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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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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혜 閔宣惠

서울예대 문예창작전공 4학년. 1996년생.

tjsgp9542@naver.com

 

 

 

돌봄의 낭만화를 벗어던지는 문학

 

 

1. 돌봄의 복판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들

 

엄마의 얼굴은 점점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이내 얼굴만이 아니라 몸도 부풀었다. 나는 풍선에 누가 펌프로 바람을 넣는 것처럼 점점 커다래지는 엄마의 얼굴과 몸을 바라봤다. 휠체어도 함께 커다래졌다. 곧 서 있는 나의 눈높이와 휠체어에 앉은 엄마의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엄마가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비이상적으로 커진 엄마의 두 눈에 담긴 날 향한 경멸을 견딜 수가 없었다.(240면)

 

최근 발표된 이종산의 「커튼 아래 발」(『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은행나무 2022)은 돌봄이 발생하는 공간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 주목할 점은 소설에서 재현된 돌봄의 공간이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돌보는 중년 여성 화자는 어느날부터 집안 곳곳 문 대신 설치된 커튼 아래에 있는 발을 보게 된다. 커튼을 젖히면 금방이라도 낯선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긴장과 공포의 공간. 그곳에서 화자는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돌본다.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낯선 무언가가 삶에 침투했다는 징후를 알아차리면서도 그 ‘발’이 당장의 생활에 큰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화자의 눈에만 보이는 커튼 아래에 있는 발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돌봄도, 집 안을 팽팽하게 채운 엄마와의 불화도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 화자는 애써 마주하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종산의 소설에서 내내 어긋나던 딸과 노모의 눈높이가 같아지는 때는 분노와 증오, 혐오와 긴장의 순간이다. 화자는 이 눈맞춤 끝에 결국 노모를 살해한다.1

돌봄이 연대나 윤리가 아닌 ‘살인’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문제적인 장면을 우리는 어떻게 독해해야 할까. 이제 문학은 돌봄의 가치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돌봄의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흘러넘치는 정동과 더듬거리며 말해지는 돌봄의 그림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마주한다. 요컨대 돌봄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돌봄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의 재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돌봄이 드리우는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돌봄의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구체적인 어려움과 지난함, 거부감이나 불쾌감 같은 어두운 감정들, 인간의 신체성 등을 말끔하게 소거한 뒤 이야기하는 윤리와 연대로서의 돌봄은 공허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타인과 함께하기 위해 시작된 행위가 어째서 살인으로 끝나버리게 되는지, 돌봄의 중심에는 도대체 무엇이 자리해야 하는 것인지. 돌봄을 둘러싼 질문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2. 돌봄과 마음: 김유담 「돌보는 마음」

 

김유담의 『탬버린』(창비 2020)이 ‘지방-(여성) 청년’들의 ‘자기돌봄’의 다양한 형상을 보여주었다면2, 최근작 『돌보는 마음』(민음사 2022)은 ‘자기계발 주체’로 평생을 살아온 여성들이 출산과 동시에 ‘돌봄 주체’로 변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주하는 혼란을 보여준다. 능력주의의 신화 아래 적극적으로 자기돌봄을 수행하는 것으로 지방-여성에게 주어진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했던 이들은 결혼과 임신, 출산을 기점으로 ‘정상가족’에 편입하면서 더이상 능력주의가 유효하지 않은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러한 주체의 변환 이 여성에게 국한된 젠더화된 과정이라는 것과 평생 ‘능력’을 증명하길 요구받았던 이들이 이제는 ‘마음’을, 즉 돌봄을 둘러싼 ‘진심’을 증명하길 요구받는다는 점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돌보는 마음」에서 미연은 대학병원의 고객서비스만족부 팀장으로 출산 후 복직을 한달 앞두고 8개월 된 딸 지우를 돌봐줄 베이비시터를 구하고 있다. 미연은 여러명의 돌봄 제공자를 만나지만, 이들 모두와 원활한 돌봄 관계를 만드는 데 실패한다. 소설 속에서 ‘돌보는 마음’은 돌봄 제공자에게 진심을 ‘요구하는 마음’과 이러한 요구로 인해 ‘소진되어가는 마음’으로 분열되어 나타나는데, 미연은 내내 이 두 마음을 분주하게 오간다. 남편 기훈은 베이비시터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미연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미연이 서둘러 복직하려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훈의 태도(“왜 굳이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려 하느냐고 비난하는 투로 말해 크게 싸우기도 했다.” 151면)는 남성이 결혼과 출산 이후에도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돌봄 주체로 변화하길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족 구성원 중 한 사람만이 돌봄 주체로 변화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연의 선택은 ‘돌봄의 외주화’이다. 미연은 베이비시터 교육을 받은 시니어 인력들을 돌봄이 필요한 각 가정에 연결해주는 지자체 프로그램을 통해 임화숙을 소개받는 것으로 가정과 사회에서의 양립을 도모하지만, 화숙은 구청에서 안내받은 것보다 더 높은 급여를 요구하며 미연을 당황하게 만든다.

 

“그건 그냥 서류인 거고, 나는 지금 시세를 말하는 거예요. 아기 엄마가 잘못 알고 있는 거라니까.”

화숙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 진심으로 아이를 잘 보살펴 줄 수 있다면, 한 달에 20만 원 더 쓰는 것도 충분히 재고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 미연이 잘못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곤란했다.(148면)

 

구청에서 보낸 서류와 달리 공공의 영역 밖에서 형성되는 ‘시세’가 있으며, 그 시세를 지키는 것이 다른 돌봄노동자들의 노동가치를 폄훼하지 않는 것이라는 화숙의 말은 그 자체로 정당하지만, 미연은 “아기 엄마가 잘못 알고 있”다며 자신보다 어린 여성을 가르치려 드는 화숙의 태도에 불쾌함을 느낀다. 미연이 느끼는 불쾌감은 화숙이 단순히 돌봄노동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연장자로서 미연을 가르치려 하기 때문(“참, 아기 엄마. 아까 내가 말하려다 깜빡했는데 찻잔 바닥에 스티커 (…) 떼고 써야 되는 줄 모르는 건 아니겠지.” 150면)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불화는 단순히 개인의 관계만을 원인으로 한다고 볼 수는 없다. 돌봄의 공공성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질서 안에서 수행되는 베이비시터 사업은 그 시작부터 돌봄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계약상의 갑과 을 사이에서 노동의 조건과 시세 등이 치밀하게 조율될 때 돌봄은 연대라기보다 ‘적대’의 힘으로 유지된다. 이에 더해 ‘진심’으로 아이를 잘 보살펴줄 수 있는지가 시세 결정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때 이들의 연대는 와해된다.

미연은 화숙 이후 친구의 소개로 이정숙이라는 또다른 시터를 얻어 곡절을 겪던 중 우연히 남희를 만난다. 베이비시터로서의 능력과 신용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딸 지우를 진심으로 예뻐하는 듯한 남희의 모습에 미연은 흔쾌히 아이를 맡기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미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희의 또다른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우연히 방문한 남희의 집에서 앙상하게 마른 노파를 험악하게 대하는 폭력적인 모습을 마주한다. 돌봄 수혜자에 따라 달라지는 남희의 이중적인 태도는 돌봄에 있어서 진심이란 과연 무엇인지, 더 나아가 보편적 윤리로서의 돌봄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결국 미연은 총 세명의 베이비시터를 만나지만, 연대와 돌봄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처참히 실패하고 만다. 이 실패에는 여러 맥락이 존재하겠으나 소설이 지목하고 있는 원인은 중층적이다. 우선 앞서 이야기한 돌봄의 외주화 및 상품화가 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바로 ‘돌보는 마음’이다. 미연은 세명의 베이비시터에게 노동 너머의 돌보는 마음을 엄격하게 요구한다. 그들이 수행하는 돌봄 안에 ‘진심’이 담겨 있는지 여부가 그들의 노동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주목할 점은 돌봄을 둘러싸고 수시로 변화하는 미연의 위치와 그에 따른 돌보는 마음의 변화다. 집에서 미연은 돌봄의 수혜자로서, 이때의 돌보는 마음은 곧 돌봄 제공자에게 진심을 ‘요구하는 마음’이 된다. 그러나 회사에서 미연의 위치는 돌봄 제공자로 변화하며, 이때의 돌보는 마음은 진심에 대한 요구와 증명 때문에 ‘소진되어가는 마음’이 된다.

 

“승주 씨, 나는 승주 씨가 단순히 사무를 보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게 나는 중요하다고 보거든요. (…) 진심은 다 느껴지게 마련이라니까.”(162~63면)

 

병원 고객서비스만족부의 일이 단순히 전화로 환자들을 상대하는 사무적인 노동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일’이라는 강조는 표면적으로 사내 업무를 매끄럽게 수행하기 위한 미연의 처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계약직 사원 승주에게 진심과 마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곧 팀장 미연의 책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장암 진단을 받은 노인이 수술 예약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승주의 사무적인 태도를 문제 삼으며 통화 내용을 언론사에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사건이 발생하자, 미연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승주 대신 무릎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팀장님이 가서 무릎을 꿇으신다고요?”

승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못 할 것도 없지. 난 병원과 우리 팀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185면)

 

내내 돌보는 마음과 진심을 중요시하던 미연이 정작 진심 없는 사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돌봄 제공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상품화된 돌봄시장에서 돌봄의 조건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돌봄은 과연 무엇일까. 돌봄이 돌봄일 수 있게 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돌봄 수혜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총체적인 퍼포먼스”(165면)로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일까. 아이를 살뜰하게 돌보는 것과 아이를 진심으로 예뻐하는 것. 암 환자에게 예약사항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과 암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이들 중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돌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동을 세세하게 호명할 언어가 부족하다.3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언어화되지 못한 어려움 속에서 돌보는 이가 마음을 다하고 있다는 것, 혹은 돌보는 이의 마음이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은 묘연해진다.

김유담은 이러한 한계 안에서 돌봄을 이상화하거나 특권화하지 않으며 돌봄 현장에서 발생하는 지난함과 어려움을 담담히 견뎌내는 인물들을 통해, 돌봄위기를 초래한 원인에는 돌봄의 상품화 및 젠더화 외에 또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밝힌다. 그것은 바로 돌봄 현장에서 소진되어가는 ‘마음’이다. 동시에 돌봄이 자본주의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젠더가 교착되어 있는, 다루기 쉽지 않은 문제임을 보여준다.

「돌보는 마음」은 미연이 차 안에서 핸드폰 화면으로 가정용 CCTV를 살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러한 결말은 돌봄에 있어 ‘진심에 대한 요구’가 여성들의 것으로 젠더링되는 상황에서 돌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돌봄의 윤리와 연대를 성급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들, 돌봄이 돌봄일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그냥 버티”(159면)는 방법밖에는 없을까. 무엇도 성급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분명한 것은, 돌봄은 미연이 응시하는 가정용 CCTV 화면 밖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 난잡한 우정의 공동체: 정소현 「어제의 일들」

 

김유담이 돌봄이 자본주의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젠더와 결합된 까다로운 문제라는 것을 폭로하는 동시에 돌봄 제공자의 ‘돌보는 마음’이 소진될 수밖에 없는 구조와 돌봄위기의 연관성을 드러냈다면, 정소현의 「어제의 일들」(『품위 있는 삶』, 창비 2019)은 장애가 있는 1인칭 화자 상현을 통해 ‘원치 않는 돌봄’과 ‘전달되지 못하는 돌봄’을 보여준다. 소설은 타인에 의해 돌봄이 필요한 의존적인 사람,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규정당하는 상현의 혼란스러움과 돌봄 수혜자의 다양한 정체성을 마주한 율희의 당혹감과 분노를 통해 돌봄과 장애를 둘러싼 정체성에 대해 새로운 시각이 요청되고 있음을 전달한다.

「어제의 일들」은 상현이 운영하는 주차장에서 우연히 중·고등학교 동창 율희를 만나면서 추락사고 이후 잃어버렸던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과정은 상현과 율희 모두에게 상처로 점철된다. 상현을 향한 율희의 관계 맺기 자체가 철저한 타자화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율희뿐만 아니라 소설 안에서 상현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경찰과 고등학교 친구들)은 상현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 소설은 이들이 상현에게 실효성 있는 돌봄을 제공하지 못하는 원인을 비교적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들이 상현의 말을, 더 나아가 ‘장애가 있는 신체’의 발화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상현이 “괜찮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50면)라고 말해도 경찰과 율희에게는 도무지 전달되지 않는다. 경찰은 상현이 주차장 사장으로부터 착취당하고 있을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 상현이 주차장 운영의 총책임자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율희 역시 상현의 “몸은 나으려야 나을 수가 없고, 마음은 이미 괜찮아졌다”(59면)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이들이 상현의 말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혀짜래기소리로 하는 말(“‘없어요’ 하고 쌀쌀맞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는 ‘없, 떠, 요’ 하고 혀짜래기소리가 나올 뿐이었다.” 49면)에서 그 내용이 아니라 형식만을 전달받기 때문이다.

경찰과 율희가 상현을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의존적이며 취약한 몸과 독립적인 몸이라는 이분법적 신체 기준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희는 정말 상현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일까. 상현은 돌봄이 필요한 상태일까. 장애인에게 ‘돌봄받는 사람’이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기저에 놓일 때 돌봄은 돌봄이 되지 못한 채,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율희는 자신의 선물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상현이 하는 말(“나는 지금이 딱 좋아.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이웃도 있어. 내 몫의 일도 있으니까 난 여기서 혼자 늙어 죽어도 좋아.” 61면)을 제대로 듣지 않으며, 기어코 주차장 부스 안에 들어가 선물을 놓고 가려고 한다. 그러나 부스 안에서 율희가 목격한 것은 주차장에서 인생을 축내는 ‘불쌍한’ 장애인의 삶을 사는 상현이 아니라, 그림책 세권을 출판한 작가 상현이다. 돌봄과 치료가 필요한 장애인과 그림책 작가의 낙차가 얼마나 큰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겠으나, 율희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상현에게 당혹감을 넘어 분노마저 느낀다.

 

“이 꼴로 살면서 뭘 믿고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나 했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나 같은 사람이랑은 뭣도 같이하기 싫다는 거였네. 넌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남의 호의를 쉽게 거절하고, 밀어내고, 사람을 참 비참하게 만들었어.”(61~62면)

 

상현의 그림책을 확인한 후 분출되는 율희의 분노는 어딘가 징후적이다. 자존심과 비참함의 토로는 어떤 과잉을 내포하는데, 이는 그 자체로 장애인, 혹은 장애인 돌봄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두가지를 짐작하게 한다. 우선 율희의 돌봄은 수혜자에 대한 제공자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율희의 돌봄이 상현이 경험하는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율희는 상현이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어떠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나는 불편한 마음을 숨긴 채 반갑게 그녀를 맞아 의자를 꺼내놓고 커피를 타주곤 했다.” “그것들이 필요 없었고, 필요도 없는 물건을 억지로 가져야만 하는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57면). 율희가 보여온 돌봄은 장애인의 삶을 딱하게 여기는 비장애인의 이타적이고 선한 행위이자, ‘독립적인 몸’이 ‘의존적인 몸’에 시혜적으로 베푸는 윤리로서의 피상인 돌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돌봄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대립, 불화를 소거하려는 태도는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망각하게 하고, 나아가 ‘정상 인간’의 규범을 더욱 강화시키며 그에 맞지 않는 몸을 (혹은 맞는 몸까지) 타자화한다. 이 때문에 둘 이상의 주체가 만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파열음을 말끔하게 지운 채 돌봄을 윤리화·이상화하려는 목소리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돌봄을 둘러싼 여러 맥락이 지워지고 물화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는 감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두가지 형태의 돌봄이 등장한다. 율희의 돌봄이 피상적 층위의 타자화의 돌봄이었다면, 그 반대편에는 상호의존적인 돌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의진과 어머니가 있다. 의진은 매년 공모전에 떨어지는 상현을 찾아와 그림책과 관련한 조언을 해주고 그와 글과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된다. 상현의 어머니는(상현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친어머니가 아니나, 가족에게 버림받은 상현을 친딸처럼 여겨 20여년간 대안가족의 형태로 상현과 함께하고 있다) 친딸의 죽음에서 비롯된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시작한 간병일로 상현을 만나 가족이 된다. 의진은 상현이 공모전에 입상한 후 그림책 원화전을 기획하여 큐레이터로서의 커리어를 쌓는 동시에 의진의 남편인 상혁의 출판사에서 상현의 책을 출간하도록 한다. 어머니 역시 상현에게 “원망과 후회, 슬픔이 뒤섞인”(92면)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를 점차 덤덤하고 대범하게 마주하게 된다. 이들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제공자와 수혜자의 자리가 수시로 변화하는 이들의 돌봄은 율희의 그것과 달리 돌봄 수혜자와 제공자가 동등한 위치에 존재하게 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사고 이후 부서졌던 상현의 돌봄 관계망이 친족이 아닌 ‘우정’을 기반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돌봄은 친족관계에 국한되지 않으며 배타적이지 않은 환대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이들의 돌봄은 윤리적이고 이상적이라기보다 ‘난잡한 것’에 더 가깝다. 이들의 ‘난잡한 돌봄’은 때때로 어머니가 상현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기존의 돌봄 회로, 즉 가족과 시장을 벗어난 이들의 돌봄은 이러한 오해마저도 끌어안아 사회의 정상 규범이 상상하지 못하는 가족의 영역을 재구성하는 ‘난잡한’ 관계를 형성하며, 돌봄에 대한 감각을 근본적으로 재편한다.4 소설은 각기 다른 돌봄 공동체를 나란히 병치시킴으로써 장애인을 돌봄의 대상으로 인지하고 돌봄을 제공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돌봄과 관련하여 특정한 신체에 대해 단일할 정체성만을 부여하는 감각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드러낸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69면)

 

나의 이야기가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에게 들려지길 바라며, 내가 그들이 오해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랐다. (83면)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90면)

 

그렇기에 소설 안에서 여러번 등장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상현의 독백은 이중적으로, 두가지 오해를 해명하는 듯 독해된다. 표면적으로는 과거 학창시절의 추문에 대한 해명으로 읽힌다. 동시에 서사의 이면에서 상현의 독백이 ‘난잡한 돌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향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나는 일방적인 돌봄과 치유가 필요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 역시 획득한다. 상현의 “괜찮아요”(50면)라는 말이 정말 괜찮다는 의미로 미끄러지지 않고 전달되며, 더이상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해명할 필요가 없어질 때 상현은 모든 사건과 시간이 ‘어제’가 되어버리는 ‘접힌 시간’5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4. 비인간과 함께 탈출하기: 아밀 「로드킬」

 

아밀의 「로드킬」(『로드킬』, 비채 2021)은 기후위기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이 붕괴된 미래사회에서 동물들과 함께 멸종위기에 처한 ‘인간 여자’들의 모습을 그린다. 「로드킬」은 돌봄위기가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기후위기가 다시 돌봄위기를 강화하는 구조를 ‘1급 보호대상 소수 인종’이라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소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소설이 그리는 ‘인간 여자’들의 삶은 위기 앞에서 더욱 취약한 계층이 존재하며, 이것이 젠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소설은 멸종위기에 처한 소녀들을 “잡아먹힐”(13면) 위험이 있는 존재, “인간이 되다 만,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조잡하고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존재”(38면)라고 직접적으로 지칭하며 여성과 동물이 동일시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다른 인간 여자들이 편의와 힘을 위해 자궁을 버릴 때 사회적·경제적·종교적인 이유로 진화에 참여하지 못한 여자들의 ‘딸’들은 그 자체로 인간이 비천한 육체를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이들의 존재는 곧 임신과 출산 가능한 몸으로만 등치되며, 존재 가치는 오직 ‘재생산’으로 환산된다. 「로드킬」은 심화되고 있는 저출생 문제를 SF적 상상력을 통해 극단으로 몰고 나간다. 소설은 위기 상황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인간의 자리에서 손쉽게 동물의 자리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변화가 다름 아닌 붕괴된 돌봄의 재건을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돌봄과 동물, 돌봄과 기후위기의 연결고리를 드러낸다.

진화를 선택하지 못하고 ‘도태’되어버린 인간 여자들에게서 태어난 여자아이들은 출생 직후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국가의 관리감독 아래에서 ‘돌봄 주체’ 혹은 ‘재생산 주체’로 훈육되어진다. 이 훈육은 ‘생명정치’6의 작동을 보여주는 선명한 예시다. 이런 생명정치 속에서 두 소녀 ‘나’와 여름은 국가의 재생산 도구이자 사회의 구성 및 유지를 위한 돌봄 제공의 물적 토대로 전락한다. ‘나’와 여름의 삶에는 국가에서 엄격하게 선별한 ‘좋은’ 남자와의 결혼과 출산만이 허락된다. 이때 소녀들에게 ‘선택’은 언제나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만 가능한 것이 되어버리고, 돌봄은 좋은 어머니와 순종적인 아내의 모습으로만 제한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어째서 남성들은 여전히 능동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기후위기가 여성과 동물만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일반 남성들은 멸종위기에 처하지 않고 “별 이유 없이 자신감이 넘치고, 별 이유 없이 여유롭고, 안일하고 게으르고 무신경”(36면)하게 자신을 돌봐줄 여성을 ‘취향껏’ 고를 수 있는 것일까. 그 때문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여성들은 과연 멸종된 것일까, 아니면 여성이 있으면 안 될 장소로부터 배제당한 것일까.

「로드킬」은 임신과 출산을 위해 ‘보호소’에 격리당한 소녀들이 그곳을 탈출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외부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된 보호소의 존재와 그 분리를 정당화하는 지점이다. 소녀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격리, 배제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보호’받는다고 생각한다(“오늘날의 생태계에서 우리는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살게 놔두면 하루도 못 가서 살해당하거나 ‘잡아먹힐’ 연약한 인종이다. 그래서 특별한 보호와 관리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한다.” 13면). 보호소 안에서 소녀들이 순종적인 돌봄 제공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훈육하는 것은 소문과 교육인데, 두가지 모두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가령 자동 운전 시스템이 내장되어 안전하다는 자동차는 사고를 내고, 멸종했다던 고라니는 숲속에 살고 있으며 소녀들이 평생 동안 외운 모범 답은 졸업시험과 전혀 무관하다). 소설 속에서 소문으로 대표되는 것은 ‘포르노그래피’이며, 교육으로 대표되는 것은 ‘돌봄’이다. 보호소 안을 떠도는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소문을 통해 소녀들은 외부 남성에 대한 환상과 공포를 주입당하며, 정부에서 엄격히 심사한 ‘좋은 남자’를 만나야 포르노그래피에 출연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학습한다. 동시에 완벽한 돌봄 제공자가 되기 위해 진행되는 교육은 소녀들로 하여금 임신과 출산에 복무하여 아내가 되는 것을 내면화하게 만든다. 따라서 포르노그래피와 이상화된 돌봄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보호소라는 공간 안에서 국가적 차원의 기획이 잘 수행될 수 있도록 소녀들을 길들이는 방법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보호소는 돌봄의 이상화와 윤리화를 통해 돌봄을 위계에 복무하도록, 혹은 위계를 강화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돌봄에 대한 국가적 착취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곳이 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돌봄이라는 테마가 문제적으로만 그려진 것은 아니다.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돌봄이 있다면, 다른 쪽에는 평생 동안 소녀들을 가두던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돌봄이 존재한다. 전자의 돌봄이 후자의 돌봄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소녀들이 보호소를 탈출하는 과정과 나란히 병치된다. 소녀들이 결혼과 도망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바깥세상을 꿈꿀 때 여름은 결혼을 희망하는 남성에게 가장 먼저 선택되어 ‘졸업시험’을 통과하지만, 자신이 평생을 주입받아왔던 결혼 대신 ‘나’와의 보호소 탈출을 선택한다. ‘나’ 역시 그동안 부정했던 비인간 존재를 긍정하며 보호소 탈출을 결심한다. 오랫동안 수동태로만 가능했던 ‘선택’은 이들이 탈출을 결심하는 순간, 비로소 능동태로 가능해진다.

산속 어딘가에 동물들이 아직 살고 있을 것이라는 여름의 믿음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하던 ‘나’는 산속에서 “언젠가” 혹은 “어딘가”(11면)에 살고 있을 동물들의 존재를 더이상 부정하지 않는다(“고양이와 토끼와 고라니와 비둘기와 까치와 올빼미가 우리의 대화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것 같았다.” 43~44면). 인간이 비인간 존재와의 연결을 비로소 감지하게 될 때, 탈출을 망설이게 만들던 ‘산’이라는 알 수 없는 공간은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나’와 여름의 탈출을 알아차린 보호소 직원들은 마취총을 들고 소녀들을 쫓는다. 금방이라도 회중전등의 불빛이 소녀들을 찾을 것 같은 순간마다 ‘거센 바람’이 소녀들의 자취를 감춰주며 탈출을 돕는다.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동물들이 산 어딘가에 살고 있으며, 바람이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숨겨주고 있다고 느낄 때 이들은 또다른 돌봄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과 비인간의 종을 초월하는 돌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고라니들이었다.

한 마리가 뿔피리 같기도 하고 사람 비명 같기도 한 기이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걸 신호로 고라니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도로로 걸어 들어갔다. (…) 마치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나아가듯, 그들은 도로 건너편으로 유유히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도 따라가자.”

여름이 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 우리 둘이 고라니들을 따라 도로를 건너는 동안,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의 구름도 운행을 멈추고 우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54~56면)

 

탈출의 끝에서 소녀들이 마주하는 도로는 그 누구도 아직 건너지 못한 미지의 것이다. 매년 보호소를 탈출하는 소녀들이 있지만 언제나 이 도로에서 그들의 탈출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소녀들이 인간이 아닌 고라니의 뒤를 따르기로 결정할 때 소녀들을 둘러싸고 있던 시스템은 정지하게 된다. 완벽해 보이는 이 시스템 역시 “불완전하고 미심쩍은”(35면) 시스템일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정지의 순간은 ‘최일선 공동체’(frontline community)7가 형성되는 순간이자, 소녀들을 억압하던 돌봄이 내파하는 순간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변화가 소녀들이 누구를, 어디서, 어떻게 돌볼지 주체적으로 결정할 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돌봄은 위계에 복무하며 위계를 강화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위계를 부술 수도 있다.

소녀들의 탈출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는 인간과 비인간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소녀들은 보호소를 탈출하며 서로를 돌볼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자연이 인간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와 여름이 평생을 기다린 “세상 한가운데로 데려가주”(16면)는 존재는 인간 남성이 아닌 고라니 떼와 거센 바람 그리고 소녀들 자신이다.

따라서 ‘나’와 여름이 고라니의 뒤를 따라 도로의 건너편 연석에 다다르는 장면은 ‘불완전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여겨지던 이들이 시스템에 균열을 가하며 새로운 사회적 ‘위치’로 이동하는 순간이며, 승인된 세계 너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주체성과 힘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다. 인간과 비인간으로 이루어진 ‘최일선 공동체’가 자신들의 착취를 정당화해온 그 도로를 정지시키며 도로 너머에 있는 ‘섬처럼 떠 있는 검푸른 숲’으로 향하는 순간, 우리는 더 큰 돌봄의 가치를 상상하며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돌보는 삶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된다.

 

 

5.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설계도

 

팬데믹은 종식되지 않고 삶의 새로운 조건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돌봄위기’ 속에서 지속 불가능한 방식으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차 강화되는 돌봄의 윤리화와 이상화에 대한 담론이 오히려 돌봄의 상상력을 제안하지는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과 함께 돌봄 현장에서 발생하는 불화와 갈등, 돌봄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새로운 돌봄을 위한 자원으로 다시 읽어보고자 했다.

앞에서 읽은 김유담 정소현 아밀의 소설은 상품화된 돌봄과 돌봄노동자들에게 요구되는 ‘진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돌봄의 한계를 포착하면서 돌봄위기의 원인을 들춰낸다(「돌보는 마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돌봄과 관련한 정체성에 대한 감각의 근본적인 변화(「어제의 일들」)와 함께 돌봄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돌봄에 대한 이상화와 이러한 착취를 내파하는 돌봄의 양면적인 힘(「로드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돌봄에 대한 회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히고 싶다. 돌봄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윤리적이고 이상화된 ‘매끄러운’ 돌봄을 의심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돌봄의 가능성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타진해보고자 했다. 돌봄이 드리우는 부정적인 속성, 어쩌면 돌봄이 의도하지 않았을 그림자를 살펴보는 일은 새로운 돌봄을 발명해내기 위한 설계도를 그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솔기 없이 매끄럽게 봉합된 정치가 안전하지 못한 불편한 정치인 것처럼8 돌봄 역시 매끄러움 아래 은폐되고 있는 것들을 들춰 볼 때 지금까지 실패한 돌봄을 더이상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심사평

 

해마다 역량있는 신진을 만날 수 있는 대산대학문학상에서 특히 평론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부문이다. 당찬 관점과 색다른 감각으로 문학 현장에 활기를 더하는 글이 매회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평론 부문에는 팬데믹 이래 가장 높은 편수라 할 수 있는 총 32편이 접수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글들이 시대의 고민이 녹아든 주요 작품을 나름의 방식으로 읽고 다른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평론 작업의 의의를 새삼 새기게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응모된 글마다 치열함을 느낄 수 있어 고무적이었다. 응모한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두명의 심사위원이 먼저 1차 심사를 통해 2차에서 논의할 작품 총 6편을 선별하였고, 선별된 작품을 중심으로 최종 심사를 진행하였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논의 선상에서 떠나지 않았던 작품은 세편이었다.

「정착하는 여성의 계보: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최은영 『밝은 밤』을 읽고」는 정세랑과 최은영의 소설을 가부장제에 귀속되지 않고 해방에 이르는 여성들의 서사로 한국문학사에 위치시키는 글이다. 두 작품을 대비시키는 구도로 전개되는 이 글은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하고자 하는 얘기를 분명하게 각인시킨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계 서사’의 계보를 세우는 과정에서 개별 작품이 지닌 특색이 섬세하게 독해되기보다는, 소설을 통한 역사적 사실 자체의 추출에 공을 들이고 있어 작품 논의가 해설에 그치고 만 느낌이다. 작품을 경유해 하고자 하는 말의 정확도를 높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비평은 어디까지나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근간이 되어야 한다.

「완전한 작별의 신화: 김초엽과 황정은이 오늘날의 매체적 경험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대하여」는 김초엽과 황정은의 소설을 상실이 사멸한 세계를 견디기 위한 전략적인 서사로 예리하게 읽어냈다. 이 글에서 상당 부분 할애되고 있는 김초엽 작품에 대한 분석은 근래에 만났던 여느 김초엽론과 비교했을 때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관점과 논리로 전개되어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특유의 통찰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글의 전체적인 구성에서 균형감을 확보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를테면 기존 비평에서 제기하는 논의에 대한 평가 및 정리 없이 홀로 두서없이 논리를 펼쳐나가는 점이나, 결론 부분에 등장하는 황정은의 작품 분석에서 김초엽 작품을 평할 때 발휘된 예리함이 없었다는 점이 그러했다. 참신한 관점을 계속해서 지켜나가고 현재 부족한 구성력을 채우며 문학적 지형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면 조만간 무서운 신예 비평가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돌봄의 낭만화를 벗어던지는 문학」은 시의성 있는 주제와 안정적인 서술, 균형감 있는 구성으로 독자가 안심하며 읽어나가도록 이끄는 글이다. 특히 김유담과 정소현 작품에 대한 분석이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소설이 가진 매력을 비평이 한층 살리고 있었다. 단, 정소현의 소설을 분석할 때 기존 개념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난잡한 돌봄’이란 표현을 고스란히 사용하느라 작품과 분명하게 조응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는데, 해당 부분을 글의 맥락에 따라 ‘상투화되지 않은’ ‘잡다한’과 같은 표현으로 유연하게 번역 및 활용했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론을 정확히 이해하는 비평은 많은 이들의 공부에 도움을 주지만, 그 이론을 어떻게 소화해서 사유의 확장에 활용하는지 자기 논리로 설득하는 작업 역시 비평의 몫이다. 자신만의 표현 및 논리를 밀고 나갈 때 좀더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이다. 아밀의 작품에 대한 해석이 앞의 두 작가의 작품 분석에 비해 설득력이 높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단단한 시야와 치밀한 구성, 동시대에 필요한 문제제기를 확보하고 있는 이 글의 매력이 미더웠다. 오랫동안 문학 공부에 진지하게 임했을 투고자들의 시간이 저절로 느껴졌다. 그 각각의 시간을 격려하면서,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을 「돌봄의 낭만화를 벗어던지는 문학」으로 뽑는 데 합의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

양경언 한기욱

 

 

 

당선소감

 

오래전,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어느 작가의 개인전을 보았습니다. 전시된 캔버스가 온통 밀밭이었습니다. 사람이나 사물은 자신의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해서, 에너지를 다 소진하지 못했는데 그림이 끝나버린다고, 그래서 밀밭을 그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종종 밀밭에 있는 기분이 듭니다.

쓰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버겁고,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어렵고 버겁고 부끄러운 이 일을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열심히, 가장 잘하고 싶습니다. 쉽게 잊히지 않는 장면들에 대해서, 단어와 문장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해진 것들에 대해서 오래도록 공들여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책 너머의 사람들에 대해 상상합니다. 날마다 조금씩 두꺼워졌을 손마디와 애써 삼켰을 말, 가지런히 모아진 발끝과 헝클어진 머리, 그들이 날마다 마주했을 하루에 대해 상상합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그들을 향해 마음이 기울고 맙니다. 이 기울어짐을 분명하고 정확한 언어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가치와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언제나 조금은 기울어진 채로 살고 싶습니다.

쓰는 사람이 어떤 눈과 목소리를 가져야 하는지, 어떤 두려움을 넘어서야만 하는지 알려주시고 격려해주신 서울예대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줄 더 쓸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문우들에게도 고맙습니다. 내내 그들의 어깨에 기대어 글을 쓰고 있는 기분입니다. 제 글의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양경언 한기욱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정신없이 밀밭을 헤집고 다니는 저에게 넓은 그늘이 되어주는 가족들이게도 사랑과 존경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긴 헤맴 끝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주신 김유담 정소현 아밀 작가님께 감사합니다.

때때로 아름답고, 자주 두려워지는 이 밀밭에서 글을 쓰고 있자면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다가온 것이 다른 것이 아닌 문학임에 마음 깊은 곳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문학과 가장 먼 곳에서 여기까지 매일 조금씩 걸어온 저에게 조금은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오래도록 성실히 밀밭을 헤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더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민선혜

 

 

  1. 관련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간병살인의 범행 결심 사유에는 ‘다툼에 따른 순간적 분노’가 38.9%로 가장 많이 집계된다. 유영규 외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루아크 2019, 27면.
  2. 신샛별 「불평등 서사의 정치적 효능감, 그리고 ‘돌봄 민주주의’를 향하여」,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37면 참조.
  3. “다양한 형태의 돌봄에 불가피한 요소인 상충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용기, 사랑, 분노 같은 비슷한 복잡성을 가진 감정을 설명하는 단어에 비해 돌봄은 그에 걸맞은 존중과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56~57면.
  4. 더 케어 컬렉티브 , 앞의 책 82면 참조.
  5. 접힌 시간성(fold temporalities)은 장애가 있는 ‘현재’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며 장애가 없었던 ‘과거’ 혹은 치유를 통해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미래’라는 시간성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장애인의 현재를 유예하게 만드는 방식의 폭력을 의미한다. 김은정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강진경·강진영 옮김, 후마니타스 2022, 18~30면 참조.
  6.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심세광 외 옮김, 난장 2012.
  7. “기후위기와 관련해 최일선 공동체라는 용어는 기후변화의 결과를 가장 먼저, 가장 심각하게 경험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빈곤층, 유색인, 토착민, 소수자 집단이나 기후변화가 특히 혹독하게 영향을 미치는 지역의 주민들이 포함된다. 이들 대부분은 기후위기 이전에도 이미 불이익과 차별에 노출되어왔으나 특히 기후변화 상황에서 이에 대처할 자원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집단이다.” 백영경 「돌봄과 탈식민은 탈성장과 어떻게 만나는가」,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28면.
  8. 아미아 스리니바산 『섹스할 권리』, 김수민 옮김, 창비 2022, 14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