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총 212편이 응모된 올해 창비장편소설상이 제정 이후 처음으로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문학상은 해를 더해가며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게 마련인데 올해는 잠시 멈추었다. 어떤 해에는 긴 이야기들이 유독 입 안에서 말라붙을 수도 있다. 섣부르게 진단하기보다 혹시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지는 않을지 예민하게 주시해야 할 것이다. 응모작들 중에서는 전반적으로 비정한 사회에서 도태된 인물의 이야기가 눈에 많이 띄었고, 새로운 미디어나 기술의 등장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작품들도 있었으며,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며 현실을 반영하고자 하는 시도도 잦게 등장했다.
한편의 장편소설에 나름의 아름다움과 완결성이 있다면 일반적으로는 그것으로 족하지만 수상작에는 유독 어떤 눈금이 매겨진다. 수상작은 독자적인 작품인 동시에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상을 포착해 고정해놓은 표본으로서도 기능한다. 본심에 오른 다섯편 모두 뛰어난 작품이었지만 그런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특수한 시공간, 사회를 구성하는 관계망 위에 놓인 좌표를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의미있는 작품을 빚어낼 만한 작가를 찾고 싶었다. 안쪽으로 고이는 독백이 아니라 동시대의 독자에게 말을 거는 대화를 듣고 싶었다.
『중력의 중심』의 경우 재치있는 작품이었으나 전체적인 조망 없이 성급하게 전개되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있었지만 그 아이디어를 표현하면서 오히려 인물들의 발이 잡힌 듯했다. 그리하여 인물들의 행동이 현실세계의 생생함으로 구현되었다기보다 과장된 몸짓으로 여겨졌다. 현실을 반영하고자 하는 작품일수록 현실에 발붙이고 고투하며 써야 한다.
『해인』은 높은 완성도에 비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모호했다. 방대한 자료조사와 정교하게 배치된 사건들이 감탄을 자아냈지만 그 이상을 찾기는 어려웠다. 풍부한 소양을 갖춘 작가임이 분명하나 독자적인 메시지가 없어 아쉬웠다. 빈번히 사용되는 설정을 버리고 다른 역사 판타지와 차별되는 요소를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것들』은 제주 4·3사건을 배경으로 펼쳐진 힘있는 서사였다. 하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평이하고 투박한 편이라 새로운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고, 인물들 역시 어딘가 낯익은 느낌이었다. 한국현대사의 여러 아픔이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좀더 이야기와 깊게 결합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나의 요리사 매고』는 개인적인 기억을 정교하게 작품화했다. 문장이 단단하면서도 가독성이 좋았고, 장면마다 이미지가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매고’가 가부장적인 가치관에 갇혀 있는 화자의 한계를 깰 수 있는 인물임에도 성찰적 반응 없이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쉬웠다. 연고 없는 이의 부고 문자를 따라 장례식장을 찾아다닌다는 결말 부분 역시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수학적 귀납법에 의한 N번째 꿈의 해석』은 노동과 자본주의사회를 고찰한 작품이었다. 전형적인 듯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신선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며 이야기를 이끌어낸 점과 기시감이 들지 않는 소설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큰 빚을 지게 된 주인공이 예지몽을 꾸는 친구의 능력을 빌려 로또 당첨번호를 알아내려 한다는 설정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악랄한 현실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작품의 에너지가 결말까지 다다를 만큼 충분하지 않아 아쉬웠다.
후보작들이 장편소설로서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독특하고 수려한 문장도 있었고, 입체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솜씨도 있었다. 결국 몸을 기울여 달려가고자 하는 방향,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각도의 문제일 뿐이니 분명 다음 소설이 더 좋으리라 기대한다.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 강경석 강영숙 유희석 전수찬 정세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