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이주혜 李柱惠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장편소설 『자두』 등이 있음.

leestori@hanmail.net

 

 

 

장편연재 4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시옷의 옛집에는 이름이 있었다. 온양집. 따뜻할 온(溫)에 볕 양(陽). 시옷은 만난 적도 없는 까마득한 옛날 어느 할머니가 온양이라는 곳에서 시집을 왔고 그때부터 집은 할머니의 호칭과 같은 온양댁 혹은 온양집이 되었다. 시옷은 아빠가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온양집에 짜장면 세그릇하고 탕수육 하나요’ 하고 주문하는 걸 듣고 자랐고 어쩌다 길에서 만난 어른들로부터 ‘네가 온양집 손녀딸이로구나’ 하는 소리를 곧잘 들었다. 온양이라는 지명은 온천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지만 집안 어른들은 문자 그대로 볕이 따사로운 집으로 해석하길 즐겼다. 남쪽을 향해 자리 잡은 집은 과연 볕이 너그러웠다. 시옷의 기억에 엄마는 자주 이불 홑청을 뜯어 빨아 햇볕에 말렸고 시옷은 햇빛이 어른거리는 새하얀 이불보 사이를 넘나들며 놀았다. 애써 빨아놓은 천에 먼지 묻는다고 할머니가 한마디 하면 시옷은 화단에 나와 아끼는 꽃나무를 돌보는 아빠 품에 숨어들어 입술을 삐죽거렸다. 장독대에 올라가 큼직한 항아리 하나하나를 공들여 닦던 할머니의 백발에 햇빛이 쨍하게 되튀던 모습이나 빨랫줄을 가득 널린 이불보가 눈이 부실 만큼 하얗게 펄럭이던 걸 생각하면 빛이 넉넉한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햇볕을 누리는 일이 얼마나 큰 호사인지 시옷은 온양집을 잃고 나서야 알았다.

새로 이사 온 군경묘지 근처의 집은 응달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온양집이라는 이름은 대대로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친척들, 동네 사람들까지 합의해서 불렀지만, 응달집은 오직 시옷만 알고 시옷만 (속으로) 부르는 이름이었다. 합의되지 않은 이름은 불리지 않으며 그러므로 이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의 시옷은 알지 못했다. 응달집에는 시옷네만 사는 게 아니었고 눈이 아름다운 (그러나 시옷의 발치에 침을 뱉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아이와 그애의 누나, 그리고 시옷과 엄마에게 구정물을 끼얹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그 아이의 엄마까지 함께 살았으므로 그 집의 이름을 정하려면 여럿의 동의가 필요했다. 시옷은 번거로움을 자처할 만큼의 힘도 마음도 없었기에 응달집이라는 이름을 혼자 짓고 혼자 불렀다. 온양집이 따사로운 햇볕의 집이라면 응달집은 말 그대로 그늘이 고인 집이었다. 야산 바로 밑에 자리 잡은 집은 늘 산 그림자에 갇혀 있었고 마당이라고 부르기에도 옹색한 손바닥만 한 공간으로는 집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빨래라도 말리려면 단층집 옥상에 올라가야 했는데 그마저 절반은 야산과 거기서 자라는 나무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그늘이 흥건한 집이었다.

시옷은 응달집에 살면서 처음으로 그늘의 색을 어떻게 칠할지 골몰했다. 여름방학 숙제로 방학 동안 한 일을 수채화로 그려가야 했는데 시옷이 한 일이라곤 이사밖에 없었으므로 하얀 도화지에 온양집과 응달집을 나란히 그리기로 했다. 시옷은 새집의 거실에 도화지와 수채물감, 팔레트, 붓, 물통을 늘어놓고 먼저 연필로 밑그림부터 그렸다. 도화지 왼쪽에 시옷이 태어나고 십년을 자란 온양집이, 오른쪽에 시옷이 이사 온 지 보름도 안 되는 응달집이 생겨났다. 시옷은 밑그림을 내려다보며 각 집의 색깔을 고민했다. 햇볕의 색이라면 마당 가득 널려 있던 이불 홑청의 백색이 떠올랐지만, 그늘의 색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시옷이 생각하는 그늘은 검은색에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불투명하지 않고 투명했다. 온양집이 투명한 백색이라면 응달집은 투명한 흑색이었다. 하지만 투명한 백색은 도화지와 같은 색이므로 칠할 필요가 없었고 투명한 흑색은 24색 물감 세트 안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칠하고 싶어도 칠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가능한 색이 현실에는 왜 존재하지 않는지 시옷은 답답했다. 지금 당장 집 뒤꼍으로만 나가보아도 건너편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물 같은 흑색을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응달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도 시옷은 꿈속에서 투명한 흑색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린 적이 있었다. 그 이상한 웅덩이는 본 적 없는 우물 속이기도 했고 가본 적 없는 심해이기도 했는데,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요란하게 깨어나면 곁에서 함께 잠을 깨버린 어른이(엄마일 때도 할머니일 때도 있었다) ‘크느라 그런 게지’라며 이마의 식은땀을 훔쳐주었다. 아니, 시옷은 꿈 밖에서도 투명한 흑색을 만난 적이 있다.

시옷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시옷으로 이루어진 다섯 식구가 어쩌다 한자리에 모여 있게 되면 시옷은 늘 어깨 뒤쪽이 신경 쓰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숫자 세는 법을 배운 이후로(입으로 세는 법은 할아버지에게, 숫자로 쓰는 법은 아빠에게 배웠다) 시옷은 식구들이 한방에 모여 있으면 하나, 둘, 셋 하고 속으로 사람 수를 세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수는 늘 다섯으로 끝이 났고 시옷의 식구는 모두 다섯명이 맞았는데도 시옷은 어쩐지 있어야 할 사람 하나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섯명 사이에 끼지 못한 누군가가 시옷의 어깨너머로 쓸쓸한 얼굴을 쑥 내밀고 있을까봐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해보기도 했다. 그러면 아빠는 ‘네 어깨에 귀신이 앉아 있다’ 하고 놀렸다. 시옷이 겁을 먹고 울음을 터뜨리면 할머니는 ‘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아빠를 나무랐고 엄마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딴청을 피웠다. (시옷을 낳은 후 엄마가 두번이나 유산했다는 사실은 시옷이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어른들 말을 엿듣다가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행여 들었더라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혼자 방을 쓰게 되면서 시옷은 할머니와 함께 자게 되었다. 하지만 할머니 방의 모든 것이 낯설고 엄마가 보고 싶어서 걸핏하면 한밤중에 깨어나 안방으로 숨어들었다. 할머니 방에서 안방으로 가려면 중간에 부엌을 지나가야 했다. 어느날 시옷은 부엌에 자기 말고 움직이는 형체가 또 있음을 감지했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모습을 하고 부엌문 뒤쪽에 오도카니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시옷은 그것의 몸집이 할머니나 아빠처럼 큰 어른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선 안도했다. 시옷은 안방으로 가다 말고 그것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이 미닫이문처럼 옆으로 쓱 움직였다. 그 속도가 빠르지 않은 점도 좋았다.

안녕.

시옷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것은 부엌 벽에 걸어놓은 소쿠리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시옷이 말을 걸자마자 사라져버렸다. 수줍음이 많은 걸까? 아니면 시옷이 싫은 걸까? 시옷은 다시 안방 쪽으로 움직였다. 마루 끝에 그것이 서 있었다. 그것이 다시 나타나 시옷은 기뻤다.

우리, 놀까?

시옷이 다시 말을 건네자 그것이 응접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시옷은 안방을 그대로 지나쳐 서둘러 응접실 앞까지 갔다. 그리고 식구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응접실 문을 열었다. 넓은 공간 특유의 싸늘한 기운이 안으로 들어서는 시옷의 몸을 휘감았다. 카펫에 들러붙은 아빠의 담배 냄새와 책장마다 빼곡히 꽂혀 있는 묵은 책 냄새도 풍겼다. 푹신한 카펫이 시옷의 발소리를 빨아들였다. 시옷은 등 뒤로 가만히 문을 닫았다. 반쯤 걷힌 커튼 틈새로 달빛이 비쳐들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옷의 눈이 응접실 안의 사물을 또렷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간 안에서 가장 투명한 흑색을 띠고 응접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시옷이 바라보자 그것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밤보다 훨씬 어두웠고 달빛보다 한결 투명했다. 그러나 그것에는 눈 코 입이 없어서 시옷은 그것의 기분을 오직 움직이는 속도로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시옷은 그것과 눈을 마주쳤다고 확신했다. 신호처럼 그것이 가볍게 떠오르더니 커튼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곤 덩굴을 타고 날아다니는 정글의 타잔처럼 커튼을 타고 순식간에 샹들리에 위로 올라앉았다. 눈물 모양의 유리 장식이 서로 부딪치며 차르르 소리를 냈다. 시옷은 그 소리를 웃음으로 알아들었다. 시옷은 깃털처럼 가벼운 그것이 부러웠다. 시옷도 그네를 타듯 커튼에 매달리고 싶었다. 샹들리에 위에 올라앉아 응접실 바닥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것이 다시 아래로 내려오더니 묵직한 테이블 한쪽 끝을 가볍게 들어 올려 소파 위에 걸쳤다. 순식간에 소파에서 카펫 바닥으로 떨어지는 미끄럼틀이 생겼다. 그것이 먼저 미끄럼을 타고 내려왔다. 시옷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테이블 미끄럼틀을 타보았다. 경사가 급해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아프기보다는 신이 났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시옷과 그것은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테이블 미끄럼틀을 탔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얼마쯤 탔을까. 미끄럼틀이 시시해졌는지 그것이 순식간에 붙박이 책장 쪽으로 움직였다. 맨 아래 칸에 꽂힌 묵직한 백과사전 전집을 하나씩 빼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반듯하게 꽂혀 있던 책이 픽픽 쓰러지는 모습은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그것이 날쌔게 책장 맨 위 칸으로 올라가더니 백과사전보다 얇은 책을 하나씩 꺼내 던졌다. 시옷은 머리를 맞을까봐 무서워 반사적으로 두 팔을 들어 막았다. 그러나 그것이 던진 책들은 추락하지 않고 새처럼 날갯짓하며 샹들리에 밑을 떠다녔다. 포르르, 파드득, 책의 날개가 서로 스치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시옷은 머리를 막았던 팔을 내리고 멍하니 책들의 비행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책의 새를 붙잡아보려고 폴짝폴짝 뛰었다. 그것은 어느새 책장에서 샹들리에로 옮아가 거꾸로 매달린 채 그네처럼 온몸을 흔들었다. 시옷의 머리 위로 책들이 날고 그것이 까딱거렸다. 시옷은 점점 신나게 뜀을 뛰었다. 조심성 없이 깔깔댔다.

누구냐?

호통 소리와 함께 응접실 불이 켜졌다. 샹들리에가 무자비한 빛을 소나기처럼 우수수 쏟아냈다. 아빠가 등장하자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날개를 파닥거리며 날던 책들도 감쪽같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카펫 바닥은 책장에서 쏟아진 책들로 어지러웠다. 한쪽 끝만 소파 위에 덜렁 올라앉은 테이블의 모습은 괴이해 보였다. 커튼 일부분이 레일에서 뜯겨 나가 있었다. 아빠는 경악에 찬 얼굴로 엉망이 된 응접실을 둘러보았다.

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도깨비놀음도 아니고.

어느새 할머니와 엄마도 잠옷 바람으로 아빠 뒤에 서 있었다. 시옷은 꼼짝도 못하고 응접실 한가운데 서서 식구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았다. 아빠가 시옷 곁으로 걸어왔다. 아빠는 몽땅 비어 있는 책장 맨 위 칸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까지 어떻게 올라갔어?

아빠의 목소리에 힐난과 호기심이 반씩 섞여 있었다. 아빠는 시옷이 디디고 올라섰을 뭔가를 찾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응접실에는 당연히 사다리 같은 게 없었고 어린 시옷 혼자 힘으로 옮길 수 있는 가벼운 의자도 없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두서없이 줍기 시작했다. 책 하나 줍고 놀라고 책 하나 줍고 혀를 차느라 일이 더뎠다. 아빠는 여전히 의문을 풀지 못한 얼굴로 방 안을 샅샅이 돌아보았다. 투명한 흑색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것이 무사히 몸을 숨겨서 다행인 걸까? 시옷만 놔두고 혼자 도망쳤으니 섭섭해야 할까?

맨 위 칸 책은 어떻게 뺐어?

아빠가 다시 물었다. 시옷은 그것이 한 일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이름이 없는 것은 정확히 가리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시옷은 그때 깨달았다. 시옷은 더럭 겁이 나 울음을 터뜨렸다.

뭘 잘했다고 울어?

내내 입을 다물고 책만 줍던 엄마가 쏘아붙였다. 그 참에 온몸에 힘이 풀렸고 다리 사이로 뜨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카펫에 천천히 얼룩이 번져갔다.

내가 못 살아!

혹시 백과사전을 쌓아놓고 그 위로 올라갔냐?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말했다. 아빠는 제발 정답이라고 말해달라는 듯 간절한 표정으로 시옷을 보았다. 아빠도 뭔가를 겁내고 있었다. 시옷은 아빠를 구해주는 심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서 자라.

아빠는 마침내 문제를 해결했다는 안도감으로 우쭐해 보이기까지 했다. 할머니는 계속 책을 주워 책장에 꽂았다. 엄마가 시옷의 손을 잡아채고 욕실로 데려갔다. 시옷의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엄마의 손길이 거칠었다. 그날 남은 밤을 시옷은 안방에서 잤다. 다음 날 할머니는 시옷의 기가 허해진 탓이라며 한약을 지어왔다. 한동안 시옷은 엄마와 할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쓰디쓴 한약을 삼켜야 했다. 대접을 다 비우고 쓴맛에 몸서리를 쳐도 엄마는 사탕을 주지 않았다. 그후로 시옷은 한밤중 할머니 방에서 안방으로 가는 길에 가끔 그것이 마루 끝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유혹하듯 응접실 문 앞에서 고개를 까딱거렸지만 시옷은 다시는 그것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것과 신나게 노는 것보다 어른들에게 미움받는 아이가 되지 않는 게 훨씬 중요했다.

응달집을 무슨 색으로 칠할지 고민하다 시옷은 오랜만에 그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투명한 흑색을 영영 온양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옷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그것의 자세한 형체를 떠올려보았다. 어떻게 해도 그것의 색깔을 도화지에 옮길 수는 없었다. 시옷은 온양집과 응달집 밑그림을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그 자리에 가본 적도 없는 해수욕장을 그렸다. 거짓 그림은 오히려 그리기가 쉬웠다. 본 적 없으므로 오히려 본 것처럼 그릴 수 있었다. 모래밭은 황토색으로, 그 너머 바다는 파란색으로 칠했다. 미술시간에 배운 대로 정중앙을 피해 오른쪽에 알록달록한 파라솔을 그리고 그 아래 엄마와 아빠와 할머니와 시옷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을 그렸다. 식구들 앞에는 빨간색과 초록색과 검은색으로 먹음직스러운 수박을 그려 넣었다. 바다 위쪽에는 원근법에 충실하게 갈매기도 세마리 그렸다. 거짓 그림 속 가족은 마냥 즐거웠다. 엄마는 다정했고 배가 불러 있지도 않았다. 아빠는 어깨가 축 처진 기죽은 모습이 아니었다. 투명한 흑색 따위는 필요 없는 그림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옷이 과제물로 제출했고 ‘행복한 우리 가족’이라는 빤한 제목을 단 그림은 우수작으로 뽑혀 한동안 교실 뒤쪽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같은 응달집에 살게 된 눈이 아름다운 아이는 방학 숙제를 하나도 해오지 않았고 담임에게 불려 나가 손바닥을 열한대나 맞았다.

 

*

 

마웨: 시옷님 일기가 연극으로 치면 2막에 돌입한 느낌입니다.

고슴: 계절도 순식간에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었어요.

도치: 그런데 봄에 비해 여름은 너무 짧게 얘기하고 지나가는 게 아닐까요?

고슴: 뭐, 계절의 속도감이야 개인차가 있지 않아?

마웨: 시옷님에게 그 여름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 모양이지요.

고슴: 아님, 기억하고 싶지 않든가요.

림자: 문학평론가 로이 파스칼은 자서전이란 연대기가 아니라 삶의 해석이라고 말했어요. 해석에는 선택적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어떤 기억을 선택해 기록하느냐에는 그 기억과 결합한 감정이 중요하게 작용할 테고요. 시옷님의 봄과 여름이 불균형하게 기록되었다면 두 계절에 대한 시옷님의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겠죠. 과거를 돌아보고 떠올린 무수한 기억 조각 가운데 무엇이 유난히 반짝여 여러분의 눈길을 끄는지는 오직 자신만 알 겁니다. 그렇게 선택된 기억의 조각들이 한데 엮여 일기나 자서전이 되겠고요.

도치: 그만큼 자서전이라는 게 왜곡이나 날조로 흐르기 좋다는 말이네요.

림자: 그렇습니다. 자서전만큼 신뢰하기 어려운 글도 없지요.

고슴: 그럼 왜 써요?

마웨: 번듯하니 남에게 보여주기 좋잖아요? 저도 자서전을 한권 완성해서 칠순 잔치 겸 출판기념회를 하는 게 소원입니다.

고슴: (입 모양으로) 구려.

림자: 자서전이 참인지 거짓인지 글쓴이 말고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악명 높은 독재자나 탐욕스러운 부자들이 오히려 자서전에 집착하기도 했죠.

도치: 그 사람들 자서전을 직접 쓰지도 않았잖아요. 죄다 대필이었지.

고슴: 그런 건 자서전이라고 부르지도 말아야 해.

도치: 그러니까. 대필 말고 진짜 자기가 쓴 거라고 해도 왜 자서전에 거짓말을 쓰는지 이해가 안 가요.

림자: 하지만 자서전에 거짓말의 비중이 높을수록 그 글에 다치는 사람은 글쓴이 자신이 아닐까요?

 

*

 

2학기가 시작되면서 엄마의 배는 무섭게 부풀었다. 배만이 아니라 온몸이 풍선처럼 부었다. 두배로 커진 엄마 종아리에 손가락을 대고 꾹 눌렀다가 떼면 붉게 팬 자국이 한참이나 원 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어떻게 해도 자세가 불편하다며 누워 있는 때가 많았고 시옷이 곁에서 얼쩡거리면 성가시다고 쫓아냈다. 시옷은 엄마가 누워 있는 안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할머니 한 사람으로 꽉 차는 부엌에도 가지 못해서 거실에서 혼자 놀다 심심해 죽을 지경이면 옥상에 올라가 집 담벼락 밑으로 흘러가는 개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름이 가을과 포개지는 계절이었다. 날이 저물면 어디선가 밥 짓는 냄새가 풍겨왔고 개울가에 오종종하게 붙은 작은 집마다 여자들이 놀러 나간 제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서쪽 하늘이 온통 붉어지면 까닭 모르게 슬퍼지고 어딘가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온양집에 버리고 온 투명한 흑색이 떠올랐고 옆집 살던 애니가 보고 싶었다. 시옷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제비다방 남자가 두고 간 기타 피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아래서 할머니가 시옷의 이름을 불렀을 때야 어둑해진 옥상을 내려왔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계단 밑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눈이 아름다운 아이가 사는 단칸방이 나왔다. 방에 불이 켜져 있었지만 문 앞에 놓인 신발은 뒤축이 한껏 꺾인 그 아이의 낡은 운동화뿐이었다.

할머니가 둥근 밥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아직 오지 않아서 밥은 세 사람 몫이었다. 그즈음 집안일은 할머니가 도맡아 했다. 아빠는 아침마다 할머니가 다려준 셔츠를 입고 나갔다가 저녁이면 땀에 젖어 후줄근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빠의 양복 바짓단과 구두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시옷이 못 본 사이에 거실에 책더미가 생겼다. 책이라면 온양집에서 이사 나올 때 고물상에 다 팔고 온 줄 알았는데 응달집에도 새 책이 야금야금 쌓여갔다. 그 책들은 읽으려고 산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책장에 꽂히지 못하고(응달집에는 책장도 없었다) 포장도 풀지 않은 채 거실 벽을 따라 차곡차곡 쌓였다. 온양집 거실에서 책 읽기를 즐기던 아빠는 이제 책을 읽지 않았다. 시옷에게 책을 사다주지도 않았다. 대신 아빠는 책을 파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아빠의 책 파는 능력은 그리 시원치 않은지 들고 나가는 책보다 들고 돌아오는 책이 더 많았다. 식구들은 거실 구석에 늘어가는 책더미를 모른 척했다. 그중에는 시옷이 좋아할 만한 동화 전집도 있었지만, 아빠는 한번도 책을 꺼내 읽어보라 권하지 않았다. 온양집에 살 때만 해도 다달이 나오는 만화잡지를 사다주고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읽어주던 아빠가 동화 전집은 한사코 그 정체를 감추려는 듯 책등을 벽에 붙여 쌓아두었다.

시옷이 밥상 앞에 앉자마자 할머니가 작은 냄비가 올려진 쟁반을 주며 옆집에 갖다주라고 했다. 시옷이 아랫입술을 비죽이 내밀고 싫은 티를 내자 엄마가 눈을 흘기며 얼른 다녀오라고 했다. 그 무렵 엄마의 얼굴엔 잿빛 기미까지 잔뜩 끼어서 시옷을 노려보는 표정이 몇배나 무서워져 있었다. 애가 맨날 찬밥만 먹어서 옳게 크겠나? 등 뒤에서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할머니의 말이 들려왔다.

야.

시옷은 문밖에서 그 아이를 불렀다. 아무 대답이 없자 한번 더 소리 높여 불렀다.

야.

잠시 후 눈이 아름다운 아이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방 안은 시옷의 집보다 작고 어두웠다. 방 한가운데 작고 둥근 밥상이 보였다. 시옷은 아이의 밥상을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할머니가 보낸 냄비를 내밀었다. 거기 할머니가 밤새 끓인 곰탕이 담겨 있다는 것을 냄새로 알 수 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갖다주래.

시옷이 냄비를 내밀자 방문을 붙잡고 있던 아이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시옷은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녁을 먹는 중이었는지 아이의 볼이 불룩했다.

따뜻한 국에 찬밥 말아 먹으래. 그래야 옳게 큰대.

정말로 할머니가 시켜서 하는 말인 듯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 아이가 큼직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옷을 쳐다보았다. 시옷은 거짓말을 들킨 것 같아 얼른 방문 앞을 떠났다.

야.

뒤에서 아이가 시옷을 불렀다. 처음 듣는 아이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맑았다(그 아이야말로 지휘자 선생님이 찾는 맑은 소년이었다). 시옷은 걸음은 멈추지 않고 고개만 돌려 아이를 보았다.

너, 내 이름 모르냐?

시옷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옷은 정말로 그 아이의 이름을 몰랐다. 4학년 때 처음 같은 반이 되었고 학년 초에 담임에게 불려 나가 학급 아이들 앞에서 때가 잔뜩 낀 배를 드러내는 모욕을 당했다는 것만 알았지 그애의 이름은 알지 못했다. 1학기 내내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걸핏하면 담임에게 매를 맞는 모습을 보며 은근히 안타까움을 느꼈을 뿐 그애의 이름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네 이름을 아는데 너는 모르냐? 치사하게?

아이가 당당할수록 시옷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옷은 도망치듯 걸음을 옮기다가 부드럽고 푹신한 어떤 것에 얼굴을 부딪쳤다. 코끝에 비릿한 꽃향기와 바깥바람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아이구나?

눈이 아름다운 아이의 누나였다. 그 언니는 흰 블라우스와 감색 치마, 조끼로 이루어진 제복을 입고 출퇴근했다. 가슴에는 유명 화장품회사 이름이 적힌 명찰을 찼고 커다란 감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언니는 집집이 다니며 얼굴 마사지를 해주고 화장품을 판다고 했다. 언니의 배에서 얼굴을 떼고 위를 보니 둥근 얼굴에 박힌 반달 모양 눈이 시옷을 보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윤수랑 같은 반이라면서? 일요일에 놀러 와. 언니가 과자 사줄게.

등 뒤로 쾅 하고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는 시옷을 향해 한번 더 씩 웃어주었다. 반달 모양이었던 언니의 눈이 순간 무지개 모양으로 변했다. 그애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였지만 남매는 남매라서 눈이 서로 꼭 닮아 있었다. 시옷은 언니의 유난히 크고 검은 눈동자와 그 위를 차양처럼 드리운 풍성한 속눈썹을 쳐다보았다. 심장이 반박자 빨리 뛰었다. 늘 놀림을 받고 매를 맞는 윤수라는 아이가 처음으로 부러웠다.

 

윤심 언니는 매일 밤 수돗가에 나와 오래도록 얼굴을 씻었다. 수건으로 긴 머리를 감싸 올리고 치약처럼 생긴 화장품을 손바닥에 짜내어 흰 거품을 낸 다음 그것으로 얼굴을 오래 문질렀다. 세수 한번 하는 데 쓰는 비누만 여러가지였다. 윤심 언니가 플라스틱 대야에 비누와 수건을 담아 수돗가로 나오는 소리가 들리면 시옷은 얼른 밖으로 나가 알은척을 했다. 언니는 옆에 쪼그려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는 시옷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날엔 시옷의 손바닥에도 하얀 비누 거품을 짜주었다. 그 비누로 얼굴을 씻은 날이면 밤새 코끝에 달보드레한 향기가 어른거렸다. 하지만 언니라고 매번 다정하지는 않았다. 어떤 날엔 시옷을 보고도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 말없이 푸석하게 부은 얼굴을 조용히 씻고 돌아갔다. 그게 운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많이 울어본 시옷은 알 수 있었다. 시옷은 저만치 떨어져 앉아 저토록 순하고 다정한 윤심 언니를 울린 사람은 얼마나 나쁜 놈일까 생각했다.

윤심 언니가 저녁마다 공들여 세수하고 아침이면 다시 곱게 화장을 한 뒤 집을 나섰다면 윤수네 엄마는 언제 집을 나가고 언제 집으로 돌아오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꽤 깊은 밤 윤수네 엄마가 한껏 취한 목소리로 철 대문을 두드리며 윤심 언니와 윤수의 이름을 불러 동네 사람들까지 다 깨우는 일이 더러 있었다. 또 아침 밥상머리에서 할머니가 흘낏 옆집 방향을 보며 ‘사람이 밤낮이 저리 바뀌어서 어찌 옳게 사나’ 하고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을 하기도 했다. 윤심 언니와 아빠가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고 시옷과 윤수가 학교에 간다고 나설 때도 윤수 엄마는 그 좁고 어두운 방에서 뒤늦은 잠에 빠져 있었고 시옷과 윤수가 학교에서 돌아와보면 그새 일하러 나가고 없었다. 윤수가 매일 저녁 혼자 먹는 찬밥은 윤심 언니가 차려놓는 걸까, 아니면 윤수 엄마가 차려놓는 걸까. 윤수와 일부러 거리를 띄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옷은 윤수의 마른 등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일요일이면 응달집도 모처럼 북적거렸다. 아빠와 윤심 언니가 쉬는 날이고 얼굴 보기 힘든 윤수 엄마도 가게 문을 닫는 날이었다. 윤수네는 일요일에 빨래를 몰아서 하는 눈치였다. 할머니는 그걸 알고 일요일에는 되도록 빨래를 하지 않고 좁은 옥상의 빨랫줄을 윤수네에게 양보했다. 모처럼 볕이 좋아 응달집도 제법 환해지면 윤수네는 이불 빨래를 했다. 윤수 엄마는 고무통에 이불을 넣고 비눗물을 푼 다음 통 안에 들어가 발로 퍽퍽 밟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역정이 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윤심 언니를 불렀다. 윤수 엄마는 자식들 이름을 부를 때면 꼭 ‘이년아’라든지 ‘이 새끼야’를 추임새처럼 붙였다. 윤심 언니가 부끄러운 얼굴로 수돗가로 나오면 윤수 엄마는 눈짓 한번으로 윤심 언니에게 이불 빨래를 넘기고 자기는 수돗가 시멘트 턱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웠다. 시옷이 활짝 열어놓은 거실 창 너머로 수돗가 풍경을 보고 있으면 잠시 후 엄마가 안방에서 나와 담배 냄새가 역하다며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닫아버렸다.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후 교육감이 학교에 시찰을 나온다면서 담임이 학급 아이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시옷네 학급은 일주일 내내 청소와 정리정돈, 교실 꾸미기에 동원되었다. 담임은 반장과 부반장을 비롯한 학급 임원 아이들에게 교실을 꾸밀 화분을 가져오라고 했다. 교육감이 오기 전주 속속 도착한 화분들 가운데 크기가 제법 큰 것은 교탁 양옆에, 작은 것은 창가 턱에 나란히 놓였다. 아버지가 중앙동 한복판에서 대형 가전제품 대리점을 한다는 아이는 공부를 못해서 학급 임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애 어머니가 섬세한 레이스 달린 하얀색 커튼을 새로 맞춰 와 교실 창문에 달아주었다. 어머니가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한 아동복 매장을 열었다는 아이는 네모반듯한 어항을 가져왔다. 초록색 물풀과 산소발생기까지 갖춘 어항에는 주황색과 검정색, 흰색 얼룩이 알록달록한 금붕어가 여러마리 들어 있었다. 금붕어는 몸통보다 크고 화려한 꼬리를 하느작거리며 어항 속을 유유히 헤엄쳤다. 흡족한 담임은 아동복집 아이를 어항 관리자로 임명했는데, 그애는 이 일을 대단한 감투라고 여겼는지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금붕어를 구경하려고 어항 가까이 다가가면 담임의 지휘봉을 가져와 마구 휘둘렀다. 그애는 곧 탐관오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탐관오리는 아이들의 놀림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어항을 지켰다. 부모가 비싼 화분이나 커튼, 어항 같은 것을 가져올 형편이 안 되는 나머지 아이들은 각자 집에서 만들어온 마른걸레와 양초 토막으로 교실 바닥에 윤을 냈다. 거친 나뭇결이 잔잔한 윤기를 뿜어낼 때까지 아이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목이 아프도록 마냥 양초를 문지르고 걸레질을 해야 했다. 대청소가 어느정도 마무리된 토요일, 담임은 종례시간에 다음주 월요일은 마침내 교육감이 우리 학교를 방문하는 역사적인 날이니만큼 다들 단단히 준비하고 등교하라고 마지막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담임은 윤수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특히! 각자 머리도 말끔히 감고 손톱도 바짝 자르고 옷도 깨끗이 빨아 입고 청결한 상태로 등교하도록! 알았나? 누가 발톱은요? 하고 묻자 담임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발톱은 양말 속에 숨어 있으니 내 알 바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는 손톱과 손등, 얼굴과 목덜미, 머리카락 위주로 청결히 하도록! 알았나? 예! 아이들의 목소리는 행사 전 긴장감보다는 토요일의 해방감으로 더 우렁찼다. 시옷은 윤수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떨구는 것을 보았다. 1학기 초 교탁 위에 올라가 때 묻은 배를 드러낸 채 굵은 눈물을 흘리며 소리 죽여 울던 윤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연히 시옷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수 엄마는 일요일마다 밀린 빨래를 하고 욕설과 담배 연기를 한꺼번에 내뱉으며 이불 빨래도 했지만, 윤수를 수돗가에 데려와 씻기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윤심 언니도 매일 밤 어두운 수돗가에 나타나 조용히 세수를 하고 돌아갔지만, 윤수를 씻기지는 않았다. 윤수는 어디서 세수와 목욕을 하는 걸까? 하기는 할까? 시옷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윤수 걱정으로(정확히는 윤수의 청결 걱정으로) 가득한 자신의 마음이 성가셔서 일부러 높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거리의 익숙한 간판을 읽었다. 그러나 예전 동네를 지나고 철둑을 넘어서부터는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어쩔 수 없이 저만치 앞서가는 윤수가 눈에 들어왔다. 윤수는 평소보다 더 고개를 푹 숙인 채 걷고 있었다. 윤수도 시옷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럴 것이다. 치욕의 순간을 목격한 것만으로도 여전히 그때의 불안과 공포가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직접 수모를 당한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저녁을 먹고 식구들 사이에 끼어 앉아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는 동안에도 시옷은 내내 바깥 수돗가의 인기척에 신경을 썼다. 마침내 9시 뉴스가 시작되고 얼마 전 새로 대통령이 된 머리숱 없는 남자가 화면 가득 나타났을 때 수돗가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과 그의 부인이 함께 경상도의 어느 도로 공사현장에 시찰을 나갔다는 소리를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시옷은 반쯤 열린 안방 창문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월요일에! 교육감이! 학교에 온대! 담임선생님이! 꼭! 손톱도 깎고! 머리도 감고! 목욕도 하고 오래! 안 그러면!

아휴, 시끄러워. 조용히 말해도 되잖아.

엄마가 반사적으로 배를 감싸며 말했지만, 시옷에겐 아직 할 말이 남았다.

안 그러면! 혼난댔어! 사랑의 매로! 맞는댔어!

고작 그런 일로 애들을 때린단 말이냐? 관세음보살.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내일 오랜만에 다 같이 목욕탕에나 다녀올까요? 아빠가 할머니에게 말했다.

당신도 갈 수 있지? 아빠가 엄마의 잔뜩 부른 배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가도 될까요? 엄마는 할머니를 보고 물었다.

그래, 에미도 산달 전에 씻으면 좋지. 애 나오면 한동안 씻고 싶어도 못 씻을 테니.

할머니 대답과 함께 방 안은 다시 조용해지고 대통령이 어딜 또 다녀왔다는 소리만 들렸다. 시옷은 열린 창틈으로 수돗가를 내다보았다. 윤심 언니는 시옷의 말을 들었는지 어쨌는지 그저 조용히 얼굴에 하얀 거품을 문지르고 있었다.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사이 엄마가 작은 대야에 수건과 비누와 갈아입을 속옷을 챙겼다. 남자 목욕탕에는 수건과 비누가 갖춰져 있으니 아빠는 빈손으로 가도 된다고 했다. 시옷은 똑같은 요금을 내는데 왜 대우가 다르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출발도 전에 엄마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눌러 삼켰다. 그런 시옷의 마음도 모르고 아빠는 시옷이 보는 앞에서 엄마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놈이 빨리 커야 나랑 같이 남탕에 가서 내 등을 밀어줄 텐데 말이야.

엄마는 우물에서 숭늉 찾냐며 아빠를 살짝 흘겨봤지만,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네 식구가 줄줄이 서서 집을 나서려는데 바로 옆에서 윤수 엄마가 튀어나와 길을 막았다. 윤수 엄마는 자다 일어났는지 파마머리가 부스스했고 얼굴에 어제의 화장기도 남아 있었다. 윤수 엄마가 꼬깃꼬깃한 지폐 한장을 아빠 손에 쥐여주면서 다급히 말했다.

우리 애도 데려가요. 목욕탕에 데려갈 애비가 없으니 애가 영 거지새끼 꼴이잖아요.

윤수 엄마는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투로 말했다. 시옷의 식구들이 떨떠름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자 윤수 엄마가 갑자기 허리를 푹 숙이고 말했다.

부탁합니다, 선생님.

당황한 아빠가 손사래를 치자 허락의 뜻으로 해석했는지 윤수 엄마가 몸을 다시 세우고 자기 집 쪽을 향해 외쳤다.

새끼야! 빨리 기어 나오지 뭐 한다고 꾸무럭거리냐?

 

목욕탕까지 걸어가는 길은 조용했다. 초가을의 일요일 오전 공기는 평소보다 잔잔히 가라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아빠가 윤수에게 괜히 말을 시켰지만(축구 좋아해? 학교 공부는 재미있니? 우리 시옷이 학교에선 어떠니?) 윤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크고 예쁜 눈을 끔벅거릴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되는 무궁화목욕탕은 인근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최신 시설을 갖추어서 엄청나게 북적거렸다. 목욕탕 입구에 남탕은 파란색으로 여탕은 빨간색으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아빠가 한꺼번에 요금을 치르자 목욕탕 주인이 작은 반원형 구멍으로 수건 두장을 내밀었다. 아빠와 윤수의 몫이었다.

우리 먼저 나오면 저기 벤치에 앉아 있을게요. 천천히들 씻고 나오세요.

아빠는 새삼 혼자 가지 않아도 되어서 기뻤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윤수의 어깨에 손까지 올리고 함께 남탕으로 갔다. 시옷은 윤수가 몸을 청결히 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야 마땅했지만, 아빠가 스스럼없이 윤수의 어깨를 감싸 안고 가는 모습을 보자 어쩐지 약이 올랐다. 아빠와 윤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엄마도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목욕탕에 들어가자마자 순식간에 달라지는 온도와 습도와 기압이 한데 어울려 시옷을 압도했다. 할머니와 엄마는 집에서 가져온 수건으로 벗은 몸 앞쪽을 가리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엄마 배가 너무 불룩해 수건 한장으로 다 가려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엄마의 벗은 몸은 무서울 만큼 낯설었다. 배는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고 한가운데 가느다란 검은 선이 배꼽을 가르며 세로로 뻗어갔다. 그걸 ‘임신선’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그때의 시옷은 당연히 몰랐기에 저 검은 선을 따라 엄마의 배가 흥부의 박처럼 쩍 갈라지며 아기가 튀어나오나 상상하고 혼자 몸서리를 쳤다. 엄마의 엉덩이와 허벅지에도 튼살이 잔뜩 벌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너덜너덜해진 엄마의 살결을 보며 시옷은 나중에 크면 절대로 아기를 낳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잠시 엄마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가 시옷의 등을 밀어주겠다고 나섰는데, 할머니보다 세배는 아프게 밀었다. 등가죽이 벗겨질 것처럼 아파서 시옷이 자꾸 움츠리자 엄마는 움직이지 말라고 등을 찰싹찰싹 때리기까지 했다. 시옷은 아프고 창피해 눈물이 찔끔 났지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목욕탕 안에서 벌거벗은 채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울음을 꾹 참았다. 엄마와 할머니는 번갈아 시옷의 때를 밀어주고 머리를 감겨주고 수건으로 물기까지 닦아준 다음 먼저 나가 있으라고 했다. 시옷이 열쇠를 맡기고 바나나우유를 사 먹어도 되냐고 묻자 할머니는 못 들은 척했고 엄마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시옷은 시무룩하게 탈의실로 나갔다. 옷을 꺼내 입고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렸다. 커다란 목욕탕 거울에 비친 시옷은 여름을 지나면서 머리카락이 꽤 자라 있었고 갈비뼈가 더 드러날 만큼 살이 빠져 있었다. 키가 컸나? 그러나 맨날 보는 자신의 모습만으로는 키가 얼마나 더 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애니랑 같이 뒤통수를 맞대고 누가 얼마나 더 큰가를 견주어보던 때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재보았을 때 시옷의 정수리는 애니의 턱 한가운데에 닿았었다. 시옷은 애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길게 자란 앞머리가 선풍기 바람에 정신없이 나부끼는 사이 남몰래 조금 울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와 할머니가 나오지 않자 심심해진 시옷은 탈의실 열쇠를 목욕탕 직원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먼저 여탕 밖으로 나왔다. 남탕과 여탕이 갈라지기 직전의 작은 휴게실에 아빠와 윤수가 보였다. 두 사람은 긴 벤치에 나란히 앉아 빨대 꽂은 바나나우유를 먹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인지 잠깐 서로 마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윤수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하하 소리 내기까지 했다. 말갛게 씻은 윤수의 얼굴도 저렇게 환하게 웃는 윤수의 얼굴도 처음 보았다. 시옷은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봐버린 사람처럼 묘한 수치심을 느끼며 답답한 여탕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까와 달리 분위기가 가벼웠다. 이번에는 아빠의 질문에 윤수가 꼬박꼬박 대답했다(축구 좋아해요. 가끔 집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동네 애들이랑 볼 차요. 학교 공부는 당연히 재미없죠. 산수시간은 맨날 몰래 자요. 쟤는 학교에서—시옷 쪽을 한번 흘낏거린 다음—멀리 떨어져 앉아서 잘 몰라요).

수업시간에 자면 어떡해? 허벅지라도 꼬집어가며 버텨야지. 엄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졸릴 때 눈꺼풀처럼 무거운 게 없느니라. 어린애가 무슨 수로 버티겠나? 할머니까지 합세하자 시옷은 쓸쓸해졌다. 아빠는 윤수가 함께 남탕에 들어갈 수 있는 사내아이라서 좋아졌다 치고, 엄마와 할머니는 왜 갑자기 윤수에게 잘해주는가? 시옷은 괜히 짜증이 치밀어 자꾸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후! 후! 입김으로 날려보았지만 앞머리는 성실하게 제자리로 돌아와 눈을 찔렀다. 여름방학과 이사를 거치는 동안 시옷의 어느 부분이 얼마나 자랐는지, 혹은 얼마나 자라지 못했는지 식구들은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시옷의 불편을 알아채준 사람은 윤심 언니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소한 기름 냄새가 먼저 일행을 맞아주었다. 곧 윤수 엄마가 커다란 쟁반에 먹음직스럽게 부친 파전을 담아 들고 시옷네 집으로 왔다. 윤심 언니는 막걸리가 든 주전자를 들고 따라왔다.

내가 파전이라면 하도 부쳐대서 쳐다보기도 싫은데 오늘은 선생님 드리려고 한번 부쳐봤습니다. 막걸리도 먹을 만할 거예요.

윤심 언니가 막걸리 주전자를 시옷네 거실 바닥에 내려놓고 물러나다가 시옷과 눈이 마주쳤다. 언니가 특유의 반달 웃음을 짓길래 시옷은 그 모습을 더 자세히 보려고 반사적으로 후! 입김을 불어 앞머리를 날렸다. 윤심 언니가 조금 망설이다가 시옷의 엄마에게 말했다.

제가 퇴근 후에 미용학원에 다녀요. 자격증 따면 미장원 차리려고요. 아이 머리가 많이 길어서 불편해 보이는데 제가 좀 다듬어줘도 될까요?

엄마는 윤심 언니의 제안에 놀란 듯 시옷 쪽을 쳐다보았다. 시옷의 앞머리가 많이 자라 눈을 찔러댄다는 것도 이제야 알아챈 것 같았다. 아니, 엄마는 시옷이 거기 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옷과 윤심 언니를 번갈아 보았다. 엄마가 아무 대답이 없자 언니가 덧붙였다.

미용학원 졸업반이라 곧 자격증을 따요. 앞머리 정도는 예쁘게 자를 수 있으니 실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빠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혹시 파마도 됩니까?

 

*

 

기억은 공감각적으로 섞여 혼란하다. 눈부시게 나부끼는 하얀 빨래는 햇살의 냄새를 빨아들이고 어린 여자애의 머리카락은 날카로운 파마약 냄새를 빨아들인다. 퍼석한 가을 공기는 주변의 습기를 끌어안고 다시 야산의 나무들 사이로 돌아가길 반복한다. 이 기억은 선택된 것인가, 아니면 제 발로 나를 찾아온 것인가. 옥상에는 어린 여자애와 젊은 여자 말고는 아무도 없다. 온종일 남의 집 문을 두드리며 화장품을 팔고 남의 얼굴을 문지르느라 고단한 여자의 손이 딱 하루 쉬는 날 옆집 여자애의 머리를 매만진다. 여자는 먹고사느라 얼굴에 들러붙어버린 친절한 미소를 말끔히 벗어던지지 못하고 고름처럼 절로 흘러나오는 피로를 감추지도 못한 채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의 머리카락에 꼼꼼히 파마약을 바르고 플라스틱 로드에 말아 고무줄로 고정하는 단순 작업을 반복한다. 여자는 하품을 참고 있다. 미용학원에서 고객 응대법을 매섭게 배웠다. 언제라도 거울 너머로 고객과 눈이 마주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친절한 미소를 잃지 말 것.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마법의 거울이 물어봐도 반사적으로 대답할 수 있게 준비할 것. 고객님이요! 지금 옥상에 거울은 없고 여자애는 고객도 아니다. 그러나 여자는 최선을 다해 머리카락을 만다. 여자애는 얼핏 남자애로도 보일 만큼 딱히 어여쁜 구석이 없었지만, 이 순간 여자는 아이를 백설공주보다 아름답게 만들어줄 의무가 있다.

여자에게 집은 쉬는 공간이 아니다. 빛보다 그늘이 우세한 단칸방은 공원 맞은편에서 대폿집을 하느라 종일 파전을 부치고, 매상을 올리겠다며 걸핏하면 손님상에 끼어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잔뜩 취해 돌아오는 여자의 엄마에겐 잠시 눈을 붙이고 술을 깨었다 가는 곳이다. 낮 동안 화장품을 팔고 마사지를 하다가 퇴근 후에는 미용학원에서 기술을 배우고 빈속으로 돌아온 여자가 캄캄한 수돗가에서 화장을 지우는 곳이다. 띠동갑 남동생은 바쁜 두 여자 사이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번 똑같이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갔다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 아이는 부실한 식사와 엄마의 거친 욕설, 세상의 매질에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는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미용실을 차리는 게 꿈이지만 그전에 이 집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매일 술로 자신의 목을 천천히 조르고 있는 늙은 엄마와 미래도 꿈도 없이 방치된 채 홀로 무섭게 성장 중인 남동생 곁에 머물렀다간 여자의 미래도 저 시궁창 같은 개울에 처박히고 말 것이다. 여자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아서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마다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이를 악물고 다짐하지만, 날이 저물고 바람이 쌀쌀해지면 어깨를 옹송그린 채 걸음이 저절로 집을 향했다. 응달이 승한 집이나마 어서 바람을 피해 그 단칸방에 눕고 싶어졌다. 저들을 버려야 내가 산다는 모진 마음을 배반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종일 혼자서 찬밥을 챙겨 먹고 지저분한 방 안에서 뒹굴었을 남동생이 송아지 같은 눈망울로 퇴근하는 자신을 가만히 올려다볼 때 여자는 무너진다. 술에 취해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에 동네 사람들 다 듣게 철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귀가한 엄마가 퉁퉁 부은 몸으로 갈대처럼 휘청거릴 때 여자는 또 무너지고 만다. 엄마의 머리카락에 진득이 배어버린 쉰 막걸리 냄새가 지긋지긋하지만 두달에 한번 엄마의 흰머리를 염색할 때 우연히 목격한 새하얀 두피를 보고 여자는 무너진다. 혼자 손톱을 깎아보려고 했는지 불안을 이겨보려 했는지 죄 물어뜯어놓아 깔쭉깔쭉한 남동생의 손톱을 보고 무너진다. 그렇게 매일 밤 무너지고 부스러지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일요일이다. 일요일이면 여자는 엄마를 거들어 밀린 빨래를 하고 지저분한 방을 치우고 어린 동생의 책가방을 살핀다. 머리카락이 자라 있으면 잘라주고 운동화가 작아 뒤축이 무너져 있으면 손을 잡고 시장에 나가 말표 운동화를 사준다. 계절에 맞는 옷을 사주려고 노력한다. 부엌에 고무통을 끌어다놓고 목욕을 시킨다. 그러나 동생의 몸은 점점 커지고 여자가 손댈 수 있는 범위도 그만큼 줄어든다. 곧 사춘기를 눈앞에 둔 동생은 여자의 손을 거부한다. 그래서 여자는 오늘 남동생을 처음 목욕탕에 데려가준 옆집 사람들이 무척 고맙다. 여자와 아버지가 다른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었다. 엄마는 지금껏 동생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말해주더라도 여자가 아는 사람일 가능성은 적었다. 아버지도 없고 남자 가족도 없는 동생은 대중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피로에 절어 아들을 씻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동생은 더러운 몸으로 학교에 다니고 동네를 쏘다녔다. 그런 애를 옆집 사람들이 목욕탕에 데려간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듯 잔뜩 기가 죽어 출발했던 동생은 모처럼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왔다. 아이의 살결이 뽀얗게 살아나 있었다. 옆집 남자가 동생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바나나우유까지 사주었다고 했다. 동생은 오랜만에 말이 많았다. 그 사실이 기꺼워 여자는 뭔가 보답을 하고 싶었다. 엄마도 같은 마음인지 집에서 웬만해선 부치지 않는 파전을 잔뜩 부쳐 옆집에 갖다주었다. 여자도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따라갔다. 그때 옆집 여자애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애의 머리카락은 지독하게 검고 숱이 많았다. 풍성한 앞머리가 한껏 자라 자꾸 아이의 눈을 찌르고 있었지만, 그 집 어른들도 아이에게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는지 아이의 불편함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남동생만큼이나 그 아이도 크느라 고단해 보였다. 여자는 남동생을 향한 후의의 보답으로 옆집 아이의 앞머리를 자르고 예쁘게 파마까지 해주기로 했다. 남동생이 ‘같은 반 여자애’라고 꼭 집어 말해줘서 겨우 여자애인지 알았던 그 아이를 누가 봐도 여자아이인 줄 알게 만들어주리라. 그애 아빠가 파마도 되냐고 물었을 때 여자는 여자애의 얼굴에 반짝 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도 남들 눈에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으리라. 어른들이 몰라줄 뿐. 아니, 어른들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욕망이란 어른에겐 그저 부담스러운 짐에 불과하니까. 여자는 오늘 옆집 여자애의 욕망을 목격했고 기꺼이 부담을 자처했다.

기억이 한차례 뒤섞인다. 나는 두피에 차갑게 닿는 파마약의 온도와 머리카락을 로드에 말 때 손에 닿는 매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내가 보자기를 둘러쓰고 의자에 앉은 작은 여자애인지 그애의 머리를 매만지는 젊은 여자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두 사람 모두의 감각을 느끼고 두 사람 모두의 생각을 안다. 나는 누구지? 퍼덕퍼덕. 흰 빨래는 새의 날개처럼 마찰하고 간혹 야산의 검은 열매가 툭 소리를 내며 옥상에 착지한다. 여자가 작은 보자기로 여자애의 머리를 감싼다. 여자애는 의자에 앉은 채 해바라기를 하다 까무룩 잠든다. 잠은 따뜻하고 검은 물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너무 평온해 물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여자애를 끌어내는 것은 냄새다. 익숙한 냄새. 여자애가 눈을 뜬다. 저만치 떨어진 야산 쪽 옥상 난간에 한 여자가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아직 날이 환하고 집 안에는 분명 다른 어른들도 있을 텐데 여자는 무람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여자가 산벚나무 그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훅 내뿜다가 여자애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가 빙그레 웃는다. 웃음 사이로 하얀 연기가 푸슬푸슬 피어오른다. 그것은 제비의 가슴 털처럼 부드럽고 따뜻해 보인다. 순간 여자는 커다란 제비로 변한다. 여자애가 제비를 향해 손을 뻗는다. 여자이고 제비인 것이 미소를 띤 채 그대로 뒤로 휙 넘어간다. 여자애는 놀라 그쪽으로 달려간다. 제비라면 날개가 있을 텐데 옥상 난간 너머로 날아오르는 것은 없다. 여자애는 난간 너머로 저 아래 시멘트 바닥을 내려다본다. 거기 제비이고 여자인 것이 바닥에 누운 채 여자애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여자이자 제비인 것의 뒤통수가 온통 붉다. 그 붉은 웅덩이가 점점 크게 번진다. 여자는 눈을 감지 않는다. 여자애는 보자기를 둘러쓴 채 소리를 지른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꿈 밖의 나는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라고! 꿈이니까 도망칠 수 있어! 이렇게 세번 강제하고 꿈속의 나를 겨우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새 식은땀을 흘렸는지 머리카락과 뒷덜미가 흠뻑 젖어 있다. 이제 내 곁에는 비명을 지르며 악몽에서 깨어나도 ‘크느라 그런 게지’ 하며 이마를 훔쳐주는 어른이 없다. 어른은 나뿐이다. 오직 내가 나를 보살펴야 한다. 그 사실이 서러워 잠 끝에 매달려 아직 멍한 상태에도 나는 그만 울고 싶어진다. 이게 다 일기 때문이다. 일기가 불러낸 기억 때문이다. 나는 마구 도리질을 치며 머리통이 깨진 채 웃고 있는 젊은 여자의 잔상을 몰아내려 애쓴다. 심장이 어린 제비처럼 파닥거린다. 머리맡의 핸드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한다. 5시 33분이다. 일어나기에도 다시 잠을 청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자정 너머 취침 약을 먹었는데 지금 한번 더 먹어도 될까? 그러면 종일 잠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까? 몇달 동안 정신과를 다니며 아주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는 줄 알았던 수면 사이클이 다시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게 다 일기 때문이다. 기억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번주 일기 쓰기 수업은 나가지 못할 것 같다.

 

*

 

동생은 모진 비와 함께 왔다. 그해 가을비는 유난히 요란했다. 아침에 할머니가 살 하나가 부러진 우산을 시옷의 몫으로 챙겨주었다. 비가 그치면 급격히 추워질 거라면서 할머니가 직접 뜬 두꺼운 스웨터도 꺼내 입혔다. 저만치 학교 건물이 보일 무렵 시옷의 운동화와 바짓단은 벌써 흠뻑 젖어 있었다. 파마머리는 습기를 한껏 빨아들여 정신없이 뽀글뽀글 부풀었고 물기를 머금은 스웨터도 무겁게 늘어졌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옷은 녹초가 되어버렸다. 낮인데도 교실 안이 어두워 형광등을 켜고 수업을 했다. 빗줄기가 굵고 바람까지 몰아쳐 창문도 꼭 닫아야 했다. 수업 중에 어쩌다 고개를 돌리면 유리창에 일제히 한 방향을 보고 있는 아이들의 까만 머리통이 어른어른 비쳐 보였다. 날이 궂으니 담임도 기분이 별로 안 좋은지(사실 담임의 기분이 좋은 날은 별로 없었다)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아 신경질을 부리고 아이들을 때렸다. 윤수는 벌써 두번이나 출석부로 머리통을 맞았다. 시옷도 칠판 앞으로 불려 나가 산수 문제를 풀 때 뺄셈을 덧셈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답을 틀려서 ‘사랑의 매’로 손바닥을 세대나 맞았다. 담임은 꼭 홀수로만 때렸고 한대는 정이 없어서 안 된다는 이상한 이유를 들이댔기 때문에 누구라도 기본이 세대 이상이었다. 손바닥을 맞고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담임이 시옷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사내자식이 머리 볶고 멋 부릴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더 해라.

최악의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새 운동장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걱정 없는 아이들이 웅덩이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비명을 지르며 물을 튀겼다. 교문 밖 신작로에는 자동차들이 물을 끼얹으며 지나갔다. 시옷은 자꾸만 날아가려는 우산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앞으로 걸었다. 갈 길이 멀었다. 철둑을 넘어가다가 바지에 진흙이 묻었지만 어차피 흙탕물투성이인 것,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더러워진 것은 바지만이 아니었으니까. 동네에 들어서자 평소 졸졸거리며 소심하게 흘러가던 개울물이 크게 불어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누가 빠뜨렸는지 신발 한짝이 위태롭게 흙탕물을 타고 흘러갔다. 시옷은 좁은 길이나마 개울 반대편에 바짝 붙어 걸었다.

야!

뒤에서 누가 불렀다. 윤수였다. 시옷은 못 들은 척하고 계속 앞을 보고 걸었다.

야!

윤수가 달려와 시옷 옆에 바짝 붙었다. 좁은 길이 가득 찼다. 시옷은 윤수가 불어난 개울물에 빠져 떠내려갈까봐 반대편 벽에 더 바짝 붙었다.

너 귀먹었냐?

윤수는 담임한테 혼이 날 때도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도 입이 붙어버린 사람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시옷에게 말할 때는 거침이 없었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은 기분이 안 좋아 윤수를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시옷은 조금 더 빨리 걸었다.

아까 많이 아팠냐?

그 말에 시옷은 걸음을 멈추고 윤수를 빤히 보았다. 걸핏하면 얻어맞는 주제에 지금 날 불쌍하게 여기는 건가? 너도 별수 없다고 놀리는 건가? 시옷은 하루의 온갖 불행이 모두 그애 탓인 것처럼 윤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윤수가 겁을 먹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시옷이 씨근거리자 어깨가 저절로 오르내렸다. 윤수가 개울 쪽으로 더 물러났다. 한발만 더 물러나면 윤수는 저 기세 좋게 흘러가는 흙탕물에 빠지고 말 것이다. 시옷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윤수의 팔을 붙잡고 제 쪽으로 와락 잡아당겼다. 윤수의 몸이 종이인형처럼 팔랑거리며 시옷의 품에 안겼다. 윤수의 몸이 닿자 시옷은 깜짝 놀라 윤수를 개울 반대편 담벼락에 밀어버렸다. 그 바람에 윤수가 들고 있던 검은 우산을 놓치고 말았다. 우산은 바람을 타고 휙 날아가더니 곧장 개울물에 처박혔다. 흙탕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윤수의 허술한 우산을 단숨에 집어삼키고 저 멀리 흘러갔다. 시옷과 윤수는 방금의 실랑이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는 우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담임에게 손바닥을 맞은 일보다, 윤수와 몸으로 실랑이를 벌인 일보다 우산을 잃어버린 일이 훨씬 더 무겁고 무서웠다. 시옷은 윤수를 보았다. 윤수의 눈에도 겁이 실려 있었다.

어떡하지?

시옷이 말했다. 담임한테 손바닥을 맞을 때도 울지 않았는데, 지금은 울고 싶었다. 윤수가 벌써 비로 젖어가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돌연 호기롭게 말했다.

괜찮아. 엄마한테 몇대 맞으면 돼.

그러곤 먼저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윤수의 어깨가 빠른 속도로 젖어갔다. 시옷은 이를 악물고 윤수에게 달려갔다.

같이 써.

윤수는 시옷이 기울이는 우산을 마다하지 않았고 순순히 시옷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공평하게 한쪽씩 젖어갔다. 시옷도 윤수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두 사람을 보고 얼레리꼴레리 하고 놀릴까 걱정하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은 둘이 비를 덜 맞는 게 중요했다.

할머니는 저녁을 차리고 난 연탄아궁이 옆에 흠뻑 젖은 시옷의 운동화를 말렸다. 그리고 윤수의 운동화도 보나 마나 젖었을 테니 가져오라고 시켰다. 시옷은 순순히 할머니 말을 들었다. 연탄아궁이에서 고무 눋는 냄새가 풍겼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이제 천둥 번개까지 쳤다. 시옷은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선생님의 신경질로 평소의 두배가 된 산수 숙제를 했다. 그러고 보니 윤수네 방 앞에 윤심 언니의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시옷은 이렇게 천둥 번개가 치는 날 윤수 혼자 있으면 무섭지 않을까 걱정했다. 창밖으로 쏴아아아 빗줄기 소리와 쿠콰콰쾅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면 집 옆에 바짝 붙어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도 들렸다. 윤수네 방은 개울 쪽에 더 가까우니 그 소리가 한결 크게 들릴 것이다. 지금쯤 윤수의 우산은 어디만큼 갔을까? 여름마다 사람이 빠져 죽는다는 온주천 하류까지 흘러갔을까? 바다에 닿았을까? 윤심 언니는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어디를 헤매느라 여태 돌아오지 않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숙제 속도가 더뎌졌다. 배가 부르고 바닥이 따뜻하니 졸음이 몰려왔다. 시옷은 따뜻한 잠의 물웅덩이에 까무룩 빠져들었다.

시옷을 깨운 건 엄마의 비명이었다. 높고도 날카로운 소리가 작은방까지 찌르고 들어와 잠든 시옷의 몸을 흔들었다. 시옷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거실에서 할머니와 아빠가 말 그대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는 아빠의 등을 찰싹 때리며 당장 철둑 너머 할머니를 데려오라고 했다. 아빠가 안방 쪽을 쳐다보며 발을 떼지 못하자 할머니가 매섭게 말했다.

그럼, 이 빗속에 저 어린 것을 보내랴?

아빠는 아직 잠기운을 떨치지 못해 어리둥절한 시옷을 한번 내려다보더니 우산을 집어 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인지 평소보다 관세음보살을 훨씬 더 많이 찾으며 허둥거렸다. 할머니는 연탄불에 물통을 올리고 미리 준비해둔 가위와 소독약, 천 등을 꺼내 안방으로 가져갔다. 문틈으로 엿본 엄마는 평소의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는 짐승이 되어 이상한 소리로 울부짖으며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시옷은 엄마가 미쳐버릴까봐 겁이 났다. 저렇게 울부짖다가 진짜 늑대로 변해버릴까 무서웠다. 할머니가 미리 빨아 햇볕에 바싹 말려둔 기저귀 뭉치를 꺼내 안방으로 가져가다가 문 앞에 있는 시옷을 보았다.

아가. 이건 네가 볼 일이 아니니 옆집에 가 있거라.

시옷은 울면서 윤수네 방문을 두드렸다(그 와중에도 숙제를 안 해가면 담임한테 또 맞을까봐 산수 숙제를 챙겨갔다). 윤수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윤수는 방 안에 정신없이 널린 물건들을 주섬주섬 치우고 시옷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방 한가운데 밥풀이 말라붙은 밥상이 보였다. 밥그릇은 비었지만 반찬통들은 뚜껑이 열린 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윤수가 서둘러 옆에 있던 보자기를 들어 밥상을 덮었다. 시옷은 처음 들어가본 남의 집에 주저앉아 계속 울었다. 윤수는 아까 우산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왜 울어?

마침내 윤수가 물었다. 시옷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방바닥을 기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울음이 더 커졌다.

할머니한테 혼났어?

시옷은 도리질을 쳤다.

엄마한테 맞았어?

시옷은 엄마 소리에 아예 목을 놓아 울었다.

우리 엄마가! 죽을지도 몰라!

윤수가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왜? 어디 아파?

아니!

그럼, 왜 죽어?

아기 때문에!

윤수는 시옷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괜찮을 거야!

네가 어떻게 알아?

사내자식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출산은 사내자식이 아닌 시옷도 모르는 영역이었으니까.

우리 엄마도 마흔살 넘어서 나를 낳았대. 내 머리가 너무 커서 죽을 만큼 아팠지만 안 죽고 낳았대. 봐!

윤수가 양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통을 감싸고 눈을 한껏 치떠서 웃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엄마, 날 때릴 때마다 목숨 걸고 낳았더니 죽어라 말 안 듣는 새끼라고 욕하잖아. 죽지 않고 살았으니까 욕도 하고 매도 때리지.

윤수가 어느 코미디언을 흉내 내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시옷은 울다가 그만 피싯 웃어버렸다. 윤수가 한 손으로 제 뒤통수를 탁 치더니 동시에 혀를 쑥 내밀었다. 시옷은 하하 웃었다.

내가 더 웃긴 거 보여줄게.

윤수는 신이 나서 방 한구석의 작은 화장대에서 립스틱을 가져왔다. 붉은색 립스틱은 반토막 정도 남아 있었다. 색깔이 진한 걸 보면 윤심 언니 것이 아니라 윤수 엄마 것 같았다. 윤수가 검붉은 립스틱으로 양쪽 뺨에 둥근 회오리를 그렸다. 입술 한가운데에도 붉은 점을 찍었다. 윤수는 금세 익살맞은 광대가 되었다. 윤수가 그 꼴을 하고 시옷 앞에 서서 개다리춤을 추었다. 시옷이 깔깔 웃었다. 윤수가 한참 동안 개다리춤을 추다가 숨이 찼는지 시옷 앞에 주저앉았다. 시옷은 윤수가 내려놓은 립스틱을 주워 들었다.

가만히 있어봐.

시옷이 윤수의 입술에 제대로 립스틱을 칠하는 동안 윤수는 정말로 가만히 있어주었다. 시옷은 옷소매로 윤수의 뺨에 그려진 회오리를 지웠다. 익살은 윤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윤심 언니처럼 눈이 아름답고 애니처럼 이목구비가 또렷한 윤수에겐 예쁜 게 더 어울렸다. 지난봄 애니가 시옷의 입술에 립스틱을 칠해주었을 때보다 지금 윤수의 얼굴이 훨씬 더 예뻤다. 방송국 지휘자 선생님처럼 오해를 잘하는 사람의 눈에는 윤수가 여자애로 보일 것이다. 윤수가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파닥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시옷은 손을 멈추고 윤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순식간에 집 밖의 개울물 소리와 빗소리가 들이닥쳤다. 짐승 같은 엄마의 비명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윤수가 겁을 냈다. 시옷은 양손으로 윤수의 두 뺨을 감싸고 말했다.

괜찮아.

윤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윤수가 나직이 물었다.

아기 태어나면, 안아봐도 돼?

시옷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윤수는 단박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시옷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에게 사나운 질투를 느꼈다. 바깥에서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관세음보살 하는 철둑 너머 할머니의 소리도 들렸다. 엄마 배 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시옷을 무사히 받아주었던 철둑 너머 할머니가 이제 아기 동생을 받아주러 왔다. 할머니의 손은 시옷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 동생을 진심으로 환대할 것이다. 엄마는 아기를 품에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할머니와 아빠는 그런 엄마와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것이다. 아기는 온 집안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할 것이다. 윤수마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를 안아보고 싶어 저리 눈을 빛내고 있지 않은가. 시옷은 다시 립스틱을 집어 들고 자신의 양쪽 뺨에 회오리를 그렸다. 입술 한가운데 점도 찍었다. 한 손으로 뒤통수를 탁 치면서 동시에 혀를 앞으로 쏙 내밀었다. 윤수가 하하 웃었다. 눈알을 빙글빙글 돌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설프게 개다리춤을 추었다. 윤수가 깔깔 웃었으며 일어나 시옷과 마주하고 서서 개다리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숨이 넘어가게 웃으며 계속 춤을 췄다. 난폭한 빗소리와 짐승 같은 엄마의 비명이 잠시 먼 곳으로 물러났다.

가을비가 매섭게 내리며 순식간에 겨울을 몰고 온 날 밤, 시옷과 윤수가 싸늘한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든 사이에 엄마는 아기를 낳았다. 엄마는 죽지 않았고 미치지도 않았으며 늑대로 변하지도 않았다. 시옷은 다음 날 아침 작은방에서 눈을 떴다. 옆자리에 아빠가 누워 있었다. 간밤 아빠가 윤수네 방에서 잠든 시옷을 안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어렴풋했다. 밤새 비가 그쳤고 집 안 공기도 달라져 있었다. 안방에서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에에에에. 가느다란 울음소리도 들렸다. 철둑 너머 할머니가 안방에서 나오며 이제 막 일어난 시옷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고추한테 터를 팔고, 우리 누나 장하다.

철둑 너머 할머니도 시옷의 할머니도 밤새 잠을 못 자 고단해 보였지만 다들 행복의 묘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계속 웃었다. 시옷만 기쁘지 않았다. 왜 기뻐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윤수가 물은 것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아기를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행히 할머니는 당분간은 아기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얼마간 엄마와 할머니가 안방에서 함께 아기를 돌보고 아빠와 시옷이 작은방에서 지내야 한다고도 했다. 아기는 안방에서 나오는 기저귀와 빨랫감에 묻은 냄새로 제 존재를 알렸다. 아침 밥상에는 기름이 둥둥 뜬 미역국이 나왔다. 시옷은 미역국이 싫었지만, 할머니는 당분간 미역국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시옷은 미역국에 밥을 말아 억지로 밀어넣고 책가방을 들고 나섰다. 현관에 운동화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부엌에서 운동화 두켤레를 가져왔다. 하얀 고무 밑창 곳곳이 누렇게 눌어붙어 있었다. 시옷은 바짝 말라 쪼그라든 운동화를 신고 윤수네 방으로 갔다. 두 사람은 비슷하게 쪼그라든 운동화를 신고 나란히 학교로 걸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얼핏 본 윤수네 방에는 윤수 엄마만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응달집에 한 사람이 태어난 날 밤 또 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

 

약을 먹은 지도 일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제 상태는 늘 제자리걸음 같을까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내 말투는 내가 들어도 의사를 향한 항변 같았다. 일년째 한결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았던 의사가 모니터 너머로 내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의사가 키보드에 올라가 있던 손을 내리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불안은 약을 먹는다고 어느 순간 극적으로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그럼 왜 약물치료를 하고 상담을 받죠?

나는 숫제 의사에게 싸움을 걸고 있었다. 처음 정신과를 찾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과호흡의 빈도도 많이 줄었고 약효도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지만, 불안은 여전히 내 통제 범위를 벗어난 곳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언제라도 불안과 공황에 잡아먹힐 수 있는 괴물 우리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이 괴물은 도저히 길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난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의사가 내 쪽으로 조금 더 고개를 내밀었다.

약을 먹고 상담을 받는 목적은 불안을 깨끗이 몰아내려는 게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우리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법에 익숙해지려고 애쓸 뿐입니다. 처음 저를 찾아왔을 때 환자분은 밤에도 심장이 뛰고 호흡이 안 되어 잠을 전혀 자지 못했어요. 낮에도 불안이 뒷덜미를 자꾸 잡아채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했고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어떤가요?

좋아졌다는 건 저도 알아요.

예. 그걸 아는 게 중요합니다.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요. 매일 찾아오던 게 일주일에 한번 찾아오고, 한달에 한번 찾아오다가 계절에 한번 오는 식이에요. 물론 그것도 꾸준히 약물치료와 상담의 노력을 기울인다는 전제 아래 말씀드리는 겁니다. 계절에 한번 오던 게 일년에 한번 온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누가 정신과에 찾아와 약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너 또 왔구나? 이러다 또 지나가겠구나, 하겠죠. 그 상태까지 가는 게 우리 목표입니다.

한달 치 약을 처방받아 병원을 나섰다. 바깥은 어느새 가을이었다. 가로수 잎이 가장자리부터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야트막한 산에도 울긋불긋한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꼭 일년 전 불안에 쫓겨 난지천공원에서 하늘공원을 거쳐 월드컵 평화의 공원까지 도망치듯 걸었을 때가 떠올랐다. 지나가다 마주친 단풍의 색이 분명 아름다운데 조금도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무너졌었다. 지금 나는 아름다운 것을 제대로 아름답게 느끼고 있는가, 자문해보았다. 대답이 곧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우선 무엇이 아름다운가 하는 반문이 돌아왔다. 대학병원 근처에 해준 또래의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게 보였다. 저들은 아름다운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들의 분주함과 고단함이 먼저 들어왔다. 병원 입구에는 어느 노조에서 설치한 농성 천막이 있었다. 그 위로 투쟁의 문장이 지나갔다. 싸우는 사람은 아름다운가? 그렇다. 그러나 저들의 치열함을 그저 아름답다고만 하고 넘어가기엔 내 무력감과 죄책감이 너무 무거웠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은행나무에서 누렇게 익은 은행 열매가 떨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은행을 밟지 않으려고 발을 깡총거리며 지나갔다. 누군가의 식량도 미래의 씨앗도 되지 못한 채 길바닥에 떨어져 사람들의 골칫덩이가 되어버린 저 누런 열매는 어떠한가? 저것도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군가의 발에 밟혀 단단한 중과피가 드러난 은행 열매 하나를 주웠다. 냄새가 마스크를 뚫고 코를 찔렀다.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냄새의 원인인 외과피를 닦아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중과피에 둘러싸인 열매는 조금 더 아름다운 쪽에 가까웠다. 어떻게 하리라는 생각도 없이 열매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오래전 어린 내 마음을 달래주었던 제비다방 남자의 기타 피크가 생각났다. 그 작은 플라스틱 조각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은행의 뾰족한 모서리를 만졌다. 이 은행알을 땅에 심으면 싹을 틔워줄까? 골칫덩이 열매가 무사히 씨앗의 역할을 해낼까? 행여 싹이 튼다고 해도 내가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 어떤 미래도 기약하지 못하고 늘 과거로 도망치는 내가?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기다려 기어이 은행의 새싹을 목격한다면 그건 분명 아름다운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속는 셈 치고 양지바른 곳에 심어볼까? 그리고 힘내어 기다려볼까? 어쩐지 마음이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했다. 양지바른 곳을 어디서 찾을까? 순간 내가 아는 가장 가까운 정원이 떠올랐다. 나는 방향을 바꿔 연희동 방향으로 걸었다.

 

*

 

아기는 겨우내 무럭무럭 자랐다. 아빠가 새해 달력을 구해오자마자 할머니가 1월의 어느 날짜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치고 거실 벽에 걸었다. 아기가 태어난 지 백일째 되는 날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미리미리 잔치 준비를 해야 한다며 백일 떡에 쓸 쌀과 팥을 모았다. 시옷은 지긋지긋한 4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시옷은 함께 방학 숙제를 한다는 핑계로 매일 윤수네 방에 가서 놀았다. 시옷네 안방에는 늘 하얀 기저귀가 잔뜩 널려 있었고 난방이 되지 않는 거실은 너무 추웠다. 아기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느라 바빠 엄마도 할머니도 시옷이 어디서 누구랑 노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시옷이 거실에서 노느라 큰 소리라도 내면 겨우 재운 아기를 깨운다고 혼을 내기 일쑤였다. 윤심 언니가 사라지고 윤수 엄마도 가게에 나가고 없는 윤수네 방은 둘이 놀기에 좋았다. 둘은 날마다 방학 숙제를 조금 한 다음에 놀았다. 시옷은 방학 숙제를 안 했다고 담임에게 매를 맞고 싶지 않았다. 윤수가 맞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윤수는 4학년이나 되면서 그동안 뭘 했는지 받아쓰기도 맨날 틀렸다. 특히 받침이 헷갈리는 단어나 겹받침 단어는 죄다 틀렸다. 산수는 두 자릿수 덧셈과 뺄셈부터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고 구구단도 6단부터는 잘 못 외웠다. 그런 윤수를 보면 한숨이 나왔지만, 시옷은 지금 당장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매 맞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윤수를 앉혀놓고 숙제를 시키고 공부를 가르쳤다. 윤수는 공부에 관해서라면 고집이 세서 시옷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닮았다. 곪았다. 넋이 빠졌다. 이런 단어를 열번씩 쓰게 하면 세번도 안 쓰고 제 팔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우는 시늉을 했다. 산수는 더 싫어해 두 자릿수 덧셈 문제를 달랑 한 문제 풀고 나자빠졌다.

너랑 안 놀아.

시옷이 토라져서 집으로 돌아오면 윤수는 잠시 후 시옷네 현관문 앞에서 얼쩡거리다 할머니 눈에 띄어 시옷의 집으로 들어왔다. 할머니는 윤수가 허술한 옷차림으로 추운 마당을 서성이는 꼴을 못 봤다. 시옷이 윤수를 외면하면 할머니는 친구 괄시하는 거 아니라고 혼을 냈고, 시옷이 못 이기는 척 윤수와 놀기 시작하면 시끄럽다고 다시 윤수네로 쫓아냈다. 이걸 잘 아는 윤수는 더욱 시옷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시옷은 꾀를 냈다.

아기 안아보고 싶지?

산수 공책을 밀쳐버리고 바닥에 엎드려 시위하던 윤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윤수의 눈망울이 반짝 빛났다. 윤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치 숙제 다 하면 안아볼 수 있어.

정말?

정말.

윤수는 다시 공책을 끌어당겼다. 주먹셈을 해가며 덧셈 문제를 풀었다. 손가락이 모자라 헷갈리면 갑자기 제 뒤통수를 때렸다. 선생님한테도 엄마한테도 매일 얻어맞는 애가 제 손으로 자기를 퍽퍽 때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윤수의 주먹이 제 뒤통수를 칠 때마다 시옷의 심장도 툭툭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 마!

참다못한 시옷이 소리쳤다.

윤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옷을 보았다.

문제 풀지 마?

머리 때리지 말라고!

아.

윤수가 씩 웃었다.

우리 엄마가 고장 난 텔레비전은 탕탕 쳐야 말을 듣는대. 내 머리도 고장 났으니까 탕탕 쳐야 굴러가지.

시옷은 바보 같은 윤수가 가엾고 또 미웠다.

한번만 더 때리면.

때려줄 거야?

윤수는 제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깔깔 웃었다.

다시는 너랑 안 놀 거야.

윤수가 단박에 울상을 지었다.

진짜?

진짜.

윤수가 다시 연필을 쥐고 덧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문제가 안 풀리는지 주먹 쥔 왼손이 움찔움찔했다. 시옷은 오른손에 쥔 연필을 왼손으로 옮겨 쥐고 오른손으로 윤수의 왼손을 가만히 잡았다. 윤수가 눈만 들어 시옷을 올려다보았다. 시옷은 윤수의 왼손을 잡은 채 자신의 왼손으로 곱셈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어쩐지 마음이 간질거렸지만 잠시 동안은 윤수의 손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왼손으로 쓰는 숫자는 비뚤배뚤 엉망이어도 그렇게 마주 엎드려 산수 문제를 푸는 시간이 시옷은 좋았다. 윤수도 싫지는 않았는지 한동안 묵묵히 문제를 풀었다. 시옷의 손안에서 윤수의 손이 움찔거리는 때도 있었지만 윤수는 시옷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풀기로 한 문제를 다 푼 다음에도 어서 빨리 아기를 안아보게 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아기의 백일이 되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새벽부터 부엌에 나가 백설기를 찌고 수수팥떡을 만들었다. 철둑 너머 할머니가 흰색 털실로 아기 망토를 만들어왔다. 철둑 너머 할아버지는 가느다란 금반지를 아기 엄지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할아버지는 아기가 침을 많이 흘리니 건강한 장군이 되겠다고 했다가 아기 눈망울이 또랑또랑한 걸 보니 똑똑한 판검사가 될 거라고 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할아버지 말에 식구들이 모두 웃었다. 고모 둘이 방울 달린 은팔찌를 선물했고 큰이모는 은수저를 주었다. 윤수 엄마는 가게에서 가장 비싸게 판다는 막걸리를 커다란 들통으로 가져왔고 아기 선물로 하늘색 내복을 사 왔다. 좁은 집 안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시옷과 윤수는 어른들 뒤쪽에 끼어 앉아 삶은 돼지고기와 떡을 집어 먹다가 심심하면 조용히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며 키득거렸다. 아기가 팔을 흔들 때마다 손목에 채운 은팔찌가 짤랑짤랑 경쾌하게 울렸다. 엄마는 기분이 좋아 아기를 안은 채 손님들에게 자꾸 술과 수육을 권했다. 아빠와 철둑 너머 할아버지와 윤수 엄마가 술을 많이 마셨다. 고모들과 큰이모는 술을 못 마신다고 술잔을 받지도 않았는데 웬일로 할머니가 빈 술잔을 내밀며 막걸리를 따라달라고 했다. 시옷은 할머니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들 놀란 얼굴로 할머니를 보았다.

별일이네. 안 하던 술을 다 하시고.

큰고모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종손 백일이라 요샛말로 기분이 끝내주는가보지.

작은고모가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누님, 천천히 많이 잡수십쇼.

할머니가 비운 술잔을 철둑 너머 할아버지가 금세 채워주었다. 할머니는 그 술잔도 단숨에 비웠다. 다들 입을 다물고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 얼굴이 새빨개졌다. 할머니가 끙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할머니를 따라 위로 향했다.

오늘은 내 평생 가장 기쁜 날이니 내 노래 한곡 뽑음세.

할머니 말에 고모들이 정말 별일이라며 웃었다. 윤수 엄마가 큰 소리로 손뼉을 쳤다. 윤수와 시옷도 까르르 웃으며 손뼉을 쳤다. 할머니가 발그레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가 이내 노래를 시작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데가 있더냐

 

할머니는 평생 가장 기쁜 날이라면서 세상 구슬픈 소리로 노래했다. 시옷은 처음 듣는 노래였다. 노래라기보다는 나지막한 한탄 같았던 소리가 갑자기 크고 높아졌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할머니는 뿌리치듯 외치고 잠시 멈추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할머니가 눈을 질끈 감더니 살짝 휘청거렸다. 아빠가 벌떡 일어나 할머니 팔을 붙잡았다. 할머니가 아빠 손을 가만히 뿌리치고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 짙고 꽃 피니라

예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서리 바람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국화 단풍 어떠한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찬 하늘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려 은세계가 되고 보면

흰 달 흰 눈 흰 천지니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할머니 노래가 다시 끊기자 철둑 너머 할아버지가 술잔을 들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두 팔을 버둥거리며 칭얼거렸다. 조용한 방 안에 찡찡대는 아기 소리와 은방울 짤랑거리는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할머니가 아기를 향해 눈을 뜨고 슬며시 웃었다. 할머니의 눈이 물기로 번들거렸다.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 내 한 말 들어보소

인간이 모두가 백년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 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죽어서 받는 진수성찬 생전에 받는 한잔 술만 못하느니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아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 마라

가는 세월 어쩔거나

 

노래는 돌연 끝났다. 할머니는 큰 숨을 한번 훅 내쉬고 자리에 앉았다. 윤수가 짝짝짝 손뼉을 쳤지만 아무도 따라 치지 않았다.

아이고, 우리 어머니. 별일이네, 별일이야.

작은고모가 눈꼬리를 닦으며 말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수습하고 싶었는지 철둑 너머 할머니가 시옷을 보고 말했다.

이참에 우리 가수 노래도 좀 들어보자. 방송국에서 배워 온 신나는 노래 하나 불러봐라.

어른들이 일제히 시옷을 보고 손뼉을 쳤다. 윤수도 시옷을 향해 활짝 웃으며 열심히 손뼉을 쳤다. 윤수 손바닥이 빨갰다. 시옷은 저도 모르게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합창단 지휘자 선생님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 앞으로 방송국에 시옷을 보내지 않겠다고 했던 일을 까맣게 잊었는지 다른 어른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다. 할머니처럼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시옷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목구멍 바로 밑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노래도 부르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음도 목 밖으로 나와주지 않을 것이다. 시옷은 이미 봄에 노래를 잃었다. 어른들이 한껏 기대하는 표정으로 시옷을 보았다. 시옷은 옆자리 윤수의 손을 잡고 함께 일어났다. 얼떨결에 일어난 윤수가 뭔가를 묻는 얼굴로 시옷을 보았다. 시옷은 윤수에게 눈으로 말했다. 윤수는 충분히 알아들은 표정을 보냈다. 두 아이는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각자의 뒤통수를 퍽 치면서 동시에 혀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 어른들이 반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아이는 동시에 눈알을 빙글빙글 돌렸다. 방 안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할머니도 눈물을 매단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시옷과 윤수는 한번 더 눈을 마주쳤다가 신호라도 주고받은 것처럼 동시에 개다리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깔깔 웃으며 손뼉을 쳤다. 시옷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런 광대놀음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다리를 흔들었다. 창문 너머로 어느새 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노래에서 처음 들은 말처럼 은세계가 펼쳐진 날 아침, 할머니는 먼 길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아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고모들이 가장 섧게 울었다. 곧 누군가의 할머니가 될 늙은 여자들이 아기보다 더 아기처럼 목 놓아 울었다. 할머니가 지나온 계절들은 어린 시옷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무수했을 텐데, 그 계절은 모조리 짧고 눈 깜짝할 새 이별은 영영이라고 큰고모가 할머니 영정을 향해 따지듯이 울부짖었다.

 

*

 

별일 없냐?

엄마와의 통화는 늘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사실 별일은 내가 아니라 엄마에게 생겼다는 걸 이제 나는 안다. 십년 전 아빠가 말기 암을 선고받고 손쓸 틈도 없이 서둘러 떠난 후에도 엄마는 삶에 그다지 큰 타격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삼십년 전 내가 대학에 간다고 고향을 떠났을 때도 하나뿐인 딸이 곁에 없어서 얼마나 서운하냐는 사람들의 말에 조용히 코웃음을 친 엄마였다. 그때도 십년 전에도 엄마에겐 생의 가장 큰 의미이자 낙인 남동생이 있었다. 내가 도망치듯 서울로 떠나왔을 때 그 아이는 고작 열살이었고 엄마는 하루하루 무섭게 성장하는 그 아이의 변화에 골몰하느라 내게 나눠줄 여분의 감정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랬던 엄마가 일흔이 넘어서부터는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어 별일 없냐고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별일 없어요. 엄마는요?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대학에 간 후였을까? 결혼한 후였을까? 해준을 낳고 난 다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어가 관계를 규정한다기보다 관계가 언어를 발생시킨다고 믿었기에 엄마를 향한 존대는 어색하지 않았다. 듣는 엄마가 언어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생각해본 적 없다. 그러다 남동생이 서른 넘어 갑자기 내게 존대를 하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서 언어의 교란이 일어났다. 나이 차이가 열살이나 나 언제나 아기처럼 누나! 안아줘! 누나! 업어줘! 했던 애가 언제부턴가 데면데면 굴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대화라는 것을 나눌 만큼 자주 만나거나 통화를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아이의 거리 두기에 조금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존대에 사실 엄마도 상처를 받았던 게 아닐까 하고. 애교가 많아 주변의 귀여움을 끌어올 줄 알았던 동생은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 급격히 과묵해졌고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과묵보다는 침울 쪽에 더 가까워졌다. 이런 변화가 남자로서 겪는 당연한 통과의례인지 크게 의지했던 아버지를 잃은 늦둥이 아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인지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 상의하려 들었지만 엄마도 나도 동생에게 왜 그렇게 우울하냐고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동생이 내게 존대를 할 만큼 나와 노골적으로 거리 두기를 시작했다면 가까이 사는 엄마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엄마도 전에 없이 자꾸 내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한참 후에야 떠올랐다. 그러니까 엄마의 잦아진 연락 역시 내가 아니라 동생이 원인이라고.

별일 없냐?

엄마는 늘 같은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내가 별일 없다고 대답하면 그것을 신호로 엄마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다. 그러면 나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커피를 내리거나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내면서 엄마 말을 건성건성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를 한다. 엄마는 동생 이야기나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주로 동네에서 주워들은 남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러니까 엄마는 요즘 엄마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차지하고 있을 남동생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나 역시 요즘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에 관해서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다. 석구와 서류상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헤어진 지 일년이 다 되었다거나 학원과 아파트를 정리하고 작은 오피스텔에서 폐인처럼 지낸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할 수 없는 이야기고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그이가 죽었단다.

엄마는 돌연 누군가의 부고를 전한다. 요즘 엄마와의 통화 주제는 절반이 부고다. 엄마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처럼 죽음의 소식을 알린다. 나는 누가요? 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가며 엄마의 말을 흘려듣는다.

우리 온양집 살 때 옆집 살던 여자 말이다. 딸내미 하나 믿고 살았던 여자. 왜 그 집 남자가 도청에 다니면서 언제 그렇게 돈을 모았는지 온주시에서 제일 높게 지은 맨션아파트에 척 하니 당첨되어 들어갔잖냐. 우리 수호 네살 때던가. 너랑 같이 집들이도 갔었는데, 기억 안 나? 너는 안 갔던가? 하긴 그때 넌 연합고사 준비한다고 맨날 밤늦게 들어왔지. 아무튼, 그 여자, 교회를 그리 열심히 다니면서 하나님 아버지! 하고 염불을 외더니 기도발이 좋았는지 아파트도 사고 건물도 올리고 내내 잘살았어. 그 집 딸, 너도 알지? 만화영화 주인공처럼 빼입고 다녔던 애. 그게 발랑 까져서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연애를 해대더니 결국 전문대 들어가자마자 임신해서 결혼했잖냐. 그래도 남자애 쪽이 동문시장에 점포를 세개나 가진 알부자라 그 여자 이 악물고 귀한 딸을 그리로 시집보냈지. 의사 아니면 판검사 사위 볼 거라고 동네방네 큰소리 떵떵 치더니. 그애 결혼식 때, 넌 서울에 있어서 못 왔지만 그 여자가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신랑 쪽 사람들 눈치가 다 보이더라니까. 그래도 그애 아들을 둘이나 낳고 시내에 큰 가게도 두개나 물려받아 지역 유지 되어 잘산다.

그래서 누가 죽었다고요?

아, 그래. 그 여자가 죽었어. 건물도 아파트도 귀한 딸내미도 떡두꺼비 같은 손자도 다 남겨두고 허망하게 가버렸어. 심장 안 좋은 게 그 집안 내력이라네.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밍크코트 떨쳐입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사우나에 다녀오는 길에 쓰러졌단다. 장례식장에서 그 딸내미가 그리 섧게 울더라. 자식이라곤 딸랑 그애 하나인데, 오죽 서운하겠어? 그 집 남자는 늙지도 않았더라. 공무원 퇴직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도청 과장님처럼 꼿꼿하게 문상객을 맞더라고. 별로 울지도 않대? 사람들이 죄 수군거리더라. 저 남자가 얼마나 기다렸다가 새 여자를 맞을지 내기를 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여자들이 가만히 놔두겠어? 돈도 많고 아직 팔다리 짱짱하고 자식도 출가외인 딸 하나뿐인데. 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이름으로 부조 넣었다.

얼마나 하셨어요? 보내드릴게요.

됐다! 넌 늘 깍쟁이처럼 구는 게 틀려먹었어. 그게 내 돈이냐? 우리 수호 돈이지. 정 미안하면 수호 앞으로 보내든지. 그나저나 수호하곤 가끔 통화나 하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너무 무심한 거 아니냐?

대화가 이렇게 흐르면 인제 그만 통화를 끝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국이 끓어 넘친다고, 택배기사가 초인종을 누른다고 둘러대고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은행 앱을 열고 곧장 남동생 계좌로 십만원을 보낸다. 무슨 내역인지는 덧붙이지 않는다. 무슨 내역이냐고 묻는 연락이 오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별일 없냐?

오늘 엄마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다. 꽤 시달린 사람의 음성이다. 나는 또 누가 죽었을까 생각한다. 취침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자다 깨는 일은 줄었지만 대신 오전 내내 머리가 멍했다. 어지러운 꿈을 꾼 기억은 있는데 어떤 꿈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든 꿈은 흐릿한 그림자극의 잔상으로만 남아 나를 답답하게 한다. 이렇게 기분 나쁜 상태로 적정 수면시간을 유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다음 상담 때 의사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전화기를 반대편 손으로 옮겨 쥔다.

저야 맨날 똑같죠. 엄마는요?

그이가 죽었단다.

엄마는 또 부고를 물어온 모양이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의 은근한 안도감을 숨기지 못하던 평소와는 달리 오늘 엄마는 꽤 상처를 받은 목소리다.

우리 군경묘지 근처에 살 때 아랫집 살던 여자 있잖냐. 대폿집 하던.

응달집 특유의 습한 냄새가 시공을 가로질러 내 코끝에 어른거린다. 이번 부고의 주인공은 윤수 엄마였던가? 나는 동요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 여자 간이 망가져서 퍽 고생했다는 건 알지?

모른다.

아무리 먹고사느라 그랬다지만 맨날 그리 무섭게 술을 퍼부어대는데 몸이 남아나나? 그래도 마흔 넘어 얻은 아들이 공고에서 착실하게 기술 배워 울산의 큰 조선소에 들어가면서 그 여자 팔자도 폈단다. 그때 용접공이 모자라 서로 모셔가는 분위기였거든. 대기업은 대기업이라 연봉이 웬만한 대학 나온 사람들보다 좋았다. 너도 그애 기억하지? 어렸을 적엔 공부도 안 하고 맨날 꾀죄죄하게 하고 다니고 그랬잖아. 네 아빠가 몇번 목욕탕에도 데려갔었지. 저게 언제 커서 사람 구실을 할까 싶었는데 걔가 효자 팔자였는지 조선소에서 월급 따박따박 받아서 죄 제 엄마한테 줬다더라. 결혼도 안 했어. 돈이 얼마간 모이고는 제 엄마 대폿집도 그만두게 하고 시내에 서른두평 아파트도 장만해주었지. 그 아파트 집들이 때도 내가 수호 데리고 다녀왔었지. 너 결혼한 다음 일이야. 우리 수호가 그애를 친형처럼 따랐잖냐. 형 따라서 저도 용접기술자 된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말렸게? 지금 생각하면 말리지 말 걸 그랬어. 법대 가서 판검사는 못 되어도 공무원은 될 줄 알았더니 저렇게 1차까지 합격해놓고 집 나가서 까페를 한다고 돌아다니니, 내가 속이 터진다. 차라리 용접기술자가 되라고 할걸.

엄마의 말은 자주 길을 잃는다. 나는 엄마에게 애초의 화제를 상기시킨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 그래. 그래서 그 여자가 가게도 접고 대궐 같은 아파트에서 우아하게 식물이나 키우고 살았단다. 누가 그 여자가 한때 쉰 냄새 풀풀 날리는 대폿집 주인이었다고 생각하겠어? 아들은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하니 따로 생활비도 안 들어가지, 월급도 보너스도 봉투째 엄마한테 갖다주지, 아파트는 척척 값이 오르지. 그 여자 말년 복이 좋았던 거라. 아들이 마흔 줄에 들어가니 늦장가 보내는 게 유일한 소원이라고 하더라.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결혼을 시키고 손주를 얻어야 자식이 성장의 마침표를 찍는다고 믿는 어른들의 이야기. 그런 기대에서 벗어난 자식은 부끄러워 한사코 감추려 들고 그런 기대에 못 미친 남의 자식은 열심히 욕하고 비꼬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듣고 있으면 화가 나는 이야기. 그게 내 이야기가 되면 한없이 슬퍼지는 이야기. 엄마는 남동생이 마흔이 넘도록 결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번듯한 직장도 없어서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남의 불행을 물어와 열심히 전달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자신의 실패를 조금이라도 옅게 희석하고 싶어서. 그런 엄마에게 요즘의 내 사정을 말하면 엄마는 나에 대한 걱정보다 자신의 수치심으로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에서 다른 줄거리를 건져 올린다. 윤수는 용접기술자가 되었구나. 윤수는 효자가 되었구나. 윤수는 잘 살고 있구나.

그 여자가 나보다 열살은 많았으니까 벌써 구순이네. 아들이 너랑 동갑이었지? 그애도 벌써 쉰이 넘었다는 말이네. 아휴, 징그러워. 언제 그렇게들 나이를 먹었어? 아무튼 그 여자가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그 아들이 불쑥 들어오더란다. 그 아들이 노조를 했거든. 노조가 한창 잘 나갈 때 위원장인가도 하고 파업도 하고 해서 월급도 많이 올렸단다. 그랬는데 마흔 넘어서 조기퇴직을 하고 경상도 어디에서 무슨 가게를 하면서 혼자 살았대. 먹여 살릴 처자식도 없고 퇴직금도 넉넉했을 텐데 제 엄마 곁에서 살면 좀 좋아? 거기가 정이 들었는지 회사 옆에 그대로 눌러앉았대. 가게도 잘된다고 했는데. 무슨 가게냐고? 그건 기억이 나지 않네? 그랬는데 그날 아들이 온다는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왔더래. 그 여자가 깜짝 놀라서 냉장고에 얼려놓은 고기를 꺼내 굽고 김치찌개나 겨우 끓여 상을 봐줬는데 아들이 엄마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며 두그릇이나 먹더란다. 그러곤 엄마 옆에서 연속극을 보고 열한시가 되니까 졸리다고 작은방으로 자러 갔대. 아들이 오면 자고 가는 방이라 침대까지 있었단다. 그 여자가 다음 날 아들이 좋아하는 콩나물국이나 끓여줘야겠다 싶어 그 밤에 무랑 명태 대가리랑 파 뿌리랑 말린 밴댕이랑 넣고 육수를 팔팔 끓여놨대. 아침 일찍 슈퍼에 가서 콩나물만 사다 넣으면 되게. 그 여자가 술을 하도 많이 마셔서 해장국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였거든. 늙은이들은 워낙 일찍 일어나니까 새벽부터 육수 솥에 가스 불을 켜놓고 밥도 안쳐놓고 거실 바닥에 걸레질 좀 하다가 지금쯤 슈퍼가 열었겠다 싶어, 엄마 콩나물 좀 사 오마, 가스 불 좀 봐라, 말하려고 아들 방문을 열었대. 그런데 침대에 아들이 없더래. 이불도 말끔하게 개어져 있더래. 아니, 얘가 이렇게 일찍 간단 말도 없이 어딜 갔어그래. 전화라도 걸어보려고 핸드폰을 찾으러 나가려는데 이상하게 한기가 몰려오더래. 오싹하고 춥더래. 그래서 다시 보니 침대 옆 창문이 방충망까지 활짝 열려 있더래.

엄마!

나는 다급하게 소리친다.

왜 그러냐?

그만! 그만요!

왜?

국이…… 국이 끓어 넘쳐요. 그러니 제발 그만……

나는 손을 덜덜 떨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다. 내 집 문은 열린 데가 없는데 오싹하고 춥다. 좀처럼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나는 눈앞에서 혼자 달달 흔들리는 내 손을 보며 주문처럼 생각한다. 윤수는 용접기술자가 되었구나. 윤수는 효자가 되었구나. 윤수는…… 잘 살고…… 있구나.

 

*

 

해준이 독일에서 한옥 처마 밑의 제비둥지 사진을 보내왔다. 이게 뭐냐고 묻자 해준이 한참 후 답장을 보냈다.

제비 귀엽지? 아빠가 보내준 사진인데 엄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아빠 집에 제비가 날아왔대. 엄마 제비 좋아하잖아. 어떻게 알았냐고? 엄마가 지난번 보내준 엄마 일기 파일, 거기에 제비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알아? 엄마 쑥스러울까봐 내가 말 안 했는데, 나 엄마 일기 두번이나 읽었어. 처음엔 엄마가 뭘 보낸 건지, 왜 이걸 내게 보냈는지 이해가 안 됐거든? 근데 한번 읽고 또 두번 읽으니까 알겠더라. 엄마가 내게 보낸 건 사실 엄마의 일기도 아니고 엄마가 쓴 소설도 아니잖아. 일기 쓰기 교실에서 만들어줬다는 PDF 파일은 ‘시옷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지만 그건 엄마의 자서전도 아니었어. 엄마, 시옷의 이야기는 사실 내게 보낸 편지였지? 엄마는 그 파일로 내게 말을 걸었던 거지?

아빠가 알려줬는데 제비는 9월 9일에 떠났다가 이듬해 3월 3일에 돌아온다며? 가을에 떠났다가 봄이면 꼭 돌아온대.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오면 제비도 어김없이 돌아온다고, 그래서 제비는 신묘한 새라고. 아빠도 시골에 내려간 첫해에 그 사실을 알았대. 아빠는 나도 꼭 돌아오라고 제비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아니면, 아빠도 언젠가는 엄마 곁으로 돌아갈 거라는 뜻으로 한 말일까? 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는 아빠를 받아줄 거야?

엄마, 이곳의 가을은 생각보다 쓸쓸해. 까페에서 커피 한잔 주문하려고 독일어로 버벅거릴 때, 지나가는 사람이 칭챙총 어쩌고 할 때, 다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져. 좋아하는 사람들 다 거기 놔두고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한심해지기도 해. 하지만 힘들게 듣는 수업이 재미있을 때는 여기 오기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 기숙사에서 만난 스위스 여자애랑 말이 통할 때는 기분이 좋아서 맥주도 두캔이나 마셨어. 엄마, 말해봐. 내 나이에는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게 맞지? 다 이렇게 크는 거지? 그렇게 우왕좌왕 살다가 언젠가는 제비처럼 좋아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렇지? 만에 하나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지?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말해줘, 엄마.

 

*

 

수호의 까페는 온양집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옛 동네는 이제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고 어린 시절 이웃집은 거의 한옥 민박이나 한옥 까페가 되었다. 온양집에는 아빠가 빚 정리를 위해 시세보다 싼값에 내놓은 그 집을 샀던 사람이 아직도 살고 있다고 들었다. 애니네 집은 아담한 게스트하우스가 되어 있었다. 수호가 문자로 보내준 까페 주소를 길찾기 앱으로 검색했을 때만 해도 온양집 바로 앞인 줄은 몰랐다. 수호는 그 사실을 알고 일부러 이 자리에 까페를 개업한 걸까? 수호는 온양집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늘 온양집을 아쉬워하는 엄마에게 나중에 크면 꼭 성공해서 엄마에게 그 집을 되찾아주겠노라 장담했었다. 그런 수호를 볼 때마다 나는 저 어린 것이 성공이 뭔지나 알까, 어쩌다가 저런 부담감을 스스로 짊어지게 되었을까 생각하며 그애의 무구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까페는 오전 10시에 문을 연다고 했는데 10시 반에도 벌써 손님이 반 넘게 차 있었다. 수호의 동업자이자 하우스메이트라는 남자가 나를 맞아주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수호가 누님 자랑을 많이 했어요.

나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자는 수호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였다. 남자가 커피를 한잔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부탁한다고 하니 이번에는 산미가 있는 커피를 좋아하는지 구수한 맛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남자는 세심하고 다정해 보였다. 엄마도 이 까페에 와보았을까? 그랬다면 수호의 바리스타학원 선배라는 저 남자의 다정함을 보고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을 텐데. 수호가 1차까지 합격한 공무원시험을 포기하고 까페를 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며칠 동안 내게 전화를 걸어 눈물바람을 했었다. 남자가 온양집이 보이는 전면 창 앞자리에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온양집을 바라보았다. 새로 지은 한옥이 즐비한 동네에 오래된 한옥은 어쩐지 튀어 보였다. 담은 그대로인데 아무래도 페인트를 새로 칠한 것 같았다. 담장 너머로 키 큰 나무우듬지가 보였다. 우리 가족이 살았을 때는 없었던 나무였다. 저 자리에 할머니는 텃밭을 가꾸었다. 아침이면 할머니는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내 손을 잡고 토란을 캐러 나갔다.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 마당은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할머니 호미질에 검은 흙이 파헤쳐지고 그 사이에서 하얀 새알 같은 토란이 나타났을 때 얼마나 신기했던가. 흙냄새와 생채기가 난 토란의 비릿한 냄새가 지금도 커피 냄새를 뚫고 내 곁에 어른거렸다. 할머니는 저 텃밭을 두고 응달집으로 이사했을 때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끝내 의연했다. 집안 대대로 살아왔던 집을 팔아야 할 정도로 빚을 진 아빠의 실패를 한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자신 앞에 떨어진 불행을 묵묵히 헤쳐나갔다. 그때는 할머니가 큰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큰 어른이었다고. 하지만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코끝이 매워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수호가 유리창에 바짝 붙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내 동생이, 열살이나 어려 언제나 어린애 같은 내 동생이 마흔을 훌쩍 넘겼으면서도 여전히 맑은 뺨을 하고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응달집에 가보자는 내 말을 수호는 간단히 거절했다. 지금 응달집은 완전히 철거되고 그 자리는 그저 산밑 공터가 되었다고 했다. 공터라는 말이 무색하게 온갖 쓰레기가 잔뜩 쌓여 흉물이 되었다고도 했다. 내가 보면 공연히 마음만 다칠 테니 굳이 가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내 마음이 다칠지 아닐지 네가 어떻게 알아? 한마디 하려다가 수호 말을 듣기로 했다. 기억 속에도 폐허로 남은 집이 정말로 폐허가 된 걸 보면 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받을 것이다. 수호 말대로 곧장 윤수의 납골당에 가기로 했다. 수호가 까페 동업자에게 자리를 비워 미안하다고 했다. 남자가 별소리를 다 한다며 가게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우리는 남자가 한참 서서 우리 뒷모습을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하며 천천히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다. 그 길은 정확히 내가 온양집에 살 때 초등학교까지 걸어갔던 길과 일치했지만, 주변의 모든 건물과 집이 바뀌었고 학교조차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없었다. 수호가 정류장 근처 꽃집에 꽃바구니를 예약해두었다고 했다. 흰 국화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분홍색과 보라색 장미였다. 꽃이 좀 화려하다고 했더니 수호가 말했다.

윤수 형이 화사한 장미를 좋아했잖아.

어쩐 일로 수호가 말을 편하게 했다. 나보다 수호가 윤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윤수는 말 그대로 수호를 업어 키웠다. 수호는 윤수에게서 팽이치기와 딱지치기와 공놀이를 배웠다. 수호가 누구한테 맞고 들어오면 윤수가 나가서 혼내줬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윤수와 내외하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엎드려 숙제를 하거나 립스틱을 바르며 깔깔 웃거나 개다리춤을 출 나이는 지났다고 생각했다. 윤수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길에서 만나도 알은척을 하지 않았고 집에서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버스가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뜬금없어 보이는 신축 건물 앞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미색 대리석으로 마감한 납골당 건물은 신전 같았다. 수호가 성큼성큼 앞장서 복도 맨 끝 방으로 들어갔다. 수호가 제 키보다 조금 낮은 곳을 가리켰다. 낯선 중년 남자의 사진이 하얀 사기 테두리 액자에 담겨 있었다. 길에서 윤수를 마주쳤다면 몰라봤을 것이다. 나는 까치발을 하고 윤수의 사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은 여전히 크고 속눈썹이 짙었다. 수호가 꽃바구니를 납골함 바로 앞에 들어 보이며 말했다.

형이 좋아하는 장미 가져왔어. 향기 좋지?

수호가 한참 바구니를 들고 있다가 이윽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수호가 눈을 감고 납골함 유리문에 이마를 댔다. 윤수야. 나는 속으로 윤수의 이름을 한번 불렀다. 윤수야. 한번 더 불렀다. 잘 가라거나 편히 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수호의 목울대가 크게 한번 출렁였다.

버스정류장 벤치에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저 멀리 논이 노랗게 일렁였다. 둘 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호가 먼저 침묵을 깼다.

누나.

응?

오늘 와줘서 고마워.

왜 네가 고마워? 난 내 친구 보러 왔는데. 내가 오히려 고맙다. 엄마가 뭐 하러 우리 둘 다 가느냐고 한 소리 했거든.

첫사랑이 죽었는데 당연히 와봐야지.

무슨 소리야? 윤수랑 나, 그런 거 아니야. 윤수가 남자로 보인 적도 없다.

거짓말이었다. 윤수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해서 내외를 했을 것이다.

누나야말로 무슨 소리야? 윤수 형, 내 첫사랑이라고.

나는 수호 쪽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윤수 형 없었으면 나 진작 죽었을 거다. 누나 서울로 가버리고 나 혼자 엄마 아빠랑 거기 살았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끔찍해? 윤수 형은 내 첫사랑이고 생명의 은인이야. 내가 평생 잘하기로 약속했어.

수호가 저 멀리 울긋불긋한 산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근데 그 새끼가 죽어버렸네? 순 제 맘대로.

저만치서 버스가 먼지 꼬리를 달고 달려왔다. 수호가 먼저 일어났다.

누나.

응.

누나는 오래 살아라. 제발 오래오래 살아라.

 

*

 

할머니가 떠났는데도 봄은 왔다. 열한살 봄은 시시하게 왔다. 5학년이 되었고 갓난아기의 누나가 되었다. 할머니가 없어지고 작은방은 시옷 혼자 썼다. 윤심 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야산의 산벚나무가 연분홍 꽃을 피웠을 때 응달집도 잠시 환해졌다. 윤수 엄마는 점점 더 술에 취해 오는 밤이 많았다. 윤수는 시옷이 내주는 받아쓰기를 70점 이상은 맞게 되었다. 구구단도 7단 빼고는 곧잘 외웠다. 이상하게 7단은 헷갈린다고 했다. 나눗셈은 여전히 어려워했지만, 뺄셈 실수는 줄었다. 윤수와는 다른 반이 되었지만 시옷은 여전히 윤수와 같이 숙제를 했다. 윤수는 매번 새로운 유행어를 흉내 냈다. 지구를 떠나거라. 윤수의 억양이 코미디언과 똑같아 시옷은 배가 아프게 웃었다. 지구르을 떠나거라아. 야산에 꽃비가 날릴 때 응달집에도 제비가 날아왔다. 제비는 옥상과 벽 사이 틈새에 용케 집을 지었다. 윤수 엄마가 시끄럽다고 작대기를 들고 나와 제비둥지를 부수겠다고 했다. 윤수가 제 엄마의 허리통을 붙잡고 말렸다. 시옷도 제비집을 함부로 망가뜨리면 놀부처럼 벌을 받을 거라고 맞섰다. 윤수 엄마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 제비새끼가 박씨라도 물어다준다냐? 윤수 엄마는 제비집을 부수지 않았다. 제비는 봄이 가고 여름이 가도록 뺙뺙 울며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이제 응달집에는 제비가 자라게 되었다. 시옷은 응달집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윤수 엄마가 대신 이불 빨래나 밟으라고 했다. 시옷과 윤수는 고무통에 들어가 이불을 꾹꾹 밟으며 놀았다. 시옷과 윤수는 텔레비전에서 배운 노래를 시작했다. 봄봄봄봄 봄이 왔어요. 우리들 마음속에도. 봄봄봄봄 봄이 왔어요. 봄이 왔어요. 좋을 때다.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윤수 엄마가 말했다. 그래, 너희는 봄이다, 봄. 안방 창문 너머로 아기 동생이 뺙뺙 옹알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구를 떠나거라. 윤수가 말하고 시옷이 깔깔 웃었다. 응달집의 봄은 짧지만 환했다.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