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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정철훈 鄭喆薰
1959년 광주 출생. 1997년 『창작과비평』 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마지막 열차』 『빛나는 단도』 『만주만리』 등이 있음.
yaboo1959@naver.com
교양의 시작
시간의 휘발
몸의 소진 끝에
다다른 숫자가 달력에
새털처럼 붙어 있다
태어난 해의 평균수명을 넘었다는 게
내 생애 자료의 한 페이지이다
그때는 오래 사는 게 지복이었지만
지금은 그 말이 저주가 되어 공중을 떠돈다
저주라는 게 끔찍한 것만은 아니다
그만큼 교양인이 되어간다
내 방은 거울이 없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침묵과 삶의 이면을
쇠락하는 몸의 음악으로 들려주었다
병원에 가는 횟수가 잦아졌으므로
청춘의 소란을 벗은 가슴께에
청진기를 대면 시간은 역류하여
세발자전거를 타던 광주 서석동이 보이고
내 유년의 음악은 고전(古典)이 되었다
고전에서 나는 새가 되어 날고 있다
그게 내 최초의 비상(飛翔)이었고 둥지였다
이제 막 쇠락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 나이
몸에서 유년의 뼈를 꺼내 피리처럼 불어보는
영롱함이 교양의 시작이었다
병원에 갔더니 동갑내기 환자는
칼로 환부를 도려내는 방법으로
고요함의 교양을 시작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원주
원주를 떠올리며
밤을 꼬박 새운다
불면을 촉발하는 원주
먼동이 트고 있다
먼 곳은 말하자면 원주다
태양이 원주에서 솟는 것도 아닌데
원주에 간다
가급적 타는 것을 줄이기 위해
창동역까지 걸어가 전철을 타고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갈아탄다
갈아타지 않고서는 도착하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원주
무엇인가를 갈아타야만 한다면
그것이 원주이고
나는 원주를 제외한 모든 곳에 있다
원주를 가려면 원주가
아닌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니다
원주 안에서 원주를 가도
원주에 가는 것이다
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원주
삶은 무목적성이라는 원주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나는
어제와 오늘로 쪼개지고
쪼개진 나를 원주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