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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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솔뫼

소설집 『그럼 무얼 부르지』 『겨울의 눈빛』 『우리의 사람들』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장편소설 『백 행을 쓰고 싶다』 『도시의 시간』 『머리부터 천천히』 『고요함 동물』 『미래 산책 연습』 등이 있음.

songbook1123@gmail.com

 

 

 

투 오브 어스

 

 

이건 강주가 움직임연구회에 다닐 때의 이야기이다. 작년 이맘때 강주는 움직임연구회에서 진행하는 움직임워크숍을 8주간 들었다. 움직임연구회는 움직임연구회 중부지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울에 이런 곳이 몇군데 더 있을 것이다 아마도. 중부시장 근처라고 해야 할까. 중부시장 안에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중부시장 왼쪽 끝에서 동대문을 향하는 골목에 위치한 건물 3층에 연구회는 있었다. 시장 건물들이 전부 어디 하나 꼽을 수 없게 다 오래되었기 때문인지, 과장하지 않고 모두 최소 오십년은 넘어 보이는 것들이었고, 그래선가 연구회가 있는 건물은 지은 지 이십년이 넘어감에도 그 사이에서는 새 건물처럼 보였다. 움직임연구회는 개개인의 움직임을 스스로가 이해하고 각자 원하는 움직임을 찾아가도록 돕는다는 목표로 분기별 워크숍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간이었다. 강주가 좀더 다녔다면 개개인의 움직임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곳 사람들이 하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두어달 워크숍에 참가한 것으로는 대략적인 분위기만 읽을 수 있을까 말까 한 정도였다.

워크숍 첫 시간에는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워크숍에 처음 참가한 사람들이 절반쯤 되었고 이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나 기존 연구회 멤버들이 절반쯤 되었다. 자기소개는 평범하게 이름과 이곳에 오게 된 계기나 이유 같은 것을 말했는데 진행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평소 자신의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으면 보여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어색해하면서도 걷거나 앉아서 뭔가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머뭇거리는 사람들 옆으로는 연구회 멤버들이 천천히 다가가 그 사람의 움직임과 연결된 보다 크고 분명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날 강주 옆으로는 보훈이 다가와 천천히 팔을 붙이고 흐르듯 느리게 움직이게 하였다. 강주와 보훈은 등과 등을 맞대고 팔을 움직였다. 강주는 자신의 움직임에 어색함을 느낄 때가 많았는데 그날 보훈과 함께 움직였을 때는 그간 느껴본 적 없던 편안함과 부드러움을 느꼈고 보훈과 만든 이 움직임 경험은 오래도록 강주에게 남아 이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게 했다. 애리는 첫날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두번째 시간부터 나왔는데 두번째 시간에 애리와 강주는 움직임 파트너가 되었다. 움직임연구회에서 만나게 된 애리와 강주는 그렇게 한동안 자주 만나고 함께 어울렸다.

 

첫날은 왜 안 나오셨어요?

첫날에는 뭐든 별거 안 하잖아요.(애리 웃음)

그렇기는 해요.(강주 웃음)

 

두 사람은 두번째 시간에 함께 파트너가 되어 서로의 호흡을 지켜보며 어떻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지 서로에게 알려주었다. 강주는 그 시기 저녁 8시에 동대문 상가 안 까페에 출근해서 동대문 여기저기에 커피를 배달한 뒤 아침에 퇴근했다. 일주일에 5일을 그렇게 근무하였고 수요일 오전에는 움직임워크숍에 참가했다. 워크숍에 참가하지 않는 다른 날에는 걸어서 근처를 걷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 집안일을 한 뒤 잠이 들었다. 워크숍은 즐거웠지만 일을 하다 와서인지 늘 조금 졸리고 피곤했다. 애리는 무릎 꿇고 앉아 강주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잠깐 멈췄다가 다시 내쉬는 것을 보고 강주는 어느새 잠이 들 듯 말 듯 반걸음 더 가면 잠이 들어버리는 곳으로 향해가고…… 애리는 고개를 돌려 주변에 조용히 하라는 듯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강주는 퇴근하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떨 때는 그 주변을 한참 걷다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벤치에 누워 있거나 할 일 없이 거닐다 보이는 동대문 상가에 들어가 이곳은 왠지 유난히 조용하다고 생각하다가 화장실에 들어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거나 했다. 워크숍 두번째 시간 후에는 애리와 함께 근처를 걸었다. 애리와 강주는 러시아 빵집에서 치즈가 든 빵과 커피를 사서 공원에 앉았다. 빵은 크고 둥글고 마치 쿠션같이 안으면 안심이 되고 한참을 먹어도 절반도 다 먹지 못해 나중에는 무릎 위에 두었다. 햇빛이 반짝이고 공원은 둥글고 공원 안에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위한 여러 곡선으로 된 조형물 몇개가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보더들이 곡선을 그리며 지나가고 넘어지고 이런 소리는 한참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여전히 덩어리로 남은 빵의 무게를 잠깐 의식했고.

애리는 작고 마른 체형에 긴 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있었고 팔다리는 유난히 길고 눈이 먼저 웃는 흰 얼굴에 덧니까지 있어서 강주는 보자마자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함께 손바닥을 맞대고 힘을 줘보거나 탄력 있는 끈을 잡고서 당기거나 하면 힘이 세서 신기했다. 벤치에 앉아 있는 자세도 꼿꼿했다.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던 애리는 저 근데 보드도 꽤 타요 말하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영상 몇개를 보여주었다. 영상 속 애리는 방금 회색 비니를 쓴 남자애가 계속 넘어지던 조형물 위를 가볍게 타 내려가고 있었다. 강주는 화면을 보다 애리를 보다 눈앞의 유유히 흘러가는 움직임들을 보다가 애리를 보다가 애리는 역시나 눈으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아, 그래서 이전에 여기 와봤다고 했었던 거군요.

네. 한창 탈 때는 뭐 맨날 왔어요.

 

그날 공원에서 보드를 타는 사람은 다섯명이었는데 모두 비니를 쓰고 있었고 모두 반스를 신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카고 팬츠였고 나머지는 면바지였다. 셋은 외국인으로 보였는데 다섯명 모두 이곳에 익숙해 보였다. 약속도 하지 않고 매일 이곳에 와서 만나고 움직이고 구르고 부딪히는 사람들 같았다. 보드는 운동이라고 해야 할까 놀이일까. 움직임워크숍을 듣고 있어서인지 강주는 더 고민하지 않고 이걸 움직임이라고 치기로 했다. 너무 세상 모든 것이 움직임 같지만 아무튼. 이걸 움직임으로 보기로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스케이트보드는 왠지 조금 평등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월등히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이곳의 흐름이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고 다섯 사람 중 꼽자면 누가 제일 잘 타고 누가 제일 못 타고를 뽑을 수야 있겠지만 신기하게 잘하고 못하고를 굳이 구분하게 되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게 보드라는 움직임의 특징일까. 그 생각을 입 밖에 낸 건 아닌데 애리도 그런 말을 했다. 보드는 못하는 사람도 못한다는 생각이 막 들지 않아서 좋아요. 그런 게 먼저 보이는 운동이 아니라서 저는 좋아해요. 물론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은 다르지만요.

 

달라요?

완전히. 완전히 달라요. 근데 그건 어떤 것이든 그래요.

 

애리는 궁금하면 나중에 자기가 보드를 가지고 오겠다고 말했다. 강주는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을 좀더 보다가 부탁하겠다고 말했다. 나란히 한참 구경하다가 애리는 다음에 보드 이야기를 더 해주겠다고 하고 돌아갔다. 강주는 누워서 여전히 쿠션 같은 빵을 안은 채 바퀴가 바닥을 부드럽게 지나는 소리 부드럽게 지나다가 넘어지는 소리 보드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이 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어. 계속 듣는 것은 계속 보는 것보다 힘들지 몰라. 그럴까? 둘 다 힘든 일이겠지만 계속 듣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드는 일일 거야. 그러나 그날은 바퀴가 바닥을 지나가는 소리를 이후에 언제라도 다시 불러낼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까 그 소리를 외울 정도로 오래 듣다 공원을 나섰다. 공원 옆에는 국립중앙의료원과 미극동공병단 부지가 마주 보고 있었다. 미극동공병단은 공사 중이었고 한창 포클레인이 오가고 있었고 그 뒤로는 갈색 지붕에 노란 벽으로 된 낮은 막사 여러개가 똑같은 간격으로 서 있었다. 건물에는 아파트처럼 숫자가 쓰여 있었다. 흰 원 안에 검정색으로 A라고 쓰여 있었고 A 아래에는 A01-A17이라고 더 작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공병단 부지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정부가 미군에 내어준 공간이었고 맞은편 국립의료원은 1958년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스칸디나비아 3국의 지원으로 시작된 곳이었다. 강주는 동대문에서 일을 시작하고 거의 매번 퇴근 후 습관처럼 공원을 지나 1950년대와 미극동공병단과 스칸디나비아와 국립의료원을 생각해보는 것도 아니고 상상해보는 것도 아니고 잠깐씩 머금다 내쉬었다. 피곤할 때는 그냥 지나갔지만 보통은 멈춰 서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오래되고 낮은 건물들. 두 건물이 마주한 길을 지날 때면 50년대라는 것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느낌을 받고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팽팽한 줄로 낚아채는 것에 가깝고 그런데 끌려가며 뒤돌아보아도 자신을 당기는 것이 뭔지 지켜보고 또 지켜보아도 알 수 없고 반복하고 또 해서 이 생경함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야 그게 뭔지 알 수 있을지. 그러나 그 전에 미극동공병단 부지 공사는 아무렇지 않게 끝이 날 것이다. 그러면 이제 50년대는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

그런데 한국 안에 있더라도 미군기지는 주소지가 한국이 아니라던데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더라…… 강주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군기지 건물을 지나 아마도 서울시 중구 을지로 6가일 거리를 걸었다.

 

다음 시간이었나 그다음 시간이었나 워크숍이 끝난 후 커피를 마시다 애리가 보여준 것은 보드를 타는 머리 긴 남자였다. 알렉스라고 했는데 보드를 타다 만났다고 했다. 열여덟살이었고 엄마랑 같이 살고 엄마는 이 근처에서 가게를 한다고 했다. 둘이 함께 다니며 이상한 취급을 많이 받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애리는 서른이 넘었고 그때도 지금도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알렉스는 열여덟이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러 일을 겪고 이제 친구 사이라고 했다. 친구라고 해도 한동안 못 봐서 사실 지금은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때 애리는 알렉스의 엄마와 함께 퇴근해서 근처에서 늘 술을 마셨다고 했다. 보통 맥주랑 치킨을 먹었고 알렉스 엄마는 이름이 영아인데 나랑 영아씨랑 이야기를 계속하고 알렉스는 늘 듣고 있다가 나를 데려다준 뒤 집에 가고 집에 가서는 동생들을 돌봤어요.

강주는 그래서 알렉스가 보드를 엄청나게 잘 탄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건가 잠깐 생각하다가 이 이야기는 뭐지? 아 이건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야 하고 어느 순간 불현듯 알아차리게 된다. 이건 이렇게 저렇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런저런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애리의 말 애리가 하는 말이었고 애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바퀴처럼 부드럽게 구르다 넘어지다가 다시 보드를 주워 들고 움직이는 말을 그 말을 그대로 들으세요. 강주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 애리가 하는 말로 향하기 위해 한참을 헤매다 어느 지점부턴가 가까스로 그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모르겠어요 저는 늘 제가 알던 사람 중에 알렉스가 가장 어른이었다고 말해요. 실제로 그랬고. 알렉스는 늘 침착하고 화를 내지 않았거든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걸 잘 받아내고 있었어요. 늘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결단인지 나는 알렉스를 생각하면 놀라게 돼요. 알렉스가 늘 듣고 있었다는 거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떠맡았다는 거요.

 

몇번 안 만나봤지만 애리는 함께 있을 때도 웃거나 짧게 대답하는 게 다였고 그보다는 움직임이 두드러지는 사람이었는데 고전무용을 오래 했다고 했고 이런저런 춤과 운동을 계속 배웠다고 들었고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도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이 사람이 남들과 다른 움직임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서 있었다. 애리는 매번 바르게 서 있는 움직임을 했다. 애리의 이야기를 듣다가 강주는 문득 이 사람도 마음을 먹으면 길게 이야기를 하는구나 생각하다가 팔을 천천히 아주 조금씩 옆으로 뻗었다. 워크숍 첫 시간에 보훈은 자연스럽게 강주의 등 뒤로 다가가 부드럽게 팔을 옆으로 뻗었다. 왜 팔과 팔이 나의 팔과 다른 사람의 팔이 함께 움직이는데 자연스럽고 편안할까 강주는 그 이후로 틈이 나면 종종 팔을 천천히 옆으로 뻗었다. 애리는 강주의 뻗은 팔 위로 천천히 자신의 팔을 포개다가 강주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애리는 힘을 줘서 깍지를 꼈고 아플 정도로 힘을 주어 한참을 그렇게 강주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있다가 손을 풀었다.

 

잘 듣는다는 거요. 그 사람은 어떻게 잘 듣는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끄덕이기도 하고(애리 웃음). 모르겠다. 모르겠어요. 설명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듣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듣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잘 듣고 잘 들으면서 필요할 때 그 사람을 바라보고 그리고 계속 듣는 거 같아요. 아니 아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 나서 강주와 애리는 스케이트보드 영상을 한참 보다가 헤어졌다. 강주는 알렉스의 엄마인 영아라는 사람이 어쩌면 애리와 비슷한 또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다 말았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또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다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것들 1950년대의 서울을 상상해보지만 상상할 수 없었고 그러나 왜 상상을 해야 할까. 50년대에 만들어진 것들이 이렇게 눈앞에 있고 그것이 떠나고 바뀌고 무언가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이것이 이 눈앞의 것이 그대로 50년대의 것이라고 믿어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잘 듣기 위해 애리를 따라가고 애리를 바라보다가 알렉스라는 본 적 없는 사람의 존재를 그대로 믿어버린다. 그렇게 곧이곧대로 해보면 어떨지. 곧이곧대로라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으니까 한번 해보면? 그러면? 그러다가 문득 화면 속 알렉스가 애리가 말하기 전에는 열여덟살로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 떠올랐고 그렇다면 처음 느낌으로는 몇살로 보였을까 기억을 더듬어보았지만 희미하다. 외국인 같았지만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고 나이는 스물다섯 정도로 생각했었나. 그러고 보면 애리도 서른이 넘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 적도 없는 영아씨만은 왜인지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애리와 비슷한 나이지만 애리보다 열살쯤 많아 보이는 노란색 염색을 하고 눈썹문신을 한 가슴이 크고 자신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빛의 사람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강주는 그 사람을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다.

 

일할 때 시간은 잘 갔다. 강주는 몇개월 전까지 천안의 문화재단에서 오년 넘게 일을 하다 퇴직을 하고 서울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간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았고 어려운 일도 있었고 그럭저럭 할 만한 일들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사무실 안에서 일을 할 때는 시간이 안 간다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상가에서 일을 하면서부터는 시간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잘 갔고 어느새 아침이 되었구나 하며 거의 매번 새삼스럽게 놀랐다. 강주는 발을 빠르게 움직여 상가 안을 오가며 배달을 했고 어쩌다 사장이 배달을 나가거나 잠시 자리를 비울 때는 서서 주문을 받고 결제를 하고 음료를 만들었다. 사장은 친구 성민의 사촌이었는데 일을 그만두고 잠시 쉬는 강주에게 성민이 마침 사촌이 일할 사람을 찾는데 해보겠느냐고 권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시간이 잘 간다는 것이 정해진 것을 한다는 것이 좋았고 그러다가 요즘은 상가 안에서 머리를 묶은 남자를 볼 때면 아 알렉스인가 별 이유도 없이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 강주는 종종 어딘가에 잘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무언가를 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닥쳐오지도 않은 고난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주는 고난을 등에 인 채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사람을 향해 한발씩 머나먼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건 축복인가요 고통인가요. 강주는 둘 다 아니고 책임이 아닌가 생각했다. 제대로 듣는 사람을 듣기 위한 마주하기 위한 책임 같은 것을 왠지 져보고 싶은 생각. 그러다 팔을 뻗어보기도 하고 팔을 뻗다가 문득 그런데 정작 자신은 애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들었다는 생각을 하고 그럴 때면 걸음을 멈추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생각하다가 다시 손에 든 영수증을 확인하고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아차리고 가야 할 곳으로 되돌아갔다. 애리가 다른 이야기를 했다면 듣는 것이 쉬웠을까. 글쎄 모르겠지만 아마 아닐 것 같아.

자주 생각한다고 해도 알렉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아니 조금 익숙해진 듯한 느낌도 들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애리의 말처럼 누구도 그 사람처럼 듣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하면 강주 역시 그 사람이 누구와도 다른 사람 그러니까 어디에도 없는 잘 듣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믿다보면 알렉스라는 이름은 잘 듣는다는 움직임에 붙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점점 사라져갔다. 그런 식으로 강주는 잘 듣는다는 것 그리고 팔을 천천히 뻗기 그 두개를 자신에게 던지고 받으며 배달을 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그 속도가 빠르다고 강주는 늘 새삼스럽게 느꼈다.

 

애리는 한동안 워크숍에 나오지 않았고 강주는 변함없이 아침에 퇴근하여 공원에서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다 마시면 공사 중인 공병단 부지와 사람들이 오가는 국립중앙의료원을 지나 걷다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는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드물었는데 어쩌다 보드를 타는 사람들이 있으면 구경을 하다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듣고 바퀴가 구르며 다가오다 멀어지는 소리와 지하철이 지나는 소리가 겹쳐지다 각자 갈 곳으로 나아가는 소리를 따라갔다. 소리들은 울리다 퍼져나갔다.

어느 이른 아침에는 긴 머리를 묶은 채 혼자 조용히 보드를 타고 있는 보더를 보았는데 이전에 애리가 보여주었던 얼굴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이미 희미하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강주는 알렉스라고 생각했다. 너는 알렉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마치 그를 거의 신부님처럼 생각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묻다가 강주는 일어섰다. 일어나서 알렉스 불러보았는데 소리는 구르는 바퀴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강주는 워크숍이 있던 날도 아닌데 그날은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연구회로 가 천천히 이전에 배웠던 것을 반복해보았다.

 

저는 이걸 아무래도 다시 해야겠어요.

 

강주는 문을 열고 들어온 보훈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다시 움직여보고 싶다고 말하고 보훈은 일단 일어서보라고 말한다. 일어선 강주 뒤로 보훈은 등을 맞대고 천천히 팔을 뻗는다. 이것을 반복해도 처음 같아지지 않지만 지금은 지금대로 다른 흐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보훈은 강주에게 들으며 움직이라는 것처럼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강주는 그것을 따르며 팔을 뻗어나가다 잠시 들리던 숨소리를 놓치고 하지만 숨 쉬고 팔을 움직이고 모든 것이 잘 흘러가는 순간들이 이곳에 잠시 머물다 간다. 어느 순간 강주는 자신이 방금 전에 머물던 곳에 다른 누가 팔을 천천히 움직이며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나는 여기서 아까와 다른 것을 해보고 또 해봐야 하는데. 강주는 거기 있는 사람이 질투가 났지만 자 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주한 두 팔을 따르며 천천히 뻗어나가세요…… 그리고 그 말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다음에 할 때는 다르게 느껴지실 거예요.

지금도 달랐어요.

그렇죠?

그대로 다시 하고 싶어요.

 

보훈은 그건 안 된다고 했다. 강주 역시 다시 하고 싶다고 말을 하면서도 저도 안 되는 것 알아요라고 이미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강주와 보훈은 연구회를 나와 시장 근처에서 칼국수를 먹었다. 보훈은 형이 근처에서 가게를 하고 있어서 얼마 전까지 형을 도와 일했다고 말했다. 원래는 춤에 관심이 많았는데 요즘은 재활이나 치료에 더 관심이 많아져서 혼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팔을 흐르게 할 때의 보훈과 칼국수를 먹는 보훈은 다른 사람 같지 않고 같은 하나의 사람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강주는 보훈과 함께 잠시 머물던 모든 것이 잘 흘러갔던 순간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천천히 다시 팔을 뻗어볼 것이고 그것을 여러번 반복하고 그러면 너는 언제 자리에서 일어나고 밥은 어디로 먹으러 가게 될까.

보훈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워크숍에서 움직였던 것들 오늘 팔을 뻗었던 것들이 기억이 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 당장은 실감하지 못할 거지만요. 강주는 어렴풋하게 그 말을 이해했다. 사실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앞으로의 시간은 강주에게 들이닥치지 않았으며 앞으로는 앞으로도 거듭되며 변형될 것이므로 그저 기다려보겠다고 생각한다. 보훈과 시장 입구에서 헤어져 손을 흔들고 공원을 향해 걸었다. 아침에 봤던 머리 긴 보더는 보이지 않았고 공원 안에 있는 체육관으로 배드민턴 채를 든 사람들이 들어갔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지만 이제 한겨울처럼 춥지 않았고 강주는 더 오래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다. 강주는 이곳에 앉아 바퀴가 구르는 소리를 듣다가 극동공병단 부지를 포클레인이 파내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면 50년대가 사라지고 어떤 시간은 꿀꺽 삼켜져버린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애리가 다시 워크숍에 나온 것은 마지막 시간이었다. 개인적인 일로 조금 바빴고 바쁜 일이 끝나고는 몸살이 나 며칠 앓았다고 했다. 강주는 앞에 선 애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까워진 듯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애리는 왠지 곧 사라질 사람 같다고 느낀다. 워크숍에 참석한 사람들은 첫 시간에 했던 것처럼 둥글게 서서 첫날 했던 자기소개를 다시 해본 뒤 간단한 감상을 이야기하였다. 강주는 애리에게 팔을 뻗는 일을 도와달라고 말하고는 몇주 전처럼 이름을 이야기하고 평소 스스로의 움직임을 어색하게 느낄 때가 종종 있었는데 우연히 간판을 보고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첫 시간에 팔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움직임을 해보았는데 여전히 저는 제가 움직일 때 낯설고 어색한 순간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팔이 함께 움직일 때 더욱 편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다시 반복할지가 요즘 자주 생각하는 거예요.

 

강주의 팔은 천천히 뻗어나가고 강주보다 키가 작은 애리는 강주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천천히 강주의 팔을 따라 흐른다. 애리는 강주에 이어서 평소 움직임에 관심이 많아서 참여하게 되었는데 결석을 많이 하게 되어 아쉽다고 말한다. 다음에 참석하게 되면 결석 없이 나오겠다고 말하고 웃으며 인사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이야기가 이어지며 마지막 시간이 지나갔다. 애리와 강주는 이전처럼 커피를 사서 공원을 향해 걸었다.

 

저 얼마 전에 알렉스 같은 사람을 봤어요.

머리 긴 사람?

네. 근데 아니었을 것 같아요.

응. 알렉스는 이사를 갔거든요. 아니었을 것 같지만 근데 아 왠지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도 같아요.

 

워크숍을 나오기 전 애리는 친구의 부탁으로 학원의 무용 수업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애리는 8월까지 하기로 한 그 일이 끝나면 부모님이 계시는 창원으로 가야겠다고 가볍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에는 광주로 가게를 옮긴 영아씨를 만나러 갔다. 애리는 이전처럼 영아씨와 맥주를 마시고 말린 오징어를 먹고 웃고 이야기하다 나와 오랜만에 알렉스를 만났다. 애리와 알렉스는 함께 보드를 타며 알게 되었고 보드를 타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만남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기보다 대부분 알렉스보다 서너살 많은 남자애들이었고 두 사람의 일에 무관심했다. 함께 타던 케이시라는 친구가 애리에게 어린애와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한 뒤 아는 척도 하지 않기는 했다. 그렇다면 누가 두 사람의 어울림을 나쁘다고 말한 거지? 영아씨 그리고 보드를 함께 타던 서너 사람을 뺀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이 만날 때 그 시기는 육개월 남짓이었지만 애리는 알렉스의 집에 갔던 적이 있었다. 그때 문을 열자 이전에 만난 적 있던 다섯살 일곱살인 알렉스의 동생 승희와 우진이 애리에게 안겼다. 애리는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다가 사온 김밥과 떡볶이를 나눠 먹었다.

 

책을 읽어주고 싶어.

책이 없어.

 

애리는 벽에 그려진 낙서를 보며 누가 그린 것이냐고 물었다. 승희가 나! 했다. 애리는 책을 읽어주는 대신 낙서로 짧은 이야기를 지어내서 말했다. 이 공주의 이름은 승희인데 승희는 애리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웃으며 좋아하는 승희. 알렉스는 빨래를 세탁기에 돌리고 있었고 애리는 빨래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승희를 끌어안은 채 집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온기와 먼지가 구분되지 않고 떠다녔고 그것이 온기의 본질일지도 모르겠어요. 애리가 승희를 내려다보았을 때 알렉스를 포함한 방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허약하고 위태로운 오갈 곳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고 그 순간 애리는 분명하게 느낀다. 애리는 알렉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한 적이 없고 그보다는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애정의 형태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 어딘가 남아 있는 냉정한 자신의 목소리도 잘 들으려는 듯이 애리는 승희가 그린 그림에 귀를 대어보고 그러면 승희가 웃으며 애리에게 안긴 채 나란히 벽에 귀를 댄다.

 

이건 뭐지?

나!

벽이야.

(승희 웃음)

벽!

나!

 

빨래는 돌아가고 애리는 베란다 벽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는 알렉스를 본다. 그 순간은 그가 모두의 보호자처럼 보이고 그에 응하듯 그는 팔을 벌린다. 애리는 알렉스에게 안기고 애리의 등을 승희가 안는다. 바닥에 앉아서 놀고 있던 우진이 세 사람을 보며 웃는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이 알렉스보다도 어렸을 때 이런 시간이 자신에게 찾아왔었다는 것을 애리는 기억해낸다. 그때 애리가 팔을 벌려 안았던 사람은 애리와 닮은 여자애였다. 여자애를 힘껏 안고 싶지만 남자애에게는 안기고 싶고 애리에게 그런 마음이 매번 새롭게 반복되고 애리는 그런 마음에 늘 응했고 그렇지만.

 

몇개월 만에 광주에서 다시 알렉스를 만났을 때 그는 이전보다 지쳐 보였고 어깨를 덮던 장발은 짧아져 있었다. 알렉스는 광주에서 만난 다른 여자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영아씨가 작은 방에서 승희와 우진이와 자고 알렉스와 여자는 거실에서 잔다고 했다. 애리는 승희와 나란히 귀를 대보던 낙서로 가득한 벽을 떠올린다. 애리는 직장을 구했다고 말을 했고 긴 팔을 뻗어 알렉스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한참을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질렀고 알렉스는 애리의 행동을 피하지 않고 애리가 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본다. 애리는 한참 뒤 팔을 거두고 알렉스는 잠시 후 일어나 또 광주에 놀러 오라고 말했다. 알렉스와 헤어져 기차를 탄 애리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기차 창 너머 때늦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린 애리는 천천히 눈을 따라 걸었다. 눈이 펑펑 내리다 어느새 서서히 멎어갈 때 땅은 젖어 있고 가벼운 바람이 불고 오늘은 그렇게 춥지 않네 생각하고 있을 때 애리의 눈앞으로 앵무새가 지나갔다. 뭔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는데 멀어지는 뒷모습을 한참 봐도 남자의 어깨 위에 있는 것은 하늘색 앵무새였다. 앵무새다 앵무새 생각하며 애리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기차가 이 근방을 지나가고 밤이 아니었다면 애리는 가만히 서서 기차가 지나는 것을 구경했을 것이다. 기차가 한번 지나가고 잠시 뒤 기차의 접근을 알리는 댕댕 소리가 나고 다시 기차가 지나가고 그렇게 열번쯤 기차가 지나는 것을 구경했을 것이다. 있잖아 나 앵무새를 봤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2월의 밤 눈은 가루처럼 흩날리고 칼라에 털이 달린 블루종을 입은 남자가 어깨에 하늘색 앵무새를 올린 채로 혹은 남자의 어깨에 앵무새가 올라간 채로 둘은 기찻길을 따라 사라져가는데 이런 이야기를 숨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나 앵무새를 봤어.

어디서?

기찻길 근처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애리도 이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눈을 맞으며 눈에 젖은 채로 알렉스에게 승희에게 나 앵무새를 봤어 말하면 어떨까. 왜인지 이제 그 집의 어떤 아이들도 애리를 크게 걱정하지 않을 것 같다. 애리도 불안해하지 않고 큰 문제 없이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러므로 있잖아 나 앵무새를 봤어. 하늘색 앵무새가 눈을 맞으며 이렇게 지나갔는데 너무나 추웠을 거야. 그 이야기를 하면 아마도 알렉스는 그것을 침착하게 들을 것이고 애리와 애리가 말하는 앵무새에 연루되어 앵무새가 지나가는 눈 오는 길에 눈이 그치고 다음 날이 되고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 장마가 올 때까지 이곳에 서서 앵무새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알렉스가 보여준 듣기였다는 것을 애리는 이제야 설명할 수 있었고 애리는 이제 이곳에 서서 눈이 멎을 때까지 자신이 본 앵무새를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연습하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