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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용옥 『도올주역강해』, 통나무 2022

물의 평등에서 불의 평등으로, 새로운 문명을 향한 주역 강해

 

 

전종욱 全鍾頊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lovejnj@jb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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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의 비극 속에 이 글을 쓴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한순간에 백수십명의 젊은 영혼이 비참하게 사라져갔다. 애통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하다. 얼마 전까지 코로나 방역에서 세계의 모범국으로 일컬어졌다. 거기에다 경제면 경제, 문화면 문화, 못하는 것이 없다고 세계의 부러움을 샀던 나라가 같은 공무원, 같은 국민인데 하루아침에 부끄럽고 참담하기 짝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이순신과 원균의 경우가 생각난다. 무패의 상승(常勝)장군으로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수를 적의 이간계에 휩쓸려 한순간에 끌어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고문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다. 결국 대체재로 원균을 세웠으나, 이순신 콤플렉스만으로 똘똘 뭉친 그가 지휘하자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모조리 궤멸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있을 때 그들은 천하무적이었고 그가 가고 원균이 왔을 때 그들은 추풍낙엽이었다. 이순신을 폐하고 원균을 올린 주체가 조선의 국왕 선조였다면, 오늘의 이 변고의 주체는 누구인가? 아아, 세월호 비극에서 어렵사리 합심했던 국민적 긴장감이, 촛불혁명으로 쌓아올린 그 자부심이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는가.

이순신은 역점(易占)을 많이 쳤다. 왜 그랬을까? 점을 쳐서 승부를 예측하려 했을까, 유리한 전술적 지혜를 얻으려 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물샐틈없는 전략을 세우고 주도면밀하게 전투 준비를 했는지, 얼마나 세심하게 병력과 물자와 물때를 점검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역점이란 것이 우리 현대인의 상식이나 논리로는 거의 파악이 불가능한 애매한 점사(占辭)의 집합이다. 때로 점치는 자의 해석이 거의 무한대로 열려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역점은 점치는 자의 상황에 따라 맥락을 갖추어 의미를 형성해내는 과정인 것이다.

이는 인간의 ‘뇌’가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우리는 주어진 외계의 감각정보만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색도 소리도 냄새도 맛도 뇌의 입장에서는 모두 단순히 전기적 자극과 물리적 파동으로 전달될 뿐이기에 필연적으로 해석 과정을 거쳐야만 의미있고 이해 가능한 무엇이 된다. 뇌는 인간 종(種)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이라는 경험적 축적에 기반해, 그때그때 주어지는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감각 소여를 해석하고 자기만의 세계상을 형성해가는 기관인 것이다. 결국 주어진 경험의 테두리 속에서 생각하고 그에 기반한 세계상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순신 역시 전투를 앞둔 객관적 상황은 다른 이와 동일했다. 국가의 운명을 어깨에 걸머쥔 자로서의 위치와 문제의식의 크기가 달랐을 뿐.

뇌의 작동방식과 역(易)의 작동방식이 유사하다면 점을 치는 주체, ‘나’란 무엇인가? 운명을 두고 점치는 자가 꼭 돌아봐야 할 질문이다. ‘나’의 경계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오장육부, 사대육신 중에 무엇을 나의 가장 본질적 부분이라 할 것인가? 여기에서 음양조화의 태극을 말한 동방의 사유가 영혼/물질, 주어/술어 같은 서구의 이항대립적 사유와 크게 갈라지는 분기점이 부각된다. 서구적 사유에서 ‘나’는 신(神)에 복속되는 형태로 귀결되고 동방의 사유에서 ‘나’는 태극과 일치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맹자는 천지에 가득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라 했다. 대인은 천지와 크기가 같다. 항상성을 유지하면서 제어가 가능한 영역까지가 ‘나’에 포함된다. 역은 바로 그러한 확장된 ‘나’의 사유를 현실의 삶 속에서 단련한다. 역에서 천지 우주에 ‘나’와 무관한 존재는 없다. 아니, 모두 ‘나’에 포괄되어야 한다. 그것을 64괘로 집약했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앞두고 끊임없이 역점을 친 실제 의미가 여기에 있다. 전장의 맥락에 나의 실존을 투영한 시뮬레이션, 확대된 나의 우주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기 위한 훈련, 역이 풀어내는 악보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연주하는 과정이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역은 ‘간이(簡易)’요, ‘변역(變易)’이요, ‘불역(不易)’이다. 우주 전체를 64괘로 모델화하였으니 얼마나 간이한가? 일음일양의 멈추지 않는 변화를 64괘 384효의 순환계로 담고 이를 영원한 우주변화의 원리로 삼았으니 변역과 불역을 아울렀다. 대재(大哉) 역! 그 역을 특히 한국인이 사랑했다. 태극기가 역이요, 훈민정음이 역이다. 세종대왕이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최만리를 꾸짖었다. “너희가 운서(韻書)를 보았느냐? 너희가 사성칠음(四聲七音)을 아느냐?” 세종은 한글과 한자의 공통조어(祖語)와 분화원리에 대한 지식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한자와 한글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우리 말글의 좌표를 명료하게 해주며 조선과 중국 음운의 유래와 갈래를 해명하는 선행 이론이 있었으며, 그 결과가 『훈민정음』이고 『동국정운』이었다. 라이프니츠가 『주역(周易)』 64괘에서 이진법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 이진법이 컴퓨터의 근간이 되었다면, 세종은 한글 창제를 통하여 동아시아판 문자와 언어의 진화론을 열었다. 세종의 꾸짖음은 지금의 우리에게 이렇게 들린다. ‘너희가 진화를 아느냐? 너희가 유전자, DNA를 아느냐?’ 역을 통해 보면 동서 사유와 문명의 발전에서 이런 공통점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다.

『도올주역강해』의 신선한 관점은 이런 것이다. 기존의 권위와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무한히 자유롭게 「역경(易經)」(『주역』 중 주석을 제외한 경문 부분)을 볼 수 있고, 그 속에 노닐 수 있게 역사의 족쇄를 온전히 풀어주었다. 「역전(易傳)」(십익十翼이라고도 지칭, 후세 주석가들의 해석) 중에서 의미있는 해석은 잘 가려서 취하되 틀에 박힌 인습적 언어나 고리타분한 풀이는 일거에 날려버린다. 여기에 「마왕퇴 백서(馬王堆帛書)」 등 출토 문헌의 새로운 자료를 가미하여 종으로 횡으로 내달리면서, 「역경」의 고졸하고 자유로운 맛을 저자 특유의 문학적 감각으로 오롯이 전한다. 후대 한국인의 역에 대한 사랑은 고조선 사람들이 역의 성립에 기여한 점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이는 전에 없던 탁견이다. 호랑이, 곧 범은 한국인의 삶 속에 살아있는 심상인데, 『역』에는 범이 등장하는 괘가 여럿이다. 산뢰이(山雷頤) 괘의 호시탐탐(虎視眈眈, 범이 위엄있게 노려봄), 천택리(天澤履) 괘의 리호미(履虎尾, 범꼬리를 밟음). 택화혁(澤火革) 괘의 대인호변(大人虎變, 대인이 범이 찬란하게 털갈이하듯 함)이 그것이다. 범의 생태에 대한 비유는 고조선 강역인 한반도-만주의 식생, 곧 도토리나무, 다람쥐와 꿩, 멧돼지 같은 생물들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해가 어렵다. 도토리는 저율(猪栗), 즉 멧돼지의 주식이다. 그 멧돼지는 범의 주식이다. 고구려 고분에 보이는 범 사냥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범 사냥은 위험하지만 조선 사람의 무용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무대였고 로망이었다. 범을 잡는 사람은 꿩의 깃을 모자에 장식하기도 했다. 이 역시 고조선-고구려 사람의 법식이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 명료하게 나타나 있듯이 조우관(鳥羽冠)은 고구려 사신들을 특징짓는 복식이었다.

역은 대인의 우환의식에서 나왔다. 혁명적 변화를 준비하고 성공시키는 이의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도올주역강해』는 혁명을 말한 고전은 『역』이 유일하다고 지적한다. 맹자의 역성혁명론 역시 역의 계승이다. 그것을 수풍정(水風井) 괘, 택화혁 괘, 화풍정(火風鼎) 괘의 3연속 흐름으로 적시했다. 여기서 우물의 맑은 샘물〔井〕은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 민중의 생명원이요, 세발솥〔鼎〕에 삶은 음식물은 곧 화식으로 문명인과 현인들의 영양원이다. 둘 다 먹는 것을 공동체와 나눈다는 공유 개념이 뿌리에 놓여 있다. 그것은 자연(물)의 평등에서 문명(불)의 평등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놓칠 수 없는 대전제이다. 정과 정에 모두 바람〔風〕, 곧 신바람이 함께한다는 것은 그 평등을 역동적으로 만들어준다. 혁명의 삼위일체로 이 세가지 괘를 보는 심정은 오늘날 더욱 처창하다. 『도올주역강해』는 물의 평등에서 불의 평등으로 상향하는 문명이, 역의 본향인 이 땅에서 만개하기를 바라는 염원의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