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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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아 沈智兒

1978년 전북 익산 출생. 2010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raindropsgarden@gmail.com

 

 

 

부화

 

 

사과를 쥐면 귀가 사라진다.

 

고백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솔직하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고백에는 언제나 거짓이 섞여 있고

 

용서받는 일은 지루하다.

 

손안에서 끓다가 찐득하게 녹는 칼자루들.

 

사과 냄새를 흘리며 하루는 대부분 타오르는 중.

 

여름 과수원에 눈을 다오.

 

테두리 없이 펼쳐지는 거대한 이불을 다오.

 

이불 밖으로 내민 얼굴의 사색을 덮을 폭설을.

 

의 이불은 우주적이고.

 

아흔아홉의 아이야 이리 와.

 

독자적인 얼굴로 쌍둥이들이 잃어가는 윤곽.

 

눈 쌓인 과수원 둘레를 돌며 전정가위로 울타리를 자른다.

 

꿈에 만져본 신의 젖은 뼈.

 

우리에게는 상한 과육 냄새가 난다.

 

우리의 입은 소용돌이 모양을 하고 있다.

 

모든 고백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범람

 

 

양을 세는 일은 문득 시작된다.

양 한마리 양 두마리 양 세마리……

 

양들이 흩어진 풍경이 나타날 때까지.

양들이 흩어진 풍경이 고요하게 고집스럽게 구겨질 때까지.

 

양들이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될 때까지.

양들이 읽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감각이 될 때까지.

 

핏속에는 도덕이 없고.

나는 조금 슬픈 것 같아.

나는 조금 의심하는 것 같아.

 

양에게 넘치는 것은 하얀색.

양을 세다가 양을 세다가 나는

색깔이 부족해진다.

 

부족한 것은 내게 잘 어울려.

나는 조금 아무렇게나 놓인 것 같아.

아무렇게나 양을 세도 언제나 양은 그럴듯해지네.

 

풀을 쓸면 쉽게 손가락이 베이는 것이 좋아.

풀을 쓸면 대지는 오래도록 엎드려 있는

어린 포유류 같아. 기도의 자세니 슬픔을 길들이는 자세니 아가야.

 

풀밭에서 얼굴은 건초 자루가 될 때까지.

풀밭에서 양들은 입구가 될 때까지.

 

부족한 것이 나의 도덕이 될 때까지.

부족한 것이 나의 윤곽이 될 때까지.

 

목이 보호하는 목소리처럼 고요하게.

고집스럽게.

양을 세다가 양을 잃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