란 말인가. 더는 비행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착륙 레버를 당기며 긴 한숨을 내쉰다. 오늘은 2681년 7월 12일. 끝내 인류가 지구를 탈출하기 사흘 전이다.

 

여러 단계에 걸쳐

이미 상당수의 인류가 눌4로 이주를 마쳤고

이제 마지막

남은 사람들의 차례가 온 것이다.

동료들 사이에 떠도는 이런저런 말들은 있지만

물론 내게도

해당되는 사안이다.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가(개별적으로) 학습한 고대어에는

사안이다, 사안일 것이다, 사안이어야만 한다 - 와 같은

여러 표현들이 있는데

이를 세밀히 판가름할 정도로 조예가 깊지는 않다.

고대어는 아름답다.

그러나 어렵다.

 

내 이름은 레띠씨아. 공무관이다. 정확히는 레띠씨아 E311451tx381s라는 긴 이름을 가졌지만 풀네임을 쓰는 공무관은 아무도 없다. 최일선에 배치된 하급요원이지만 민간인들과는 확실히 구분된 지위에 속해 있다. 그리고 역시나, 대이주(大移住)를 눈앞에 둔 인류의 한 사람인 것이다. 이틀만 넘기면 그만이었다. 정확히는 54시간 28분 36, 35, 34... 초가 남아 있다. 시간은 흐른다, 줄어든다. 내가 속한 S1A지구(地區)의 이주선이 날아오를 시간 말이다. 탑승을 위한 소집 등 절차를 따지자면 이틀도 남지 않은 게 엄연한 사실이다. 오늘 일정이

 

그래서 이곳의 마지막 임무가 될 거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본청에서 지령이 온 것은 RT091S기상관측탑의 수리를 끝내고 기지로 막 귀환하던 때였다. 느닷없이 크랙이라니... 긴급동원이라니... 아마 누구라도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기운이 심상찮은 커튼5을 바라보며 나는 어렵게... 혹은 겨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운명의 장난’이라는 고전 속 어휘를 생각해낸다. 안정을 얻기 위함이다. 그런 이유다. 상냥한 대기와 온화한 기후, 곡물과 나무란 것이 자라던 푸른 들판... 축복의 시대를 누렸던 언어에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 코드명과 상황번호가 대부분인 현재의 상용어에 비해 확실히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 몰라도 그래, 운명의 장난이야. 랜딩 기어를 내리며 문장을 읊조리자 거짓말처럼, 혹은 운명의 장난처럼 마음이 누그러진다. 매뉴얼은 간단하다. 눈앞의 저 커튼 너머... 어딘가 있을

 

자신의 요정을 잃어버린

한 인간을

어떻게든 찾아

생환시키는 것이다.

 

말은 쉽다. 그러나 눈앞의 저 풍경... 장엄한 폭포처럼 쏟아지는 회갈색의 분진과... 멀리서도 이를 꿈틀이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보이게 하는 광풍과 난기류... 성난 혈관이 돋은 듯 군데군데 섬광이 내비치는 오렌지빛 하늘... E4 레벨로 측정되는 폭풍을 보고 있노라면... 마지막 임무라는 생각보다는, 이것이 마지막이란 생각이 절로 들기 마련이다. 쯔안이 떠오른다. 함께 고대어를 학습하던, 특히 고전에 조예가 깊어 내겐 매우 특별한 동료였다. 신앙을 가진 유일한 공무관이었고 매사에 앞서 성호(聖號)를 긋던 그녀였다. 그리고 어느날... TX314S지구의 기상관측탑 근처에서 셔틀과 함께 추락, 산화하였다. 갑자기 불어닥친 E2 레벨의 먼지 폭풍 때문인데

 

6년 전 일이다. 그러나 마치, 엊그제 일 같기도 한 6년 전의 죽음이다. 흥미 반 장난 반으로 기도를 배웠던 동료들은 그후로 누구도 성호를 긋지 않았다. 앵커 포지션6을 충분히 잡아주고 지진계의 수치를 확인한 후, 나는 폭풍의 동선을 다각도로 점검한다.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쯔안이 만난 E2 레벨엔 못 미치지만 포화도 및 몇몇 요소가 E2에 근접하는 엄청난 폭풍이다. 무엇보다 커튼이 드리워진 지역이 실로 광범위하고... 하물며 언덕과 협곡을 낀 지형이다. 오래전 도시라 불렸던 수많은 잔해들, 복잡한 장애물도 지나야 하는 거겠지...

 

물러서고 싶어도

물러설 자리가 없는 것이 공무관이다.

나는 세상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세상의 오른손이다.

 

공무관 선서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계속 분석을 이어간다. 쯔안은 말했다. 우리의 선서문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난해한 경전 구절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이는 자취를 감춘 종교의 꼬리를 물었을 만큼 공무관의 역사가 깊다는 증거겠지만... 그래, 덕분에 그리스도란 존재... 고대의 흔적을 알아볼 수도 있는 거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곁에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에겐 왼팔이

 

왼손이 없었다고 말이다. 쯔안의 답변은 무엇일까. 쯔안이라면, 이 상황에서 또 어떤 판단을 하게 될까... 오른손이란 무엇이며... 그녀는 왜 무리한 진입을 해야만 했던 걸까... 본청과의 교신 시도... 팅커벨의 위치 추적을 동시에 하고 있지만 어느 쪽도... 시간이 흐른다. 줄고 있다. 그리고 더는... 생각이 진행되지 않는다.7 아무것도 모르는 왼손처럼, 나는 오른손이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진행한다. 중요한 건 시간이다. 폭풍이 유지될 예상 시간은 10시간 남짓, 그러나 느긋이 앉아서 기다릴 여유가 없다. 팅커벨의 신호는 끝내 잡히지 않고... 따라서 대상의 상태, 생사조차도 파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주선의 탑승 절차가 시작되기 전까지 복귀를 해야 한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만... 답이 없다, 결국 나는 폭풍 속으로... 눈앞의 저 커튼을 뚫고, 가로지르기로 결심한다. 바이크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래, 매 순간 직관적인 주행이 가능한 바이크야말로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일 것이다. 셔틀에 수납된 에어볼 바이크를 내리고 나 역시 땅으로 내려선다. 모니터맵8의 여러 수치에 경고등이 들어오지만... 시동을 건다, 그리고 에어볼이 예열되기까지 주어진

 

약간의 시간

바이크에 걸터앉은 채

나는 성호를 긋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6년 만에 그어보는 성호다.

6년 전의 쯔안도

아마 이렇게

눈앞의 폭풍을 마주했을 것이다.

 

힘주어 나는

쓰로틀(액셀러레이터)을 당긴다.

 

 

내가 내린 선택을 본청은 모를 것이다. 최고 레벨의 중요도 - 커튼 너머 어딘가에 있을 한 인간도 알 리가 만무하다. 하지만 나는 달린다, 달리고 있다. 쉴 새 없이 가속을 하며 그야말로 낯선 임무... 인명 구조와 크랙에 관한 자료들을 검토하고 숙지한다. 크랙의 자료는 특히 방대해서 모니터맵의 스캔선이 일종의 조명처럼 헬멧 안을 환히 밝힌다. 달린다, 나는 달린다. 신경을 써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모니터맵과 연동된 상태로 나는

 

촉각이 곤두서 있다. 물보라가 인 듯 주변이 자욱한데, 바이크의 분사 반동으로 솟구친 지표면의 살인먼지다. 대기 중의 먼지와는 또다른, 더 치명적인 방사능과... 독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시작에 불과하다. 불분명한 잔해와 능선들, 그외 수많은 변수를 감안한다면 현장 도착이 언제일지 그조차도 미지수다. 먼지 폭풍은 결코 직진을 허락하지 않는다. 흔들리고 떠밀리고 튕겨나고... 마치 거대한 호밀빵 속에 바이크를 처박듯... 숨 막히고 답답한 진입을 시도하고... 가까스로... 다시금 선회하며 조금씩 방향을 잡아가는 주행이다. 리볼버9의 회전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에어볼과 자이로 센서의 상태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나는 달린다, 목적지까지 직선거리로 겨우 8킬로미터를 왔을 뿐인데 모니터맵에 표시된 실제 운행거리는 192킬로미터를 찍고 있다. 지진계의 수치가 순간 요동을 쳤지만... 달린다, 달려야 한다. 그리고 나는... 모니터맵 상단에 떠 있는 작은 얼굴을 확대한다.

 

어린 소녀다.

 

안나 킴. 16세. 56.4퍼센트 동양계. 6.5퍼센트 코카서스계...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수호요정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한 인간을 눈에 새긴다. 크랙의 역사를 알기 위해선 팅커벨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자료에 따르면 고대에 개발된 이동형 통신기기가 그 시초라 한다. 기술의 진화와 함께 기기에는 인공지능이 추가되었고, 말하고 듣고 대화하고 판단하고... 점차 별도의 전원 없이 인체에 흐르는 미세전류만으로 구동이 가능해졌으며... 폰 앤 체인이란 특허가 도입되면서 마치 달처럼... 부양한 채 사용자의 몸 주변을 언제나 공전하는 작은 인공위성의 형태로 진화하였다. 반짝이고 말하고 언제나 단짝인 그 기기를 사용하며

 

아마도 누군가는 요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곧 제품으로 실현되었고... 정말이지 요정으로 보이는 기기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었다. 2172년에 첫 등장한 그 기기를 세상은 ‘팅커벨’이라 불렀다. 전화기의 역사가 뒤바뀐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한한 확장성을 지니고 있었다. 육아에서 교육, 상담과 안내, 위험 예방과 건강 체크, 정보 제공과 수집, 사고 형성과 사회활동... 결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한 인간과 함께하는 요정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크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22세기의 크랙은

 

대부분 범죄와 연관... 아니,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의 무질서한 범죄들... 강제로 요정을 크랙시켜 정보를 팔거나 몸값을 요구하는... 또 누군가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리는 수단... 내지는 요정을 해킹해 포섭과 조종을 일삼는... 실로 방대한 고대의 범죄기록들이 지금껏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요정에겐 진화가 필요했다. 크랙에 대한 방어, 크랙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시도와 노력이었다. 지나온 세계... 인류의 역사를 알 수는 없다. 역사에 관한 한, 아무리 사소한 정보 열람도 공무관에게는 엄격히 금지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물론 열람이 가능한 자료도 있기는 하다. 허가받은... 혹은 허락된 역사만이 그래서 내가 아는 세계의 전부이다. 하지만 넘겨짚는 몇가지 사실이 있다.

 

여러번의 전쟁이 있었다.

23세기부터 이곳이

인간이 살기 힘든 끔찍한 행성으로 전락해갔고

25세기경에는 인간의 지능을 급격히 저하시킨

바이러스의 공격이 있었다.

 

공무관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의 역사를 알고 있다. 열람이 가능한 정보들은 아니지만, 임무를 수행하며 알게 되는 사실이다. 예컨대 크랙의 자료를 받아 보면 팅커벨을 전투에 활용한 예와 광범위하게 크랙을 유발시키는 무기 개발... 그로 인한 결과들이 빼곡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른 크랙의 유형 변화도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기 마련이다. 기후재앙이 일상화되고 인류의 지능이 저하되면서... 요정의 역할, 크랙의 유형에도 많은 변화가 일었다. 이제 팅커벨은 개개인을 통제하고 인류의 개체수를 유지하는 가장 요긴한

 

또 강력한 수단으로 진화를 한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고대의 종말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이... 그래서 살아남은 인류 전체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저마다의 요정 없이는 살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그후에도 크랙은 종종 발생했는데 이는 이를테면 ‘자살’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인간과 요정의 합의에 의한 크랙, 인간이 자신의 요정을 파손하거나 요정이 일방적으로 크랙을 일으키는...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그 결과가 사망에 이르는 일종의 비극이었다. 정확한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안정화를 거친 끝에 결국 인류가 크랙을 극복한 것이 지난 세기의 일인 것이다. 딱 한번

 

나는 팅커벨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

 

맡은 업무의 성격상 퓨어를 마주칠 일이 거의 없는데... 언젠가 제3통제구역의 노후시설 점검을 나가서였다. 작업 도중 우연히 통로 아래에 모여 있는 그들을 보았다. 제법 거리가 있는데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반짝이고 파닥이며 주인의 곁을 맴도는 요정의 존재... 요정에 이끌려... 요정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 민간인들을 볼 수 있었다. 특별한 기억은 아니지만...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위험과 불안으로 가득한 지표면의 세계와 달리... 주변에 조성된 인공숲과... 공격성이 전혀 없는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군집이... 각자의 요정들과 어우러져 묘한 느낌을 주었다. 퓨어들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서로를 마주하지도 않았다. 다만 소통이 필요할 경우, 마치 외교를 하듯 서로의 팅커벨이 만나 정보를 주고받는 모습이었다. 지금 갑자기

 

그 풍경이 떠오른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라진 왼팔... 왼손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다. 쯔안은 그 답을 알았을까. 갑자기 치솟은 기류에 의해 바이크가 붕~ 허공을 맴돌다 곤두박질쳤지만 자이로 센서의 기능이 아직은 완벽하다. 고도가 좀 높았을 뿐, 늘 겪는 일이 아니냐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달린다, 달려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줄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과연, 복귀가 가능할까? 생각의 추(錘)가 기우는 것도 사실이다. 고민 없이 나아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매뉴얼은 정해져 있고... 공무관은 운명처럼 매뉴얼을 지키고 완수하는 사람이다. 물론

 

이상한 점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아무리 하급요원이라도 그렇지, 인명 구조는 내가 속한 기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드 BE17에 속하는 내 경우엔 특히 그렇다. 그간 행한 1,726건의 공식 업무 대부분이 기상관측장비의 점검과 수리 보수였다. 그런 내게 ‘크랙’을 떠밀다니... 하물며 대이주를 눈앞에 둔 어린 소녀가 어떻게 이런 위험지역까지 들어왔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본청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주거지역을 이탈한 민간인이 이 먼 거리를 이동할, 동안, 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도마뱀처럼 의문점을 나열할 수 있겠으나... 이 또한 부질없는 생각이다. 공무관이라면 누구나

 

10이 사라진 사실을 알고 있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시스템의 오류와 빈틈

한세기 만에 발생한 크랙 역시도

어쩌면 움의 부재가 원인일지 모르겠다.

그래, 다른 말이 필요치 않다.

운명의 장난이다.

 

인류는 최선을 다해왔다.

이 끔찍한 행성이

우리에게 제공한 가혹한 환경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류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이는 내게도

해당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나는 「소풍」을 떠올린다. 눌랜드 워낭 11이 방영한, 모두가 좋아하는 시리즈물이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시즌 5를 최고로 치지만 나를 매료시킨 것은 단 한편의 짧은 영상... 시즌 2의 에필로그다. 어떤 각본도 없이 눌의 일상... 먼저 이주한 인간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담은 점이 「소풍」의 매력인데, 시즌 2의 에필로그는 그중 짧고 소박한... 고전미가 가득한 영상이다. 자전거를 탄 두명의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흙길을 달려간다. 애써 모두 찾은 단어들인데 ‘린넨’이란 고대의 천으로 만든 모자와 옷을 입고 있다. 나는 특히, 그 모자가 너무 좋았다. 아름다웠다. 그 모자를 쓰고 있는 그녀들의 웃음과 치마를 펄럭여주는 상냥한 바람이 좋았다. 자전거의 앞에는 단단한, 말린 식물로 만들었다는 ‘소풍바구니’란 것이 걸려 있는데 어떤 커버나 안전막 없이 노출된 그대로의 빵과 우유가 담겨 있다. 길의 끝자락에서 그녀들은 자전거를 세우고 촉촉해 보이는 흙

 

땅 위에

그냥 자리를 깔고

 

그 차림 그대로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영상이다. 눈이 부신다는 듯... 모자를 벗은 그녀들이 자신의 손을 이마에 대고 살짝... 손그늘 속에서 눈을 찡그리는 그 모습이 나는 좋았다. 너무 좋았다. 고대의 모든 것이 이 속에 담겨 있다 생각했으며... 눌로 건너가... 그녀들과 똑같은 차림으로 길을 달리고... 눈을 찡그리는 나 자신을 상상했다. 언제나 그렸던 모습이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분진과 연기 속에서... 이제는 피부의 일부로 느껴지는 슈트와 헬멧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살짝 찡그리며 하늘을 바라본다. 아마 여기서도 보이겠지? 이틀 뒤

 

거대한 소음을 일으키며 날아오를

마지막 이주선을

 

그래서 그려본다.

달린다, 나는 달린다.

 

 

레띠씨아?

 

G813026ty962n이란 인식명이 먼저 뜨고, 곧바로 모니터맵에 디에고의 이름과 정보가 떠올랐다. 확실히 디에고의 목소리다. 디에고? 인사를 받으면서도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상대도 분명 인식명으로 나를 파악하고 통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본청과 교신이 끊어진 상태인데... 그렇다면 기기 간 연결이고, 이는 그가 매우 가까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내가 아는 디에고는 현재 수감자의 신분이다. 상당 기간 금지된 자료를 열람해오다 본청에 발각되었고... 그것이 4년 전 일이다. 네가 어떻게? 묻기도 전에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디에고의 질문이 날아든다. 나는 잠시 답변을 망설인다. 모니터맵에 남게 될 수감자와의 통화기록은 자칫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주선 탑승이 거부될 수도 있는 사안이라 나는 순간 판단을 보류한다. 혼란스럽다. 레띠씨아? 디에고가 다시 물었으나 좀더, 상황을 파악함이 옳을 것이다. 기기 연결이 확실하다. 디에고는 가까이 있고 역시나 바이크를 운행 중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상위 기종이다. 정식 등록된 본청 소속의 바이크이고 점검일, 일련번호 등 아무런 하자가 없는 기기이다. 실은

 

반가운 목소리다. 오랜 시간 함께 고대어와 고전을 학습하던 멤버였고... 어떤 의미에선 쯔안의 연인이었다. 그가 금지자료를 열람한 데에는 쯔안의 죽음이 관련되어 있을 거라 나는 믿었다. 훌륭한 공무관이었다. 수감자가 될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상황을 짐작한 듯 디에고가 먼저 입을 연다. 서로를 볼 수 없는 분진 속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는 폭풍의 한복판에서... 디에고는 우선 나를 안심시킨다. 이미 2년 전부터 공무관 업무에 복귀했다고... 본청이 수감자 전원을 동원해 새로운 부서를 꾸린 거라고

 

디에고가 말한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기 연결을 통해 확인한 너무나 많은 정보가 디에고의 말을 입증해준다.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자연스러운 인사... 우리가 심취했던 고대 스타일의 인사를 다시 나누고... 지금의 내 상황을 디에고에게 설명해준다. 크랙? 놀라면서도 디에고는... 놀라지 않는다. 해도 너무하는구먼, 수감자들은 그렇다 쳐도 너 같은 기술직까지 동원될 줄이야... 디에고가 웃는다. 내겐 아직 웃을 여유가 없는데... 지금 그쪽으로 갈게, 레띠씨아. 폭풍 속에서 그가 말한다. 아마 목적지도 비슷할 거야,라고도 했다.

 

디에고와 나는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두대의 바이크가

자이로 센서를 연동하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운행이 안정되었다.

튕겨날 때의 굴절

진입 시 커브의 각도도 많이 줄었다.

 

시간과 거리가

그만큼 줄었다는 얘기이고

줄어든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운명과 장난... 너무나 동떨어진 두 단어의 간극이 상당히 좁혀지는 시간이었다. 디에고의 말에 따르면, 이미 수년 전부터 크랙의 발생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갑작스런, 원인을 알 수 없는... 대륙을 가리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크랙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팅커벨... 그렇게밖에는 판단할 수가 없는 거야. 유형은 거의 동일해. 인간을 끌고 위험지역 내부로 최대한 들어간 다음, 그러니까 셔틀이든 뭐든 이동수단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들어간다는 거지. 왜 거기까지 인간을 끌고 가느냐. 이유는 간단해. 어떤 이동수단이든 탑승을 위해선 등록된 인간의 코드가 필요하니까. 그리고 한계선에서 크랙을 일으키는 거야. 인간은 버려지고

 

요정의 행방은 알 수가 없지. 현장에 도착하면 상황은 거의 비슷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거나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인간만 남아 있을 뿐이지. 그런데 더러 엄마 잃은 아이처럼 셔틀 밖으로 뛰쳐나온 인간들도 있다는 거야. 최소한의 보호복이나 보호구도 없이 말이지. 셔틀이 갈 수 있는 한계선이라면 그 외부가 어떻겠어? 구조나 생환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인 거야. 난리가 났다고 해. 본청의 문제 정도가 아니라 눌에 건너가 있는 연합 차원의 문제였던 거지. 처음엔 간단히 해결될 사안으로 보였어. 퓨어... 소위 말하는 민간인들은 어느 지구를 막론하고 철저히 격리되어 보호받는 존재들이니까. 때문에 격리구역 자체를 봉쇄하면 그만이란 판단을 했던 거야. 그런데 움조차도 간과한 사실이 있었지. 그간 요정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통제를 해온 거잖아. 팅커벨이 개개인과 움을 연결하는 파이프라면... 그 경로를 통해 당연히 한쪽으로만 물이 흐른다고 착각을 해온 거야. 7차 대이주... 마지막 이주가 가시화된 시점이었어. 그간 물이 반대로도 흘렀을 수 있겠구나 자각했을 땐 이미 돌이킬 수가 없게 된 거야. 대이주의 플랜이 얽혀 있는 이 거대한 시스템의 암호, 신호체계를 지금 당장 바꾸거나

 

교체할 수가 없었던 거지. 팅커벨은 이미 모든 감시와 차단, 잠금, 인증 등을 푸는 마법의 열쇠를 지니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철저히... 자신의 목적지까지 인간을 이용하고 내버린 셈이지. 사태를 파악한 연합은 바로 대응을 달리했어. 이제는 연합이 팅커벨을 버리기로 한 거야. 연합의 입장에서 중요한 건 요정이 아니라 남은 인간이었어. 생식을 통해 이어져온 본연의 인간... 인체인 셈이지. 불확실한 정보를 첨언하자면... 앞서 이주를 한 대부분의 퓨어들이 행성 적응에 실패했다는 얘기가 있어. 다시 말해 인류의 문제인 거잖아. 남아 있는 인간의 몸, 과학이 손대지 않은 순수한 유전자가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상황이다, 이 얘기야.

 

연합은 극비리에 이를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했어. 크랙에 대응해서 인간을 온전히... 살아 숨 쉬는 상태로 회수하고 보전하는 부서를 말이야. 전대륙에 걸쳐 수많은 공무관이 차출되었고 2년 전부터는 수감자들까지 전원 복직... 이 일에 매달리고 있어. 당연한 결과였지. 하나부터 열까지 위험지역에서 행해지는 임무잖아. 날이 갈수록 크랙의 빈도수는 높아져가는데 공무관의 수는 줄기만 했으니까. 그러니까... 사망자가 속출했다고 해. 쯔안의 경우처럼 말이야. 디에고의 입에서 쯔안이란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나는

디에고를 쳐다보았다.

바로 곁, 불과 2~3미터의 거리인데도

그의 형체가 불분명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먼지 때문이다.

 

쯔안과 나, 디에고는 섹스를 해본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인데 정확히는 디에고와 나, 디에고와 쯔안의 순으로 진행을 한 것이다. 셋 다 열의가 있었다. 퓨어, 특히 고대의 인간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픈 열의 말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가 없었으므로 어떻게든 셋이서 해결을 해야 했다. 가능은 했다. 하지만 왜, 이런 행위가 중요했는지 이해는 할 수 없었다. 셋 다 같은 생각이었다. 그럼 말이야, 혹시 너와 디에고가 가까워지면 내게 ‘질투’란 게 생길까? 쯔안에게 나는 이상한 제안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쯔안과 디에고가 연인이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디에고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고, 쯔안과 나는 줄곧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토로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 어떤/변화도/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설계 자체가 다른 인간임을 납득하기까지 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디에고가 쯔안의 이름을 언급하자

 

화악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누군가 내 얼굴에 불을 붙이고 연기가 새 나올까 바이저(헬멧 창)에 락을 걸어 헬멧을 덮어씌운 느낌이었다. 착각이나 오류는 아니었다. 헬멧 내부의 쿨러가 작동을 했고... 바이저에 서린 김이 서서히 옅어졌기 때문이다. 분진... 인화성을 띤 화학물질이 내부로 유입된 건 아닌지 체크를 했다. 슈트의 성능이 아무리 완벽해도... 결국 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모공과 폐부터 세척을 해야 할 것이다. 디에고는 말했다. 바로 어제가 절정이었다고... 다시 말해 이주 일정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던 거야, 반란이라도 일으키듯 도주와 크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디에고가 말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처한 상황... 운명과 장난이라는 두 단어의 거리를 상당히 좁힐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두 단어가 같은 의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치듯 이런저런 대화를 더 나누던 끝에... 상당수의 공무관은 지구에 남는다는 디에고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질조사, 수질측정, 기상관측... 아무튼 환경 시스템과 관련된 부서는 전부 남는 걸로 알고 있어. 이주를 마친다 해도 연합은 여전히 지구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얘기겠지. 시간이 흐르면 이곳의 대기와 환경도 언젠가 안정을 되찾을지 모르잖아. 그러니 그 변화를 파악할 시스템을 계속 보수하며 유지하고 싶은 거라고. 어쩌면 너에게 동원령이 떨어진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몰라. 이주 대상이 아니니 부담이 없는 거잖아. 아마 확실한 얘길 거야. 왜냐면 수감자 출신들에겐 일찌감치 부서 배정을 시작한 상태거든. 전부 환경과 관련된 부서들이야. 이제 더는 크랙도 없을 테고... 임시 복직을 시킨 우리의 경우 그 소임을 다한 거니까, 안 그래?

 

별다른 답은 하지 않았다.

동료들 사이에 떠돌던 이런저런 말들을

다만 디에고의 입을 통해

또 한번

들었을 뿐인 거니까.

 

하긴 여기 남는 편이 더 좋을지 몰라.

디에고가 말했다.

수감자 동료 중에 눌랜드 워낭에서 일하던 친구가 있거든.

얼굴 보면 너도 알지 몰라.

이따금 방송에도 얼굴을 내민 친구니까.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알아?

눌랜드 워낭이 실은 지구에 있대.

본청 지하에

커다란 세트장이 있다더군.

 

그나마

폭풍의 위력이 다소 감소하였다.

E6의 레벨이라면

충분히 견딜 만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달린다, 달릴 뿐이다.

 

 

소녀는 무사했다. 다행히 타고 온 8인용 셔틀의 뒷좌석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디에고의 말 그대로였다. 얼간이였다. 안나?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매뉴얼에 따른 조처를 하고 미리 보고서를 전송해두었다. 더는 들어갈 수 없는 위험지역의 끝자락이다. 아무리 폭풍이 누그러졌다 해도 본청과의 교신이 이어질 리 만무했다. 커튼의 끝은 어디일까. 이렇게나 깊숙이 들어왔는데도 여전히 분진과... 먼지의 커튼 속에 한참을 서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지만 모니터맵으로 보는 현장은 아수라장 그 자체다. 보이지 않는 커튼 너머... 가깝게는 수십 미터, 또 멀게는 수 킬로미터 간격으로 한데 모여든 곤충떼와 같은 크랙 현장들이 빛을 내며 점멸하고 있었다. 레띠씨아? 디에고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요는 본청 산하의 수송선이 도착할 예정이니, 너도 이를 통해 복귀를 하라는 얘기였다. 거기선 교신이 돼? 묻자 아니, 어제 미리 예정된 작전이었어 - 라는 답이 돌아왔다.

 

고마워. 나는 답했다. 말 그대로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어서 나도 우두커니 소녀와 마주 앉아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상한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푹 숙인 얼간이 안나를 쳐다보다... 그녀에 관한 자료... 그녀의 팅커벨이 여지껏 전송해왔을 소녀의 삶을 스캔해본다. 요정과 소녀가 나눈 말들... 일상의 추억과 관심사들... 따뜻한 배려와 격려... 안부, 또 안부 그리고 웃음소리... 그 어디를 뒤져봐도 지표면에서 실제 매일 일어나는 재앙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구름 한점 없는’이라는 고전의 문구가 떠올랐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구름 한점 없는 얼간이 안나의 눈을 쳐다보며

그녀 몰래 나는

그녀의 삶을 생각했다.

 

에밀이라는 동료와 함께 디에고가 찾아온 것은 약간은 무료하다, 그런 기분이 들 무렵이었다. 현장을 떠나도 돼? 묻자 바로 코앞인걸, 게다가 우린 전담부서라구, 2년째 호흡을 맞춘 동료들이 모였는데 뭐가 걱정이야,라고 디에고가 답했다. 이쪽은 에밀, 여긴 레띠씨아... 둘만 있을 땐 몰랐는데 에밀이 합류하자 디에고의 변화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공무관이라면 현장을 떠나지 않고... 뭐가 걱정이야 같은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변화는 수감자가 되었다가 다시 복직한 공무관만이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친구 모르겠어? 에밀은 디에고가 말했던 눌랜드 워낭의 종사자... 공무관이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 방송은 전부 지구에서 제작되는 거예요. 에밀은 자신이 「소풍」의 시즌 1과 시즌 2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했다. 정말이요? 나는 물었다.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헬멧 속의 얼굴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신 시즌 2의 에필로그 있잖아요, 그 짧은 영상... 영상에 대해 물었다. 에밀은 잠시 난처해하더니 실은 시즌 2를 찍는 도중에 수감을 당했어요. 어떤... 일들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영상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제작은 여기서 하지만 거의 모든 시나리오는 눌에서 하달하는 거니까... 다들 모여 회의를 할 때 그런 비슷한 콘티를 봤어요. 에밀은 지나치게 진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이지 그를 「소풍」에서 보지 못했다. 디에고가 나를 찾아온 것은 실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꽤 오래 이 문제를 고민했고 지금이 이를 실행할 때라고 했다. 레띠씨아... 너를 다시 보게 된 게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거 같아서 말이지. 그리고 너라면 합류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디에고는 말했다. 에밀과는 뜻을 모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일이냐고 묻자 우리 오래전에 섹스를 해본 적 있잖아, 말하자면 그와 비슷한 일이야. 조심스레 디에고가 말했다.

 

디에고는 팅커벨을 쫓고 싶다고 했다. 이제 곧 이주선이 뜨고 나면 사실상 행정체계가 사라진다 봐도 과언이 아닐 거야. 묵묵히 명령만 수행하는 공무관들만 남는 거겠지. 지금 복귀하면 다시 나오기가 힘들어져. 하지만 여기서 사라지면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는 거지. 저 많은 요정들이 왜 크랙을 일으키고 사라졌는지 나는 꼭, 행방을 쫓아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거야. 요정이 향한 곳은 한군데야. 여기 한계선 너머의 들어갈 수 없는 곳... 다른 대륙에서 일어난 크랙도 마찬가지였어. 말하자면 지구 곳곳에 위치한 재앙의 중심... 거점 같은 장소지. 정보는 전혀 존재하지 않아. 들끓는 용암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르고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동공(洞空)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해. 팅커벨은 어쨌거나 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거잖아. 체인 기술도 그렇고 또 이를 통해 전달받는 미세전류가 반드시 필요한 구조를 가졌지. 그래서 가정컨대 나는 저 너머에 어떤 형태로든 생명체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모르겠어, 어떤 정보도 가능성도 없지만... 나는 확인하고 싶은 거야, 그저... 너무너무 알고 싶은 거지. 나는 공무관으로 돌아가기 싫고 에밀은 눌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뜻을 모았지. 네 생각은 어때, 레띠씨아?

 

디에고와 에밀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얼간이 안나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12

 

거절을 한 것은 아니지만

디에고는 이를 거절로 받아들였다.

 

이상하리만치

소녀의 동공이 풀려 있다.

 

 

달린다, 나는 달린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크랙이 발생한 까닭에 공무관들은 수송선을 타지 못했다. 얼간이 안나를 인계해주고 보고 승인 절차를 받을 때, 초이라는 공무관이 그렇게 말했다. 인계를 끝내고 수송선을 내려오자 디에고와 에밀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짧은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어쩌면 만남 자체가 짧은 인사였을 거라고 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정해진 매뉴얼을 따르자면 이제 개인적인 ‘복귀’만이 남은 것이다. 빠듯하긴 해도 충분히 시간 내 도착이 가능할 것 같았다. 폭풍도 거의 누그러진 상태여서 나는 곧장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짧다. 특히나 왔던 길을 생각한다면 ‘구름 한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하늘이다. 풍속과 지진계의 수치가 조금만 더 내려간다면 풀 모드의 자율주행으로 바꿔도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순조롭다. 셔틀이 있는 장소에 다다르면 본청과의 교신도 분명 재개되겠지. 순조로이 나는 달린다, 달리고

 

물론

 

마음에 걸리는 점이 아주 없지는 않다. 수송선이 떠나고도 주변은 어수선했는데 인간과 요정이 끌고 온 여러 이동수단... 그 많은 기체들을 회수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디에고와 같은 부서로 보이는 공무관들이 바삐 그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적어도 보름... 길게는 한달을 잡아야 끝이 날 사안인데, 디에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무런 동요도 없는 얼굴이었다. 공무관 모두가 이주하는 게 아니라는 소문이... 그래서 조금은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디에고는 도마뱀에 관한 얘길 내게 했다. 네가 본 것은 무어냐고... 내가 모르고 네가 아는 것이 무언지, 금지된 자료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다.

 

어쩌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어.

디에고는 말했다. 그러면서

인간이라는 연결고리...

인류의 역사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 도마뱀과 같다고 했다.

의도된, 혹은 예측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싹둑, 눈앞의 꼬리가 잘렸다 해도

 

그래서 아무리

의문을 가진다 해도

 

입에 물고 있는 게 뭐지?

삼키든가 뱉든가 자네 맘대로 하시게나.

 

눈앞의 인간은

혹은 역사는

어느새 이미 적당한 꼬리가 돋아 있기 마련이라고

디에고는 말했다.

 

아무리 맘대로 꼬리를 자른다 해도

그래서 누구도 꼬리를 자르지 않은 셈이지.

지구가 이 지경이 된 것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처럼 말이야.

 

우리가 이 일을 도와온 거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말이지.

그래서 다시는

공무관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거라구.

 

디에고와 에밀은 정말로 그 길을 간 걸까? 커튼 속의 커튼... 또 그 속의 커튼을 열고 요정에 홀린 듯 그 길을 가는 중일까? 풀 모드의 자율주행으로 바이크를 전환하고 나는 모니터맵에 저장된 「소풍」을 찾아 재생을 시작한다. 예정된바 내가 이주할 새로운 지구... 다시 시작될 고대의 삶만을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순간 바이저 너머의 적갈색 하늘과 대비되는 푸르른 하늘... 구름 한점 없는 투명한 하늘이 모니터맵 가득 펼쳐진다. 수없이 보아온 풍경이지만... 그러므로 수없이 보게 될 풍경일 거라 스스로의 의식 속에 말없이 성호를 그어본다. 「소풍」의 시즌 1이다. 고전적 의미의 ‘가족’들이 푸르른 들판에서 파티를 연다. 요리와 음료... 장식된 리본과 꽃들이 또다시 그들을 장식하는... 아마도 초창기 눌로 건너간 이주자... 그들의 후손일 것이다. 웃고 거닐고 음식을 권하는 그들 속에서

 

그리고 나는

에밀을 발견한다.

 

아니, 에밀과 무척

닮은 사람을 보게 된다.

 

 

달린다, 달리는 중이다. 나는 지금 디에고를 쫓는 중이다. 아니, 정확히는 사고현장으로 추정되는 지점을 향한 것인데... 사고현장이 아니기를 더 바라는 마음으로 쓰로틀을 당기는 중이다. 셔틀을 세워둔 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갑자기 모니터맵에 긴급신호가 표시되었다. 디에고의 바이크와 체결했던 연동 시스템을... 지금껏 해제하지 않은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파손. 링크된 바이크에 생긴 문제를 알려주는 신호였다. 수치상으로 볼 때 전파(全破)에 가까웠다. 바이크를 멈추고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얼간이.

 

누군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어떤 결정이라도 내려야 했다. 그리고 나는... 얼간이가 되었다가 공무관으로 복직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상당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커튼 너머의 커튼과 또 그 속의 커튼을 어떻게 열고 들어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격한 두통에 시야가 다 흔들렸고... 끔찍한 두려움에 수치를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의식을 잃을 정도의 진동과 자기장의 문제... 따라서 자이로 센서의 이상을 알리는 푸른 불빛을 보았고... 그리고 얼마나 그 공간을 지났을까. 달리고 있었다, 나는

 

일정한 지역을 지나고 나자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지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래서 더, 생소한 두려움이 일었지만 이제 현장이 코앞이었다. 바이크의 상태가 너무나 처참했다. 자이로 센서에 생긴 문제로 차체가 거의 지면에 내려앉은 상태였고... 끼익, 끽 이상한 소음과... 이제 거의 달린다고도 볼 수 없는데... 달리는 중이었다. 완만한 경사의 언덕이 나타났다. 그리고 저 멀리... 오르막의 중간쯤에 그을리고 흩어져 있는 잔해와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 디에고의 바이크였다. 삐걱대고 흔들리며

 

혼자서 그 길을 올랐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린넨 모자를 쓴 쯔안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소풍바구니에 빵과 우유를 담고

다 같이

소풍을 온 것이라 생각하며

그 길을 올라야 했다.

 

그러지 않고선 오를 수 없는 길이었다.

부상을 입고 서 있는 에밀을 볼 수 있었다.

파손된 헬멧을 말없이 손에 쥔 채

그는

디에고였던 디에고를 지켜보고 있었다.

 

쯔안이었던 쯔안 역시

어디선가

디에고였던 디에고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

나는 믿었다.

 

저만 운이 좋았어요.

 

어찌된 일이냐 묻지도 않았는데

오래전 눌에서 가든파티를 열었던 한 남자가

대답했다.

 

 

우리는 함께 디에고를 묻어주었다. 외부의 지표면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습기가 배어 있는 토양이었다. 한번 측정해보세요. 실은 저도 호흡이 멎어야 할 시기가 지났거든요. 부서진 헬멧을 들어 보이며 에밀이 말했다. 모니터맵 상단 가득히 데이터가 없는 수치들이 빼곡히 나열되기 시작했다. 고대의 대기 상태와도 맞지 않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데이터였다. 세밀한 분석을 위해서는 내가 모르는 장비들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헬멧을 벗어도 숨을 쉴 수 있는 대기... 공기였다는 사실이었다. 더 놀라운 건 지질의 성분이었다.

 

다육선인장.

 

가장 근사치로 제시된 이 분석이 사실이라면 이 일대는 지면이 아닌 식물의 표면이란 얘기가 될 것이다. 이리 와보세요. 보여줄 것이 있다며 에밀은 언덕의 끝까지 나를 이끌고 올라갔다. 순식간에 바이크가 허공으로 떠올랐어요. 그 직전에 엄청나게 치솟은 자기장 수치를 보긴 했지만... 무려 여기까지 날아와 추락을 한 거예요. 우리가 지급받은 바이크는 어지간해선 어떤 경우에도 탑승자를 보호하는 기종인데... 디에고에겐 그만 불이 옮겨붙고 말았어요. 저도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당시엔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디에고도 분명 이 광경을 봤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면 저도 보았으니까요. 허공에 붕

 

날아오른 바로 그 순간에 말입니다. 언덕 아래에는 움푹 파인 듯 연결된 광활한 분지가 있었고 그 중심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둥그스름한 돌기가 솟아 있었다. 우리가 딛고 선 이 언덕이 정말로 식물이라면... 어쩌면 분지와, 치솟은 저 돌기가 중심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돌기의 내부에는 신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호흡하듯 꿈틀대는... 살아 숨 쉰다는 느낌의 은은한 빛이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거대한 나무의 주변을 맴돌 듯

반짝이며 부유하는

수많은 팅커벨들의 군무(群舞)를

나는 보았다.

 

에밀도 나도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내려가볼까요?

에밀의 말에 아니, 아직은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자리를 깔고 앉듯

우리는 나란히 언덕의 끝에 걸터앉았다.

바람이 불어왔다.

먼지도 분진도 없는 바람

다만 바람인

 

바람이었다.

저는 저것이 지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돌기를 가리키며 에밀이 말했다.

어쩌면 지구는 자신의 지분

자신의 인간을 회수(回收)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굉음과 더불어

창공을 가로지르는 빛 하나를 나는 보았다.

이주선이었다.

그리고 실은, 이제 비로소 크랙이 이뤄진 거라

나는 믿었다.

 

소풍바구니를 내려놓듯

나도 헬멧을 벗어 내려놓았다.

애초부터 인간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자

쯔안이었던 쯔안도

디에고였던 디에고도 나란히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본다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눈부신 하늘이 아닌데도

나는 레띠씨아의 이마에

레띠씨아의 손을 가져다 대고

그 작은 손그늘 속에서

살짝

눈이 부신 듯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레띠씨아께서 보시기에

그 모습이 매우 좋았을 거라

생각했다.

 

에밀이었던 에밀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1. 리우의 예수상. 23세기부터 시작된 기후대재앙으로 지구의 환경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예수상은 25세기 중순경 끔찍한 재앙을 겪었고 그후 줄곧 왼팔이 없는 모습으로 방치된 상태다.
  2. 외적 혹은 내적 요인으로 인해 팅커벨과 인간이 분리, 괴리되는 현상을 칭하는 말.
  3. pure. 생식을 통해 태어난 고전적 의미의, 순정 상태의 인간을 뜻하는 말. 27세기엔 크게 세가지 범주의 ‘인간’이 있는데 브레이너와 휴머노이드, 그리고 퓨어가 그것이다. 브레이너는 두뇌만 보존되어 있는 인간인데 25세기경 Rx13바이러스의 습격으로 인류의 지능이 저하되면서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게 된 선대의 뇌들을 칭한다. 화자인 레띠씨아는 과거의 인력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체형 휴머노이드에 속하는 인간이다. 대부분의 공무관들이 이 유형에 속해 있다.
  4. NULL. 인류의 이주지로 선택된 목성의 위성. 2543년부터 단계별로 6차에 걸쳐 이주가 이루어졌고, 화자가 말하는 2681년의 대이주는 마지막 7차에 해당한다.
  5. 포화 상태에 이른 미세먼지와 분진이 특정한 기압대를 형성한 지역 혹은 대기를 칭하는 용어.
  6. 정박한 배가 닻을 내리듯 지각변동이 심한 지역에서 기체의 랜딩 기어를 최대한 안정적으로 고정시키는 작업이다.
  7. 공무를 목적으로 한 생체형 휴머노이드는 업무와 임무 완수에 반(反)하는, 혹은 지장을 초래할 사고(思考)를 할 경우 사고체계를 관장하는 회로에 일시적인 방화벽이 생성된다.
  8. 공무관들의 헬멧 내부에 장착된 복합정보기기. 대부분의 공무관들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장비이다.
  9. 화자가 탑승 중인 에어볼 바이크의 필터계. 미세먼지로 꽉 찬 미래의 대기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속 장비다. 튜브필터가 삽입된 24개의 홀이 차례로 회전하며 작용, 재생, 순환하는 구조인데 그 형태가 과거 권총의 회전식 약실과 닮았다는 이유로 ‘리볼버’라 불린다.
  10. UMM. 인류의 단일체제화를 가능하게 해준 인공지능의 이름이다. 2679년 6차 대이주 때 시스템 전체가 눌로 옮겨졌으며 그후 지구의 운영체계에 여러 공백이 생겨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류에게 단일체제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23세기부터 본격화된 기후대재앙이 원인이었다. 단일 국가나 단일 정부의 수립 없이 우선적으로 비상 공동 대응체계가 형성되었는데 대재앙과 질병, 식량난으로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점차 이 대응체계가 과거 국가의 역할을 대행하게 된 것이다. 대이주가 시작된 2543년, 살아남은 퓨어는 196만명에 불과했다.
  11. 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방송사다. 지구에 남아 있는 인류를 위해 눌의 긍정적인 소식을 지구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12. 각주 7에서 언급한-사고체계가 일시 차단당하며 나타난 현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