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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연 崔朱淵

명지대 행정학과 3학년. 2001년생.

juyeon011011@daum.net

 

 

 

그런 믿음

 

 

얇은 천가방 깊숙이 넣어둔 열쇠가

허벅지에 맞닿아 느껴질 때면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갈 그곳에는 작은 식물이 있고 또 검은 고양이가 있다는 게 좋아서 가방이 흔들릴 만큼의 걸음걸이를 당분간은 유지하며 걷기로 한다 정해놓은 목적지는 없지만

 

모르는 나무와 아는 나무 파란 대문과 긴 창문을 지도 삼아 고개를 바짝 들고 앞으로 앞으로만 걷다보니 나에게도

마트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생겼고

 

나는 나와 같이 가자고 했다

길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어도

 

있다고 믿으면 어디든 도착하고 말 테니까

 

나란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있으면

비가 오지 않는데도 우산을 따라 펼쳐야 할 것 같은 기분처럼

 

우리가 함께 발맞춰 걸으면 멀리서는

확신만 가득한 발걸음처럼 보일 테니까

 

열쇠고리에 엮인 열쇠들처럼 함께 걷는다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질 때면 서로의 팔목을 살짝 맞댄 채

 

계속해서 걷는다

 

걷다보면 장바구니를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사람이 보이고 그 사람을 따라서 걷다보면 마트에 도착하고 그럴 때면 가볍게 달랑거리는 마음

 

나는 함께 걸은 사람과 반씩 나눠 가진

체리와 토마토를 들고 돌아간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쳐

노란 불빛 벽돌집으로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날 때면 뛰쳐나와 반갑다고

내 허벅지를 긁는 검은 고양이의 앞발은 여전히 아프고 그 탓에

체리와 토마토가 전부 뒤섞였지만 그래도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라이너 노트1

 

 

우리가 잘 지켜야 해요

우리는

 

줄곧 한쪽 어깨에 흘러내리듯 걸쳐 메던 백팩의

지퍼를 열며 네가 말했다

 

그 까만 백팩은 너무 커다랬고

안을 가득 채우면

 

내 몸이 뒤로 기울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그대로 바닥에 붙어 영영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너는 그러지 않았다

 

헐렁이는 소리가 드문드문 날 때면 귀엽고 경쾌해

 

우리는 책 한권과 이어폰이 담긴 가방을 달랑거리며

오월의 청보리밭을 나란히 걷다가

멈춰서

 

그 사이에 심어진 사람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계속되는 바람에 물결치듯 마음껏 흔들리면서

 

문득 나는 이대로

우리 같이 세계의 끝으로 가요, 저 끝까지 가봐요

말하고 싶었고

 

귀 뒤에 꽂아두었던 머리카락마저

저마다의 리듬을 찾아가느라

 

앞도, 네 얼굴도 전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았지

 

바람이 스치듯 닿을 때면 몇번이고

뒤돌아보게 될 거란 걸 알았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여름 궁굴리기

 

 

오늘도 언덕을 오르고 있었어

너의 집과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어

 

비가 오는 날엔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서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는데

 

구석에 접혀 있던 우산을 펼칠 때면

순식간에 팽팽해져 나를 전부

 

가리는 게 무서웠고

우산 위 노크 소리는 멈출 줄을 몰라서

 

누구세요, 하고 길에 멈춰서

없는 문 대신 벽이라도 열고 나가고 싶은 기분

 

기분은 언제나 기억을 불러오고

벽을 열면

 

비에 흠뻑 젖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빨래를 걷어 오고, 축축해진 평상 위에 도로 누워 기타를 치는 네 납작한 손톱을 눌러보다가 늘어진 러닝만 입는 옆 옥탑 아저씨가 나와서 손뼉을 칠 때면 나도 같이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그러다 갑자기 또 비가 쏟아지면 너의 손바닥을 우산 삼아 재빠르게 집으로 뛰어 들어갔던 우리가 재생되거든 끊기지 않고 반복해서

 

우리는 여름을 절대

지나가는 여름으로 두지 말자고 약속했었지

 

나는 그래서 혼자서도 자꾸만 언덕을 오르고 있어

신발 뒤축이 닳아버릴 때까지 양말이 다 젖을 때까지

 

퉁퉁 부어 미워진 다리로

더 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고

오늘도 끝내 언덕을 다 오르지 못했어 그럴 때면

 

우리의 지난여름이 여전히

혼자서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놀이터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이었다

 

잠든 엄마 몰래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건

흔들의자의 마지막 손님이 되고 싶기 때문이고

 

다리로 허공을 저으면

추리닝의 무릎이 잔뜩 나오겠지

 

움직이기 시작한다

 

녹슨 그네와 노란 페인트칠이 벗겨진 시소 위

한낮의 아이들 웃음소리가 보이는 것 같고

 

누군가 흘리고 간 실내화 주머니의 모래를 털어

옆자리에 태우자

 

실내화 주머니를 발로 차며 달려오는

네가 보인다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이 너의 뺨을 간지럽힐 때마다

너는 항상 하늘을 바라보고 웃었다

밑을 모르는 아이처럼

 

그런 네게 어젯밤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어

 

속삭이면 너는 내 옆구리를 찌른 다음

나를 정글짐 가장 높은 곳에 데려가 팔짱을 껴줬고

 

그럴 때면 내게도 꼭 맞는 낙하산이 생긴 것 같아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나는 계속해서 더 세게

발을 구르고 팔짱을 껴보고

둘이 걸었던 새끼손가락을 혼자서도 걸어본다

 

무릎이 수북해진 추리닝을 바라보며

이 속에 네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특수믿음지도

 

 

무섭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될까봐

 

솔직하지 못했어

수도꼭지를 잠그며 네가 말했고

 

욕실 안 작은 매트 위에 네개의 발이

빈틈없이 올려져 있으면 그제야 안전한 기분

 

우리 얼굴이 다 마를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조금 더 있다가 나가자

 

매트 밖을 벗어나면

 

어둠뿐이었고 마루에 발바닥 스치며 나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우리의 것 같지가 않아 견디기 힘들어서

 

혹시 누가 여기까지 우리를 따라왔으면 어떡해

주위가 보이지 않았고 길도 충분하게 길었는데

 

그런 말 하지 말랬잖아 우리는 만나지 말았어야 해?

우리는

 

너와 내가

우리가 되면 자꾸만

 

인도보다 차도가 더 안전하게 느껴지고

질려 있는 나무들처럼 끝없는 불안 속을 걷게 되니까

 

함께라는 강한 믿음에게 우리는

빼앗긴 게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무사히 돌아와 발을 포갤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만들어놓았던 작은

 

습관 때문이었지

 

어둠 속에서 나의 열걸음

또다시 새롭게 너의 열걸음

번갈아가며 끊임없이 세는 동안

 

너머를 보는 그런 것 말이야

 

꺼져 있는 가로등 앞을 지나쳐 더 가다보면

어디쯤에선 빛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러니 앞으로도 손 놓지 않고 계속 걸어가기

 

 

 

심사평

 

2022년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에는 총 376명이 응모하여 그 전해 297명보다 크게 늘었다. 9월부터 11월까지 작품공모 기간을 거쳐 11월 중순부터 3주 동안 세명의 심사위원이 1차 심사를 진행하였다. 최종 심사에는 10명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다시 열흘 동안 심층적으로 읽은 후 12월 중순 심사 회의에서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의 사유와 감각의 지평을 넓힐 역량있는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기대하면서 시를 투고할 때의 설렘과 정성, 수많은 고민들이 떠올라 한 작품이라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작품의 완성도, 문장력과 사유의 깊이, 새로운 표현과 함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모인 만큼 패기와 실험정신, 언어적 탐색이나 모험적인 시도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이야기하였다.

많은 응모자들이 모두 치열한 의식과 자신만의 고유한 시적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응모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사회적 자아가 아니라 시적 자아의 내밀한 세계를 보여주려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공동체 혹은 세계에 대한 이해보다 ‘너’와 ‘나’ 사이 관계의 비밀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본선에 오른 작품들은 대체로 고유한 개성과 시적 세계를 펼쳐주었다. 「겨울 비행」 외 4편은 내면을 조용히 드러내는 방식이 단정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차분하게 세계와 사물을 응시하는 집중된 시선이 주목되었다. 「루의 부분」 외 4편은 개성적인 호흡과 언어로 자신만의 시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으며, 「범고래의 일부분」 외 4편은 독창적인 발상으로 흥미로운 전개방식을 보여주었다. 「슈퍼바이러스」 외 4편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미성년 화자의 언어로 독특하게 구축했다. 「이상한 화요일」 외 4편은 조용한 서정과 발랄함, 장면전환이나 현상의 발생을 조용하게 응시하는 미덕이 돋보였다. 위의 시편들은 모두 일정한 수준을 이루고 있으나, 일부는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담아내려고 하다 시적 긴장을 놓치기도 했다. 언어의 압축과 정서를 절제하는 힘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아직 발아하지 않은 이분들의 가능성이 앞으로 시 쓰기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꽃피길 기대한다.

오랜 토론과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그런 믿음」 외 4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된 5편 중 하나인 「여름 궁굴리기」는 기억의 시간을 공간으로 치환하여 사라지지 않는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런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기본적으로는 혼자가 아니라는 태도를 이야기하는 소통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이 시편들은 전체적으로 선명하고 강렬한 색감은 아니지만 솔직하고 일상적 풍경에서 포착한 감성을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구축하고 있다. 특히 시간의 흔적과 기억의 문제를 공간적 이미지로 엮어나간 솜씨가 훌륭했다. 당선자의 시적 세계가 더욱 성장하기를 기대하며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김경후 문태준 이기성

 

 

 

당선소감

 

이제는 제가 시를 쓴다고 말해도 될까요? 저는 사람들에게 시를 쓴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당선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것 역시 저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어요. 대산대학문학상에 당선이 됐어요, 사실은 시를 썼어요,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게 우습게도 너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용기 내어 주위 사람들에게도 시를 쓴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행정학과 학생이 어떻게 문예창작학과 수업까지 듣게 되었는지, 힘들지는 않은지에 대한 질문을 수도 없이 많이 받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매번 쉽게 답하지 못했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쉽지만은 않은 것을 내가 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나는 왜 하려고 하는 걸까? 계속해서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럼에도 저는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마다 그냥 혼자 썼습니다. 가끔 썼습니다. 그렇게 쓰고 나면 이상하게도 한동안은 마음이 좋았어요. 그런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벽을 오래도록 쳐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더니 이제 더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껴지는 순간들투성이였습니다. 저에게도 함께 시를 쓰며 서로를 응원하는 동료들이 생겼거든요. 제가 계속해서 혼자였다면 제 목소리가 여기까지 닿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 앞에서는 꽤 오랫동안 혼자였던 저를 혼자 남겨두지 않고 손잡아준 사람들 덕에 쓰고 있습니다.

제가 시로 인해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시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보았더니 더 좋은 것이 있었고, 조금 더 따라가다보니 그 자리에 시가 있었습니다. 시를 써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거창한 마음을 먹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사실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따라가다보면 분명 더 좋은 것이 나올 거라고 믿어요. 그 좋은 것이 무엇일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저는 충분히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걸어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던 저에게 처음으로 시를 더 써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해주신 박상수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그 한마디 덕분에 제가 시를 조금 더 써볼 수 있었어요. 더 써봐도 된다고 말씀해주신 교수님의 목소리에 제 목소리를 덧대고, 또다른 목소리를 끝없이 덧대어가며 지켜내고 싶은 마음을 지킬게요. 스터디 식구들도 정말 고맙습니다. 함께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힘이 납니다.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기회를 저에게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정말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선택이 헛되지 않게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나가겠습니다. 모두가 쉽게 안 된다고만 말하는 세상일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 무엇이든 된다고, 아니 되고 말 거라는 믿음을 말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실 저는 시를 씁니다. 그냥 그게 좋아서 좋을 때마다 가끔 씁니다.

최주연

 

 

  1. 레코드 발매 시 감상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덧붙이는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