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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소영 金昭榮
작가, 어린이 독서교육자. 지은 책으로 『어린이책 읽는 법』 『말하기 독서법』 『어린이라는 세계』 등이 있음.
sohosays@hotmail.com
안희연 安姬燕
시인.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등이 있음.
elliott1979@hanmail.net
양재훈 梁宰熏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반박귀진의 하수들과 철없는 바틀비들: 「잘 살겠습니다」를 중심으로 본 장류진 소설 등장인물의 두 중심 유형」 「새해가 오게 하려면」 등이 있음.
ddalgimilk2u@naver.com
안희연(사회) 안녕하세요. 시 쓰는 안희연입니다. 새해 첫 문학초점에 초대되어 기쁩니다. 오늘 사회자라는 다소 무거운 직책을 맡았는데, 대화의 물꼬를 트고 두분 말씀 충분히 경청하는 자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양재훈 평론 쓰는 양재훈입니다. 저는 그간 박사논문 쓰느라고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 나오게 됐습니다. 문학초점에 초대받아 요즘 작품들을 읽으며 모처럼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김소영 저는 김소영입니다. 저는 어린이와 같이 책을 읽고 어린이에 관련된 글을 주로 쓰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요즘같이 불안한 현실과 어두운 전망 속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문학으로 회귀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돼요. 저는 창작하는 사람도 비평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좋은 작품을 읽고 싶은 독자 한명으로 오늘 열심히 듣고 궁금한 게 있으면 여쭤보고, 또 제가 생각한 것들도 솔직히 말씀드리는 자리로 생각하고 왔습니다.
고명재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
안희연 고명재의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으로 시작해볼까요. 약력을 살펴보니 2020년에 데뷔했고 2~3년 만에 시집이 나왔으니 비교적 이르게 작품집을 선보인 셈입니다. 시가 난해한 것은 아닌데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략된 말들이 많아 독해가 쉬운 편은 아니라는 첫인상을 받았습니다. 행간에 숨은 말들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며 읽어야 하는 시편들이더군요. 그럼에도 아포리즘적인 구절이 중간중간 시를 탄탄하게 받쳐주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가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양재훈 무슨 말이지 싶으면서도 어휘의 연결이나 문장의 리듬이 굉장히 자연스럽고 매력적이어서 몇번씩 반복해서 읽게 만들더라고요. 다만 저는 형식이나 기교보다는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려는 편이라 여러번 읽어도 잘 모르겠는 시들은 어떻게 소화할지 난감했습니다.
김소영 저는 시를 읽을 때 방금 말씀하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싶은 순간을 좋아해요. 그 비어 있는 부분이 시의 특징이자 소설과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감상한다’고 하고 소설은 ‘읽는다’고 하는 표현이 각각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 같은데요. 완전히 이해하기보다 뭔가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그 부분들이 시를 읽기에 좋은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독자여서 말씀하신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극, 그 사이에서 “흐르는 강물에서 기다란 바게트를 꺼내요”(「페이스트리」)처럼 갑자기 점프해 뭔지 모르는 채로 끝나는 낯섦이 너무 좋았고 매번 깜짝 놀라면서 시집을 읽었어요.
안희연 고명재의 시는 주로 내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면의 독백이 자연스럽게 발설되기보다는 이미지로 전환되거나 생경한 비유가 끼어드는 등, 자기 문법에 입각해 서술하려는 의지가 강하더라고요. 달리 말해 그건 시의 문체와 표현, 즉 형식에 대한 고민이 많다는 뜻이겠고요. 제가 느낀 독해의 어려움은 아마도 그런 형식적 도약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용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자기 경험에 충실한 시집처럼 보입니다.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는 엄마와 함께 콩국수를 먹는 소박하고 단순한 장면을 그린 시로, 엄마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아들의 마음이 진정성 있게 다가왔습니다. 시의 동력이 자기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탄탄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식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눈에 띄는데, 시인의 어머니가 정말 반찬가게 운영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소보로」나 「페이스트리」처럼 자기 체험과 음식 이미지가 만날 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이 폭발하는 듯했습니다.
양재훈 「소보로」 「페이스트리」 모두 무척 좋았는데요, 사랑과 죽음이 부푸는 빵의 이미지를 통해서 폭발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시인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주목되었는데, 「페이스트리」는 “매일 사랑하는 사람의 유골을 반죽에 섞고/언덕이 부풀 때까지 기다렸”다는 말로 시작하잖아요. “나는 안쪽에서 부푸는 사랑만” 본다고도 썼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멈춰 있지 않도록, 그 죽음이 자신의 세계를 끝내게 하지는 않도록 자기 안에서 굴리고 굴려서 부풀리는 것 같았어요.
김소영 시각적 이미지뿐 아니라 냄새나 소리, 촉감 등의 감각들이 총동원되어 독자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와요. 「뜸」을 보면 하얀 안개꽃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백내장이 흐드러지고”를 지나 “박하를 짓이겨 배꼽에 밀어넣었”다는 대목에 이르는데요, 연 구분도 없이 하나의 호흡으로 다양한 감각을 전달하고 있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나비를 찢고 깨어난 그는 일흔이다”(「일흔」)라는 구절에서는 어떻게 한 문장 안에 이런 강렬함과 연약함이 공존할 수 있을까,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나비를 찢고 깨어났는데 일흔살인 사람. 어구 하나로부터 엄청난 서사가 만들어지는 듯해 좋게 읽었습니다. 또 좋았던 점은, 엄마와 할머니가 자주 등장하는데 지극히 개인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에요. ‘엄마’ ‘할머니’라고 할 때 우리가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아니라 말이죠. “너희 할머니는 민들레했다”(「지붕」) 같은 표현이 기억에 남고, 시가 한 존재를 이렇게까지 얘기해줄 수 있으면 앞으로 시를 좀 믿어도 되겠다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안희연 시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시집이라는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저 역시 “사람을 넘어 존재가 된다”라는 「소보로」의 구절이 시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집약해준다고 봤습니다. 엄마와 할머니를 포함해서, 시인의 시선을 거쳐간 대상은 보편적인 것에서 고유한 것으로 들어 올려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시인의 시선이 참 다정하다 느낀 것이, 싫은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더라고요. 무엇이 나에게 아름다움이라고 느껴지는지를 하나하나 열거한 「엄마가 잘 때 할머니가 비쳐서 좋다」가 대표적입니다. 싫은 게 없거나 고통을 몰라서는 아닐 텐데 그럼에도 좋은 면을 발견하고 호명하고자 애쓰는 태도가 시인을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해요.
양재훈 고유한 존재에 대한 호명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사실 반대로 생각을 했습니다. 고명재의 시에서 사람이 존재가 되는 건 그들이 자기 안으로 들어올 때였던 것 같아요. 엄마, 할머니, 친구, 애인 이야기를 하는데 다 자기 이야기하고 뒤섞여 있어요. 그러니까 개별적인 ‘나’가 아니라 그들과 구분되지 않는 ‘나’가 되어서 시를 쓰고 있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개별적 존재자들을 존재 자체의 보편성으로 고양시킨다고 할까요.
김소영 두분 말씀이 다른데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느껴져서 좋네요.
양재훈 “혁명을/민들레라 부르는 거다”(「지붕」) 같은 구절을 읽으면서는 혁명을 민들레로 바꾸어 부른다는 게 너무 아름답다 느끼면서도, 아름다움만을 마냥 취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들었습니다. 시인이 언어의 의미를 생략하고 언어 자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예컨대 분단체제 속에서 의미기가 달라지고 쓰기 어려워진 말들이 있잖아요. 인민에는 국민이라는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의미가 있는데, 우리는 인민이라는 말을 빼앗겨버렸죠. 혁명이라는 말도 비슷한 방식으로 제게는 뺏긴 말처럼 다가와요. 자본주의가 낳은 심각한 문제들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는 상상이 막혀버렸으니까요. 그래서 “혁명을 민들레라 부”를 때 발생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그 ‘핏기’를 정말 빼버릴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들었던 거예요.
안희연 시인마다 할 수 있는 몫이 다른 것 같아요. 현실논리가 거대하게 존재하는 시세계도 있고 희박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다정을 끊임없이 밀어붙여서 돌파하고자 하는 에너지도 있을 수 있겠고요. 저에게 고명재의 첫 시집은 ‘사랑과 다정의 시집’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첫 시집의 아쉬움은 다음 시집을 향한 기대로 바꿔보기로 하지요.
송진권 『원근법 배우는 시간』(창비)
안희연 이어서 송진권 시인의 『원근법 배우는 시간』을 읽어보겠습니다. 제목 이야기를 먼저 해보고 싶습니다. 원근법을 배운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이 제목이 적합하다고 느낀 것이, 이 시집에는 회상으로 이루어진 시들이 많아요. 지금은 돌아갈 수 없지만 과거에 두고 온 시간이나 공간을 그리는 시편들이 다수를 이루는데, 화자가 그것들을 가까이 느끼기도 하고 한없이 아득하게 느끼기도 하면서 마음의 거리를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리적 거리와 마음의 거리가 늘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요. 결국 삶에 대한 공부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공부로서의 원근법이구나 싶었습니다.
김소영 저 역시 제목이 궁금해서 표제작을 먼저 읽었지만 왜 원근법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 시집은 한권 전체를 읽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시집 전체를 읽고 나니 말이 공간을 만들 수 있구나, 실제로 있는 어떤 공간을 말로도 지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화자가 시골에서 보내는 시간, 변두리에서 보고 겪는 것같이 구체적인 삶을 시의 재료로 쓰고 있는데, 내가 시골 살아보니까 이렇더라는 식으로 그냥 쓴 게 아니라 자기만의 원근법으로 재배열해 하나의 공간으로 만든 것처럼 보여요. 한 세계를 직접 경험하고 시집 한권으로 만들어낸 이의 자부심이나 어떤 확신도 느껴져서 힘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이 갖는 언어의 힘은 고명재 시집과는 또 달라 읽는 재미가 있기도 했습니다. 또다른 차이점은, 이 시집에도 어머니 할머니가 등장하지만 구체적이고 선명하고 심지어 개인적이기까지 한 시집의 다른 풍경에 비해, 어머니나 할머니에 대해서만큼은 안타깝게도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졌어요. ‘아내’는 대체로 남편을 타박하는 사람 정도로 그려지는 것이나, “중학교 졸업하고 공장에 간 누나가 모은 돈으로 사준/소 한마리”(「공우탑」) 같은 구절이요.
양재훈 어떤 시공간을 묘사하는 작품들이 많은데 다 과거 시제라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의 우리가 잃어버린 때와 곳을 그리고 있는 거죠. 그런데 사실 그런 시공간을 우리가 정말 가진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예를 들어 「첫걸음마」는 어린 화자의 눈에 비친 최초의 세계, 최초의 기억을 말하는 시인데요. 화자는 언어를 배우기 전의 아기인데, 그래서 오히려 세계와 세계의 모든 존재들과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요. 마치 시간이 발생하기 전인 듯, 인간의 삶과 자연 자체가 일치하는 신화적 장면이에요. 토속어의 사용을 통해 그런 전근대적 일체감이 더욱 고양되고요. 시집의 앞부분에 이런 일체감을 고양시키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회복 불가능하고 냉정하게 따져보면 지나치게 미화된 듯한 시공간이 과잉동일시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어요. 목가적인 풍경은 과거를 아름답게 그리는 방법 중 하나지만 동시에 과거에 엄존했던 추한 모습을 감추는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김소영 사실 1부까지만 읽었을 때는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그게 방금 말씀대로 저라는 독자가 시집에서 그리는 시간과 풍경을 잘 알고 있지도, 별로 그리워하지도 않아서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좀더 내밀한 경험들이 구체적으로 들어오니까 시가 재미있어지더라고요.
양재훈 3부를 지나면서부터는 등호(=)로 연결된 존재들, 자아와 세계, 자연, 신화, 지방(토속어) 속에 끼어들지 못하는 ‘현재’가 비치더라고요. 「당재 넘으며」의 “개를 버리기 좋은 곳”이 “죄를 버리기 좋은 곳”이라는 구절은 세계와의 일체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른 세계를 보여줘요. “털이 뭉친, 다리가 부러져 디룽거리는, 목줄이 파고든, 한쪽 눈이 없는/들개들이 무리 지어 사는 곳”처럼 현실적 구체성을 띤 장면들 덕분에 뒷부분의 시는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안희연 물론 1, 2부 시들에서도 허구성이 지닌 힘이 전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첫걸음마」에서도 화자의 눈에 비친 소리와 빛이 어렴풋하게 일렁이는 그날의 풍경이 제게는 참 아름답게 다가오더라고요. 사후적으로 재구성된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그 시간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기에, 각자의 원초적 시간을 떠올려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가죽나무에서 가죽나무로」라는 시도 참 좋았는데 한 가계를 톺아보는 과정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한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다는 사실이, 자연의 영원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대비시키며 아득한 골짜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나 인물의 전형성이나 상투성이 노출될 때 독자들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지, 하고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서정의 미래에 대한 중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봐요. 시집이 제시하는 목가적 풍경의 아름다움, 갈등 없이 선하기만 한 농촌공동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버렸으니까요. 독자들에게 더 큰 호소력을 갖기 위해서는 서정에도 진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소영 저도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서정이 새로워질 수 없는 걸까. 시적 자아가 자기를 중심으로 만드는 것이 서정이지만, 그걸 혼자서 갖는 게 아니라 나누어야 한다면 독자에게도 잘 가닿을 수 있는 표현 방법과 소통 방식이 필요할 거예요. 한편으로는 아까 시인마다의 몫이 있다는 말씀을 안희연 선생님이 하셨는데, 누군가에게는 바로 이런 시집이 필요하리라는 생각도 했어요. 이런 시와 세계를 계속 만나고 싶고, 시인이 나와 함께 이 세계를 기억해주고 있음에 반가움을 느끼는 독자 말이죠.
양재훈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내고 보여주는 일이 갖는 기능은 분명 있을 겁니다. 나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는 시기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일 뿐이지만, 이 환상은 현재의 결여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살고 있는지를 알려주기도 하니까요. 2022~23년의 한국은 살기 힘들고 우울하지만 그럼에도 미래를 상상해내야 할 필요는 여전히 있잖아요. 그런 상상이 과거에 대한 기억의 형태로 가능하다고도 생각해요. 이 시집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과거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맞세워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상상해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안희연 송진권의 시세계는 ‘못골’이라는 지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보입니다. 전작에서도 집요한 탐색이 이어졌는데 이번 시집에서도 「못골 살 때」 등 여러군데서 못골이 등장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속도에 내몰리는 사람들, 아파트 키즈로 자라나 농촌보다는 도시적 삶에 익숙해져버린 사람들에게는 이 시집이 먼, 옛것의 이야기로 다가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구분 자체가 이분법적으로 이 삶과 저 삶을 나누는 일이기도 해서 조심스럽습니다. 모쪼록 저는 시인의 ‘못골’이 특정 지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 자리한 저 아득한 시간, 원초적 그리움의 세계를 아우르는 진화된 서정의 장소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쉽게 찾아갈 수 없고 쉽게 화해할 수도 없는 장소 말이지요. 그렇다면 연고나 세대를 뛰어 넘는 파급력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게 또 서정의 미래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명수 『77편, 이 시들은』(녹색평론사)
안희연 마지막 시집인 김명수 시집으로 넘어가볼까요. 오늘 다룰 시집 중에서는 가장 오랜 시간 작품활동을 해온 시인의 작품인데요. 한국사회의 생태주의 담론과 지평을 열어온 녹색평론사에서 새롭게 시작한 ‘녹평시선’의 첫번째 시집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앞서 읽은 두 시집에 비해서는 시어는 물론 시가 던지고 있는 물음도 상당히 큰 시집입니다. “무엇이 정녕 우리를 해방하고/무엇이 끝내 우리를 속박하나”(「국립묘지」)라거나 “목소리와 목소리/숨결과 숨결은/어떻게 하나 되나”(「향로봉」)라는 구절에서처럼, 꿈, 사상, 자유, 노래, 근원, 인간, 국가, 인류 등에 대한 시인의 정념이 묵직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다들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양재훈 「너희들이 넘노는 홑이불 덮고」나 「모든 꽃의 형제」 같은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데, 동시(童詩)적인 표현이 좋고, 추상적 관념이나 너무 큰 질문들이 시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낡은 것 같지만 여전히 중요한 질문들을 품고 있는 시도 있었어요. 「내 자전거에 비밀번호가 있습니다」는 중간에 “우리는 무엇을 잃고/놓쳤나요” 묻더니 “내 자전거에 비밀번호가 있습니다/내 자전거에 비밀번호가 없어요”라는 말로 끝나요. 자전거의 비밀번호를 통해 소유의 부자연성에 대해 묻죠. 자본주의의 폐해가 분명한 오늘날이지만 이를 다시 묻는 게 어떤 의미에서든 어느 시대에서든 중요할 텐데, “우리는 무엇을 잃”었냐는 그 질문이 힘있게 다가왔습니다.
안희연 1부에 배치된 일곱편의 「강」 연작을 읽으면서 어떤 시는 시인이 쓰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세대가 쓰게 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아마 젊은 시인이었다면 ‘강’이라는 제목으로 연작시를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공무도하가의 강, 레테의 강 등 이별과 망각의 강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강은 그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 거대하고 상징적인 시어입니다. 김명수 시인 역시 이 연작 시편들에서 너와 내가, 과거 현재 미래가, 삶과 죽음이, 몸과 마음이 구분되지 않는 시원(始原)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확실히 젊은 시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스케일과 에너지였어요. 그중에서도 「강 6」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요. 이 시에서 시인은 일종의 자전 신화를 적고 있습니다. 화자가 아홉살까지 살았던 작은 마을에서 처음 시를 만나는 장면이 한편의 동화처럼 펼쳐집니다. 어느날 소년에게 편지를 배달하라는 심부름이 주어졌는데 얼결에 전했던 그 편지가 실은 주인댁 아주머니 아들의 전사 소식를 담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신이 배달한 부고편지를 받고 혼절하는 어른들을 보며 소년의 내면에는 뜻 모를 죄의식이 자리 잡았을 겁니다. 저는 이 일화를 읽으며 시라는 것은 결국 불가항력적으로 전해지는 비극적 진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집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장면이고요. 그런데 아쉽게도 시집 초반의 감상이 후반부까지 이어지지는 못한 것 같아요. 77편이라는 워낙 많은 편수가 엮였는데, 뒤로 갈수록 추상적·관념적 색채가 짙어지더라고요. 물론 시인이 활발하게 활동했을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면 자유, 해방, ‘향로봉’(「향로봉」 「다시 향로봉」)으로 상징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한 갈망이 시인에게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소영 저는 꿈, 자유, 존재 같은 큰 개념이 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독자예요. 일상이 아닌 말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게 시집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바이기도 하고요. 그럴 때 시보다 내가 커지는 것 같아요. 이 시집에 담긴 관념적·성찰적 언어들도 감각 너머의 무언가를 인지시킨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읽기 시작했어요. 1부의 「강」 연작을 읽으면서는 묵직한 언어들에 감응했고, 화자처럼 강가에서 생각해보는 것같이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성을 대상화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해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가령 「여권 없는 자」에는 원시적 아름다움을 아프리카 여성들의 몸을 통해 표현하는데, 표현이 낡았다는 것은 차치하고 이런 표현들이 활자화되는 것이 옳은가 질문하게 했습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배낭」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성추행 혐의가 제기된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래서 끝내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정치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도 멘 그 배낭/그가 메고 산에 오른/우리들 배낭”과 같이 화자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표현을 통해 추모의 의도라는 것이 짐작되고요. 특히 “우리들 배낭”이라는 마지막 구절에서는 독자까지 추모에 동참시키는 듯해 당황스러웠습니다. 개인적인 추모라면 몰라도, 출판이 된다는 것, 또 이렇게 리뷰 좌담에서 우리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확실히 윤리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시집을 읽으며 중간중간 느껴지는 불편한 시선들을 제가 애써 넘어가려고 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독자로서 반성할 부분입니다. 좌담 참여자의 의무감으로 끝까지 읽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중간에 읽기를 멈췄을 거예요.
양재훈 「미결에 대하여」라는 시는 인상적이었는데 “우리의 미결을 부지해”달라는 요구, “해결은 미결/미결은 해결이”라는 구절은 논리나 관념의 환원 불가능성을 환기했습니다. 이른바 시원이나 우주적 합일 따위로 퉁칠 수 없는 그 무엇이요. 다만 시집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시원적 총체성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한 듯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런 확신과 유사하게 한국사회의 정치적 입장을 둘로 분류하는 태도가 담겨 있는 것도 같았고요.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 해방이나 자유를 사유하는 사람은 특정한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는 식의 전제가 깔려 있는 듯했습니다. 「미결에 대하여」에서처럼 ‘다른’ ‘정답이 없는’ 것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이 좀더 발휘되었더라면 좋았을 거예요.
안희연 시의 정치성은 미학적 실험을 동반해야 한다는 종래의 논의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저 역시 한명의 독자로서 미학적으로 새롭고 아름다우면서도 충분히 정치적인 시를 늘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장희원 『우리의 환대』(문학과지성사)
안희연 소설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장희원 소설집 『우리의 환대』로 시작해볼까요? 작가가 2019년도에 데뷔를 했으니 첫 책을 비교적 빠르게 묶은 편입니다.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김소영 처음에 시와 소설을 ‘감상’과 ‘읽기’로 대비하며 말씀을 드렸는데, 소설은 정말 이야기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쓰기도 읽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가가 왜 이 이야기를 하나, 왜 나를 여기에 끌어들이나, 그 점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느껴요. 오늘 읽은 세권의 소설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장희원 작가는 비어 있는 자리와 장소, 지금은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솜씨가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있는 걸 설명하기보다 없는 것, 빈 것을 설명하기가 훨씬 어렵잖아요. 그것도 이야기로 말이에요. 그런 부분을 침착하게 구현하고 조심스럽게 독자들을 초대해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안희연 감정의 결이 섬세한 소설이었습니다. 이런 소설의 경우, 줄거리를 요약하면 굉장히 납작해져요. 일례로 표제작인 「우리〔畜舍〕의 환대」의 줄거리를 요약해본다면 어느 중년의 부부가 외국에 사는 아들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쯤으로 소략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무척 입체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요. 서사 자체보다는 그 속에 놓인 인물들이 그 순간을 겪을 때 어떤 마음인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세밀화처럼 선명하게 그리고 있어 정서적 감응력이 탁월했어요. 소설의 마지막장을 덮자마자 창밖을 봤는데 마음이 일렁이더라고요. 그런 경험이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앞서 없는 사람의 자리, 부재를 그린 소설이라는 말씀 해주셨는데 특히 저는 그 없음을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없음, 즉 죽음이라는 사건이 드라마틱하게 제시되지 않고 그저 흐릿한 배경으로만 처리되며 소설은 남겨진 사람들의 일상을 담담히 따라갈 뿐이라는 점이 좋았습니다.
양재훈 서사가 앞서지 않는다는 점이 제게도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지고 그에 처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야기가 무엇 하나 먼저 말하지 않고 그들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데 두분은 제목 어떻게 보셨어요? 목차와 수록작 속표지를 보면 ‘우리’에 축사(畜舍)의 한자 표기가 병기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제목만 들었을 때 짐작되는 ‘우리’가 아니라 실은 짐승의 ‘우리’였던 거죠. 묘하더라고요.
김소영 말씀하신 그 장치가 고요한 정서에 마냥 젖어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하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어요. 「우리의 환대」는 호주 퍼스에 살고 있는 아들 영재를 방문한 재현의 이야기인데요. 재현은 호주에서 다자연애적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영재의 삶을 마주하게 됩니다. 영재와 두 하우스메이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 ‘우리’의 환대겠지만 재현이 바라보기엔 거기가 축사, ‘우리’처럼 보이는 거죠. 동음이의어를 통해 ‘우리’의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볼 수도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2023년 지금이 어느 때보다 연결이나 연대, 환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인 한편, 그런 것이 너무 손쉽게 말해지는 것 같기도 한데요. 「우리의 환대」를 비롯해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그런 식의 연대가 정말 가능한가 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타인과 그런 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타인을 존중하면서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타인을 속속들이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닐 거예요. 우리 사이에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지만 그런 거리를 알면서도 문을 열어두는 것이 환대일 테니까요. 수록작들은 어떻게 보면 환대가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모두 그렇게 문을 여는 방법을 알려주는 듯도 합니다.
안희연 저 역시 환대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말해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덮어놓고 환대하자는 손쉬운 구호 대신, 다른 방식 다른 맥락으로 바라보고 살피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장희원 소설에서는 그 환대의 의미가 납작하지 않더라고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으로 남겨두려는 태도가 있어요. 결국 「우리의 환대」 속 재현은 “본능적으로, 이제 영원히 아들을 잃었음을”(69면) 깨달으며 영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영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부분은 사실 제 안에도 있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이방인을 환대하지 못하는 꽉 막힌 사람인가 하면 또 그건 아니고요. 참 복잡한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 한쪽을 향해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보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보여주는 태도 자체는 충분히 신뢰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되더라고요.
양재훈 영재와 재현, 둘에게서 다 거리를 두고 보면 영재와 하우스메이트들이 재현 부부를 대하는 방식 역시 과연 온당한가 싶죠. 재현 부부를 조롱하려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래서 환대도, 우리도 없다는 것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봤습니다. 거기에 그치고만 있다는 게 만족스럽지 못하기도 하면서 이 소설의 미덕이 되기도 하는 점이 흥미로워요. 작가가 어딘가로 나아간다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우리가 떠난 자리에」를 읽으면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연인이었던 ‘나’와 선재가 같이 살던 집을 정리하기 위해 만나는 이야기예요. 둘은 서로의 근황을 짧게 주고받고 청소를 시작하는데 처음 집을 구했던 순간부터 그곳에서 쌓은 기억들을 차례차례 톺게 됩니다. 청소를 마친 집에서 둘은 움직이는 거미를 발견하고 “이곳에 다른 무언가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우리 모르게 숨어 있는 것들이 모두 나오는 순간을, 우리는 계속해서 간절히 기다리”(211면)며 소설이 끝나요. 헤어진 연인이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거미라는 상징을 통해 함께한 그 자리에 자신들이 떠나고도 남아 있는 것들이 있음을, 함께했던 시간이 의미없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죠.
김소영 「Give me a hand」는 팬데믹 시기를 배경으로 아들이 자해를 시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가 아들이 있는 뉴욕에 건너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도시봉쇄령 때문에 아들을 만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엄마는 뉴욕을 떠돌며 아들이 직면했을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고충을 어렴풋이 알게 돼요. 분량이 무척 짧은데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의료진을 향해 “여러 색깔의 손”(134면)을 들어 박수를 보내는 시민들의 연대 속에서 동양인이 느끼는 고립감이 극대화되는 마지막 장면이 강렬합니다. 여기에 섣부른 해석을 내지 않으면서 우리가 연대감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 안에 소속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줘요.
양재훈 섣불리 주제를 앞세우거나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서 잔잔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매력인 동시에 이야기가 선명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남기도 해요. 이런 조심스러움이 방향과 도정을 신중하게 살피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인지 뚜렷한 주제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인지 아직은 모르겠더라고요. 「우리가 남긴 자리에」의 거미 역시 뭔가 더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하지만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거든요. 거미가 무엇인지를 알 만한 다른 작품들이 함께 놓일 때, 훨씬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거라고 봅니다.
안희연 서사의 빈틈을 좀 심심하게 느끼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막 첫 책을 선보였으니 작가가 보여준 장점과 힘을 믿고 앞으로의 작품들에 더 큰 기대를 걸어보고 싶습니다.
최정화 『날씨 통제사』(창비교육)
안희연 다음으로 최정화 소설집을 읽어보겠습니다. 장희원 소설이 메시지를 안 드러내려고 애썼다면, 최정화 소설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할 뿐 아니라 어떻게 더 명확하게 전달할까를 치열하게 고민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날씨 통제사』는 환경오염과 기후위기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다수 묶인 테마소설집인데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주제에 대한 열정”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됐다며 “소설을 박차고 나가야 하는 때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는데 (…) 소설이야말로 현실에 뛰어드는 가장 적극적인 통로라는 걸 깨달았다”고, “잘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249~50면)고 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하며 즉각적인 변화를 모색하고 있어요.
김소영 장면에 고요히 천착하는 『우리의 환대』도 좋았지만 주제가 선명한 소설이 좋은 소설로서 『날씨 통제사』가 주는 후련함이 있었어요. 미래에 대한 전망은 사실 암울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작가는 ‘이제 다 끝났어’ 하고 포기하기보다, 이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현재를 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덕분에 저도 별로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나는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청소년소설도 일반소설도 동화도 갖는 본질적인 질문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좋게 다가왔어요.
양재훈 저 역시 그 ‘후련함’이 좋았습니다. 맨 앞에 배치된 세 작품이 각각 다른 이슈를 다루며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선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레이트 퍼시픽 데드 바디 패치」는 일회용품 사용에 따른 환경문제를, 「벙커가 없는 자들」은 기후위기로 도래할 미래를, 「비지터」는 인류가 지구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타자들을 대하는 방식을 문제 삼고 있죠. 그러면서도 주제가 명시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확장되기도 합니다. 「그레이트 퍼시픽 데드 바디 패치」는 일회용 안드로이드인 블러가 사람들을 죽이고 그 자리를 대체한다는 설정인데요. 간편하니까, 쉽게 구할 수 있고 싸니까, 별생각 없이 쓰다보니까 블러 사용이 계속된다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것이 사람들의 죽음과 병치되어 있는 점이 통렬해요. 블러가 특정한 인간의 삶을 빼앗고 그를 대체한다는 점은 우리의 고유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도 하죠. 결국 이 작품은 일회용품 사용 문제에서 고유성의 파괴라는 주제를 끌어내며 인류 전체의 삶의 방식, 지구적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다만 선명하게 제시되는 중요한 질문을 찾아내거나 이야기를 즐겁게 읽는 건 좋은데, 문학작품을 실질적인 효과로 이어갈 방법을 생각하면 막막해지더라고요.
김소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확신하는 점이, 성장기에 있는 인간들은 읽는 대로 정말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작품을 청소년, 어른, 아무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다 달라붙어 읽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상당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문제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인식하고 변화의 방향을 제일 급하게 생각해주는 존재가 청소년들이기도 하고요. 저는 「비지터」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어요. 인간 이후에 지구를 지배하며 인간을 사육하는 이(異)종족의 이야기인데요. 비슷한 우화들은 종종 보아왔지만 이 작품은 더는 에둘러서 말하지 않겠다는 박력이 느껴졌어요. 노골적인 미러링인데도 눈을 돌릴 수가 없었고,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을 세세히 분해해서 보는 과감한 시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을 「벙커가 없는 자들」 뒤에 수록한 배치도 절묘했어요. 멸망 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벙커가 없는 자들」)를 앞에 두어 당장에 우리에게 닥칠 일을 먼저 생각하게 한 다음, 이 지경이 된 까닭을 「비지터」를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양재훈 「비지터」에는 무척 인상적인 구절이 나옵니다. 이종족의 한 예술가가 우리는 인간과는 다르다며 “나는 작품이 뛰어나기보다는 적절하기를 바란다”(73면)고 하죠. 우리가 여태 뛰어난 무언가를 원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것이 적절한가 묻는 데 소홀하지 않았는지 질문하고 있어요. 이 모든 일이 인류 전체의 욕망과 쾌락 때문에 일어났으니 그것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김소영 가장 좋았던 작품은 「쑤안의 블라우스」인데, 약간이라도 희망이 비치는 이야기를 제가 더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봉제공장 사장인 경애가 베트남 이주노동자 쑤안을 만나면서 경험한 기묘한 시간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경애는 봉제기술이 없는 이주노동자들을 직원으로 받지는 못하지만 자기 공장의 일을 배정받은 시간만큼은 그들의 서툶을 인내하고 도와주며 자기가 베풀 수 있는 선의를 베푼다고 하죠. 읽다보면 나흘간 경애를 찾아온 존재가 쑤안의 영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자기 깜냥의 선의를 건네는 용기가 이처럼 삶과 죽음을 넘는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누군가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음을 알게 돼요. 이 작품을 읽고 나니 시간을 거스르는 일이 만약 가능하다면 저는 그것이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는 식이라기보다, 나흘간 공들여 끝내 블라우스 하나를 완성하는 쑤안의 모습처럼 작은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양재훈 「쑤안의 블라우스」는 타개를 모색할 재료가 우리의 역사 속에 이미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특히 좋았습니다. 경애가 그처럼 선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1979년 야학에서의 경험을 통해 “신에게서 받은 것을 다시 신에게”(91면) 돌려주는 자세를 배웠기 때문이에요. 1980년대는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이상화되거나 낭만적으로 대상화되기 쉬운데, 그 시기에서 현재의 우리가 어떤 가치를 되살릴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안희연 저는 작가가 두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소설이 재밌잖아요. 설정도 신선하고 이야기 자체에 흡인력이 있죠. 메시지가 독자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적절한 소설적 형식을 경유한 것 같아요. 더불어 소설의 배치도 탁월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책 한권이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제시하고 경고하는 소설로만 묶였다면 뻔했을 수도 있는데, 초반부에는 SF적 요소를 활용해 현실을 각인시키는 소설이 실려 있고 「쑤안의 블라우스」를 기점으로 후반부에는 「부케를 발견했다」 「거실 장 한가운데」같이 서사에 공백이 많은 소설을 배치했더라고요. 특히 이 두 작품은 다 읽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계속 남는 작품이에요. ‘거실 장 한가운데’ 분명 무엇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비밀에 부쳐지는 식입니다. 작가도 말해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저는 이러한 서사의 빈틈이 곧 인간 인식이나 감각의 빈틈을 형상화한다고 봤습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지한 채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사유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결론이지요. 구성 면에서 균형이 잘 잡힌 소설집이라 생각했습니다.
김소영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작품을 읽을 때 늘 염려하는 바가 쉽게 인간 혐오에 빠지게 되는 것이거든요. 근데 이 책은 혐오나 포기로 가지 않고 그럼 이제 뭘 해볼까, 이런 생각을 들게 해서 참 희한하다 싶었는데 방금 균형에 관한 말씀을 들으니 왜인지 설명되는 것 같습니다.
안희연 이 책이 교육 부문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누가 읽어도 좋겠지만 특히 청소년들과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책이에요.
김소영 무엇보다 기후문제에 대해 청소년과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청소년세대와 어른세대 사이에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생길 겁니다. 환경을 파괴해서 성장을 이룬 기성세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불신이 쌓여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의 붕괴를 야기할 수도 있어요. 문학이 모두하고 같이 가는 방법, 모두를 설득할 방법을 생각할 때인 것 같아요.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두우니 문학의 미래도 암울하게 느껴지는데, 그래도 저는 언제나 더 좋아지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세상이 망하더라도 끝까지 좋아지면서 망할 거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웃음) 그런 믿음을 견지하며 문제상황을 외면하지 않는 게 중요하겠습니다. 또 그것이 청소년소설을 어른들이 함께 읽으며 문제의식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요.
이두온 『러브 몬스터』(창비)
안희연 마지막 책으로 넘어가볼까요. 오늘 목록 중 유일한 장편인 이두온 소설 『러브 몬스터』입니다. 이두온 작가는 미스터리, 스릴러 계열의 장르문학을 선보여온 젊은 작가입니다. 서스펜스를 밀도있게 가져가면서 한국사회의 이슈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솜씨로 사랑받고 있고, 전작들의 경우는 일본에서 소개되어 큰 반응을 얻었다고 해요. 이번 소설 역시 중심화자인 지민이 실종된 엄마의 흔적을 추적해가는 미스터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읽어나갈수록 상당히 강렬하더라고요. 어떻게 읽으셨어요?
양재훈 장르문학적 요소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갖고 읽었습니다. 술술 읽힐 걸 기대했어요. 그런데 전반부의 상당히 긴 호흡에 다소 당황했습니다. 인물 소개가 길게 이어지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제각각 제시되어 있어서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인물이 서로 연결되고 이야기가 하나로 맞춰지면서 너무 재밌어지더라고요. 이런 소개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읽으면 정말 매우 재미있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김소영 방금 말씀처럼 저도 처음에는 감을 잡기가 좀 어려웠어요. 게다가 『날씨 통제사』 다음으로 읽었더니 도입부는 우화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구청이 주최한 단체 소개팅의 기이한 풍경과 거기에 난입한 하얀색 픽업트럭 말이죠. 저 역시 중간쯤 갔을 때 이렇게 풀리는 이야기구나 갈피를 잡았는데, 후반부는 무척 즐겁게 읽었어요.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말해두겠습니다. 다 읽어보니 앞에서 그렇게 한명 한명씩 공을 들여야 했던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그랬기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흐를 수 있었고,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생겼을 거라고 봅니다. 인물이 정말 선명하죠. 장편소설을 읽을 때는 종종 등장인물이 헷갈려 옆에 이름을 써놓기도 하는데 이 책은 안 그랬어요. 가령 지민의 엄마 염선숙이 “나를 보면 예쁜 연보랏빛이 떠오른대”(29면) 하며 염보라로 개명한 에피소드는 인물의 성격과 어우러져 너무 와닿잖아요. 이야기가 맞물리고 사랑, 광기, 혐오 같은 것들이 한데 뒤엉킨 채 무척 빠르게 전개되는데 롤러코스터를 탄 듯 즐거워요. 장 구분이 없는 것도 눈에 띄었어요. 전체적으로 장면 구획을 잘해두어서 헷갈리거나 어색함 없이 작품을 읽을 수 있었고 장으로 나눠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속도감도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와장창 소동으로 끝나는 결말을 읽고 책을 덮었더니 와, 지금 영화 한편이 끝났구나, 하는 쾌감이 있더라고요.
양재훈 영화 말씀하셨는데, 읽으면서 소설보다 영화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더 정확히는 소설적으로 영화를 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요. 도입부의 픽업트럭 사고 장면부터 영화 같죠.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장면은 주로 영화에선 앞에, 소설에서는 뒤에 나오기 마련입니다. 소설은 독자가 스스로 읽어야만 이야기가 진행되고 영화는 장면들을 관객이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감상이 이루어지니까요. 그래서 영화는 먼저 장면을 보여주어 관객이 주목하게 하고, 소설은 장면이 만들어지는 조건이나 쓰이게 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먼저 제시하죠. 그런 점에서 영화의 문법을 차용하고 있어요.
안희연 저도 한편의 영화를 본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공간, 조명, 소품의 위치, 인물의 동선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더라고요. 장면 구성에 공을 들인 것이 느껴졌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텐데, 중심화자인 지민이 실종된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사이비 종교집단의 실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착취와 폭력의 대상이었던 여성들이, 그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군림한 남성-교주를 살해하고 가짜 수영장이 아닌 진짜 바다를 향해 질주하는 이야기가 이어지고요. 한바탕 난장이 벌어지는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적잖은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만, 다 읽고 나서는 그래서 왜 제목이 ‘러브 몬스터’이지? 독자로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지?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잠시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김소영 저 역시 비슷한 질문을 남기면서 독서를 마쳤는데요. 영화에서 본 적 있는 듯한 지금의 결말 말고 혹시 다른 결말은 불가능했을까요. 하지만 사실 제가 작품을 읽으면서 느꼈던 쾌감이나 즐거움의 일부는 전형성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아요. 몇가지 설정들이 전형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읽기에는 무척 재미있었어요.
안희연 ‘러브 몬스터’라는 제목으로 돌아와보면 ‘사랑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작가가 직접적으로 계속 던지는 한편, “사랑이 그런 것일 리 없다”(38면)는 식으로 무엇이 사랑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판단을 내리고도 있어요. 그러니까 사랑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 채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일그러진 사랑을 끝없이 갈망하고 있는 거죠. 그런 우리가 결국 ‘러브 몬스터’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양재훈 허인회라는 인물은 가장 사랑에 집착하는 인물처럼 보이는데, 되돌려받지 못하는 사랑을 계속 갈구하면서 자기만의 망가진 방식으로 그것을 쟁취하려고 하죠. 그 사랑이 계속 왜곡되고 굴절되어만 가는데도 허인회는 사랑을 통해서 자기의 결여가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처럼 사랑을 모르고 해본 적이 없지만 사랑이 자신을 구원하리라고 생각해 말 그대로 사랑에 미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사랑은 정말 무엇인가 계속 묻는 소설 같아요. 심지어 휴거와 사랑을 일치시키는 인물이 나오기도 하잖아요. 후반부에서는 사회적·경제적 위기, 정상성의 논리, 가족의 학대와 무관심 등 인물들의 사랑이 이렇게 일그러진 이유를 짐작게 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어느정도 예측 가능했다는 감상입니다. 또 사랑을 향해 달리고는 있지만 결코 도달하지는 못하는 이야기라, 사랑이라는 개념이 너무 실체 없이 던져지지 않았나 싶기도 했어요. 사랑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구체적인 인물이나 장면이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소영 저는 진짜 사랑을 아는 인물이 한명은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민과 어린 시절 서로 사랑했던 친구 태이. 태이가 달려와 지민 앞에 서던 장면 기억나세요? 너무 가까운 나머지 “영혼이 통하는 것처럼 하나가 되”(103면)기를 바랐던 둘은 서로 같은 성별이라는 사실 때문에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죠. 하지만 태이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교생이 모인 운동회 이어달리기 때 운동장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지민에게 달려옵니다. 물론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지민이 태이를 외면하면서 둘 사이는 파국으로 끝나지만 태이가 달리는 그 순간, 운동장을 질주하는 여자아이의 이미지, 이거야말로 ‘몬스터’다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사랑을 안고 전차처럼 달려오는 것. 좋았어요.
양재훈 사실 태이의 운동장 에피소드에는 큰 감흥이 없었어요.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둘만 남는 낭만적 연애의 장면이 와닿지 않았거든요. 제가 사랑의 장면을 꼽아본다면 허인회가 처음 지민을 납치한 밤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 때문에 계획했던 것들을 지민을 위해 모두 중단하기로 마음먹는 대목이요. 사랑이 낳는 정념이 사랑과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감정의 강렬함이 사랑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허인회가 알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 모습은 어떤 행동이나 정동을 멈추는 모양새지만, 역설적으로 이 멈춤이야말로 사랑의 중요한 행위라고 생각해요. 진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멈추게 되는 것 같거든요. 또 사랑이 낳은 정념을 멈추며 낭만적 사랑을 넘어서는 것도 가능하고요. 이렇게 보니 이 작품은 정념적인 낭만적 사랑에 종언을 고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각기 강렬한 ‘사랑’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행동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구원의 실패 그리고 자기 삶과 사랑의 실패를 껴안은 사람들이 진짜 바다를 보러 떠나잖아요. 진짜 사랑, 구원, 삶의 의미 등은 관념적이고 강박적인 정념의 실패를 인정하고서만 찾아 나설 수 있는 거라고 말하는 듯해요. 지민과 허인회가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암시되면서 그다음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볼 수도 있고요. 사랑이 실체 없이 던져지기만 했다는 아까의 말을 수정해야겠습니다.
안희연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 소설이 왜 쓰였을지 알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우리 모두 사랑에 대해서 아는 바 없잖아요. 사랑이라는 괄호를 향해 누군가는 모르는 힘으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아는 힘으로 나아갈 뿐이겠죠. 저는 이 소설이, 영원히 미지로 남아 있는 사랑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는 한바탕 난장을 통해 놀랍게도 독자를 다시 사랑 앞으로 되돌리는 소설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책에 대해서만큼은 여러 말 없이 그냥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뒤로 갈수록 흡인력이 강렬해지니 중간에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라요.(웃음)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눴던 이 시간, 어떠셨어요?
김소영 언제나 읽는 사람들이 하나의 세계에 같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린이들 청소년들이랑 같이 책을 읽으면서도 이제 ‘읽는 세계’에 초대된 거라고 말하는데, 역시 책은 혼자 읽는 게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읽고 함께 이야기하는 게 참 좋았고요. 오늘 두분 말씀 들으면서 몰랐던 것, 생각하지 못했던 것 짚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양재훈 요즘 글쓰기보다 좌담을 훨씬 좋아하는 편이에요. 글은 혼자 써야 하는데 좌담은 함께 모여서 생산하고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니 함께 이야기하다보면 혼자서는 생각 못했을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순간들이 있어요. 그래서 글쓰기의 방식도 좀 바뀔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미완의 무언가로부터 시작해 다른 누군가와의 협업을 통해 완성해가는 일이 가능하면 좋겠다, 그런 게 있으면 내가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즐거웠습니다.
안희연 저도 연초부터 성실한 독자의 길을 걸었더니 뿌듯한 마음입니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한권의 책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여러모로 어지러운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문학이 할 수 있는 몫을 포기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두분 오늘 함께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했습니다.(2023.1.19.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