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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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청소년주거권운동으로의 초대

 

 

김시연 金時衍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 상임활동가.

yhousingrights@gmail.com

 

 

 

‘운이 좋아서’

 

나는 청소년주거권운동을 하는 비청소년이다. 그리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위험한 장면을 자주 마주하는 청소년의 삶을 목격한 한명의 시민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청소년에게 위기상황이 반복되면 불평등의 문제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곤 한다.

“우리 딱 6개월만 버티며 일해봐요. 모텔비 내며 조금씩 모으면 한달 뒤에는 고시원에 들어갈 수 있고, 그렇게 모으다보면 보증금 100만원 모아서 집 구할 수 있어요.”

개인 맞춤형 지원을 통해 위기상황에 처한 청(소)년의 자립을 지원하는 ‘청년맞춤제작소’ 사업을 했을 때 청소년에게 돈을 모으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구직을 강하게 독려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청소년은 “오늘 지낼 수 있는 곳과 내일 지낼 수 있는 곳이 다르고 계속 바뀌는데 어떻게 일을 구하란 말이에요”라며 내가 답답하다는 듯 토로했다.

스스로 무언가를 시작해볼 힘도, 이전의 삶을 끊어내겠다는 용기도 불안하지 않은 ‘집’이 있어야 가능하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청소년에게 무슨 집이 필요해?’라는 질문은 이상하다.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1은 당연한 것에 조건과 이유를 묻기만 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답답한 사회에서 청소년주거권운동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비청소년인 내가 청소년주거권운동을 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나 역시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안전함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엄마와 살던 집에서 엄마의 시신을 실은 구급차가 떠난 후, 저를 아빠에게 보낸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밖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조금 떨어진 동네의 병원으로 들어갔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복도 의자에 앉아서 하루 종일 울다 자다 눈뜨기를 반복했어요. 그러니 사흘이 지나 있었습니다. 조금 괜찮아지니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싶었는데, 병원에서 다행히 좋은 분을 만나 그분 집에 잠시 머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달 뒤 그분의 사정으로 더이상 그 집에 머물 수는 없었고, 그분이 쉼터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저는 아빠의 폭력을 피해 초등학생 때 저 스스로 쉼터를 찾았었는데, 흔히 말하는 ‘가출청소년’으로 여겨져 아빠에게 다시 되돌려 보내진 적이 있어요. 그게 너무 싫었어서 쉼터에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분이 쉼터에 잘 이야기해주셔서 아빠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진짜 운이 엄청 좋았던 것 같아요.”

—청소년주거권말하기 강의 중 청소년 A의 발언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노출되었고 청소년기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설에서 생활하게 된 A의 증언을 들으며 “진짜 운이 엄청 좋았던 것 같아요”라는 말이 오랫동안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우리는 보통 ‘운이 좋다’는 수식어를 당연하고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에 사용하지는 않는다. 운이 좋아서 복권에 당첨될 수는 있지만, 운이 좋아서 내가 지낼 곳이 생긴다는 건 이상하다. ‘운이 좋지 않은’ 수많은 날들을 집 없이 지내는 것이 당연한 일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가출이 아닌 탈가정

 

흔히 “집 나오면 고생길이 뻔한데 멀쩡한 집을 도대체 왜 나오는 거냐”고들 말한다. 그러나 누구나 원(原)가정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가정에서 살 수 없고, 살고 싶지 않은 청소년이 있다. 2017년 여성가족부는 ‘가출청소년’을 27만명으로 추산한 바 있으며, 학교에 다니는 초·중·고등학생으로 좁혀도 최근 1년 내 가출 경험률은 3.2%로 17만명을 넘어선다(통계청·여성가족부 「2022 청소년 통계」).

사회에서는 이들 청소년을 소위 ‘가출청소년’ ‘비행청소년’ ‘위기청소년’이라고 호명한다. 이러한 호명은 이들을 문제적 집단으로 낙인찍으며 ‘문제적 상황’에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나아가 당사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운이 좋지 않은 불쌍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반면 ‘탈가정청소년’이라는 이름은 안전과 존엄을 훼손하는 폭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청소년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비행청소년이어서 탈가정을 한 게 아니라 탈가정을 피할 수 없었기에 여러 폭력에 노출되고 비행을 경험하게 된 것 아닌지, 청소년이기에 제한되는 것이 많고 선택지가 적었던 것은 아닌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때 필요한 지원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힘이 이들에게 부여된다.

더욱이 청소년의 탈가정을 잠깐의 자유를 위한 일시적인 방황이나 일탈로만 보면 문제의 근원에 접근하기 어렵다. 청소년주거권 토크쇼에서 만난 청소년 B는 “집이라고 하면 여행의 시작과 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집을 탈출하기 위해 길거리로 향하는 여행을 시작했다”고, “제가 원하는 안정적인 집을 찾을 때 이 여행도 끝날 것 같다”고. 이들은 각종 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거리에서의 삶이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원가정에는 가족과 보호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당한 통제, 훈육을 명분으로 손쉽게 이루어지는 폭력, 가족과 사회가 함께 청소년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 방임이 있기 때문이다. 상가 계단, 공원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긴 밤을 지새우다가 24시간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눈을 붙일 수 있는 날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룻밤 재워준다며 성매매와 같은 폭력으로 청소년을 착취하려는 어른들을 피하려면 청소년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미성년자가 주거계약을 하기에는 제약이 많아서 20대 초반인 또래의 집에 모여 살기도 하지만 실은 그마저도 열악한 환경의 집이고 눈치 보며 얹혀 지내는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들에게 ‘가출팸’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손가락질한다. 그럼 이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규칙적인 삶’과 ‘규칙이 있는 삶’의 간극

 

원가정을 나온 청소년은 보육원이나 쉼터 같은 시설에서 살게 되기도 한다. 혹은 더 어렸을 때부터 시설에 맡겨지는 이들도 있다. 시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탈가정청소년에게 주어진 유일한 주거지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출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쉼터가 처음 설치된 것은 1992년이다(서울 YMCA 청소년쉼터). 1997년 IMF 이후 가출청소년이 늘어나고 돌아갈 가정이 없는 청소년의 수도 증가하면서 1990년대 후반부터 정책적 차원의 청소년쉼터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2006년부터는 청소년쉼터의 운영을 위한 지침이 마련되면서 청소년의 특성, 상황 및 요구에 따른 쉼터가 확충되었고 일시·단기·중장기 쉼터로 유형이 세분화되었다. ‘비행청소년’을 잠시 머무르게 하기 위한 차원에서 시작했던 청소년쉼터가 청소년의 보호·복지시설 확충의 맥락으로 변화한 것이다(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10).

현재는 가출 등 위기청소년을 조기에 발굴하고 보호해 원가정 또는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목표 아래 138개의 청소년쉼터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거리에 있는 청소년 수에 비하면 전국 청소년쉼터 정원인 1,405명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여성가족부, 2022년 12월 기준). ‘2021년 위기청소년 지원기관 이용자 실태조사’(여성가족부)에 따르면 가정 밖 청소년 중 청소년쉼터를 이용한 경우는 27.5%에 불과했다. 62%가 친구 집에 거주하고, 29.8%는 노숙을 경험했다. 찜질방·고시원·PC방과 여관·모텔·달방·월세방을 전전하는 경우도 각각 17.6%, 27.5%에 이르렀다. 청소년이 왜 시설보다 위험한 거리에 머물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집이라고 표현한 적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시설과 집의 가장 큰 차이는 무언가 ‘해야만 할 것’이 있냐 없냐 같은데, 그게 규칙적인 삶과 규칙이 있는 삶의 차이인 것도 같아요. 내가 원해서 규칙적인 삶을 사는 것과 어떤 곳에 입장하는 순간 정해진 규칙이 적용되는 삶은 정말 다르니까요.”

—청소년주거권토크쇼 중 청소년 C의 발언

 

당장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시설을 이용했던 청소년들은 모두 그곳을 ‘내가 나다울 수 없는’ 공간이라고 했다. 규칙을 어기면 벌점을 받을뿐더러 벌점이 누적되면 퇴소를 당할 수도 있다. 정해진 시간에 휴대폰을 제출해야 하며, 학교에 가는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외출하기도 어렵다. 이처럼 시설에는 수많은 규칙들이 존재한다.

시설에서 청소년은 먹고 자는 사소한 일상부터 소비, 저축 등 다양한 일까지 타인에 의해 결정되고 통제당하는 삶을 산다. 무언가를 직접 시도해보는 경험으로부터 차단되는 것은 물론이다. 우리는 누구나 적지 않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에게 더 안전하고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청소년은 ‘미성숙’하므로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 시설의 규율과 결합해 더욱 큰 통제력을 발휘하면서 이들에게 안전한 실패,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좌절을 경험할 권리를 앗아간다.

게다가 시설의 실무자는 입소해 있는 청소년을 자해와 같은 위험한 순간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 청소년이 잠을 자는 방에도 유리문이 달려 있다는(혹은 아예 문이 없다는) 사실은 가장 손쉬운 통제의 방식으로 시설이 운영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이는 시설이 아무리 좋아진다고 해도 ‘시설일 수밖에 없는’ 맥락을 보여준다. 청소년주거권운동이 현재 시설에 집중된 탈가정청소년 지원정책에 개입하고 새로운 주거권운동의 흐름을 만들고자 시도하는 이유다.

시설은 물리적 공간의 통제만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울고 웃는 것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감정마저 통제해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낯선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시설에서는 그런 감정의 이완이 생겨나기 어렵다. 청소년주거권말하기 강의에서 만난 청소년 D는 “밤에 머리를 감고 머리가 젖은 채로 달빛 아래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좋아했”지만 소등시간이 정해져 있는 시설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시설의 답답함을 성토하던 자리에서 누군가 거실에서 방귀를 뀌면 벌점이 부과되는 곳도 있다고 말해, 모두가 황당해한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편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생리현상을 참았다가도 비로소 나의 공간인 집에 돌아와 편히 머물 수 있다. ‘집다운 집’이란 눈치 보지 않고 방귀도 뀌고 무릎이 늘어난 잠옷도 입고 밤에 책을 보기도 하는 소소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또다른 문제는 시설이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임시적 거처라는 점이다. 청소년들이 시설을 ‘내 집’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 청소년은 “가장 좋았던 시설에서 1년 반 동안 살았지만, 6개월이 넘도록 캐리어를 풀지 못했다”고 말했다. 언제든 쫓겨날 수 있다는 긴장과 불안이 있었다는 것이다. 계속 옮겨다닐 수밖에 없는 시설에서의 삶을 살다보면 짐을 늘리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언제든 이동할 수 있도록 짐을 추리게 된다. 그렇게 적은 짐을 담은 캐리어도 6개월이 넘도록 풀지 못하는 불안이 있는 곳. 이런 시설에서 꾹 참고 지내는 것밖에는 정말 대안이 없는 건지,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 곳을 그저 운에 맡겨 정해야 하는 건지, 도대체 탈가정청소년은 왜 이렇게까지 불안과 위험을 감수하며 견뎌야 하는지 묻고 싶다.

 

 

청소년주거권운동으로 연결되어 얽히게

 

“어른들은 왜 청소년들은 통제해야 하며 자신들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보호는 누구를 위한 건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지원주택컨퍼런스 발제 중 청소년 E의 발언

 

문제를 일으키니 바로잡기 위해서는 통제하며 ‘가르쳐야 하는’ 청소년과 부모 없이 자라 불쌍하니 ‘도와주어야 하는’ 청소년. 이 두 시선의 간극은 무엇일까. 비청소년인 어른들은 정해놓은 대로만 잘 따르고 순종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비로소 지원을 해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청소년주거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생소했지만 감동이었어요. 내 상황을 구구절절 말하지 않고 ‘나에게 주거권이 보장되지 않았어’라고 하면 되는 거잖아요. ‘어쩌겠어. 네 팔자인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아니야, 이건 국가 책임도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 뉴스레터 인터뷰 중 청소년 F의 발언

 

나는 내가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싶어서 청소년주거권운동을 한다. 청소년주거권운동은 가족 불안정성이 점차 심화되고 있는 지금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가정 내 폭력의 양상은 어떠한지, 청소년들은 왜 보호시설로의 입소를 거부하거나 잦은 이동을 반복하는지, 청소년들이 ‘살고 싶은 집’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경제적·사회적·정책적 장벽은 무엇인지 등을 질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초대장」,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2019에서 일부 발췌). 그 과정에서 청소년 스스로 변화를 이끄는 데 동참할 수 있도록 사회참여의 통로와 계기를 꾸준히 기획하려 하며, ‘가정복귀’와 ‘시설보호’라는 두가지 범주만으로 수렴할 수 없는 청소년들의 요구에 주목해 제도를 개선해가고자 한다.

2019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대한민국 제5·6차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를 통해 “구체적인 탈시설 계획을 통해 단계적으로 시설보호를 폐지하기 위한 적절한 인적·재정적·기술적 자원을 할당할 것”을 요구했다. 청소년을 단순히 보호해야 할 미성숙한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는 변혁적 사고와 함께 탈시설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청소년의 주거지원에 대해서는 아직 국가 차원의 연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우선 청소년 주거실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토대로 공공임대, 매입임대, 사회주택, 민간주택 등 다양한 대안적 주거지원을 모색해 법적인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청소년정책에는 주거지원이 빠져 있고, 주거정책에는 청소년이 빠져 있는 실정에서 무엇이 청소년을 위한 정책인지를 포괄적으로 고민하는 일도 필요하다. 청소년의 주거지원 정책은 단순히 집을 제공하는 것만을 넘어서서 안정적인 주거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교육·취업지원, 의료지원, 행정 및 법률 지원, 생활지원, 심리지원 등 삶을 위한 다양한 지원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살고 싶은 평등한 사회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나의 안전이 보장된 사회는 청소년주거권이 보장된 사회와 맞닿아 있다. 불평등은 점점 다차원적으로 정교하게 얽혀 가장 약한 곳부터 무너지게 만든다. 주어진 삶을 ‘각자도생’으로 버티며 살아가야 한다는 식의 말들을 뒤로하고 서로가 연대하며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싶다. 청소년을 향한 ‘통제로서의 보호’가 아닌 ‘권리로서의 보호’가 한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기를, 나아가 결국엔 청소년주거권운동으로 연결된 우리가 모두를 위한 좀더 좋은 삶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1. 2019년 청소년 지원 현장, 인권단체, 법률단체, 연구자, 청소년활동가 등이 모여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연대체로 활동을 시작했고, 2023년 2월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창립했다.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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