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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아르투로 에스코바르 『플루리버스』, 알렙 2022

‘다른’ 세계의 존재를 확인하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는 일

 

 

현재환 玄在煥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과학기술학) jhwanhyun@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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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자원의 이용과 대규모의 사회적, 물적 파괴”를 통해 “지속 불가능한 구조”(24면)를 만들어온 디자인이 “어머니 지구의 해방”(46면)을 위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기후, 식량, 에너지, 가난, 의미의 위기가 중첩”(8면)된 이 시대를 타개하기 위한 집합적·공동적 노력에 디자인이 유의미한 대답을 제공할 수 있을까?

아르뚜로 에스꼬바르(Arturo Escobar)는 『플루리버스: 자치와 공동성의 세계 디자인하기』(Designs for the Pluriverse, 2018, 박정원·엄경용 옮김)에서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우리가 근대주의적 디자인과 그에 내재된 인식론·존재론을 역사적으로 살펴 문제화한다면, 그리고 공생을 지향하는 문화로의 전환을 이끌 ‘전환 디자인’(transition design)을 발전시키고자 애쓴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시도를 가리켜 우리 세계를 ‘플루리버스’(Pluriverse, 다중의 우주와 세계)로 만들기 위한 디자인 활동이라 칭한다.

에스꼬바르는 철학, 과학기술학, 인류학 등을 넘나들며 발전주의 담론을 비판하고 지역공동체 운동에도 참여해온 실천적 인류학자다. ‘플루리버스 디자인’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도 이런 맥락 위에서 그 독특한 용례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소품이나 건물, 사회서비스의 친환경적인 설계와는 다르다. “사물, 구조, 정치, 전문적 시스템, 담론, 서사” 등과 같은 대상을 만들어내는 행위이자, 우리 인간들과 다른 비인간들의 “삶의 형태”와 “존재 방식을 창조”하는 일종의 “삶의 기획”이다(28면). 에스꼬바르가 보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가부장적·자본주의적 서구의 근대성이 고안해낸 발전과 개발에 의해, 특히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디자인에 의해 주조되어왔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가 출현했다. 이에 대항해 에스꼬바르는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서벌턴(subaltern, 노동자·농민·여성·이주민 등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된 존재) 투쟁을 조명한다. 플루리버스 디자인이란 이들 공동체가 서로의 차이를 지우지 않고 상호의존적인 동시에 자치적인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는, 무엇보다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수많은 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이다(47면).

이처럼 플루리버스 디자인은 위기에 처한 세계를 바꾸려는 정치적 노력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위기의 근원에 근대주의 디자인이 가정해온 인식론이 있다고 보고 새로운 관계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정치존재론적 실천’으로도 명명할 수 있다(114~15면). 우리와 타자, 자연과 문화, 주체와 객체, 개인주의, 경제 논리, 과학 대 전통과 같은 데까르뜨주의적 이분법에 기인한 인식론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식민주의를 지탱하는 동시에 그것과 뒤얽히면서 자연과 남반구 지역공동체를 수탈하고 착취하는 데 기여해왔다. 모든 존재들이 연결되고 상호의존적이며, 이런 관계론적 그물망 안에서만 실재할 수 있다는 사고의 존재론적 전환을 통해 우리는 플루리버스를 상상하고 디자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238면).

얼핏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이 주장이 힘을 갖는 지점은 에스꼬바르가 자신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구체적인 지역들의 역사와 실천에서 찾는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전환마을(Transition Town) 계획으로 상징되는 탈성장과 커머닝(commoning) 운동, 라틴아메리카의 부엔 비비르(Buen Vivir)로 대표되는 포스트-발전 논의와 포스트-채굴주의 운동은 플루리버스 디자인으로 여길 만한 전환주의적 기획들이다. 전환 디자인의 구체적인 구현이자 영토와 문화를 지키기 위한 서발턴 공동체의 실천 사례로 자신이 참여한 콜롬비아 카우카 유역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대목(131면)은, 추상적으로만 보이던 그의 논의와 주장들이 어렵지만 현실세계에서 추구할 수 있는 기획임을 독자들에게 확인시킨다.

오늘날 관계론적 존재론에 기초해 인류세(人類世)의 위기를 헤쳐가자고 외치는 이는 에스꼬바르만이 아니다. 페미니즘 연구와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의 사상가들, 예를 들어 해러웨이(D. Haraway)나 라뚜르(B. Latour) 등도 다원적이고 공생적인 세계 만들기를 제안한다. 에스꼬바르의 플루리버스 논의의 강점과 문제점은 이같은 사상가들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기후위기에 대한 라뚜르의 최근 논의는,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이음 2021)을 보건대, 서구의 환경위기 시급성 담론에 여전히 얽매여 있고, 인간들 간의 문화적·계급적·젠더적·정치적 차이들을 종종 무화하며, 무엇보다도 식민주의 문제를 담아내지 못한다. 반면 에스꼬바르는 라틴아메리카의 서발턴 운동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아 세계를 탈식민주의적으로 재구성할 방안을 모색한다. 기후문제뿐 아니라 발전주의·식민주의의 유산이 복합적으로 결부된 위기에 직면한 한국 상황에서 그의 기획은 꼼꼼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강점이 서술의 문제를 야기하는 면도 보인다. 서발턴 공동체의 자치 디자인과 발전주의에 기댄 근대주의 디자인을 흑백 구도로 나누면서 기술과 과학, 혹은 기술과학(technoscience)을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는 경향은 그가 과학기술학 문헌에 능통하며 본인 스스로도 반(反)과학주의자가 아님을 강조한다는(373면) 점을 고려하면 다소 의아하다. 예를 들어 그는 기술이 “모계적, 공생적, 미래적인 디자인”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여성의 능력을 박탈할 가부장적 “포스트휴먼의 꿈”에만 일조하는 것처럼 서술하는가 하면(49~51면), 근대주의 디자인의 최신 버전인 ‘포스트휴먼’ 상상이 생명의 유기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개인·기술·과학이 “인간의 삶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듯 생각될 것을 우려한다(389면). 이 서술에서 과학은 플루리버스 디자인 기획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아마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에스꼬바르가 라뚜르에게서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기후위기를 위기로 인식하게 만든 중요한 제도가 과학이고, 기후 모니터링 기술이 향후에도 대안을 모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티모시 M. 렌턴·브뤼노 라투르, 「가이아 2.0」, 『에피』 9호, 2019 참조) 이미 어떤 기술과학들은 자치 디자인에 복무하려는 노력을 하기 전부터도 ‘어머니 지구의 해방’에 중요하게 기여해왔다.

마지막으로 번역과 관련해 사소한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 책은 과학기술학을 ‘과학기술 연구’ 내지는 ‘과학기술에 관한 연구’로 번역하고 있는데, 에스꼬바르가 존재론적 전환 논의와 관련해 과학기술학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소하지만 아쉬운 오류다. 특히 국내에서도 단순한 수입 담론을 넘어 2000년부터 한국과학기술학회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과학기술학연구』를 통해 유의미한 연구들이 제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역자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인류세 시대에 한국의 독자들이 유럽 지식인들의 파국적인 전망 대신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구 남반구의 중요한 경험들을 렌즈로 삼아 희망적인 미래를 상상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크게 반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