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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동호 申東昊
1965년 강원 화천 출생. 1984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겨울 경춘선』 『저물 무렵』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가 있음. jamchi@naver.com
뼈들
홍수가 지나간 뒤로 이름이 생각 안 나요
고향 생각을 해보려 했는데 다른 마을이었어요
청개구리 한마리랑 더덕 뿌리가 자라 스쳐갔고
어쩐 일인지 말이 달라, 다르제, 다르드레요
내가 기억하는 건 여자의 노랫소리
하얀 발목이 떠올랐는데
도무지 돌아보질 않았어요, 분명 엄마를 불렀어요
골반뼈가 사라진 사타구니에서
사슴벌레 유충 두마리가 몸을 뒤섞어 뒤척이고
갈비뼈 두어개가 모자라 쉭쉭
바람이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간 지 오래고요
다람쥐가 감춰놓고 잊은 도토리처럼 망각은 딱딱해요
처음엔 어색했을 거예요, 서걱이는 소리
삐걱이고 웅웅거리다가 또 울다가 깨진 복숭아
아직 어색한 건 단지, 아이의 것이었던 정강이뼈
다리는 자주 엄마를 찾아 덜컥거렸으니까요
함께 구름을 보았을 것이지만 기억이 다른 뼈들이
때론 자운영 피웠을 언덕에서
떡갈나무 묵은 나뭇잎 덮고 누웠을 언덕에서
남은 뼈들이 구덩이를 빠져나와 흘러 계곡에서
어른도 아닌, 남자도 아닌, 빨갱이도 아닌
죽어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렇게요
다행히 그동안 몇번 큰 비가 내렸던 거죠
노고산동 54-38
유독 오른팔만 당기기 시작한 게, 지금 생각해보면 지하실로 책들을 옮겨놓은 뒤였다. 바다였다가 산이었다가, 과거가 뒤죽박죽 뒤섞인 곳이 서재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미얀마로 바뀐, 낡은 버마 여행기를 사온 그날 어깨가 아파 잠에서 깼다. 그를 위해 한 페이지에서 참 오래 머물렀다.
비오는 날에는 여자를 데려왔다. 몸도 없이 얼굴만 데리고 오는 날도 있었다. 다리 없는 여자는 구름처럼 떠다녔다. 스물 몇번을 거듭했으니 비도 참 자주 내렸다. 골목을 두번 꺾어진 건물에는 바람 불지 않는 날에도 꽃잎이 흩날렸다. 여자는 비에 젖은 채 하늘로 올라갔다. 그만 데려오라고 하자, 희대의 살인마가 살던 집 아래 식당이 화제가 되었다. 6월은 여자들의 죽음만큼 반복되었고 팔을 당길 때마다 나는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살』을 펼쳤다. 시간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는 가벼운 현기증.
그날,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내 야전침대에 그가 앉아 있었다. 놀래라. 그런 날은 머리가 하얗게 센 친구들이 왔다 갔다. 기억은 서재만큼 쌓이고 오래되었다. 또 낡아갔다. 만화책을 사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점심 뒤에는 골목 옆 헌책방, ‘숨어 있는 책’에 가서 만화책을 골랐다.
지하실 번호키를 0108로 해놨는데 교회 집사인 후배가 1004로 바꿔놨다. 바닥에 빗물이 고이더니 앞뒤 길이 맞지 않는 과거로 그가 떠났다. 어깨는 아프지 않았다. 증류주는 증발되었다. 벽이 갈라져 아저씨를 불렀다. 그저 지난날을 말끔히 수리해버리고 6월은 다시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