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백수린 白秀麟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여름의 빌라』,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등이 있음.
eternal.dreamer.writer@gmail.com
빛이 다가올 때
인주 언니는 나와 여덟살 차이가 났다. 다시 말해, ‘언니’라고 부르지만 유년시절을 함께 통과하거나 학창시절 경쟁하는 사이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언니는 큰이모의 첫째 딸이었는데, 큰이모는 육남매의 맏딸이 지닐 법한 위엄과 자존심을 지닌 여자였고, 그래서 막내인 엄마는 큰이모를 대체로 선망하고 가끔 질투했다.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도 못한 엄마와 달리 큰이모는 대학까지 다녔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래로 줄줄이 딸린 세명의 남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하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회사에 취직해 경리 일을 하라고 했을 때, 큰이모가 자기는 교수가 되고 싶으니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외갓집에서 무용담처럼 전해지곤 했다. 결국 교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큰이모는 입주 과외를 해서 등록금을 벌어 국립대에 다녔고,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었으며, 졸업식에서 할머니에게 학사모를 씌워드렸다.
인주 언니는 그런 큰이모를 닮은 것인지 사촌들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 게다가 언니는 효녀로 일컬어지기까지 했는데, 큰이모가 망막색소변성증이 발병해 시력을 점점 잃기 시작하자 큰이모의 눈이 대신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부터 언니가 방과 후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곧장 귀가해 큰이모와 같이 장을 보러 다니거나, 큰이모가 깨끗하게 마치지 못한 설거지나 청소를 다시 했다는 건 친척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일이다. 일찍 철들어 반항하는 법 없이 큰이모와 큰이모부가 원하는 대로 늘 따랐다던 언니. 언니는 정말 놀러 나가지 않았을까? 놀러 가고 싶진 않았을까? 어렸을 때 내가 그걸 궁금해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큰이모를 어려워했고 큰이모가 날 무시한다고 생각했는데, 큰이모가 나를 못 본 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못 봐 그렇다는 걸 알게 된 건 꽤 크고 난 이후였다. 큰이모가 진단을 받은 건 언니 나이 여덟살 때였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에 본격적으로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건 언니가 열두살 때부터였지만, 시력을 대부분 잃어 확대경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책이나 신문기사를 아예 읽을 수 없게 되기 전까지 큰이모는 친척들과 있을 때조차 눈이 보이는 연기를 꽤 오래 했다.
아무튼 남다른 가정사 속에서도 언니는 좋은 대학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갔다. 그 사실이, 친척 어른들의 말이 언니에게 부여했던 후광을 더 짙게 해 나는 언니를 성인(聖人)처럼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사람으로 오랫동안 여겼다. 그런 언니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건 내가 열다섯살 때, 엄마의 성화로 언니가 여름방학 한달 동안 영어 과외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땐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막 들어섰고, 아직 동네에 다른 세탁소가 생기기 전이어서 엄마 아빠의 세탁소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던 시기였다. 언니는 스물세살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앳됐을 나이다. 언니는 한국 고전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시력이 더 나빠진 큰이모가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래서 여전히 학교, 집만 오가던 언니는 평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영어 문제를 풀다가 지겨워지면 언니에게 대학생활 이야기나 연애담을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럴 때면 언니는 무척 난감해했는데, 언니의 삶엔 내 관심을 충족시킬 만한 흥미진진한 모험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내가 나중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글 쓰는 여행작가나 화가 같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넌 아마 어려울 거야. 첫째잖아. 첫째는 부모를 거슬러 살기가 힘들어”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지만—당시 언니의 그런 유의 말들은 안 그래도 커져가던 세상에 대한 나의 반항심에 기름을 붓곤 했다—그래도 나는 언니가 좋았다. 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게 『반 고흐: 태양의 화가』 같은 책을 사다주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내가 몸을 흔들어도,/고운 소리 나지 않지만/저 우는 방울은 나처럼/많은 노래를 알지는 못해.//방울과, 작은 새와, 그리고 나./모두 달라서, 모두가 좋아.”1 같은 시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달궈진 불판 위에 올려놓은 듯 마음이 늘 요란하게 달싹이던 당시의 나와 달리 언니는 얼마나 한결같이 차분해 보였던지. 나는 얼어붙은 겨울의 강처럼 고요한 언니의 어른스러움을 항상 동경했다.
세기가 바뀌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으며, 언니와는 점점 더 마주칠 일이 없어졌다. 친척들의 경조사 때 오가다 마주치면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내밀한 이야기 같은 건 나눌 수 없었고, 언니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되었을 때도 따로 만나거나 하지 않고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이 전부였다. 큰이모는 무척 기뻐했을 테고, 우리 엄마는 조금 부러워했지만 그때 나는 겨우 스물다섯살이었고, IMF 직후 고등학교를 다닌 많은 이들이 그랬듯 실용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간호대학에 진학한 후 우여곡절 끝에 중환자실에서 일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란 착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줄 테니 걱정 마.” 내가 그렇게 큰소리를 치면 엄마는 하루 종일 세탁소에서 동네 사람들의 바짓단을 줄이느라 옷에 붙여온 실밥을 떼어내며 말했다. “시끄럽고, 얼른 졸업해서 시집이나 가라.”
큰이모는 내가 한국 간호사들 간의 위계질서와 과도한 업무량에 숨 막혀하며 해외 취업을 준비하던 그해에 돌아가셨다. 시력 때문은 아니었고 뇌출혈 때문이었는데, 장례식장에서 큰이모부도 이종사촌 오빠도 봤지만 지금 내게는 유난히 많이 울던 언니의 모습에 가슴이 무척 아팠던 기억만 남아 있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난 이후엔 또다시 일상에 치여 언니와 연락을 더이상 주고받지 않게 되었고, 몇달 후 나는 결혼자금으로 모은 적금을 깨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뉴욕의 간호사가 되기 위해 떠났다. 그때 내 나이는 서른세살이었는데, 뉴욕은 기회의 도시처럼 여겨졌고 한번 사는 인생인데 더 넓은 세상을 보며 근사하게 살아보지 않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던 내게 가장 걸맞은 도시처럼 느껴졌다.
언니와 재회한 것은 내가 뉴욕에서 에이전시 소속 계약직 간호사 생활을 한 지 반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언니는 느닷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안식년을 맞아 뉴욕의 한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와 있다고 했다. “네가 뉴욕에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연락하는 건데, 이제야 알았네.” 우리가 맨해튼의 한 까페에서 재회했을 때, 나는 뉴욕 한복판에서 만나는 언니가 너무 낯설었고,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긴 단발에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베이지색 얇은 모직 코트 차림이었다. 그날 언니는 카드를 주며 메뉴를 대신 주문해달라고 말했는데, 점원이 언니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할까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미국에 도착한 지 한달이 넘어가지만 회화에 자신이 없어 지금껏 영어로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언니가 내게 고백한 건 대화가 어느정도 무르익었을 때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언니는 한인 부동산을 통해 구한 아파트에 살고 있고, 그때까지는 연구소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나 교수들과만 어울리며 순두부찌개나 칼국수 같은 걸 사 먹었다고 했다. 언니는 영어권 나라를 방문해본 적이 없었고 영어권 나라는커녕 해외를 여행한 경험 자체가 매우 적은 듯했다. “가족끼리 패키지 여행으로 하이난 가본 거랑 학회로 연변에 가본 게 다야.”
“그럼 안 되지. 그렇게 한국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면 뉴욕엔 뭐 하러 왔어?” 내가 그렇게 타박하듯 말하자 언니는 웃으면서 답했다.
“대학시절부터 친구들이 다들 어딘가로 떠났다 돌아오는 게 부럽더라고. 지금까지 못해본 것들이 꽤 많으니까, 이제라도 다 해보고 싶었어.”
그제야 언니가 해외 경험이 거의 없는 이유는 큰이모를 돌보는 데 전념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큰이모와 같이 여행을 다니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친구와도 잘 나가 놀지 못했다던 언니로서는 큰이모를 두고 혼자 먼 곳을 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언니와는 다른 이유에서지만 대학시절 부모의 돈으로 쉽게 배낭여행을 가거나 어학연수생이 되어 떠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마음이 떠올랐다. 언니의 심정이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내 심정과 비슷하다면 나는 언니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날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허드슨리버파크를 거닐었다. 허드슨강 너머로 유리로 된 고층건물들이 초봄의 햇살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언니는 이제야 정말 뉴욕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땐 나도 아직 반년밖에 뉴욕 생활을 하지 않은 처지였고, 에이전시 소속이라 시급이 정규 간호사보다 낮은데다 그나마 번 돈조차 초기 정착 비용으로 모조리 써서 뉴욕을 제대로 누릴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언니에게 지금껏 언니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언니의 삶에 큰이모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런 큰이모를 잃은 걸 계기로 용기를 내 떠나왔으리라 생각하자 언니가 조금 안쓰러워져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언니가 귀국할 때까지 십개월이 조금 넘도록 지속된 우리의 교류가 시작됐다. 그후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만나 같이 미술관에 가거나 뮤지컬을 보았고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언니에겐 돈이 있었고 주 3일밖에 근무를 않던 내겐 시간도 해보고 싶은 것들도 아주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언니는 늘 밥과 커피를 사주었고, 내가 가장 저렴한 마트 브랜드의 치약과 대용량 파스타를 사는 걸 알고 난 이후엔 소고기나 연어 같은 걸 사서 들려 보내기도 했다. 언니에게 친구들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에 한번은 동료 간호사들과 바비큐 파티를 할 때 언니를 불렀는데 낯을 가리는 언니는 거절했다. 나는 언니에게 영어회화 수업을 들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해보기도 했지만 언니가 언니보다 훨씬 어리고 he has 대신 he haves라고 말하고 I ate 대신 I eated라고 말하는 아이들 틈에서 영어를 배우는 걸 자존심 상해한다는 걸 금세 이해했고, 그후로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언니와 단 둘이 베이글이나 도넛을 사서 유니언스퀘어 근처 공원에 앉아 있거나, 브루클린 다리 밑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을 구경하러 가는 날들이 한동안 이어졌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도로에 줄지어 있는 옐로우캡이나 건물 앞에 펄럭이는 성조기, 타임스퀘어의 전광판 따위를 보거나 거리에서 풍겨오는 낯선 향신료 냄새를 맡으면 업무에 쫓겨 화장실도 제때 가지 못할 때마다 이러려고 미국까지 온 걸까 자괴감이 들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슴이 뛰었다. 그러다 한번은 언니가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 집에서 같이 피우기도 했다. “나 태어나서 처음 피워보는 거야!” 켁켁거리며 언니는 기뻐했지만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해보고 진즉 졸업한 그런 일 자체보다는 언니가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이제 내가 커서 언니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게 됐다고, 보다 넓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면 꽤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와 즐겨 가는 식당이나 까페가 생겼고, 루틴이 생겼다. 뉴욕의 웬만한 관광지들을 다 섭렵한 이후엔 일주일에 한번 웨스트빌리지의 근사한 까페들을 찾아가 같이 공부를 하다가 근처의 맛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헤어지는 일이 근무하지 않는 날의 코스처럼 자리 잡았다.
언니와 그렇게 까페 창가 자리에 앉아 초록빛으로 물든 울창한 가로수와 고즈넉한 벽돌 건물들을 보다보면 이따금씩 비현실적인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다. 우리가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열다섯 여름의 기억을 불러왔기 때문일 것이다. 몇개월 사이 10센티미터나 커버린 키와, 붉은 여드름이 가득 돋은 이마뿐 아니라,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은 나란 존재 자체를 견디기가 힘들었던 그 시절. 그때 나는 몇개월 전 우리 반에 왔다 떠난 교생 실습생에게 난생처음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따금 편지를 보내거나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기는 식으로 속마음을 털어놓던 그를 제외하면 까마득하게 나이 많아 보이던 언니는 당시의 내가 대화를 하고 싶어하던 유일한 어른이었다. “언니는 왜 교수가 되려고 해?” 어느날 내가 그렇게 물은 건 늘 그랬듯 영어 문제 풀이를 듣는 것이 지겨워져서였을 것이다. 언니는 연애를 해본 적도,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겨본 적도, 데모를 해본 적도 없었으므로 더 재미있는 화젯거리는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 꿈이 교수였거든.”
“그렇다고 언니가 교수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럴 순 없어.”
언니는 그날 나에게 큰이모가 언니를 임신하는 바람에 당뇨에 걸렸고, 아마 그것 때문에 시력을 잃는 병에 걸리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가 말하는 걸 어렸을 때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나 초등학교만 입학하고 나면 대학원에 가려고 엄마는 매달 생활비 일부를 적금으로 붓고 있었대.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으니 내가 엄마 꿈을 대신 들어줄 수밖에.”
그렇게 말할 때 언니의 얼굴은 무척 슬퍼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는 언니 몫이 되어선 안 되는 죄책감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 같고, 그런 감정을 품고 오랫동안 많은 걸 미리 포기하고 억누르며 살았을 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당시의 어린 나는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언니의 우수에 젖은 듯한 그 분위기가 그저 근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당시 나는 교생 실습생에 대한 사랑의 열병에 도취되어 있었고, 세상의 모든 것에서 비애와 드라마를 발견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시각으로 보면 대학 근처도 가보지 못해놓고 내게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들들 볶거나 일기장을 뒤져 보는 엄마, 술만 취하면 나와 남동생을 깨워 일장연설을 늘어놓던 아빠에게 반항하는 나는 운명에 맞서는 영웅이었다.
지금 나는 그 시절엔 지긋지긋하게만 느껴지던 세탁소에서의 익숙한 일요일 오후의 풍경을 다시 떠올려보고 있다. 열기로 가득한 한여름의 세탁소. 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색색의 실패가 층층이 쌓인 테이블 앞에 앉아 때가 묻은 야마또 미싱을 돌리고 있고, 아빠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손잡이에 가제 손수건을 댄 다리미로 셔츠를 다리고 있다. 선풍기가 돌아가면 벽에 매달아놓은 일력이 펄럭이고 세탁물을 담아둔 비닐싸개가 서로 부딪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나는 실밥과 자투리천이 바닥에 가득한 세탁소의 한구석, 옷 더미와 장부, 전화기, 라디오 따위가 어수선하게 놓인 테이블 위에 한자 노트나 영어 노트 따위를 펴놓고 숙제를 하고 있을 것이다. 회상 속에서 엄마 아빠는 피로한 것 같긴 하지만 조금도 슬퍼 보이진 않는다. 나는? 나 역시 불만으로 가득했지만 불행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년시절 세탁소는 내게 가장 안락한 공간이었다. 엄마의 미싱 소리, 세제 냄새가 밴 습하고 더운 공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디제이들의 유쾌한 목소리. 엄마 아빠가 교회에 가면 언제나 내가—남동생이 아니라 언제나 나였다—손님들의 세탁물을 찾아 건네거나 받아두어야 했던 그 공간.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곳을 매우 비좁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그곳에 앉아 “五更燈影照殘粧 欲語別離先斷腸 落月半庭推戶出 杏花踈影滿衣裳2” 따위의 엄마 아빠가 해석할 줄 모르는 한시를 내가 읽고 있다는 것, “잘 지내고 있냐?”라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잘 지네고 있냐?”라고 쓰는 아빠나, 포스트잇에 “시게 약 살 것”이라고 적는 엄마는 내게 설명해줄 수 없는 to 부정사와 동명사의 차이를 내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밖에 소나기가 떨어지기 시작하거나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하면 나는 세탁소의 유리문 너머를 영화 스크린 보듯 바라보며 조용히 it’s starting to rain이라거나 it starts snowing이라고 발음해보곤 했다. 묘한 슬픔이 뒤섞인 우월감을 느끼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자기의 부모를 딛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즈음 우리는 개리를 이미 마주쳤을 테지만 아직 그의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개리는 ‘룩스’(Lux)란 이름의 까페 직원이었다. 우리가 그 까페를 즐겨 찾기 시작했을 무렵 언니는 이제 영어로 말하는 것에 아주 조금이지만 자신감이 붙어 있었고, 간단한 의사소통에 성공하면 즐거워했다. 그러던 어느날, 언니가 테이블 옆을 지나가던 개리에게 포크를 떨어뜨렸으니 하나 더 줄 수 있느냐고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단한 문장이 아니었지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늘 내게 말해달라고 하던 언니로서는 커다란 발전이라 나는 기뻤다. 언니 역시 개리가 알아들은 것이 좋았는지 그가 “물론이죠”라고 말하자 혀를 조금 내밀며 웃었다. 내 눈엔 그런 언니가 무척 귀여워 보였다. “한국에서 왔나요?” 포크를 가져온 개리가 웃으며 물었다. “고향에 한국계 친구들이 많았어서 한국말은 알아챌 수 있거든요. 알아듣진 못하지만.” 개리는 키가 매우 컸고, 부드러워 보이는 연갈색의 머리카락을 지녔으며 연두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개리가 가져다준 포크로 초콜릿케이크를 나눠 먹었다. 내 입에는 조금 퍽퍽했지만 접시 위에 얹힌 생크림과 잘 어울렸다. 케이크를 다 먹은 후엔 언니가 노트북을 펴고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에선 보기 힘든 고도비만 환자들을 돌보다 생긴 요통을 앓고 있었고, 계약이 만료되기 전 정규직 일자리를 슬슬 알아보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초조한 상태였다.
그날, 우리는 소호 쪽으로 이동해 저녁을 먹었다. 직원용 앞치마를 벗은 개리가 까페 문을 열고 나온 건 우리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까페 앞을 지날 때였다.
“헤이!”
퇴근하는 길이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며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자 그는 보폭을 맞춰 우리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뉴욕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어요? 나는 이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시간대의 뉴욕은 낯설게 느껴져요.”
그는 미국 중서부 출신으로 이제 대학교 3학년이라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나는 뉴욕이 좋아요.” 그는 정말 외국인 친구들이 많은 편인지, 뉴욕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말을 천천히 해주었고 우리의 서툰 영어에도 인내심을 보였다. 그의 질문에 답을 하는 건 주로 나였는데, 언니가 그저 웃기만 하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개리는 아주 천천히 언니에게 “뉴욕을 좋아해요?” 하고 물었다. 언니는 나를 한번 보더니 “네” 하고 답하고는 용기를 낸 듯, “중서부 어디에서 왔나요?” 하고 물었다.
“일리노이요. 샴페인이라고 들어봤어요?”
우리는 그런 지명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샴페인?”
언니가 술 마시는 흉내를 내서 개리와 내가 웃었다. 그러다 골목의 모퉁이를 돌 즈음 개리가 말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으면 유니언스퀘어 쪽에 있는 시칠리안 피자집에서 먹고 가요. 거기 피자가 끝내줘요.” 아쉽게도 우리는 이미 저녁을 먹었다고 말했다. “다음에 꼭 가봐요. 정말 맛있어요!” 지하철역에서 헤어지기 전 개리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 이후 개리는 천천히 우리의 삶에 들어오게 됐다. 개리는 언니와 내가 룩스에 앉아 있으면 옆 테이블을 치우다가도 우리에게 다가와 한두마디 말을 건넸다. 개리가 세명의 룸메이트와 같이 아파트를 나눠 살고 있고 연극을 전공한다는 걸 우리는 그렇게 알게 됐다. 날이 더워졌지만 언니와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늘 같았다. 여름이 시작되고도, 언니와 같이 보스턴과 워싱턴에 다녀온 짧은 휴가 기간을 제외하면 우리는 뉴욕에 머물렀다. 근교를 여행할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언니나 나나 둘 다 국제운전면허가 없었으므로 계획은 금세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뉴욕은 그 자체로 거대한 도시였고, 멀리 가지 않아도 볼 것과 할 것이 넘쳐났으므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러다 가을이 됐고, 내가 이직 준비로 바빠져 언니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한달 정도 시간이 흘러 언니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언니는 외양이 꽤 달라져 있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언니는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고 펌을 했으며 옅게나마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화장을 한 언니를 보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뜻밖에도 언니가 옷을 사고 싶다고 해서 같이 쇼핑을 하고 오랜만에 소호에 들른 김에 웨스트빌리지로 넘어가 까페 룩스에 갔다. 모처럼 개리를 만나면 언니가 반가워할 것 같아 들르자고 한 것인데, 개리는 없었다.
“이주 동안 고향에 간다고 했어요. 집에 일이 있다는 것 같더라고요.”
개리는 어디 갔느냐는 나의 질문에 서빙을 하던 다른 직원이 대답했다.
“아, 어쩐지 요즘 보이지 않더라.”
언니는 나와 만나지 않았을 때 혼자서 룩스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언니의 집에서 가까운 까페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였지만 언니는 그곳이 꽤나 마음에 든 듯했고, 나 역시 산미가 풍부한 커피 맛과 서재처럼 조용한 까페의 분위기를 퍽 좋아했다. 그날 우리는 모처럼 만났는데 일찍 헤어지기가 아쉬워 언니 집에 가서 같이 저녁을 해 먹고 술 한잔을 하기로 했다. 언니의 집은 원룸인 내 아파트와 달리 아주 자그마하지만 거실이 있었고, 소파도 있어 여차하면 자고 갈 수도 있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삼겹살을 구워 먹고 한인마트에서 산 소주를 한병 마셨다. 언니가 화장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아이라이너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눈썹 정리를 해주었다. 언니가 병원에 멋있는 남자는 없느냐고 물은 건 혈소판을 한국식으로 잘못 발음하는 바람에 동료들이 알아듣지 못해 고생했던 미국생활 초기의 에피소드를 늘어놓고 있던 중이었다. “없어. 병원 남자들은 다 유부남이거나 애인이 있고, 아니면 게이거든.” 언니가 웃었다. 언니는 내게 연애나 결혼 계획은 없는지 궁금해했는데, 내가 옛 애인들을 떠올리며 지금은 없다고 말하자 언니는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나는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사랑은 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사랑?”
“응, 사랑. 얼마나 낭만적일까.”
언니의 말투가 너무나도 소녀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언젠가 언니는 같이 시내를 걷다 키스를 하는 연인들을 보고는 “키스하면 심장 터져?” 하고 진지하게 묻기도 했는데, 그래서 나는 언니가 그때까지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됐고, 조금 놀랐다.
“그리고 난 아이가 갖고 싶은데 이젠 정말 생물학적으로 시간이 별로 없잖아. 그래서 좀 초조해.”
그제야 나는 언니가 마흔살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언니네 학교엔 괜찮은 교수님 없어?”
그러자 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 육십대 유부남 할아버지들이야.”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의 농담에 언니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음. 그치만 유부남은 좀 그런가?”
언니와 내가 동시에 웃었다.
그해 가을 언니는 조금 이상했다. 내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느라 바빠져 우리가 많이 만날 수 없던 탓이기도 했겠지만 언니는 전에 없이 자주 내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다 만나거나 통화를 하면 언니는 평소와 달리 들뜨거나 침울해하는 일이 잦았는데 왜 그런지 나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해 울거나 자기 얘기만 늘어놓기도 해서, 혹시 한국에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언니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언니는 뉴욕에서의 생활에 꽤 만족하는 듯 보였고, 한국에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만 하며 여생을 살아야 한다는 데 전에 없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언니는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고, 지금껏 자기가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한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종종 말을 했다. 언니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요리사가 되거나 플로리스트가 되어보면 어떨까 따위의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거나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뭘까 따위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기도 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언니의 얼굴은 어쩐지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보였고, 그런 언니는 내게 무척 낯설었다.
아무튼 11월 초, 재회했을 때 우리는 또 룩스에 갔다.
“고향엔 잘 다녀왔어요?”
내가 안부를 묻자 개리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네, 어머니가 편찮으셨는데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하고 답했다. 연한 회색인 그의 눈은 그날따라 평소보다 유난히 슬퍼 보였다.
“어머니가 파킨슨병이시래.”
언니는 그런 이야기를 대체 언제 들은 걸까? 언니의 말에 나는 우리가 만나지 못한 사이 언니가 까페를 또 찾았단 걸 알게 됐고, 언니와 개리가 대화를 나눌 만큼 가까워졌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학교에서 업무로 만나는 한국인들이나 나를 제외하면 어울릴 사람이 마땅히 없던 언니에게 비록 언니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아르바이트 직원이지만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마침내 언니에게 미국인 지인이 생긴 것이 흐뭇했던 것이다. 개리는 우리와 대화를 몇마디 나누고 다시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개리가 따라준 뜨거운 커피를 마셨고, 언니는 가방에서 꺼낸 책을 펼쳐 들었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면접용 예상질문들의 답변을 영작해보려 했지만 나보다 앞서 뉴욕에 정착한 한국인 간호사들 중 몇몇으로부터 대학병원에 채용되지 못하고 요양병원에 취직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라는 충고를 들은 참이었기 때문에 심란해져 아무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규직만 되면 근무조건이 훨씬 좋아질 테니 요양병원이든 어디든 상관없다고 줄곧 생각해왔지만 막상 그 일이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자 나는 내가 대학병원에서 임상경험을 이어나가고 싶어해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외국인인 내게 선택의 여지가 생길지는 알 수 없었고, 원하는 병원을 고르기는커녕 갑자기 백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체인형 세탁소가 생겨 소득이 형편없이 줄어든 부모님에게 생활비를 드리고 있는 남동생은 내가 얼른 가계에 보탬이 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국의 가족을 생각할 때면 나 혼자 잘살아보겠다고 먼 곳까지 와 아등바등하는 게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인가, 울적해졌다.
언니가 예전에 개리가 알려준 피자가게에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은 건 우리가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였다. “개리도 같이 불러서.” 나는 낯선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언니의 성격을 생각하면 뜻밖의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개리의 어머니가 편찮으셨다는 말이 언니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렸을 거라는 걸 이해했고, 그래서 언니의 제안에 선선히 동의했다.
그날 저녁 개리가 아르바이트 마치는 시간까지 기다린 후 우리 셋은 같이 피자를 먹으러 갔다. “느닷없었을 텐데 응해줘서 고마워” 하고 내가 말하자 그는 “일 끝나서 배고프던 참인데 내가 운이 좋지” 하고 특유의 친근한 말투로 말했다. 개리는 로고가 크게 박힌 후드티 차림이었고 그 탓인지 평소보다 더 어린애처럼 보였다. 협소하지만 아늑한 식당은 테이블이 작은데다 의자 간격마저 좁아 우리는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했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식당인지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시끄러웠다. 개리는 룸메이트와의 갈등이나 아파트 수도에서 녹물이 나온다는 이야기 같은 걸 했는데, 식당 안이 너무 시끄러워 까페에서 몇마디를 주고받았을 때와 달리 개리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언니가 대화를 잘 따라오고 있나 걱정이 되었다. 취한 것인지, 자리를 제안한 게 언니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조용했기 때문에 신경이 더 쓰였던 것이다. 나는 언니와 개리만 두고 화장실에 가는 게 꺼려졌고,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내가 돌아왔을 때 우려와 달리 언니와 개리는 정수리가 닿도록 바짝 붙어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학’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그들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 듯했는데, 언니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인터넷 사전을 찾아가며 나는 모르는 러시아의 희곡작품에 대해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갈매기가 주인공인 연극이야?” 내가 자리에 앉으며 묻자 개리가 먼저 웃었고 언니도 따라 웃었다. 언니는 양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나는 언니가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이미 말했지만 언니는 무척 내성적인 사람이었고, 나와 어딘가에 놀러 가기로 했다가도 다른 친구들을 불러도 되느냐고 물으면 “그럼 그냥 너네끼리 다녀와”라며 물러서는 성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언니의 귀국일이 다가왔을 무렵, 언니가 개리에게 같이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자고 제안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뜻밖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리와는 피자를 같이 먹은 이후 한층 더 편한 사이가 되었지만 까페 바깥에서 만나자고 일부러 약속을 잡은 적은 그때까지 한번도 없었다. “귀국 전에 마지막 추억을 만들 겸 교외에 나가보고 싶은데 얘나 나나 운전을 못해서.” 그렇게 말한 언니는 “우리 둘하고만 가는 게 재미없을 것 같으면 친구를 불러도 좋아” 하고 덧붙였다.
우리가 개리 일행과 함께 몬탁에 가게 된 것은 1월 마지막주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잭슨하이츠에서 만나, 렌트한 차를 타고 몬탁까지 달렸다. 날씨가 이른 봄날처럼 무척 좋았고, 도로에는 차들이 많지 않았다. 우리와 동행한 개리의 친구 겸 룸메이트는 필리핀계 여자아이로, 스파 브랜드의 커다란 핑크색 귀걸이와 베이비핑크색 코트 차림이었는데, 그 탓인지 개리보다도 더 어리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고급주택가를 지나면 개리의 친구는 “저걸 봐요!” 소리 질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이 차이를 실감했고, 언니는 정말 학생들을 인솔하는 느낌을 받고 있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몬탁의 주요 관광명소인 등대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이었다. 언니와 내가 둘 다 좋아하던 영화 촬영지라 목적지로 정한 것이었지만 몬탁엔 기대만큼 볼 것이 없었고, 겨울이라 등대 안에 들어가볼 수도 없어 내심 실망해 있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개리는 우리에게 인근에 맛있는 해산물 식당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랍스터와 굴을 먹었는데, 음식 맛이 매우 좋아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개리는 친구의 얼굴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며 장난을 쳤고, “둘이 정말 사귀는 사이 아니야?”라고 내가 묻자 “말도 안 돼” 하며 친구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예정대로면 그후엔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우리는 갑자기 존스비치에 가기로 했다. 개리가 곧 떠날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며 존스비치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눈부시게 밝던 햇살은 점점 희미해져, 우리가 차로 달리는 사이 어스름이 몰려오기 시작해 해변에 닿았을 즈음엔 하늘이 온통 연한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봄이 오기 전이라 해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두셋씩 모포 같은 걸 덮은 채 모래밭 위에 앉아 있었다. 갈매기들이 바다 위를 맴돌거나 아주 천천히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모래밭 위로 날아들었다. 저 멀리, 커다란 개 두마리가 춥지도 않은지 바닷속을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바닷가는 고요했고 사람들은 해 질 녘의 분위기에, 잔양이 너울대는 대서양의 장엄함에 취해 있는 듯 보였다.
“어때? 근사하지 않아? 이 근방에서 난 여기가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고 생각해.”
개리가 칭찬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말했다.
“응, 정말 굉장하다.”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해변을 조금 거닐었다. 나는 조금 감상적인 마음이 되었는데, 더이상 낮이 아니지만 아직 밤도 아닌 미확정의 시간대가,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을 그었다 지우는 파도의 철썩이는 소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머지않아 어둠이 몰려오면 보랏빛이 되었다가 검게 물들 테지만, 아직은 사방이 핑크빛으로 가득했고 그 사이에는 부드러운 오렌지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 놀라운 장관,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놓는 시간과 시간의 경계를 언니와 개리의 친구 그리고 나는 모래밭 위에 앉아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고, 개리는 밀려오는 파도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갈매기들이 해변으로 날아들었고, 그러면 개리는 양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은 채로 가볍게 달려가 갈매기들을 날리기를 반복했다. “또, 바보같이 구네.” 개리의 친구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개리의 친구,라고 나는 계속 지칭하고 있지만 이제 와 그 여자아이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많지 않다. 그녀의 이목구비나 실루엣, 목소리의 높낮이와 이름 같은 건 세월 속에 지워졌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 일렁이던 특별한 빛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는데, 그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빛이었다. 사랑에 빠진 상대가 당신을 황홀한 듯 바라볼 때 당신의 눈동자에 비치는 그 빛. 터무니없는 열망과 불안, 기대가 뒤섞인. 지금까지 내가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건, 그녀 옆에서 개리를 바라보던 언니의 얼굴에서도 그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낯선 세계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언니가 지금까지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개리를 좋아했으며, 그것은 언니를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만들어줄 감정이라는 걸 느닷없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 나는 분명히 그걸 깨달았지만 그 겨울 저녁, 해변에서 나는 내가 깨달은 것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그 깨달음이 그간 내게 납득 가지 않았던 언니의 태도 중 많은 부분을 설명해줄 수 있었는데도. 그로부터 얼마 후 언니가 내게 너라면 가망 없어 보이는 짝사랑의 상대에게 고백을 할 것 같으냐고 물었을 때 더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금세 돌린 것은 언니를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언니가 귀국 직전 어느날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고백을 했는데 잘 안 됐다고 취중에 털어놓았을 때 그것이 사실 개리가 아니냐고 묻지 않았던 것도. 내가 그랬던 것은 그저 언니가 개리를 사랑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내가 굳게 믿어서였을 뿐이다.
마흔이 넘은 언니가 스무살이 갓 넘은 남자를 사랑한다니.
그건 부도덕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통념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언니는 결코 그런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2월 말이 되어 언니가 귀국했고 나는 대학병원 정규직 간호사가 되어 뉴욕에 남았지만 더는 룩스에 가지 않았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 내겐 몇번인가 연애와 결별이 찾아왔는데, 옛 애인들과 결국 헤어지고 만 건 누구의 일방적인 탓이라기보단 그들과 내가 서로 욕망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때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 그 사실은 여전히 나를 놀라게 한다.
남동생과 내가 보내준 생활비로 노후를 보내는 부모님은 세탁소를 정리하진 않았다. 얼마 전엔 아빠가 게실염으로 수술을 했는데,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다른 대륙에서 낯선 환자들을 간호하는 내 삶이 얄궂게 느껴진다. 부모님은 아무리 초대해도 미국에 오지 않지만 남동생 가족은 한번 놀러왔고, 조카들은 디즈니랜드를 가장 좋아했다. 언니는 지금도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이따금씩 연락을 하게 되면 교수들에게도 온정을 베풀 필요가 있다는 걸 학생들이 모른다며 툴툴댄다. 더이상 요리사나 플로리스트가 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언니는 긴 혼란의 시간 끝에 자신의 삶을 다시 받아들인 듯하다. 하지만 이제 언니는 예전과 달리 취미활동을 즐기고 있고, 종종 나에게 직접 만든 나무도마나 도자기 머그컵 같은 것을 소포로 보내준다. 나는 얼마 전부터 동부의 겨울을 피해 엘에이로 이주해 살며, 일년에 한번씩은 한국을 방문한다. 한국에 들어가 언니를 만나면 우리는 어김없이 뉴욕시절을 추억하지만 내가 먼저 개리 이야기를 잘 꺼내지는 않는데, 어쩌면 그것이 내가 부정하려 했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선 알고 있던 어떤 진실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중환자실에서 많은 이들이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걸 목격하는 사이 시간이 무심히 흘러 어느덧 나는 그 시절의 언니 나이가 되었다. 언니의 나이가 되어, 처음 정규직으로 일했던 병원에서 친하게 지낸 동료 간호사의 출산을 축하해주기 위해 다시 뉴욕에 와 있다니.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우리를 때때로 뜻하지 않은 시간대에 뜻하지 않은 장소로 데려다놓는 인생이 갈수록 신기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재회한 뉴욕은 어딘지 쇠락한 듯 보이고, 살찐 쥐가 죽어 있거나 마약에 절어 중얼거리는 노숙인이 노상방뇨를 하는 도심의 오래된 골목들을 걷다보면 이곳에서 언니와 보냈던 시간들은 가마득히 멀게 느껴진다.
아직 뉴욕이 내게 광채를 잃은 도시가 되기 전, 언니가 내게 큰이모와 산책하던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뉴욕에 눈이 몹시 많이 오고 난 이후의 어느날이었고, 우리는 눈 덮인 센트럴파크를 걸어보기 위해 만났다. 진흙투성이의 잔디밭엔 흰빛이 가득했고, 눈이 쌓인 채 넓게 얼어붙은 빙판은 겨울 햇살에 황금색으로 빛났다. 5번가의 높다란 빌딩들에 둘러싸인 아이스링크에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청록색 침엽수들이 울타리를 이루는 눈길 위엔 커다란 눈사람이 서 있었다. 언니가 그 말을 한 건 우리가 쉽미도우를 지나, 베데스다 분수 즈음 이르렀을 때였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하루에 한번씩 해 질 녘 즈음 산책을 나섰어.” 언니가 큰이모 이야기를 꺼내는 건 재회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나는 더 집중해 귀를 기울였다. 언니는 앞이 안 보이는 큰이모가 언니의 팔꿈치를 붙잡은 채로 둘이 동네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고 말했다. “엄마와 그렇게 꼭 달라붙은 채 매일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건 다른 사람들은 누리지 못할 축복이었어.” 그리고 언니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걸으면서 언니는 큰이모를 위해 보이는 풍경을 묘사해주곤 했다고. “엄마와 여길 같이 걸었다면, 나는 이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위해 애를 썼겠지. 사방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온통 부드러운 흰빛이라고. 눈 위로 떨어져내리는 햇살은 아주 연한 노란색이라고.” 그렇게 묘사를 하고 나면 큰이모는 “이젠 내 차례야” 하고 말하곤 했다고 했다. 그리고 큰이모는 시각을 잃은 후 얻게 된 예민한 다른 감각들을 활용해 큰이모가 느끼는 풍경을 언니에게 묘사해주었다. 바람이 어제보다 부드럽고 가볍구나. 눈 때문인지 사방에서 지난여름 우리가 쪼개 먹었던 수박 향이 나는구나. 까치 소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들리는구나. “엄마가 묘사해주던 그 세계 역시 정말로 아름다웠어.”
그날, 우리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눈 덮인 센트럴파크에 오래 서 있었다. 큰이모가 느꼈을 방식대로 세상을 느껴보기 위해서. 나는 피부에 닿는 공기의 차가운 감촉과 겨울나무의 냄새와,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빛 쪽으로 들어 올리면 눈꺼풀 위로 느껴지는 햇살의 온기를 그때만큼 그렇게 생생하게 느낀 적이 없다. 그때 나는 우리가 바로 그 순간 큰이모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었다. 언니 역시 그렇다고 느끼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렇다.
그렇더라도 존스비치에서 개리를 바라보던 언니의 얼굴에 일렁였던 빛을 지금 내가 떠올린 건, 지난날 언니와 함께 보았던 록펠러센터 앞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다가 아주 오래전의 일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덧붙이고 싶다. 열다섯번째 맞이했던 크리스마스 즈음이었고, 나는 그해 봄 우리 반에 왔던 교생 실습생이 영화를 보여준다고 해서 지하철을 타고 난생처음 서울에 도착한 참이다. 이제는 없어진 서울극장 앞에서 나는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롤과 구세군 종소리가 거리에 가득하고 나는 인생의 첫 데이트를 위해 용돈을 모아 지하상가에서 산 모직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 스스로 충분히 어른에 가까워졌다고 믿으며.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 영화관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며 나는 얼마나 설렜나. 그리고 그가 애인과 함께 나타났을 때 내가 빠졌던 절망은 얼마나 깊고 어두웠었나.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생인 그가 열다섯살인 나를 연애감정으로 좋아했을 거라고 믿었다는 사실이 터무니없게 느껴지고, 그를 향한 사랑을 보답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사실 역시 가당치 않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때 나는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압도된 채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것은 이제 와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무척 황홀한 감정이었다. 온 세상을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처럼 형형색색으로 반짝이게 만드는.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생각들은 한번도 자신만의 욕망을 가져본 적 없던 언니가 그때 어떤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는 걸 내게 마침내 깨닫게 했다. 그건 얼마나 달콤한 일이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이미 오래전 지나왔으나, 그런 시기가 틀림없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언제 누구에게 찾아오든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