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올해 사회인문학평론상은 자유주제 1편을 공모한 예년과 달리 ‘자본주의의 장기적 변화전망과 우리의 실천과제’라는 주제를 지정하여 응모작을 2편씩 받았다. 사유의 이론화·담론화를 적극 유도하기 위함이었지만 과제가 주는 무게 탓인지 응모자가 예년보다 적었다. 총 17편의 응모작 중 당선자에 근사한 한명으로 정현을 뽑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류성희의 「한국사회의 금융화 진전: 사다리 ‘관리’하기」, 김주원의 「항상 역사화하라!: 서브프라임이라는 파국을 돌아보며」, 김세라의 「통일, 당연하지 않다」가 언급되었으나 정현과 각축을 벌일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사회의 금융화 진전」은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사회과학도다운 탄탄한 공부가 돋보였지만 자기만의 분석언어를 갖추지는 못했다. 「항상 역사화하라!」는 글을 끌어가는 감각이 남달랐는데 영화 텍스트 분석에 지나치게 매몰된 것이 문제였다. 우리 시대 통일담론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박을 담은 「통일, 당연하지 않다」는 어설프게 서양이론을 끌어와 멋부리는 요즘 글들에서 찾을 수 없는 진솔함이 심사자의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아직은 깊이가 부족했다.
글쓰기의 기본기나 문제의식의 날카로움, 그리고 독서량에서 정현의 두 평론 「담화 주체성과 정치: 신자유주의-빅데이터 시대의 정치학을 위한 시론」과 「세월호 이후 정치적인 것의 ‘세속화’」는 단연 돋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자기만의 언어가 확실히 보였다. 또한 자본주의-신자유주의 비판이라는 거시적 분석틀을 세련되게 운용하면서도 발 딛고 선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그것을 헤쳐가려는 열정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서양의 고전과 현대 이론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종종 비약이 드러났고 논증의 치밀함이나 섬세함이 부족했다. 큰 이야기를 호기롭게 던지는 패기는 인상적이었으나 디테일이 받쳐주지 못한 때가 많았다. 제출한 두편 중 공이 더 들어간 것으로 보인 「담화 주체성과 정치」를 당선작으로 정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시대 정치적 주체의 위기를 수신자로서의 타자를 찾지 못한 폐쇄적 자아-세계의 일체화에서 찾는 문제의식은 명료했으나 빅데이터 시대의 디지털 주체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독자를 설득해내는 힘이 부쳤다. 반면 전자에서 제기한 주체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을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의 현상에 착근하여 풀어간 「세월호 이후 정치적인 것의 ‘세속화’」가 더 진정성과 호소력이 있었다. 생명과 죽음의 공적 성격을 회복함으로써 사라져가는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열어가려는 진지함이 글이 가진 다른 약점을 상쇄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드린다.
다섯번째 사회인문학평론상 당선작을 선보이면서, 앞으로 더 수준 높은 열정적인 응모자들의 호응을 기다린다.
당선소감
정현
1979년생. 독립연구자로서 현재 정치철학 및 매체사를 중심으로 공부.
제주도에 계시는 부모님이 당선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다. 평생 이렇다 할 좋은 소식을 가져다드리지 못해 늘 죄송했는데, 이번에 많이 웃으셨으면 좋겠다. 당선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늘 그렇듯 만족할 만한 글은 쓰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도 짧은 기간 두편의 글을 쓰며 앞으로 공부해가야 할 문제와 주제를 더욱 확고히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누구보다 연인인 희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늘 그렇지만 글을 쓰는 막바지에는 내 글을 스스로 객관화하기가 너무 힘들다. 마감일을 앞두고는 체력도 바닥나고 글에 집중도 되지 않았는데, 희윤의 조언이 글 곳곳에 반영되며 많이 개선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이 글에, 그리고 내 사고 전반에 긴 흔적을 남긴 많은 이들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연락조차 끊긴 선배와 동료 들, 내게 이념적 가치와 사회변화의 의미를 알게 해준 많은 이들에게, 그리고 힘들 때 곁에서 응원해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마도, 글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을 가졌다고 사람들이 믿던 그런 시대가 있었던 것 같다. 플래카드와 전단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소책자를 통해 조직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던 시대가 있었던 것 같다.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를 원했듯, 지식인만이 아니라 대중 일반이 글의 거대한 힘을 신뢰했던 시대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SNS의 시대가 가장 먼저 소멸시키려 한 것이 텍스트의 힘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리돌림’성 비난 외에 논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와 비평이 운명을 다한 시대는 인간이 더이상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시대일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만을 추구하는 동물들만 남는 시대, 오늘날 매스미디어가 ‘종북사냥’으로 보여주듯 적과 아군의 동물적 정글의 세계만 존재하는 그런 시대가 남을 것이다.
글을 쓰는 내내 관념의 유희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SNS의 넘쳐나는 담화 속에서 불필요한 말을,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수없이 했을 법한 그런 ‘학술’적인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세계에서 나 자신과 2015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물어야 할 화두는 무엇일까를 찾아내려 했지만, 솔직히 그 결과물이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과제이자 부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았다.