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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여성의 돌봄에서 공동체의 돌봄으로

최근 소설의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김주원 金周源

2021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

aimhere@naver.com

 

 

 

1. ‘여성서사’의 부상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1929)은 여성의 교육과 경제적 독립을 주장한 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예술가의 창작에 관한 중요한 논설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울프는 왜 여성 예술가에게는 기억할 만한 전통이 없는가 묻는다.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e)나 제인 오스틴(Jane Austen) 같은 소수의 선배들이 있지만 여성 예술가의 모델은 너무나 부족했다. 울프는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하며 ‘주디스’라는 가상인물을 만들어내지만 그녀가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주디스에게 셰익스피어와 같은 재능이 있더라도 그녀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때 이른 결혼으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과 ‘자기만의 돈’은 중요하다. 그것은 자립의 기초이며 예술가의 정신적 토대가 되어줄 것이다. 울프의 말대로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다. 그러나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소환된 울프에게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울프는 여성 소설가들의 창작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울프가 보기에 소설은 여성들의 장르였다. 소설은 희곡이나 시에 비해 전문교육이 필요하지 않으며 중단했다가 다시 시작하기 수월했다. 다른 전통적인 장르들이 이미 굳어지고 결정된 형태였던 데 비해 소설은 유연하고 새로운 장르였기 때문에 여성은 소설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글을 쓰는 중간중간 아버지를 병간호했던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나 글을 쓰다 말고 감자 싹을 잘라야 했던 샬럿 브론테 등 울프의 선배들은 집을 벗어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이유로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여성 작가들은 응접실에서 여러 사람들을 관찰하며 인물을 분석하는 능력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여성 예술가들을 옹호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울프는 예술에서 남성도 여성적인 것을, 여성도 남성적인 것을 다루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의 광대함과 다양함을 고려하면 두개의 성(性)도 부족한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해나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이해가 편을 가르거나 제한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위대한 마음은 양성적’(androgynous)이라는 말에 잘 나타난다.1 시인 콜리지(S. T. Coleridge)의 그 말을 빌려 울프는 어느 한 성의 독단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성을, 나아가 사물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여성의 능력과 재능을 말살하는 사회를 여러 차원에서 비판한 울프였지만 동시에 그는 여성 예술가들이 남성중심사회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원한도 문제적이라고 보았다. 권위의 눈치를 보는 것도, 지나치게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도 온전한 진실함이나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가부장제사회에서 여성 예술가에게 더 많은 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울프는 여성 작가들이 이런 종류의 갈등에서 힘이 소진될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증오와 분노 속에서 예술적 재능이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울프는 경험을 온전히 충실하게 표현하려면 마음 전체가 활짝 열려 있어야 하는데 의식적인 편향성이 있으면 당장은 빛나 보이더라도 오래 살아남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여성의 글쓰기가 지닌 잠재성과 개성을 한껏 고무하면서 남자와 여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리얼리티’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리얼리티를 찾고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작가의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문학에서 여성 독자들의 영향력, 그리고 여성 작가들의 약진은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미투운동 이후 페미니즘은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고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은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들의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대중문화 현상으로서 버디무비나 브로맨스(Bromance)에 반격하여 여성서사나 워맨스(Womance)가 장르화되고 이를 소비하는 여성들은 새로운 젠더 감수성으로 ‘느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때 ‘여성서사’라는 용어는 엄밀한 학술적 규정이라기보다 주로 여성들의 삶을 중심으로 다루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보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특징과 가치들을 긍정하는 의미가 강하다.2 “여성 서사는 그 기호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함을 예리하게 다각화하고 있”3다는 진단이 보여주는 것은 여성서사의 다양성뿐 아니라 그것을 정의하는 일의 곤란함도 포함하고 있다.

최근 여성서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가족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일 것이다.4 여성서사는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모성이나 정상가족의 모델을 수정하거나 재검토하고 있으며 “다양하게 재구성되고 새롭게 명명되는 가족의 모습”5을 그리고 있다. 이 여성서사는 우선 기존 한국문학의 남성중심성에 대한 암묵적인 반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남성 인물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눈에 띄는 현상이다. 여성서사가 남성 인물들에 할당하는 서사는 그다지 풍요로운 편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인물 구도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하며 어느 한 성의 리얼리티만을 전경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가족 이야기에서 남성 인물의 배제 경향은 여성들이 차지하는 “희생의 누진성”, 다시 말해 “문제가 중첩되고 누적되는 자리”6에 있는 여성들이 구조의 문제를 잘 볼 수 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희생자로서의 서사를 빈번하게 반복하는 이런 방식이 여성의 이야기를 다각화하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그럼에도 지금 여성서사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관습화된 패턴에서 멀어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 한국사회의 혈연중심적인 가족제도를 수정하고 변형시키는 이야기, 또는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이야기, 돌봄의 상상력을 회복하려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2. ‘파묘(破墓)’와 동맹: 황정은의 『연년세세』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공적 안전망이 부재하는 가운데 개인이 기댈 거의 유일한 언덕이 된 지 오래다. 한국에서 혈연중심의 가족주의가 더 공고해진 것은 강력한 근대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가족이 떠맡아왔기 때문이다.7 가족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 개념이 지닌 강력한 구속력 때문에 문제가 되곤 한다. 한국의 가족은 과거 전통시대의 보수적이며 혈연주의적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한 가운데 가족 밖의 시민사회와 고리를 거의 갖지 못한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8 근래 출간된 가족 이야기들은 가부장적 혈연가족 관념에서 벗어난 돌봄 공동체로서 가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가족이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는 황정은 연작소설 『연년세세(年年歲歲)』(창비 2020)의 주제이다. 노년 여성 이순일은 자식 셋을 다 키우고도 집안일을 놓지 못하는데, 그의 자식들은 성인이 되어 이미 저마다의 삶을 찾아가는 중이다. 맏딸 한영진은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까지 대면서 부모 노릇을 대신해왔으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이순일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하고 있다. 아들 한만수는 취업에 실패하여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고 둘째 딸 한세진은 대학생이 되고부터 집을 나가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한영진은 이순일과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식이지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81면)는 엄마의 조언이 아들 한만수가 아닌 맏딸인 자신에게만 향했다는 것을 알고 애증을 느낀다. 그는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81면)에 체념하며 살아가지만, 이순일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만수와 한세진은 전혀 다른 형태의 가족을 예고하고 있다.

첫번째 소설의 제목 ‘파묘(破墓)’는 매우 상징적이다. 이순일은 건강 악화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자신이 물려받은 갈골의 산에 있는 조부의 봉분을 파묘하기로 한다. 이순일은 친정을 찾듯 혼자 성묘를 해왔지만 자신이 죽으면 묘지를 아무도 찾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어렵게 무덤을 찾아낸 파묘꾼들의 수고에도 그곳에는 겨우 뼛조각 몇점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고, 이내 봉분은 빠른 속도로 메워진다. 소설 서두의 파묘 장면은 이순일 세대가 중시하는 혈연가족의 의미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알린다. 그 와중에도 순일의 남편 한중언은 그 산을 자신의 명의로 등록하여 아들 한만수에게 물려줄 계획을 한다. 그러나 그 산은 부동산 가치가 거의 없고 거래 자체가 어려운 곳으로, 소설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혈연관계의 공고한 유대가 그 시효를 다했음을 보여준다. 한만수는 뉴질랜드에서 낯선 백인 할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그곳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고, 한국에 돌아올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파묘」는 기존 가족 개념에서 탈영토화되는 이순일의 자녀들을 조명한다.

가족의 의미는 「하고 싶은 말」 중 한영진이 한세진이 올린 연극을 보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만찬을 앞에 두고 모인 가족을 보여주는 그 연극에서 한영진은 그것이 자기 가족의 모습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무대 위에선 평범해 보이는 가족 모임이 펼쳐지고 별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때때로 섞여드는 굉음은 중요한 연극적 효과를 발휘한다. 배우들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어느 순간에는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배우들의 대사가 관객에게 잘 들리지 않기도 한 것이다. “굉음 자체가 그 연극의 중요한 대사이자 내용인 것 같기도”(65면) 하다고 한영진은 생각한다. 이 굉음은 가족 내부의 소통 불가능성이 만든 소리 없는 마찰 같은 것이 아닐까. 한영진은 자기 역할을 맡은 배우의 모습을 보고 그 순간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마음 맞는 사람, 지금 내가 제일 필요한 게 그거야.”(66면)

소설은 이순일의 헌신과 돌봄을 무용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한영진이 첫 아이를 낳고 스스로를 모성이라는 게 결여된 잘못된 인간이라고 여겼을 때, 이순일은 살림도구를 가져와 “자기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들을 먹이고 보살폈다.”(75면) 한영진은 아이에게서 조금 떨어진 뒤에야 아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한영진은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75면)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다가오는 것들」에서는 뉴욕의 북 페스티벌에 참가한 한세진 일행을 통해 한국사회의 공고한 혈연주의 바깥을 탐색한다. 한세진 일행은 ‘평화의 읽기, 저항의 쓰기’라는 주제의 대담회에서 “2016년 촛불집회에 관해 뭔가 말해주기를 기대하는”(162면) 분위기를 감지한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와 국가 폭력과 IMF 이후 노동의 비정규직화가 한국의 창작자들에게 미친 영향, 2016년의 촛불집회와 광장의 경험과 대통령 탄핵은 각자의 장르, 혹은 개별 작업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164면)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얘기할 것이 너무 많은 주제들”이고 “대담자 구성이 애매”(162면)한 상황 속에 내실있는 대담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다 끝나갈 무렵, 끝으로 서로에게 질문할 것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담자들은 흠칫 놀란 채 서로를 두리번거렸고 시시한 질문과 농담에 가까운 대답이 두어개 이어지고 다들 한차례 웃은 뒤 사회자가 방청석에 마지막 질문을 제안했을 때 출구에서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마른 여성이 손을 들었다. 검은 직모를 느슨하게 묶어 한쪽 어깨로 늘어뜨렸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말했다.

당신들이 한국에서 온다고 해 내가 여기 왔다 당신들을 만나러.

한시간 반을 여기 앉아 당신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국인 입양아, 한국의 입양아 수출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다. 당신들은 한시간 반 동안 그것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Why?(164~65면)

 

소설은 대담의 공식적 질문들보다 이 마지막 질문에 집중한다. 한세진은 한국인 입양아 문제가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강하게 느낀다. 이 질문은 한세진에게 “평생 잊지 못할 부끄러운 질문”(179면)으로 남는다. 그것은 공적 역사에 가려 침묵되어온 이야기이며 국가가 돌봄을 방기한 파양이다. 미국에서 한세진은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안나)의 아들 노먼이 한인 커뮤니티에서 자라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양갈보’ ‘양색시’라고 경멸한 한인들과 그들의 언어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세진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촛불혁명의 정치적 유산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포함한 혈연적 공동체가 만들어낸 배제와 차별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이다.

『연년세세』가 여성이 겪은 억압적 노동이 종래의 고통받고 수난을 겪어온 여성 기록으로 일반화되는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9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가족 개념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 혈연가족의 돌봄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려는 동맹의 욕망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둘째 딸 한세진과 그의 동성 파트너 하미영으로 그들이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 관해 나누는 대화는 한국 대중문화의 로맨스 강박을 은연중에 비판하고 있다.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182면)가 없다는 것은 이들이 이성애중심적이고 혈연적인 가족 유대에서 이탈한 존재들임을 보여준다.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를 읽고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고 그리고 거기서 죽을 것이다”(145면)라는 문장을 자주 생각하는 하미영은 그 소설의 작중 인물들이 그러하듯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문화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이다. 노먼이 거대한 혈연공동체로부터 버림받았듯이 그에게도 가족은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미영은 어린 시절 아기를 집어 던진 자신의 어머니를 이야기하며 돌봄을 방기한 자신의 부모를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러나 미영은 혈연가족에 귀속되지 않는 대신 자신에게 필요한 가족을 스스로 선택한다.

미영에게는 세진과 반려고양이가 있다. 그는 실수로 고양이를 밟았다가 크게 넘어지면서도 고양이가 무사한지를 먼저 걱정할 정도로 고양이를 자신의 분신인 듯 애지중지한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내동댕이친 친엄마보다 일상을 공유하는 반려동물이 그에게는 더 중요하다. 세진과 미영은 혈연가족의 모델에 포섭되지 않으며 혈연관계에서의 돌봄을 다른 관계로까지 확장시킨다. 이처럼 황정은 소설에서 여성 인물들은 가족을 혈연의 선이 아니라 ‘결연’의 선으로 이어진 공동체로서 실험 중이다. 이들에게 가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어떤 관계를 만드느냐이기 때문이다.

 

 

3. 돌봄의 불안: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

 

개인들 사이의 돌봄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고 있다. 돌봄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한국사회에 요청된 중요한 과제다. 김유담의 『돌보는 마음』(민음사 2022)은 가족 안에서 여성과 돌봄노동의 조건들을 첨예하게 다룬다. 핵가족을 이룬 부부가 아이를 낳고 끝까지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는 근대가 만든 제도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가족제도와 돌봄의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중요한 전환의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10

「돌보는 마음」의 주인공 미연은 늦깎이로 엄마가 되어 베이비시터를 고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워킹맘이며 육아 선배인 혜정에게 도움을 청하고, 혜정의 조언으로 업체에 의뢰해 입주도우미 정순을 소개받는다. 정순은 살림도 잘하고 아이도 잘 다뤘지만, 미연은 정순이 좋은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집에서 작은 물건들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나자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남편과 달리 미연은 시터를 바꾸기로 한다. 때마침 딸 지우를 예뻐하던 102동 할머니 남희가 시터를 자청해온 덕분에 미연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경찰 공무원을 퇴직한 남편과 사는 남희는 아이를 자신의 집에서 돌보겠다는 요구 외에는 미연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이웃이다.

미연이 방과 거실에 설치한 CCTV를 계속 지켜보는 장면은 꽤 현실적인 동시에 육아의 부담을 덜기 위한 방편이 도리어 육아에 대한 관리를 가중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도 하다. 미연은 신도시 대학병원의 고객서비스만족부 팀장이다. 그는 회사에서 중간관리자로서 부하 직원들을 평가하듯 베이비시터의 자질과 능력을 평가한다. 미연은 회사에서뿐 아니라 집에서도 베이비시터를 감시하고 해고하는 등 집안의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관리자이다. 이때 미연은 희생하는 역할보다는 집안 관리에 전권(全權)을 쥔 엄격한 돌봄 수행자에 가깝다.

「돌보는 마음」은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페미니즘의 ‘돌봄의 윤리’가 처한 곤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돌봄은 인간이 서로를 의존하는 토대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었다. 여성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데 매진하느라 돌봄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충분히 주장하지 못했으며 돌봄은 일 주위에 알아서 욱여넣어야 하는 것이 되는 한편 돌봄을 분담하려는 남성도 늘어나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11 직업적 성취와 가정 내 돌봄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는 혜정과 미연의 모습은 공공의 영역이 아니라 여성 개인의 몫이 된 돌봄노동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연의 남편 기훈은 베이비시터를 “해결하기 힘든 업무를 아웃소싱”(164~65면)하는 것으로 여기고 미연에게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돌봄을 효율적이고 깔끔한 경영 관리술로 생각하는 기훈은 그것이 사랑에 기초한 노동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돌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미연도 마찬가지이다. 베이비시터가 좋은 사람인지,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그에게 서비스 품질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초보 엄마 미연은 깐깐한 돌봄 서비스의 구매자인 것이다.

그러나 미연은 남희를 통해 돌봄의 상호관계를 경험한다. 남희의 돌봄은 계약관계에 따라 제공하는 서비스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희가 미연에게 자신을 친정엄마라 생각하고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 미연은 “차마 엄마라고는 부르지 못하고 102동 어머님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정말 이상하게도 어머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남희에게 마음 한편을 의지하게 됐다.”(171~72면) 돌봄은 상품화할 수 없는 타인에 대한 마음가짐과 감정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것이다.12 남희가 계약조건에도 없는 이유식을 조리하고 진심으로 미연을 위로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그리고 미연이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희와 아이가 궁금해서 CCTV를 보고 걱정 없이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돌보는 마음’을 가능하게 한 여성들 간의 친밀한 연대 덕분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반전은 미연이 항상 잠겨 있던 남희의 집 창고 방에 들어갔다가 남희의 또다른 모습을 마주친 데서 시작된다. 남희가 치매에 걸린 자신의 시어머니를 방에 가둬놓고 학대에 가까운 폭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밥그릇을 발로 툭툭 차며 노인을 경멸하는 남희를 보고 미연은 경악한다. 남희는 자신을 믿어달라고 사정하지만 미연은 혼란에 빠진다.

 

미연은 운전석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휴대폰을 들어 CCTV 앱을 켰다. 102동 906호 거실이 화면에 떴다. 빈 거실만 덩그러니 나타났을 뿐 아이와 남희는 보이지 않았다. 매일 보던 거실 풍경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다. 미연은 소리라도 들어 보려고 허겁지겁 볼륨을 최대한으로 키웠다. 휴대폰에서 치익 하는 잡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이의 가늘고 약한 목소리쯤은 모두 덮어 버릴 정도로 크고 불쾌한 기계음이 귓전을 때렸다. 미연은 초조한 손길로 카메라 각도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줌 기능을 실행시켰다. 아이의 모습을 도통 찾을 수 없었다. 거실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서 확인해야 했다. 미연은 두 눈을 부릅뜬 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188~89면)

 

미연은 진상고객에게 사과를 하고 돌아와 CCTV 앱을 켠다. 그는 “매일 보던 거실 풍경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졌”고 신경은 온통 “거실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쏠려 있다. 이러한 감정은 ‘엄마’ 같았던 남희가 “애한테는 너무 잘하는데, 시모를 학대하는 사람”(182면)으로 판명된 것에 대한 충격과 배신감에서 온다. 남희는 ‘독한’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구박과 눈치로 자신의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지 못했고 직업도 갖지 못한 채 마음의 병을 얻었다. 그리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집에 오고 싶어하자 “당하고 산 세월”(180면)을 복수하듯 되갚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김유담의 소설에서 부(富)와 성(姓)을 대물림하는 남자들과 달리 여성들은 서로 불화하는 경향이 있다. 「안(安)」의 주인공 윤미가 윗세대 여성들이 요즘 여자들에게 팔자 좋아졌다며 “대물림이라기보다는 ‘되물림’”, “되풀이나 되갚음”(48면)을 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돌봄노동을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던 여성들이다.

「돌보는 마음」의 탁월한 점은 친밀한 연대가 불가능한 관계를 통해 감시와 관리만 남아버린 돌봄의 민낯을 발견한다는 데 있다. 잠시나마 남희에게서 느낀 ‘엄마’ 같은 친밀감은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더 큰 불안과 공포로 미연을 엄습한다. 손익계산에 민감하고 유능한 관리자인 미연이 다른 이들과 ‘돌보는 마음’을 나눌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가 같은 처지의 감정노동자인 승주를 진상고객의 횡포로부터 보호하거나 편들어주지 못하는 것 역시 사회적으로 폄하된 돌봄노동의 현실을 보여준다. 미연은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일”(161면)을 하면서도 거래나 계약이 되어버린 돌봄의 곤궁함을 목도하며, 다시 CCTV 앱을 감시하듯 들여다본다. 낯설고 무서운 것은 ‘돌보는 마음’이 사라져버린 집이다.

 

 

4. ‘돌보는 마음’의 회복을 위하여

 

『돌보는 마음』의 다른 소설 「특별재난지역」은 돌봄의 붕괴에 대해 묻는다. 코로나19 유행 시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경북 청도. 일남은 치매에 걸린 아흔두살의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두고 자신은 이혼한 아들이 맡기고 간 손녀를 키운다. 일남은 가족에 헌신하지만 누구도 그의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 남동생은 아버지를 걱정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 적이 없고, 딸 상희는 일남이 장남인 상진만을 위해왔다며 일남과의 대화를 거부한 상태이다. 일남의 남편 경호마저 상진의 이혼이 아들을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은 일남 때문이라며 타박을 한다. 그러던 중 손녀 가영에게 사건이 일어난다. 가영이 누군가에게 신체 사진을 찍어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일남은 누군가 가영에게 엄마라고 속이고 접근해서 사진을 요구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영은 그를 엄마라 믿어 연락이 끊길까봐 두려워하며 요구에 응해오고 있었다.

청도가 바이러스 청정구역이 아닌 것처럼 집은 더이상 안식처가 아니다. 가족을 유지하고 가영을 지키려는 일남의 외로운 투쟁은 무력하기만 하다. 소설은 디지털문화에 어두운 일남이 가영을 디지털성범죄에서 구출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여성은 ‘가족 가치’를 구현하는 돌봄노동의 주체로 간주되지만13 노년 여성 일남은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다. 소설은 남성들에게 돌봄의 자리를 주지도 않는데, 그들은 누군가의 돌봄을 기대하거나 때로 강제하지만 돌봄에 참여하지 않는 인물들로 반복해 제시되는 경향이 있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겠다며 심리치료를 받는 딸 상희나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으로 아이를 포기하는 일남의 며느리는 혈연가족에서 스스로 이탈한 여성들이면서 여성들 사이의 급격한 세대적 단절을 나타낸다. 그들은 전통적 가족 개념이 붕괴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표지이다. 여기서 타격을 입는 것은 일남과 가영 같은 노년 여성과 아이이다. 한 팔로 부친의 유골함을 끌어안고 나머지 팔로 잠든 가영의 어깨를 감싸 안는 일남의 모습은 공동체는 사라지고 개념만 앙상하게 남은 가족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다. 일남이 “처절하게 버려지고 고립된 기분”(261면)으로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이 소설의 설정은 여성을 돌봄의 주체가 아니라 돌봄에서 가장 소외된 존재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팬데믹은 재난이면서 돌봄의 비상사태와 같은 것이었으며 전통적 가족 개념의 균열을 극적으로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특별재난지역」은 여성이 전담해온 돌봄이 공동체의 돌봄으로 바뀌지 않는 상황을 돌아보게 만든다.

최근 여성서사는 가족을 동맹의 실험실로, 돌봄의 공동체로 다시 보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돌봄은 이제 혈연가족이나 여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남성들을 돌봄의 수혜자로서 획일화하는 것도 이 실험에서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 돌봄은 “우리가 그 세계 안에서 되도록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세계를 지속시키고 유지하고 고치기 위해 하는 모든 활동”14을 포함하는 노동으로서의 의미 역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의 문제에서도 ‘둘 중 하나’(either/or)만 골라야 한다는 사고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므로 “‘둘 다’(both/and) 포용하는 논리15가 필요한 게 아닐까.

『자기만의 방』 이후 약 십년의 시간이 지나 울프는 『3기니』(Three Guineas, 1938)에서도 기득권을 쥔 남성들이 보지 못한 세계와 전쟁의 참상들을 말한다. 울프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매우 중요한 연결이 존재함을 알리며 무너진 집과 부서진 담장에서 처참하게 깨진 연결의 파편들을 응시한다.16 그는 분노의 정념을 넘어, 다른 성에 대한 적대감을 넘어 공동의 삶을 위한 협력을 먼저 제안한다. 지금 가족 이야기를 다시 쓰는 여성서사는 공동의 삶을 위한 돌봄을 모색하고 소통하는 중이다. 일남과 가영을 위한 구원의 시간이, 돌봄이 모두의 책임으로 이어지는 전환의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1.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최설희 옮김, 앤의서재 2022, 208면.
  2. 선우은실 「세계적 위기의 공통감각 위에서 읽는 질병 시대의 여성 서사」, 『작가들』 2020년 가을호; 이나라 「성장하는 여성, 달라지는 여성서사」,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참조.
  3. 김미정 「여성 서사의 자긍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279면.
  4.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 최은영의 『밝은 밤』, 문학동네 2021,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 은행나무 2022,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5. 정주아 「우연이자 필연인 가족의 역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318면.
  6. 김미정, 앞의 글 281면.
  7.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동아시아 2017, 166면 참조.
  8. 김동춘 『한국인의 에너지, 가족주의』, 피어나 2020, 100면 참조.
  9. 백지연 「삶의 전환을 꿈꾸는 돌봄의 상상력」, 『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23~26면 참조.
  10. 조한혜정 『선망국의 시간』, 사이행성 2018, 40면 참조.
  11. 매들린 번팅 『사랑의 노동』, 김승진 옮김, 반비 2022, 55면 참조.
  12. 캐슬린 린치 외 『정동적 평등』, 강순원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6, 87~88면 참조.
  13. 낸시 폴브레 『보이지 않는 가슴』, 윤지영 옮김, 또하나의문화 2007, 16~17면 참조.
  14. 매들린 번팅, 앞의 책 70면.
  15. 벨 훅스 『벨 훅스, 당신과 나의 공동체』, 김동진 옮김, 학이시습 2022, 15면.
  16. 버지니아 울프 『3기니』, 김정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25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