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돌봄 연대의 현장을 만나다

▶ 봄호부터 가을호까지 특집에서 돌봄을 다룬 글 세편을 읽었다. ‘돌봄’은 ‘촛불’ ‘기후위기’ ‘기후정의’만큼이나 우리 삶터를 잘 드러낸 키워드라 본다. 봄호 백영경의 글(「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과 여름호 송종원의 평론(「돌봄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은 저마다 돌봄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확보해주었는데, 지난호에는 김중미가 「‘서로 돌봄’의 그물망이 희망이 된다」를 통해 우리 사회 돌봄 뿌리의 생성과 멈춤, 진행 및 확산, 돌봄에 대한 정치가들의 행태,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돌봄 연대를 알려주었다. 거대담론이 아닌, “나와 내 이웃의 관점에서, 그리고 곁에 있는 청년의 관점에서 쓴 글”(75면)이라 더욱 몰입감이 높았다. 나 또한 15년간 텃밭을 일구며 알게 되었다. 풀이 얼마나 질기고 모질게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는가를 살피려면 그 뿌리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글을 여러번 반복해 읽을수록 돌봄의 뿌리와 거기에 수북하게 묻은 흙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글을 읽으며 세가지 점을 생각했다. 먼저 돌봄과 ‘나’와의 관계성이다. 노동자·농민·빈민 등 다양한 사람들부터 기후위기로 고통받는 산천에 이르기까지 돌봄 영역은 무척 넓고, 우리도 자기 자리에서 그 돌봄에 동참해야 한다. 두번째로 정부와 정치권, 언론과 사회 전반에서 청년과 여성을 호명해오던 기존 방식을 수정해야 한다. 돌봄 서비스의 대상을 더 세분화하고 현실화해야 하며, 정책 실효성과 체감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번째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2022년 두번의 선거를 거치며 오래전의 일화를 떠올리는데, 1992년 총선 당시 희망을 가지고 정치인의 손을 잡았으나 끝내 실망했다는 얘기다. 돌봄 연대를 선거 전략으로서만 정치자원화하는 현실에 화가 나며,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글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시설에서 함께 살아온 친구들과 동생들을 수시로 만난다” “그 만남이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자리라고 말한다”(84면)였다. 돌봄 그물망의 현장에 머물지 않으면 접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연구실과 서재의 ‘골방생활’에 익숙한 나로서는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경험으로 쓰인 이 글에 호감이 가는 것은 당연하고, 그만큼 감동을 받았다. 나아가 다양한 차별철폐운동과 시위에 대해 가졌던, 다소 중립적이거나 비뚤어진 눈과 마음을 고쳐먹는 계기가 되었다.

강길봉 gkm508@naver.com

 

좋아하는 마음과 가여워하는 마음

▶ 가을호 ‘책머리에’에서 송종원은 김수영 시 「애정지둔」을 빌려와 민생에 대해 묻는다. 나의 하루가 떠오른다. 인문학의 위기, 학벌주의, 학력 인플레이션처럼 뉴스에 나오는 이슈로 점철된 게 사실상 나의 삶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나는 한 개인으로서 ‘노오력’하여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이 문제를 타파해갈 방법밖에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 모르는 것뿐, 영원히 모를 거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현재의 사는 모양새에 속지 말고”(5면) 우리가 원하는 삶의 진정한 모습을 되묻자는 머리글의 제안, 또 이 땅에 뿌리박고 사는 보통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연대하자는 메시지에 공감한다.

그런 마음을 창작란에서도 확인했다. 최은영의 「파종」은 슬픔을 직조해내는 작가의 장기가 여실히 발휘된 소설이다. 담담한 눈물이 불러일으키는 안쓰러움이 최은영이 그리는 슬픔의 속성이라고 느꼈다. 「파종」은 시란에 실린 박준의 시 「일요일 일요일 밤에」와도 맞닿아 읽혔다. 시에서 상갓집에 온 조문객 ‘그’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사라진다. 생수통 뚜껑도 채 따지 못한 채, 아마도 비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시의 마지막에 ‘나’는 “솔직히 말해서 형이 누나를 얼마나 좋아했냐. 누나는 늘 형을 가엾어했고.”라 말한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속 ‘형’과 ‘누나’를 「파종」 속 ‘소리’와 ‘소리의 삼촌’으로 치환하면 잘 들어맞았다. 소설에서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려 좋아하는 것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조카 소리를 따뜻하게 품어주던 삼촌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소리에게 슬픔을 남긴다. 시와 소설을 엮어 읽으며 좋아하는 마음과 가여워하는 마음은 단선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아마도 순환적인 게 아닐지 생각했다. 서로 좋아해서 가여운,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

이정하 dengjia@naver.com

 

전환을 위해 다시 보아야 할 개벽사상

▶ 갑자기 다가온 추위에 계절의 흐름을 실감하며 올 한해 잘 살아왔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때다. 깊은 노란색의 가을호에서 선거를 되돌아보는 특집 글들을 흥미롭게 읽었다. ‘진보’의 의미는 상대적이다. 단순히 말해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쪽은 보수,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쪽은 진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진보정치도 고정된 어느 집단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꾀하고 일구어가는 쪽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 정치에서 과연 누가 진보라 할 수 있는가. 어떤 자세로 정치에 임할 것인지 정치인들의 생각부터 달라져야 한다. 주병기의 글 「경제정책의 패러다임 전환」도 이같은 맥락에서 읽었다. 연구실 전등이 나가면 정치경제학자는 어느 회사 전구가 나은지 조사하고, 사회경제학자는 전등별로 선택에 따른 여파를 계산하며, 법경제학자는 선택에 위법사항이 없는지를 조사하고, 계량경제학자는 전체 비용을 산정하는데, 결국 전구는 조교가 교체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지금 우리 경제가 그 꼴이다. 정치인·이론가들이 경제 문제를 탁상공론으로만 논해선 안 된다.

대화 「새로운 한국학과 개벽이라는 화두」를 읽으면서는 초반에 유영주 교수가 “아카데미 시상식은 매우 지역적(local)인 축제”라는 봉준호 감독의 발언을 인용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깐영화제며 아카데미시상식을 더 우월한 것처럼 여기지만, 각 지역의 문화는 저마다 소중하다. 동학은 ‘인내천(人乃天)’이라 해서 사람들 누구나 하늘을 품고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이야기했다. 서양우월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동학과 개벽의 화두가 여전히 의미있다.

뿌찐과 트럼프의 문제점을 논한 네이오미 클라인의 현장 글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인류가 이기심과 자만으로 행해온 수많은 일들이 원인이 되어 지금의 기후위기와 전쟁 문제에 이른 것이다. 해결방법은 당장 멈추고 서서히 되돌려놓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뿌찐과 정치인들은, 그리고 우리는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너그러움과 은근한 미학이 있는 민족이다. 대놓고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끌리는 정서와 문화가 있고, 공격성을 갖기보다는 타인에게 너그러운 성향이 있다. 경쟁하고 정복하는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우리의 정서가 지금의 기후위기나 전염병, 전쟁 등 숙제를 풀어가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홍지연 wollen@naver.com

 

불안한 시대를 함께하는 ‘헤아림’

▶ 창비는 ‘기후위기’와 ‘정치’ 문제를 꾸준히 화두에 올린다. 언제나 중요한 한편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라서 묘한 기분을 준다. 창작란의 시·소설 작품도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유려한 문장으로 위안을 주는 작품도 좋지만, 혼란과 혐오로 물든 시대에 ‘함께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마음에 더욱 와닿는다.

지난호에는 창비신인문학상 작품들이 실려 눈여겨보았다. 신인시인상을 받은 김상희는 「말하는 희망」을 통해 제대로 부푼 것이 아니어도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님을 ‘빵’이라는 시적 형상을 통해 전한다. 한때는 “푹 꺼”진 빵이 희망을 잃게 만드는 듯했지만, ‘너’와 함께 걸음으로써 “고소한 냄새와 뜨겁고 아름다운 연기”를 지닌 것으로 빵을 다시 깨닫게 되는 모습을 그렸다. 시란에서 권창섭 송승언 여세실 조온윤 등의 작품을 무척 인상적으로 읽었음도 덧붙인다. 소설은 아포칼립스 시대를 그리는 작품이 눈에 띄었는데, 신인소설상 수상작인 주영하 「굴과 모래」와 정선임 소설 「몰려오는 것들」을 연결하여 읽을 수 있었다. 두 작품 모두 기후위기로 인해 삶의 저편으로 밀려난 이들을 등장시키고 ‘이쪽’과 ‘저쪽’, ‘기득권’과 ‘비기득권’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정치적 소명을 수행하면서도, 재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갈등을 빚고 타인을 외면하는 와중에 이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점차 변화해가며 타인을 헤아리게 된다. 아마 이 ‘헤아림’이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아니었을까. 기후위기와 재난을 막기 위해서는 타인을 향한 이런 ‘헤아림’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메시지를 발견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정치적인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고은 qkflfn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