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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아미타브 고시 『육두구의 저주』, 에코리브르 2022

절실한 질문, 단순한 대답

 

 

이우창 李禹昌

순천향대 AI소설생성연구단 연구원 woochang.lee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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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은 전작 『대혼란의 시대』(The Great Derangement, 2016, 에코리브르 2021)에서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는 세가지 문제의식을 제시한 바 있다. 기후위기의 시대, 소설 장르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인류세의 전개 과정에서 아시아의 (탈)식민주의적 역사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근대 국민국가 정치가 기후변화에 충분히 급진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종교적 운동이 보편적 정의의 구현을 위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란 무엇인가? 그로부터 5년 뒤에 출간된 『육두구의 저주: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The Nutmeg’s Curse: Parables for a Planet in Crisis, 2021, 김홍옥 옮김)는 이러한 물음에 적극적으로 답변하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책은 향신료 육두구의 서식지였던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에서 벌어진 대학살의 기록으로 시작한다. 16세기 초 이래 육두구의 독점권을 노린 유럽인들은 수차례 반다인들과 충돌했으나, 1621년 론토르섬을 점거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잔혹함은 비교를 불허했다. 그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반다인의 절멸 자체를 시도했던 것이다. 저자는 네덜란드인들이 자행한 학살, 파괴, 노예화로부터 서구 근대화 과정을 관통하는 대립구도를 추출한다. 한편에 “지구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비활성 존재로 환원”(55면)하고 이를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기계론적 철학’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비인간 존재에도 고유의 생명력과 주체성을 인정하는 ‘생기론적 형이상학’(vitalist metaphysic)이 지배 엘리트에 대항하는 저항의 정신으로 남아 있다. 이어 고시는 ‘정착형 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가 초래한 “대규모 생물학적 생태 파괴”(80면)를 거론하면서, 서구의 식민지배에서 기계론적 환원주의로 대표되는 사상적 측면과 자연파괴 행위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8장에서 14장은 화석연료와 기후위기 문제로 시선을 돌린다. 탄소경제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난 오늘날에도 새로운 에너지체제로의 변화가 더딘 이유는 무엇인가? “화석연료는 시작부터 지배 계급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삶과 얽혀왔”(147면)을 뿐만 아니라, 서구인들의 지정학적 경쟁을 추동하는 요인이었다. 서구 제국들은 군사력의 우위를 통해 화석연료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으며, 다시금 화석연료의 활용에 기초해 군사적 지배를 강화할 수 있었다. 미국 국방부를 비롯한 지배적 행위자들이 기후변화를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에너지전환에 소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현재의 권력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지정학적 체제의 전환도 함께 수반”(184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방사회는 자신들과 같은 ‘선진화된’ 국가들이 기후재난의 충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서구 국가들이 드러낸 취약성처럼, 이는 지구적 재난의 파급력을 고려하지 못하는 안이함의 소산일 뿐이다. 고시는 이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자들이 빈곤한 자들보다 더 안전하며, 그렇기에 전자는 위기에 둔감해도 된다는 믿음의 어리석음을 비판한다—“부유하든 가난하든 세계의 어느 지역도 위기를 모면할 수 없으리라”(246면).

서구 근대를 극복하고 체제전환을 이룩하기 위해서 어떠한 대안적인 정치가 가능할까? 책의 15장부터 후반부는 그 답변으로 ‘생기론적 정치’를 제시한다. 비록 명확한 규정을 시도하는 대목은 없지만, 이 개념은 다종다양한 비인간 존재의 행위 주체성을, 또 그들과 인간의 깊은 연관을 인정하고 그러한 비인간 주체들의 영역을 보전하려는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시는 북미 원주민들의 저항 시도, 흑인 급진주의는 물론 뉴욕 월가를 뒤덮었던 ‘점령하라’(Occupy) 운동, 그레타 툰베리의 기후위기 활동,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종교운동, 가톨릭교회의 기후정의론에 이르는 다양한 조류를 모두 생기론적 정치의 사례로 들면서 이를 기계론적 철학에 입각한 근대의 파괴적 경향에 대항하는 힘으로 호명한다(단 고시는 생태계 보호를 위해 인구 희생이 필요하다고 보는 인종차별주의적 에코파시즘은 분명히 경계한다). 마지막 19장은 ‘기계론적 형이상학’의 지배에도 사라지지 않는 생기론의 힘을 강조하며 마무리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육두구의 저주』는 장단점이 뚜렷하다. 서구의 (그리고 한국의) 독자 대부분에게 낯설 수많은 사례를 동원하는 넓은 시야, 그러면서도 각각의 대목을 설득력있게 그려내는 능력은 저자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독자들의 호오가 갈릴 지점은 개별 요소를 배치하는 방식에 있다. 과장된 비유가 허락된다면, 이 책의 전체 서술은 단단히 조직된 건축물보다는 여기저기 흩뿌려진 아름다운 구슬에 가깝다. 대략의 서사가 있지만 각각의 장(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각 장을 구성하는 단락들의 연결관계 또한 종종 흐릿하다. 저자가 풀어내려는 서사를 이미 알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독자와 그렇지 않은 이들이 서로 다른 독서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지적인 측면에서 『육두구의 저주』가 제시하는 구도와 해법은 다소 거칠다. 서구 과학철학사에 약간의 배경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기계론적 철학을 곧 서구 근대의 정신으로 놓는 과감한 서술에 당혹감을 느낄 수 있다. 기계론적 형이상학은 17세기부터 충분히 경험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18세기는 다양한 유물론적·생기론적 설명이 등장해 기계론을 대체하고자 했다. 나아가 서구 근대질서 못지않게 생기론적 정치 역시 지나치게 단순화되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비인간적 행위자들의 존재와 행위능력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누가, 어떤 방법을 통해 대표/재현할 수 있는가? 라뚜르(B. Latour)가 제안한 ‘사물들의 의회’(the Parliament of Things) 개념이 암시하듯, 인간세계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비인간 행위자들의 존재가 기입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절차를 통해 후자를 유의미하게 ‘대표’(representation)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대면해야만 한다. 이는 정작 기후위기의 소설적 ‘재현’을 질문한 장본인인 고시의 대안에는 누락된 물음으로, 그렇기에 생기론의 정치는 실천적인 대안이라기보다는 즉각적으로 와닿지만 내실은 없는 또 하나의 구호처럼 읽히게 된다. 『대혼란의 시대』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에 대한 더 나은 답변은 단순화라는 익숙하고 편안한 덫을 피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