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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위화 『원청』, 푸른숲 2022

작가의 귀환

 

 

김태성 金泰成

중국문학 번역가 hswh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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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화(余華)의 여섯번째 장편소설 『원청: 잃어버린 도시』(文城, 2021, 문현선 옮김)는 1999년을 전후로 집필을 시작하여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려 완성된 소설이다. 처음 쓴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 삭제와 다시 쓰기, 쓰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국제적 인기에 따른 강연과 출국도 잦아지면서 20만자 가까이 쓴 초고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10만자를 삭제한 후 한쪽으로 치워두고 『형제』(兄弟, 전2권, 2005~2006, 최용만 옮김, 푸른숲 2017)와 『제7일』(第七天, 2013, 문현선 옮김, 푸른숲 2013)을 먼저 써서 발표했다. 이 두 작품 역시 상당한 시차를 두고 세상에 나왔지만 기대 이상의 반응을 도출하진 못했다. 그에게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준 최고의 성공작 『인생』(活着, 1993, 백원담 옮김, 푸른숲 2007)이 항상 기준이 되어 그다음 작품들을 비교하게 되면서 중국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이와 달리 『원청』은 『형제』와 『제7일』을 크게 뛰어넘어 『인생』에 접근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초판 50만부가 순식간에 다 팔리는 기염을 토했을 뿐 아니라 발표와 동시에 드라마로 각색되어 중국 ‘문학영화(文藝片)’의 계보를 잇기도 했다.

북방 청년 린 샹푸(林祥福)는 우연히 남방 여자 샤오메이(小美)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샤오메이는 딸을 하나 낳고 갑자기 사라져 소식이 두절된다. 린 샹푸는 딸을 안고 아내가 말한 ‘원청’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찾아 기약 없는 여정을 시작한다. 한편 샤오메이 역시 딸과 린 샹푸를 찾아 고달픈 여행을 떠나는데, 엄격한 계율을 어긴 죄로 시집에서 쫓겨난 아내를 따라 가출한 남편 아창(我强)이 샤오메이의 여정에 동행한다. 린 샹푸와 샤오메이는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지만 서로 어깨를 스쳐 지나갈 뿐, 만나지 못한다. 아름다운 슬픔의 진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원청』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두가지 측면에서 작가의 귀환을 상징한다. 첫째는 전작들에서 보여준 것처럼 어설픈 현실비판이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변소 옆 칸의 여성을 훔쳐보다가 똥통에 빠져 죽는 일(『형제』)이나 7일 동안 벌어지는 개연성 부족한 사건들(『제7일』)처럼 지나친 엽기로 흐르는 바람에 위 화 소설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휴머니즘에 기초한 애잔한 감동에서 멀어졌던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은 것이다. 『원청』은 『인생』과 마찬가지로 시적인 표현과 세련된 수사 속에서 구차한 역사와 시대환경이 가져다준 다양한 역경을 극복하는 방법이자 과정으로서의 감동적인 반전이 전개되고 있다. 소설가 장강명이 추천사에서 언급한 ‘위 화적인 순간’은 아마도 이런 액운과 재난이 극복되어 휴머니즘으로 승화되는 과정에서의 감동을 지칭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생』의 인물들이 시대와 역사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적응해나가는 평민들로서 소설 전체를 통틀어 인물과 배경이 평형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해 『원청』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극단적인 호인들이라는 점이다. 극단적인 악인 집단이 등장하긴 하지만 호인들과 대칭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또다른 유형의 엽기로 흐를 수도 있는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악인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착한 사람들의 슬픈 사랑과 아름다움만으로 소설 전체를 채웠어도 이 작품은 충분히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위 화는 『인생』은 사실주의 소설인 데 비해 『원청』은 일종의 전기(傳奇)소설로 구상했다고 해명한다. 전기소설이란 사실주의에서 벗어나 괴기나 애정 등을 내용으로 하여 문어체로 쓰인, 설화와 소설의 중간 단계에 있는 중국의 고전문학 양식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소설의 기법을 차용하고 드라마적 요소를 극대화함으로써 서구 소설과의 차별성을 실현하면서 영화화를 기대한 서술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장 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화 덕을 톡톡히 보았던 위 화만의 고유한 전략이 아니라 류 전윈(劉震雲)이나 마이쟈(麥家), 둥시(東西) 등 대부분 중국 작가들의 공통된 전략이다.

두번째 측면은 오랜 시간 소설을 발표하지 않아 문학적 상상력이 고갈되어 산문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일거에 불식했다는 점이다. 스토리텔링과 수사를 포함한 작품 전반에 걸쳐 『인생』에 버금가는 위 화 고유의 문학 상태로 회귀하는 동시에 문단에서의 지위, 글쓰기의 지속성 등을 회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시 한번 위 화라는 작가의 선명한 이미지를 각인시킬 수 있었다.

시대적 배경이 또다시 1900년대 초반인 청말민초(淸末民初)로 회귀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두가지 흐름은 전통과 사랑이다. 전통적인 관념과 풍속습관, 가치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전통 생활방식과 문물들이 풍경처럼 펼쳐진다. 소설이 갖는 민족지(ethnography)로서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야기의 주조를 구성하는 아창과 샤오메이, 샤오메이와 린 샹푸의 슬픈 사랑은 대단히 특수하다. 한 여자가 두 남자를 사랑할 경우 진부한 삼각관계나 불륜의 프레임에 갇히기 십상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놀랍게도 세 사람의 교차하는 사랑이 무력하고 불가항력적임에도 감정의 충돌 없이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답고 정갈하다. 어떤 심리학이나 철학의 논리로도 이런 사랑을 해석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 사람의 사랑이 비극을 잉태하고 있는 이유는 당연히 시대의 환경과 관념 때문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필연적으로 속박과 영혼의 마모가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샤오메이와 아창은 폭설이 지나간 뒤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 중 동사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죄한다. 속죄를 위한 죽음이지만 슬픔보다는 처연한 아름다움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소설 전체가 폭설이 내리는 흐린 하늘 같은 잿빛 풍경으로 다가온다. 까뮈(A. Camus)는 “우리의 삶은 어떤 이론으로 해석되거나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으로 기억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 삶의 무력감과 불가항력을 풍경으로 전환해주는 최고의 장치가 바로 소설이 아닐까?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도 이런 풍경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은 국가가 작가들을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나라이다. 국가기관인 작가협회를 중심으로 루쉰문학원, 현대문학관, 『인민문학』 잡지, 작가출판사 등이 거대한 인프라를 구축하여 작가들에게 다양하고 지속적인 지원과 교육을 진행한다. 그러다보니 중국의 작가들은 대체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나 철학적 사유가 부족하고 어두운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거나 스토리텔링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잘못하면 사회 전체가 집단적 망각에 빠질 수 있는 함정으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무명시절 베이징 스리푸(十里堡)의 루쉰문학원에서 모 옌(莫言)과 같은 방을 쓰면서 문학수업을 받았던 위 화 역시 소설뿐 아니라 산문에서도 이야기에만 집착할 뿐, 중국의 역사와 사회, 인민의 삶이 노정하고 있는 갖가지 문제와 왜곡된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가정신과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